2024년 5월 14일 (화)
(홍)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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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 김사건 안드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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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01-09 ㅣ No.490

대구순교자 23위 시복시성을 준비하며 -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


(13) 김사건(金思健) 안드레아(1793∼1839)

 

 

김사건 안드레아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천주교 박해 가운데에서 정해박해(丁亥迫害:1827년)와 관련하여 체포된 후 경상 감영의 형장인 관덕정에서 참수를 당하여 순교한 인물 중의 한 분이다. 그는 중인으로 충청도 서산(瑞山) 출신이며, 특히 부모로부터 천주교 교육의 영향을 받은 이후에는 본시 그렇지 않던 기질이 온순, 겸손하고 관대한 성품으로 변하였다고 전한다.

 

박해 당시의 상황을 보면 김사건 안드레아는 1815년 을해(乙亥)박해 때 큰아버지 김강이(金綱伊) 시몬, 아버지 김창귀(金昌貴) 다테오를 따라 경상도 머루산으로 피신해 살고 있던 중에 포졸들에게 잡혀 안동 진영에 수감되었다. 이때에 그의 큰아버지는 신앙을 위하여 순교하고, 아버지 또한 보성으로 유배되었으나, 나이가 어린 그만은 석방이 되었다. 이후에 그는 아버지를 자주 찾아서 위로와 격려를 다해드렸음은 물론 천주교 신자로서 끊임 없는 전도와 착한 모범을 다하다가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다시 체포되어 상주(尙州) 진영으로 압송되었다. 여기서 그는 모진 고문을 받은 다음에 다시 대구, 전주 등의 감옥으로 끌려 다니며 신문을 당한 끝에 기해(己亥)박해 때인 1839년 5월 26일(음력 4월 14일) 대구의 형장에서 순교하였다.

 

샤를르 달레가 전하는 『한국천주교회사』의 기록에 의하면 김사건 안드레아가 경상 감영의 형장에서 동료 교우 2명과 함께 처형될 당시의 나이가 46세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의 출생연도는 1793년 무렵이다.

 

이상과 같은 김사건 안드레아에 관한 현존사료는 교회측의 기록으로『한국천주교회사』 그리고 국가기관의 기록으로서는 『일성록』 및 『승정원일기』에서 드러나는 관련 내용을 들 수 있다.

 

이제 여기서 순교자 김사건 안드레아의 열렬한 신앙 모범 그리고 그가 천주의 증거자로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고난 중에 보여준 한결 같은 자세를 살필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몇 가지 사례를 구해보기로 한다.

 

첫째, 1815년의 을해박해 당시에 큰아버지인 김강이 시몬과 아버지 김창귀 다테오가 관아에 잡혀서 문초를 당할 즈음에 그는 나이가 어리다고 하여 석방된 바 있다. 이후에도 그는 종종 “참 좋은 기회를 놓쳤다.”고 원통해 한 것으로 볼 때에 아직은 어린 나이임에도 이미 그의 신앙심은 확고하게 굳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더 나아가서는 1827년 박해가 일어난 후 체포되어 경상 감영에서 배교의 명을 받았을 때에도 일언지하에 “배교를 하려고 했으면 첫 번 관청에서 했지 뭣하러 여기까지 왔겠습니까?”라고 하여 죽음 앞에서도 전혀 굴하지 않는 그의 의지를 다시 한번 분명히 드러내었다. 이처럼 김사건 안드레아는 평소의 신앙 생활을 통하여 자신의 생명을 하느님을 위해서 기쁘게 바칠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다하였기에 때가 이르자, 순교의 큰칼을 마치 왕관을 쓰는 것처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둘째, 김사건 안드레아는 1827년에 체포·투옥되어 사형 선고를 받은 다음에 1839년 대구의 형장에서 참수 순교할 때까지 약 13년이라는 긴 기간을 감옥에서 보냈다. 이때에 그가 받은 고통으로는 영어(囹圄)의 격리된 몸으로 극도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지낸 기나긴 옥중 생활에 더하여 감옥 안에서는 수시로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갖가지 참혹한 형벌을 당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상주 진영에 이어 경상 감영, 전주 감영 등을 옮겨 다니며 신문을 받았는데, 그 과정에서 가해진 형벌의 예를 들면 소위 치도곤을 비롯해서 줄톱질 등에 이르기까지 살이 타는 듯하고 뼈가 허옇게 드러나는 잔학한 고문을 연이어 3일씩이나 받은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렇듯 김사건 안드레아는 현세적인 육신의 고통을 당하면서도 오로지 주님을 위해 고통받는다는 기쁨에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단언하건대 아마도 김사건 안드레아를 비롯한 모든 순교자가 자기 생명에 대한 애착을 조금이라도 보였다고 한다면 그 무서운 고통을 끝까지 견디어내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그는 모진 박해 가운데에서도 꿋꿋하게 자기를 굽히지 않는 용기를 실천하였으며 이를 통해서 십자가의 길과 순교의 길 그리고 신앙의 길은 하나임을 분명히 드러내 보여주었다.

 

셋째, 김사건 안드레아에 대한 처형 결정은 1839년의 기해박해 이후에 열린 섭정회의(攝政會議)에서 비로소 확정이 되었다. 곧이어 조정으로부터 경상 감영에 왕명이 하달되자 대구의 감옥에 갇혀 있던 사학죄인 김사건 안드레아를 비롯한 박사의 안드레아, 이재행 안드레아 3인은 오직 하느님을 위해 생명을 바친다는 기쁨으로 기꺼이 순교할 것을 거듭해 결심하였다.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특히 이들이 13년간의 감옥 생활동안에 보여준 모범은 함께 갇힌 죄수에게는 물론이고 옥졸들에게도 큰 감화를 주었다. 그렇기에 이들의 처형 결정 소식이 전해졌을 때에는 주위의 모든 이가 애석해 하였으며, 당시에 매우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정성껏 음식과 떡을 마련하여 별리의 정을 나누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이 처형된 후에는 지금까지 일찍이 없었던 일로, 옥졸들 스스로 시체를 거두어서 장사를 지냈다고 전한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 순교자들은 고난의 가시밭길에서도 오로지 하느님을 위해 자기 것을 다 바쳐 봉헌하는 순교 정신 안에서 하느님에 대한 신덕을 분명히 드러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웃에게 사랑을 드러낼 때에도 자신을 봉헌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함으로써 뭇사람의 애정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것이다.

 

이상 대표적인 몇 사례를 통해서 확인한 바와 같이 김사건 안드레아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모범을 보였다.

 

순교의 피를 통해서 이어져 내려온 뜨거운 신앙은 무릇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 외형은 변화하지만, 하느님을 위해 자기 것을 다 바쳐 봉헌하는 순교의 참 정신은 우리 교회의 근간으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제 오늘의 생활 속에서 우리가 따르고 실천해야 할 일은 조상의 참된 순교신심을 찾아서 스스로 내 안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해 나아가는 일이다. 아무쪼록 신앙 선조인 순교자 정신이 내 안에서 일치를 이루기를 빌며!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단순하게, 참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신앙을 받아들였고, 그 때문에 기쁘게 순교하였습니다.” 또한 모든 순교자들은 자기가 받드는 진리에 대해 얼마나 감사하였고, 또 얼마나 그대로 정직하게 지켜나갔습니까!

 

[월간빛, 2002년 12월호, 강유신 미카엘(대구가톨릭대학교 박물관 학예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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