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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신학ㅣ사회사목

[사목자] 교구 사제 영성의 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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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5-02-23 ㅣ No.325

교구 사제의 영성  - 교구 사제 영성의 모델

 

 

성덕의 여러 모델

 

오랫동안 수도생활은 그리스도인 성덕의 가장 충만한 표현으로 간주되어 왔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멀리 존재하지만, 교회 안의 구성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에 참여할 수 있다. 필자의 경우에도 과거에 평신도들에게 영성교육을 할 때 이런 수도회의 방법론을 사용했다. 그런데 이 방법은 많은 경우에 성공보다는 실패를 가져왔다. 신자들은 대부분 열심히 하는 것 같았지만 그 노력에 합당한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그래서 신자들은 낙담해서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20여 년 동안 사제 피정을 지도하면서 대부분의 교구 사제들에게도 이 문제가 일어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엇이 문제인가? 이 문제는 평신도와 교구 사제들에게 흔히 있을 수 있는 것인가? 이 사람들은 깊은 영성을 갖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잘못된 출발을 하고 있고, 잘못된 전제를 하고 있고, 잘못된 질문을 하고 있다. 그들을 잘못된 틀에 끼워 맞추려고 한 것이 잘못이었다. 결국 필자가 깨달은 것은, 모든 영성의 문제에서 그 출발점은 어떤 특정한 영성 모델이 아니라 하느님과 사람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혼인의 문제와 유사하다. 아무리 그것이 이상적이고 좋은 혼인의 모델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준거로 놓고 누군가의 혼인생활을 평가할 수는 없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혼인의 이상적인 모델이 아니라 관계이다. 

 

교구 사제들은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게 할 수 있는 어떤 영성 모델에 따라 판단되어 왔다. 평신도의 신앙생활 역시 그들을 이류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영성 모델로 판단되어 왔다. 그러나 이것은 적절치 않다.

 

 

4세기 이후의 변화

 

이러한 현상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초기 교회는 오직 하나의 동일한 “교회적 영성”을 실천했다. 이것 이외에 다른 모델은 없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모델들이 생겨났고 나름대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3세기 말에는 평신도 가운데서 수도 공동체들이 탄생하였다. 그때까지도 사목자는 평신도의 영성을 따랐다. 그런데 그 뒤 특이한 현상이 발생했다. 교구 사제의 영성을 재정비하는 노력을 하는 가운데 관상 수도회에서 발전한 영성들이 교구 사제의 영성에 부과되기 시작한 것이다. 교구 사제들에게 기도, 금욕, 가난, 정결, 순명, 이 밖에도 수도 공동체에서 실천되었던 영성 모델이 요구되었다. 

 

사실 수도자들은 교구 사제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을 수도생활에서 없앴다. 수도 공동체들은 기도를 중심으로 일을 조정하고 기도를 가장 우선시하는 것에 비해, 사목활동을 하는 사제들은 기도의 횟수와 장소를 사목 활동의 요구에 부합하도록 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다. 또한 수도회들은 하느님과의 직접적 관계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결정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하루의 특정한 시간 동안에, 또는 하루 대부분 침묵을 했다. 그러나 오늘날 교구 사제의 생활은 대부분 바쁘고 번잡하다. 심지어 식사시간조차 불규칙적이 되기 쉽다. 따라서 그들은 규칙적인 스케줄, 곧 규칙적인 기도 시간, 규칙적인 영성생활을 제대로 실천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생활은 그대로 ‘나는 기도를 잘하지 못하고 있다.’라는 한탄으로 바뀐다. 적절하지 않은 기준으로 판단한 결과이다.

 

 

교회적인 영성

 

나는 ‘평신도 영성’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어떤 상표나 지엽적인 어떤 것을 지칭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본래적 영성이다. 공동체의 영성, 신약성서가 말하는 근본적인 영성에 해당하는 것이다. 평신도는 교회 영성의 모든 부유함에 접근할 수 있다. 수도회적 영성이 등장하기 이전에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교회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 됨에 토대를 두고 있었고, 말씀이 선포되고 성체성사가 베풀어지는 공동체 안에 단단히 뿌리박고 있었다. 

 

교구 사제의 영성 역시 교회적 영성이고 본래적 영성이다. 확실히, 교구 사제는 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지도자, 전례 집전자, 사목자로서의 특수한 전망 안에서 이 영성을 살아낸다. 교회적 영성을 사는 모든 사람들은 그들 각자의 삶의 환경과 관련되어 있는 특정한 양식을 가지고 있다. 사제를 위한 교회적 영성은 그가 들은 복음을 가르치고, 그 역시 사목자로서 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성체성사를 집전하는 것을 포함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이다. 어떤 관계에서 지속적인 대화가 없다면, 우리는 친구, 아내와 남편, 그리고 하느님을 잃을 것이다. 관계의 깊이는 의사소통의 깊이와 같다. 만일 하느님과의 대화가 계속해서 이어지지 않는다면, 시간적인 여유가 있을 때 나는 그 시간에 할 다른 일을 찾을 것이다. 시간이 많다고 해서 이 시간을 하느님께 향하는 시간으로 사용하리란 법이 없기 때문이다.

 

일상적으로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면 다양한 방법을 통해 반복적으로 거기로 되돌아갈 것이다. 인간관계에서도 그런 것처럼 수년 동안 우리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좀 더 창조적인 것이 되도록 배워야 한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결혼의 모습에 변화를 주는 여러 가지 방법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종종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고, 아이들과 떨어져 부부끼리만 휴가를 보내기도 한다. 

 

사제들이 하느님과 좋은 시간을 보내는 최상의 방법은 기도를 하루의 중심에 놓는 것이다. 피정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더욱 깊게 하고, 우리의 삶과 직무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대화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바쁜 삶에 무언가 덧붙이기보다 이미 우리 삶에 존재하는 것을 받아들여 이를 계속적인 대화로 돌리는 것이 도움이 된다. 거기에는 강론 준비, 미사, 본당 신자들을 위한 봉사, 성사 집행과 같은 일들이 해당된다. 조금만 더 노력한다면 이 시간이 ‘과업’이 아니라, 사람들과 그리고 하느님과 함께하는 좋은 대화의 시간이 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영성의 핵심을 가장 잘 실천하는 것이다. 

 

영성은 기도 이상이다. 영성은 현실의 비전이고, 세계관이고, 사물을 보는 방식이다. 그것은 하느님과 세계를 보는 방식을 포함한다. 그것은 하느님뿐 아니라 세상, 타인, 나 자신을 향한 신념과 이상, 그리고 행동을 포함한다. 영성은 결코 머릿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나의 행위 안에 있다. 마침내 그것은 초월에 대한 나의 개방성, 사람과 세계와 하느님을 향한 기꺼움, 나의 변화를 포함한다.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교구 사제들에게 제자직은 교회적 영성에 핵심이 된다. 교구 사제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공동체에 속해있다. 우리는 모든 평신도와 같은 투쟁을 하고, 그들이 살아가는 것과 동일한 세계에서 살아간다. 수도생활을 모델로 삼아 교구 사제직을 개혁하려는 시도는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평신도들처럼 우리 자신의 삶의 환경양식을 갖고 교회적인 영성을 건설할 필요가 있다.

 

* 원문 : Donald B. Cozzens(ed.). “Using the Wrong Measure?”, The Spirituality of the Diocesan Priest, The Liturgical Press, 1997년, 20-26면, 엄재중 기자 편역. 케네스 E. 운터너 주교는 디트로이트 대교구에서 사제품을 받았고, 주교가 되기 전까지 그곳의 성 요한 신학교 학장으로 일했다. 탁월한 연설가이며 피정 지도자로서 그는 다양한 잡지에 교회적이고 사목적인 중요한 문제들을 기고했다.

 

[사목, 2005년 1월호, 케네스 E. 운터너(미국 미시간주 사지노 교구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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