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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위하여28-29: 시노달리타스의 실현 - 참여와 공동책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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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12-19 ㅣ No.785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위하여 (28) 시노달리타스의 실현 : 참여와 공동책임성 1

 

 

우리가 앞서 살펴본 내용들을 간단히 종합해 보면,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함께 구원의 여정을 걸어가는 친교의 공동체이며, 그 구원의 사명을 ‘저마다 제 길에서’, 그리고 ‘함께’ 수행해야 합니다. 이러한 시노드 정신이 추상적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모든 이들의 ‘참여’가 요청됩니다.

 

우리는 이미 교회의 공동체적 본성으로서의 요소인 ‘친교’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친교라는 말 자체에 이미 함축되어 있지만, 교회가 수행해야 하는 사명은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과 ‘함께’ 수행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우리 모두는 그 지체’라고 표현하신 것처럼, 교회의 모든 구성원은 저마다 지체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고 그리스도의 몸의 성장에 기여해야 합니다. 그러나 구성원이 참여하지 않고 제 몫을 하지 않는다거나 함께 가지 않는다면 이 몸은 유지되기도, 성장하기도 어렵습니다. 물론 이 몸을 살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시지만, 성령께서는 우리의 협력을 요청하시기에 이에 응답하는 것이 바로 ‘참여’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특히 하느님 백성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평신도들의 참여를 촉구하였습니다. 세상 안에서,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하는 교회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현세성’이라는 고유한 특성을 가진 평신도들의 역할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친교’와 ‘참여’가 사회학적인 차원으로만 축소되거나 변질되어 이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치 다수결의 원칙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면서 의회주의와 비슷하게 자기(또는 자기들)의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여론을 조성하면서 지지 세력을 확장해 나가는 방식은 교회의 생활 방식인 시노달리타스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교황청 국제신학위원회는 ‘가톨릭 신앙적이고 교회적인’ 친교와 참여가 요청된다는 것을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교회의 생활 방식과 활동 방식은 공동체적으로 말씀을 경청하고 성찬을 거행하는 것, 친교의 형제애를 이루는 것, 그리고 하느님 백성 전체가 다양한 차원에서 다양한 직무와 역할을 구별하며 교회의 삶과 사명에 참여하고 공동 책임을 지는 것을 통하여 실현된다.” (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공동합의성, 70항)

 

시노드 정신을 실현하기 위해 교회의 모든 구성원은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전례 특히 성찬례에 참여하여 주님의 몸과 피로 성장하며,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구별된 직무와 역할을 서로 인정하는 가운데에 교회의 사명을 ‘함께’ 수행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2023년 12월 17일(나해)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춘천주보 4면,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위하여 (29) 시노달리타스의 실현 : 참여와 공동책임성 2

 

 

교회적 친교를 이루기 위한 참여는 곧 ‘함께 감’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노달리타스를 실현하는 데에 있어 ‘함께’가 매우 중요하기는 하지만, 이 ‘함께’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이 ‘제 몫을 함’입니다. 이 두 축 중 어느 하나를 소홀히 한다면 시노달리타스는 충만하게 실현되기 어렵습니다.

 

세례 받은 모든 하느님 백성이 복음화의 주체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이 사명에 참여함과 동시에 책임성을 지니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회에’ 공통의 사명을 맡기셨고, 이 사명을 수행해야 하는 주체는 교회의 구성원, 즉 하느님 백성 전체입니다. 다만 ‘교회 안에서’ 그 형태와 방식은 다양하게, 곧 ‘자기 나름대로, 자기 몫을 실천하는’(교회 헌장 31항) 가운데에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가 지니고 있는 온갖 종류의 문제와 그 원인을 단순히 성직자들만의, 또는 반대로 평신도나 수도자만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위험합니다. 하느님 백성 사이의 관계는 ‘위-아래’ 또는 ‘중앙에서 변두리’의 일방적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상호적 관계이자 다방향성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세상의 영혼’이 되도록 부르심 받은 평신도들은(교회 헌장 38항) 교회 안에서 단지 ‘수혜자’에 지나지 않거나, 교회의 ‘고객’이 아닙니다. 하느님 백성의 구성원으로서 교회의 선익을 위한 일에 대하여 스스로의 의견을 밝힐 권리가 있을 뿐 아니라, 때로는 그럴 의무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자유로운 의견’을 표명할 의무와 권리가 무책임한 발언이나 여론의 형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시노드적 과정은 단순히 건의 사항을 수집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개인 또는 집단이 전문적 조언을 하거나 일방적인 방향으로 바라는 ‘원의’ 를 이야기할 뿐, 그것을 수행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 그 어떤 책임감이 결여되어 있는 상태로 그저 ‘해 주세요’라는 수동적 태도는 시노드 정신에 적합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사회와는 분명하게 다른 교회의 생활 방식으로서의 시노달리타스는 모든 하느님 백성의 참여와 이를 통한 ‘신앙 감각의 수렴’이라는 원리를 내포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직자이든 수도자이든 평신도이든 서로의 품위와 사명을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상호보완적이라는 사실, 그래서 서로 돕고 함께 해야만 한다는 인식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만약 본당, 교구, 나아가 보편 교회의 차원에 이르기까지 교회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일에 아무런 관심이 없이 내 삶과는 동떨어진 것, 부수적인 것으로만 여긴다거나, ‘누군가 알아서 하겠지...’ 또는 ‘나는 귀찮아서...’, ‘나는 책임지기 싫어서...’라는 생각으로 교회의 삶과 사명에 참여하기를 회피한다거나 수동적 태도로만 일관한다면, 시노달리타스의 실현은 머나먼 이야기에만 머무를 뿐입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2024년 1월 7일(나해) 주님 공현 대축일 춘천주보 4면,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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