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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3·1 운동과 한국 천주교회: 안중근이 삶으로 드러낸 하느님 집안의 평화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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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3-19 ㅣ No.1013

[경향 돋보기 - 3·1 운동과 한국 천주교회] 안중근이 삶으로 드러낸 하느님 집안의 평화살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신앙살이

 

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안태훈과 조성녀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897년 1월에 토마스로 빌렘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자신에게 생명을 준 원부모 하느님을 자신의 존재와 생활의 뿌리로 지키며 새로운 세계 관계에 눈을 떴다.

 

그는 황해도 청계동본당 신자로서 빌렘 신부와 함께 신앙을 전파하면서, 자기가 들어선 사회관계에 하느님의 정의를 육화시키는 일에 투신하였다.

 

안중근은 하느님을 부모로 온 인류가 한 가족이라는 믿음을 가졌다. 그는 한국인은 물론 일본인도 ‘동포’, 곧 ‘한 어머니 배에서 태어난 형제’로 보았다. 그는 교회의 기본 가르침을 누구에게나 명확하게 제시할 만큼 가톨릭 교리를 깊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의 신앙을 동포에게 널리 알리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 대한의 모든 동포 형제자매는 크게 깨닫고 용기를 내어 지난날의 허물을 깊이 참회함으로써 천주님의 의자(義子)가 되어, 현세를 도덕 시대로 만들어 다 같이 태평을 누리다가, 죽은 뒤에 천당에 올라가 상을 받아 무궁한 영복을 함께 누리기를 천만 번 바라오.”

 

그는 이웃과 사회와 나라가 겪는 고통과 무관하게 신앙하거나 구원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확신하였다. 하느님의 정의에 인간 사회와 국가들이 응답하여 이루는 평화야말로 모든 사람과 생명, 전 존재의 주인이시고 참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신앙살이’로 인식하였다.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지학순 주교가 증언한 세계를 품는 신앙살이와, 프란치스코 교황이 강조한 변두리에서 민중과 함께하는 신앙살이를 1900년대 초에 삶으로 드러낸 평신도 그리스도인의 한 선구자였다.

 

 

신앙과 민족의식 사이에서

 

안중근은 1907년 봄에 항일 투쟁을 결단하는 과정에서 민족이 놓인 위기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를 놓고 빌렘 신부와 크게 갈등을 빚었다. 빌렘 신부는 독립운동과 신앙을 대립시켜서 “만일 네가 여기서 정치적 소요를 일으키려 한다면 네가 떠나든지 내가 떠나든지 하자.”며 압박하였다.

 

빌렘 신부는 나중에 뤼순 감옥을 찾아가 안중근을 면회하는 자리에서 “국가 앞에는 종교도 없다.”고 말하고 간도로 갔다며, 그가 일본의 지배에 맞서 항거한 것을 질책하였다. 이는 안중근이 가톨릭 신앙을 무시해서 한 말이 아니라, 당시 상황과 분리된 신앙살이를 요구하는 교권을 뒤로 하고 자기의 신앙으로 애국을 지켜 갈 것을 택한 것을 드러낸다.

 

안중근은 20대 초반에 뮈텔 주교를 찾아가서 대학 건립을 제안한 적이 있다. 이때 뮈텔 주교는 “한국인이 만일 학문을 배우면, 신앙에 좋지 않을 것이니, 다시는 그런 의논을 꺼내지 마라.”며 끝까지 거부하였다. 이에 그는 “분개함을 참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맹서하되 ‘천주교의 진리는 믿을지언정, 외국인의 심정은 믿을 것이 못된다.’ 하고 프랑스어를 배우던 것도 폐하”였다고 했다. 그는 정당하지 못한 것은 비판하면서도 ‘신앙’의 진리는 주체적으로 지켜 갔던 성숙한 신앙인이었다.

 

 

신앙과 통합된 민족과 평화 사랑의 실천

 

안중근은 간도와 연해주 지역 동포 사회에서 신임을 얻어 독립군 부대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1908년 여름 독립의병대 참모중장으로 독립군을 이끌고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면서 일본 군인들과 상인들을 포로로 잡기도 하였다.

 

이때 그는 부대원들의 반대에도 포로들을 함부로 살해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노하시는 일이므로 안 된다며, 그들에게 빼앗았던 무기까지 돌려주며 풀어 주었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일본의 침략자들과 선한 일본인을 구별하여 전투를 벌이면서도 일본을 원수국이 아니라 ‘형제국’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이런 하느님의 한 집안이란 인식, 간단히 ‘동포 의식’이 그의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투쟁과 그가 죽기 직전에 진술한 ‘동양평화론’의 영성적 기초였다. 이러한 한 형제 동포 인식 위에서 그는 형제국으로서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이 연대하여 동양과 세계의 평화를 위해 헌신할 것을 죽기까지 설득하고자 하였다.

 

안중근이 포로를 풀어 준 뒤 안중근의 부대는 일본군의 집중 공격으로 참혹하게 패했다. 그 뒤, 독립군 부대를 이끌고 전투에 참여할 기회가 그에게 더는 주어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러시아 재무장관과 회담하려고 만주로 온 이토 히로부미를 1909년 10월 26일 오전 10시경 중국 하얼빈역에서 저격하였다.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체포되어 이듬해 3월 26일에 뤼순 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하였다. 그는 옥중 심문과 재판 과정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은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지키려는 것이었다고 일관되게 확인해 주었다. 안중근은 빌렘 신부와 두 동생에게 다음과 같이 유언한다. “(나는) 앞서 성단(聖壇)에 오르니 교우의 힘에 의해 한국 독립의 길보를 가져다주기를 기다릴 뿐이다.”

 

안중근은 “3월 25일 처형되기를” 원했는데, 그 이유가 “이날은 성금요일”로, “갈바리오의 희생,” 곧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안중근의 표현에 따르면, “내가 믿는 천주교의 기념스러운 날”이었던 것이다.

 

성금요일에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성단’에 오르기를 바랐을 만큼, 자신의 죽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와 구원을 위한 사랑과 하나로 이어 놓을 만큼, 안중근은 깊은 신앙을 갖고 있었다. 그가 일본군과 맞서 싸우고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은 침략 세력의 불의에 항거하고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정의를 사회 생태 차원에서 지키려는 의로운 투신이었다.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과 투신을 지켜 준 빛으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뒤 많은 일본인과, 친일하는 자들에게 비난받았다. 뮈텔 주교와 빌렘 신부 등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의 정책을 오해해서 죽였다고 비판하였다. 하지만 그의 의거는 한민족에게는 물론 많은 동아시아인과 세계인에게 빛이요 희망으로 작용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들은 안중근의 사형 소식을 듣고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안 의사의 죽음은 슬퍼함을 요치 않는다.” “금세기에 있어서 가장 큰일을 이룬 사람”, “국가를 생각한 그 정신은 우리의 귀감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빌렘 신부에 따르면, 일본인들조차도 자기네 나라 사람 가운데 그와 같은 용기와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나오지 않은 것을 애석하게 여겼고, 러시아 사람들과 중국인들도 안중근에게 찬사를 보내며 높이 기렸다.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한 그의 헌신은 한국인들이 대한민국의 독립과 일본의 패망을 볼 수 있기까지 그들의 투신과 삶을 지켜 주었던 빛 가운데 하나로 작용하면서 이들의 가슴속에 살아 있었다. 특히 그의 동생들 정근과 공근, 그리고 사촌 동생 명근과 조카들이 그를 따라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커다란 역할을 수행하였다.

 

안중근의 의거는 중국의 항일 투쟁 과정에서 문학과 연극 등에서 다양하게 다루어졌다. 다음은 중국의 항일 투사들이 안중근을 추도하여 부른 노래다.

 

“존경스럽다, 안중근/ 직접 이토를 암살하고, 살신성인의 정신을 보였다/ … 충성스러운 혼이 되어 역사에 오래도록 남네/ 누가 그의 뒤를 이을 수 있을까 그의 뒤를….”

 

일본과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헌신하였던 고토쿠 슈스이 같은 인물은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에 이렇게 응답하였다. “생을 버리고 의를 취하였네. 자기를 죽여 인(仁)을 이루었으니 안 군의 일거에 천지가 다 진동하네.”

 

현대에 이르러서는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이 유럽 연합(EU)의 선구를 이룬다면서 동아시아 경제-정치-문화 연대 공동체를 구상하고 이를 위해 투신하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영감을 준다.

 

‘안중근 정신의 실천’을 동아시아 연대와 연결 지어 접근한 예로 ‘동아시아 경제 공동체’, ‘유럽 통합과 동양평화론’, ‘동양평화론의 21세기적 계승’, ‘안중근의 동양평화론과 아시아 금융 통화 협력’, ‘동아시아 협력과 한일 관계’ 등 여러 연구를 볼 수 있다.

 

이제 안중근의 ‘동양 평화살이’ 정신을 동아시아를 하나의 단위로 보는 집안살이와 지구 단위의 인간-사회-자연 통합 살림을 내다보면서, 좀 더 깊고 넓게 승화시켜 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한국 교회가 그의 동양 평화 비전을 가톨릭 신앙과 통합해서 좀 더 철저하게 먼저 ‘공부하고, 공유하며, 공명을 발생시킬’ 방법을 찾고 이를 우리 사회에 확산시킬 수 있기를 희망한다.

 

2018년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남과 북, 북한과 미국의 새로운 화해와 상생의 기운에 비추어 볼 때, 우리 교회의 이 같은 노력은 민족사회의 복음화와 동아시아 사회와 세계의 복음화를 하나로 이어 주는 매우 뜻깊은 시대적 과업이 될 것이다.

 

* 황종열 레오 - 평신도 신학자. 대구가톨릭대학교 겸임 교수. 미국 뒤케인대학교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신앙과 민족의식이 만날 때 -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에 관한 신학적 응답」과 「안중근 토마스」 등을 저술하였다.

 

[경향잡지, 2019년 3월호, 황종열 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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