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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혐오 사회: 혐오의 두 얼굴, 유행어와 순응 매커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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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2-26 ㅣ No.1629

[경향 돋보기 - 혐오 사회] 혐오의 두 얼굴, 유행어와 순응 매커니즘

 

 

세기말의 기운이 충만하던 1999년,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는 들어 보지 못한 유행어가 퍼졌다. “너 되게 엽기다.” 아이들은 당황하다가도 어느새 모두가 ‘엽기’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게 되었다.

 

엽기라는 표현이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만 유행한 것은 아니었다. ‘정보화 시대’를 맞이하던 시기, 엽기는 한 온라인 동호회를 중심으로 퍼지더니 마침내 공중파에까지 소개되기에 이르렀다. 한 시대를 풍미한 유행어, 아니 문화 현상이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그즈음, 또는 이후로 ‘엽기적’인 사건이 많았던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엽기라는 말의 심층적 맥락이 어떠하든, 사전적 의미에서 어떻게 변화했든, 유행어의 맥락을 과대평가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오늘날 가장 논쟁적인 말, 혐오라는 단어도 근본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다.

 

 

혐오라는 말이 일반화 되기까지

 

많은 논자가 오늘날을 ‘혐오 사회’라고 이야기한다. 이때의 혐오는 영어 ‘hate’에서 온 말로, 일반적인 ‘화’ 또는 ‘분노’보다 강한 정서적 상태를 말한다. 한편 혐오라는 말만을 따져 본다면 본디 ‘역겨움’을 의미했다. ‘혐오’라는 말이 일반화되기 전까지만 해도 일상 언어에서 ‘혐오’의 용례는 쓰레기나 오물, 징그러운 것들을 수식하는 데 쓰였다.

 

‘혐오’의 의미가 ‘역겨움’에서 ‘증오’로 바뀐 결정적인 계기는, 하나의 유행어로서 사이버 공간에 등장하면서부터다, ‘엽기’가 그랬던 것처럼. 문제의 유행어는 ‘극도로 혐오스럽다.’는 말을 줄인 ‘극혐’이다. 이때의 ‘극혐’은 ‘혐오’의 무게와는 사뭇 달라서, ‘짜증이 난다.’를 대체하는 정도의 표현으로 시작되었다. 엽기라는 말이 충격적이고도 신선했듯이, ‘극혐’ 또는 ‘○○혐’ 또한 ‘신박한’ 유행어가 되었다.

 

그러던 가운데 학계에서 오래전부터 개념어로 사용한 ‘여성 혐오’(misogyny) 개념이 ‘일베’ 현상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갑작스레 대중화되며 ‘혐오’의 의미는 더욱 큰 질곡을 겪게 되었다. 본디 여성에 대한 멸시나 편견을 의미하던 여성 혐오가 말 그대로 “여성을 혐오”(hate)한다는 의미로 오인된 것이다.

 

이 개념을 오해한 (일베를 포함한) 많은 사람은 ‘나는 여성을 싫어하지 않는다.’와 같은 오해에서 비롯한 잘못된 반응을 보이며 이른바 성 갈등이 촉발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급조된 단어가 ‘남성 혐오’인 바, 남성을 비하하거나 남성에 대한 욕설 일반을 ‘남성 혐오’라는 신조어로 만드는 데 이르렀다. 이 말은 우리 사회에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체계적인 성 차별과 배제, 편견과 같은 문제를 ‘젠더 갈등’(일베 대 워마드라는 구도가 그러하다.)으로 ‘퉁’쳐서 여성 혐오의 혐의를 받는 이들에게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엽기적인 기능을 창출했다.

 

이처럼 오독스럽기까지 한 ‘혐오라는 말’은 표현은 거칠지언정 말일 뿐이어서 오늘날 ‘많아졌다’고 할 만한 것은 결국 그 말뿐이다. 따라서 지금의 현상은 혐오라는 말이 증오를 대체했다는 단순한 사실뿐이다. 10여 년 전의 한국을 ‘엽기 사회’라고 말할 수 없듯이, 혐오라는 말이 넘치는 ‘오늘’을 혐오 사회로 규정할 필요는 없다.

 

 

혐오로 쌓은 성 차별과 배제

 

하지만 통시적 관점에서 우리 사회를 보자면, 건국 이래 발전의 토대가 혐오가 아닐까 할 정도로 체계적인 차별과 배제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해방 이후로만 한정시켜도 당장 북한에 대한 증오가 아니었다면 압축 성장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또 월북자 가족을 배제했으며, 미군의 달러를 벌어 오는 기능만을 요구했던 ‘양공주’를 멸시했다. 미국인 또는 백인(여기엔 명예 백인인 일본인이 포함된다.)을 우대했던 것만큼이나 우리 땅에 오래전부터 터 잡고 살아온 화교를 여전히 배제하며, 다문화 가정 아이들 또한 괴롭힘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차별과 배제, 다시 말해 혐오는 종종 국가가 나서서 조장했고, 직장에서 고과나 채용 과정의 불이익 등으로 표현되었다. 민주화 이후에 약간의 차이가 생겼다면 예전엔 드러내 놓고 배제하던 것이, 이제는 미세한 장치를 통해 배제하고, 공적인 장소에서 결정되던 배제가 작은 규모의 비공식적인 모임들에서나 유통되어 현실에서의 힘은 여전하다.

 

오늘날 혐오는 경로에서 이탈한 ‘루저’들의 발악으로 보이지만, 실은 경로 의존성을 강화해 왔다. 혐오는 필연적으로 피안과 차안을 나누는데, 사회 구성원들은 ‘저쪽’이라는 낙인이 찍힌 이들이 겪는 각종 불이익을 보며 그렇게 되지 않으려는 생존 전략을 모색한다. 스스로 ‘저쪽’이 아님을 증명하고자 누군가 지정한 ‘저쪽’에 대한 혐오에 가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해’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덧씌운다.

 

이러한 연쇄는 저 신뢰 사회로 요약할 수 있는 한국적 폐쇄성으로 말미암아 사회 전반에 안착하였다. 혐오는 특히 흡연장이나 술자리와 같이 일상의 긴장을 풀어 주는 비공식적인 뒷자리에서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이 뒷자리는 단순히 일자리에서의 긴장을 풀어줄 뿐 아니라 혐오의 구체적인 내용이 공유되고, 실질적인 의사 결정 또는 합의가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사회생활’의 바탕을 이루는데, (당연하게도) 초대받지 못한 이들을 희생양 삼아 ‘정상적’인 구성원들만의 사회를 공고화시킨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모든 문제는 혐오의 대상, 곧 소수자들의 것이 된다.

 

이쯤에서 혐오의 적통이라 할 수 있는 ‘일베’(일간 베스트 저장소)를 보자. 필자는 이들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던 2012년부터 일베 게시물을 살펴보고 이용자들을 인터뷰해 왔다. 필자가 만나 본 이른바 ‘일베충’들은 어디서나 만나 볼 수 있는 청년들이었다. 이들은 마치 자신의 아버지가 보여 줬던 것처럼, 평범하게 취업해서 다들 하는 것처럼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가부장적 이상향을 꿈꿨다.

 

다만 여기서 평범함은 겸손의 표현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로서의 표징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바꿔 말하면, 평범하지 않은 나머지는 기득권이거나, 평범해지려는 집단적 분투(‘노오력’)를 하지 않는 무임 승차자에 불과하다. 곧,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나는 이를 ‘평범 내러티브’라 부른다.

 

지금의 (청년) 실업률과 출생률이 말해 주듯이, 이러한 ‘평범한’ 꿈은 더는 평범한 것이 아니다. 당연했던 직장에서의 정규직도 이들에게는 쟁취해야 하는 무엇이고, 결혼은커녕 연애도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평범 내러티브를 수용한 사람들은 모순적 사회 구조를 비판하기보다 기존의 경로에 순응한다. 그리고 이 경로가 흔들리면 흔들릴수록, 혐오의 충동은 더욱 강렬해진다.

 

따라서 일베가 보여 주는 각종 혐오는 실상 새로운 것들이 아니라, 차라리 여태까지의 발전을 지탱해 온 사회 심리학적 근저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일베에서 나타난 수많은 혐오 표현은 실상 누구나 어느 정도는 동조하거나, 최소한 인지하는 내용을 특유의 유머 코드로 풀어냈다는 점 외엔 새로울 것이 없다. 인터넷을 통한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매체적 환경은 심각성을 조금 더 명징하게 드러낼 뿐이다. 이처럼 한국 사회에서 혐오의 기원은 발전의 역사와 같이한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고, 그런 점에서 차라리 혐오 사회라는 진단은 지금보다 훨씬 오래전에 내려졌어야 했다.

 

 

혐오를 멈추려면

 

혐오는 근대 한국이 압축적인 발전을 위해 고안해 낸 체계적인 순응 매커니즘이다. 따라서 ‘누가’ ‘오늘날의’ 혐오를 부추기고 이익을 얻는가와 같은 질문은 성립될 수 없다. 나치 독일의 혐오가 히틀러 한 명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닌 것만큼이나, 현대 한국의 혐오도 개인 또는 소수 집단에 돌릴 수 없다.

 

몇몇 근시안적인 정치인이 이 현상을 자신의 지지로 돌리려고 혐오를 ‘조장’하지만, 그들이 부추긴다고 격화될 문제도 아니고 없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기 때문에 그들을 ‘탓’하는 것 또한 무의미하다. 오히려 혐오의 ‘범인’을 찾으려는 욕망은 우리 사회와 나에 대한 근원적 성찰이라는 괴롭고 어려운 길 대신 비난의 대상을 색출함으로써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는 혐오 매커니즘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먼저 말로서의 혐오와 행위로서의 혐오를 구분해야 한다. 많은 경우, 그저 말이며 유행어인 혐오는 늘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으로 오늘의 문제를 인식하는 데 도움을 주기는커녕 과장하거나 오해하게 한다. 이후엔 일상에서 체계적, 또는 습관적으로 이루어지는 행위로서의 혐오를 살피되, 자신을 먼저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이 쉽게 해 왔던 말들 속에 혐오의 혐의는 없는지 경계해야 한다. 자신이 ‘가해자’ 또는 ‘동조자’일 수 있다는 인식이 있지 않으면 혐오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지난한 자기 성찰과 함께, 혐오를 퍼 나르는 이들의 말을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 이 또한 성찰만큼 괴로운 일이지만, 결코 어리석은 이들의 악행으로 일축해서는 안 된다. 많은 심리학자의 진단처럼, 어떤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이해보다는 반발을 낳는다. 내가 만났던 일베 이용자들도 자신과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이들에게 무시당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기억을, 일베만 가지고 있을까?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혐오하는 이들의 말을 들으면 그 오활함 속에 일말의 진실과 결핍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이때 우리는 혐오라는 현상에 드리워진 거시적 문제를 오롯이 들여다볼 수 있으며, 혐오의 이면에서 구원의 싹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성찰하고 인내하는 시민적 우애만이 혐오에서 오늘을 구원할 수 있다.

 

* 김학준 - 1990년대 중반부터 PC 통신과 인터넷 커뮤니티를 전전해 온 자칭 ‘인터넷 죽돌이’ 1.5세대.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일베 저장소’를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고, 요즘 빅 데이터의 분석 분야에서 일한다. 공저로 「#혐오_주의」, 「그런 남자는 없다」가 있다.

 

[경향잡지, 2019년 2월호, 김학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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