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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대구경북의 성지: 박해시대의 교우촌 구미 여진공소, 군위 법주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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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8-06 ㅣ No.1722

[믿음의 길 - 대구경북의 성지 지상 순례] 박해시대의 교우촌 구미 여진공소, 군위 법주공소

 

 

병인박해 때 순교자를 배출한 구미 여진공소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를 통칭하여 여진이라 부릅니다, 낙산리에 있는 사기점 마을은 박해 때 이곳으로 피신한 신자들이 사기를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던 곳이라 붙여진 이름입니다. 병인박해 때 여진 교우촌의 신자 2명이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끌려가는 것을 목격한 사람이 있다고 전해집니다.

 

1882년경부터 경상도 지방을 순회 선교하던 로베르(김보록) 신부가 이곳에 갔을 때는 64명의 신자가 있었다고 당시 사목보고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후 신자수가 급격히 줄어 1893년 11월 뮈텔 주교가 이 공소를 방문했을 때는 신자 가정이 겨우 이 베드로 가정 한 집뿐이었습니다. 뮈텔 주교의 일기에 의하면 “54세 된 이 베드로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는데, 큰 아들은 지금 군위의 옹기 마을에 살고 있고, 둘째 아들은 예전에는 거기에 있었는데 지난봄부터 이상한 병을 앓고 있다. 필시 문둥병에 걸린 것이 아닌가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공소가 폐허가 된 것은 아들의 병 때문에 모든 신자들이 이곳을 떠난 것이 원인이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1980년에는 옛날 여진공소가 있던 낙산리에 새로이 낙산공소가 설립되어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병인박해 이전부터 조성된 피난지 군위 법주공소

 

여진공소와 불과 30~40리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법주공소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신자들이 군위군 소보면 달산리 법주 거리 앞산으로 피난을 와서 옹기를 굽고 살면서 형성되었습니다. 1882년 말부터 로베르(김보록) 신부가 이곳에 성사를 주러 갔을 때는 신자수가 78명에 달했으며 고해성사 58명, 영성체는 51명이 하였다고 교세통계표(1882~1883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900년 12월 28일자 김성학 신부의 서한에 의하면 “제 관할 공소 중에 가장 큰 공소이며 신자는 100명이 넘습니다. 이곳 대부분의 신자들은 옹기장이이고 외교인들은 나름대로 양반들이라고 합니다. 잘 알다시피 이런 사람들은 재목이나 질(옹기 재료)이 떨어지면 오래지 않아 이주하고 말 것이라는 의혹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서한 내용으로 보아 법주공소는 당시 가실본당 관할의 공소 중에서 꽤 큰 공소였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부터 1928년 사이에 이곳에 살던 신자들은 군위 용대리나 칠곡 장자골, 신동 등지로 이주해 공소가 쇠퇴했으며, 1945년 이후에는 완전히 폐쇄되었습니다.

 

[2017년 8월 6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대구주보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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