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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제주 4 · 3 사건 당시 교회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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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5-02 ㅣ No.885

제주 4 · 3 사건 당시 교회의 역할

 

 

국문 초록

 

본고는 제주 4 · 3 사건 당시 제주 지역의 천주교회를 둘러싼 사회적 환경과 그에 대처한 교회의 역할에 대해서 검토한 글이다. 4 · 3 사건은 해방 후 정치사회적 이념과 가치관이 상충하고 한라산 무장대와 국가공권력인 군 · 경 토벌대 사이에 무력 충돌이 빚어지면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된 사건이었다. 이 사건에 대한 교회의 인식과 교회가 당한 피해 실태, 교회가 행한 선무 · 구호 활동 등에 대해서 검토하였다.

 

4 · 3 사건 당시 제주 천주교회는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충돌과 폭력, 주민 희생의 위험지대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교회의 골롬반 선교회 신부들은 미국 군인들에게 민심과 민정을 전달하고 교회 신도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하기도 하였다. 골롬반 선교회 신부들은 한결같이 제주도 사태를 남북한 전쟁의 예고 사건 또는 축도로 인식하였고, 미군의 진주와 보호 없이는 제주도와 남한이 공산화될 것으로 우려하였다. 그들은 자연히 미군정 당국과 같이 4 · 3 사건을 공산분자들의 폭력적인 사태로 파악했으며, 1만5천 명 주민 희생의 원인도 한라산 무장대의 습격에 의한 것으로만 인식하였다. 교회는 신도들의 보호와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았기에 교회 밖의 일반 주민들의 희생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막아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4 · 3 사태의 국면을 처음부터 유심히 관찰해 온 제주 본당의 스위니 신부는 이 사태의 근본 원인을 경찰의 폭력과 테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고, 미군정 당국이 경찰의 폭행을 중지시킬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미국 메리놀 선교회의 캐롤 몬시뇰은 스위니 신부로부터 편지를 받고 직접 미국대사 무초, 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장군, 그리고 한국의 대통령 이승만을 만나서 수많은 사람의 희생을 중단시킴으로써 제주도 사태를 원만하게 해결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교회 신도들의 선무공작대 참여, 활발한 구호 활동 또한 4 · 3 사태를 평화롭게 해결하려는 일관된 입장이었다. 교회가 김익렬 9연대장이 나선 평화협상의 막후에서 협조하는 주요 역할을 담당한 일이나, ‘유지사건’ 당시 수많은 제주의 지도급 인사들의 어이없는 죽음을 막아낸 것 모두 평화적 사태 해결의 원칙을 실천한 것이었다.

 

 

1. 머리말

 

본고는 제주 4 · 3 사건1) 당시 제주 지역의 천주교회를 둘러싼 사회적 환경과 그에 대처한 교회의 역할에 대해서 검토한 글이다. 해방 후 정치사회적 이념과 가치관이 상충하고 한라산 무장대와 국가공권력인 군 · 경 토벌대 사이에 무력 충돌이 빚어지면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된 이 사건에 대한 교회의 인식과 교회가 당한 피해 실태, 교회가 행한 선무(宣撫) · 구호 활동 등에 대해서 차례로 검토해 보고자 한다.

 

4 · 3 사건의 진상조사보고서가 정부 위원회의 이름으로 2003년에 발간되어 그 대체적인 피해 실태의 윤곽은 드러났지만, 마을별 피해 실태, 행방불명인의 실상, 여성 및 아동의 피해 실태, 일본에 피신한 사람들의 행방 등 구체적인 진실에 대해서는 아직도 규명 작업이 미진하다고 할 수 있다. 교육계 · 종교계의 피해 실태, 물적 피해 실태, 연좌제 등 정신적 피해 실태에 대한 규명도 앞으로의 과제로 남아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추가적인 보완을 필요로 하는 조사 대상 가운데 천주교 · 불교 · 개신교 등 종교계의 4 · 3 사건 당시 피해 및 활동 내용에 대해서는 불교계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큰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2) 천주교 측의 서술은 선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출간한 《제주천주교회 100년사》가 유일한데, 좀 더 구체적인 서술을 필요로 한다.

 

이 글을 준비하면서 자료를 검색해 보았지만, 《제주천주교회 100년사》에서 인용된 자료를 능가하는 새로운 자료를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교회의 관련 자료가 많이 일실되어 버려서 구체적인 교세현황조차 파악하기 힘들었다. 심지어 제주 본당과 서귀포 본당의 신부 재임 시기 또한 100년사에 서술된 내용과 맞지 않는 기록들이 나와서 정확한 고증을 필요로 하였다. 당시 제주교회 선교사에 관한 편지가 아일랜드 골롬반 선교회 본부 문서고에 일부 소장되어 있어서 교회의 4 · 3 사건 인식과 피해 실태를 파악하는 데 다소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제주 본당의 세 신부가 직접 쓴 편지가 아니어서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3) 부족한 글이지만 현실과 사회 속에서 교회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회고하고 성찰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다행이겠다.

 

 

2. 교회의 4 · 3 사건 인식

 

무장봉기가 발발했던 1948년 4월 당시 제주 천주교회는 2개의 본당(제주 본당과 서귀포 본당)과 2개의 공소(신창 공소와 용수 공소)를 중심으로 복음 전파 활동을 하고 있었다. 태평양 전쟁 발발 직전인 1941년 10월 제주 지역의 포교를 담당하던 도슨(P. Dawson, 孫 파트리치오) · 스위니(A. Sweeney, 徐 아우구스티노) · 라이언(T. Ryan, 羅 토마스) 신부 등 3명의 선교사들은 제주의 군사 기밀 유출 혐의로 일제 당국에 의해 검거되어 해방될 때까지 광주형무소에 수감되어 고초를 겪었다.4)

 

1945년 11월에 광주에서 요양을 하던 스위니 신부가 제주 본당의 제8대 주임으로 재부임해 오면서 제주 본당이 부활되었다. 한편 일제 말기에 제주 본당 주임을 역임했던 도슨 신부와 서귀포 본당의 주임을 역임했던 라이언 신부는 광주에서 요양을 하다가 1946년 9월에 휴가를 얻어 본국인 아일랜드로 귀국하였다.5) 1947년 10월 10일에는 본국 휴가에서 돌아온 라이언 신부가 서귀포 본당의 제10대 주임으로 다시 부임함으로써 서귀포 본당이 부활되었다. 도슨 신부 또한 비슷한 시기에 본국 휴가에서 돌아와 1947년 12월경에는 스위니 신부가 사목하던 제주 본당에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광주의 헨리 신부가 1947년 11월 29일 쓴 편지에 도슨 신부가 곧 제주도에 갈 것이라고 했으며,6) 1948년 4월에 미군정 군인들이 제주 본당의 두 신부를 만난 사실로써 도슨 신부의 제주 복귀 시기를 미루어 알 수 있다. 1949년 4월 27일에는 스위니 신부가 본국으로 휴가를 떠났고, 7월 7일에는 휴가를 갔다가 돌아온 도슨 신부가 제9대 제주 본당 주임으로 다시 부임하였다.

 

4 · 3 사건을 겪던 시기에 제주의 신자 수가 얼마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935∼1936년의 신자 수가 529명이었음을 감안한다면, 태평양 전쟁 때 감소했다가 해방 직후 복구되어 500명 정도로 회복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신창 공소가 1947년 말에 신자 수가 100명으로 증가하였고, 1949년 9월 1일 용수 공소의 신자 수가 150여 명을 기록하는 등 새로운 영세 입교자가 많이 증가했을 것이다.

 

해방 후 부활된 제주 본당의 스위니 신부는 본당 신자들, 최정숙을 비롯한 신성여학교 졸업생들과 힘을 합쳐 신성여학교의 부흥을 위해 노력하였다. 신성여학교의 부활에 대해서 초대 교장 최정숙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이때 천주교 신자들과 지방 유지, 신성 졸업생들이 폐교된 신성의 부흥을 논의하게 되었다. 일제 억압에 문을 닫은 29년 만에 다시 재건하게 될 신성을 위해 나는 적극 참여, 교사, 급사, 소사까지 겸하며 동분서주했다. 전기가 없기 때문에 등잔을 닦아 준비하는 일, 몰수되었던 학교 재산을 찾는 일 등을 「수이니」 신부님을 통해 미군정 책임자에게 탄원하여 절간이 되어버린 재산을 찾았다.

 

여기서 야간 1학급으로 발족한 학원은 3년간 고생한 보람이 나타나 49년 여자중학교로 인가를 받았고 천주교 재단의 양해를 얻어 등기를 했다. 교사, 급사, 소사 일을 도맡아온 나에게 교장을 맡도록 하여 나는 여러 차례 사양했지만 적임자가 나올 때까지라는 조건부로 교장 취업을 승낙, 신성 1회 졸업생이 신성 초대 교장을 맡은 것이다. 학교를 설립한 뒤 계속된 재정난 때문에 교사들에게 충분한 대우를 해 주지 못했는데도 희생적으로 봉사해 주었다.

 

특히 이때 학교 부흥을 위해서 헌신해 준 분으로 홍완표 · 이기형 · 고창호 · 고영일 · 김종철 씨 등을 들 수 있다. 학교가 천주교 재단에 들어 있기 때문에 나는 현 하롤드 광주교구 대주교님을 찾아 학교 투자를 늘려주도록 하소연했다. 일부 성직자는 교육 사업 투자보다는 성당을 몇 개 증축하자는 의견이 많이 나왔다. 나의 학교 설립의 극성은 나의 천주교 세례명인 베아트릭스 학교라고 핀잔까지 받았다. 그러나 나는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현 대주교님의 특별한 후의로 학교가 정상궤도에 올라가게 되었다.7)

 

이처럼 제주 교회는 해방 후 제주 본당과 서귀포 본당이 부활하고, 신성여학교가 다시 문을 여는 등 차츰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47년 3월 1일 3 · 1 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가 발발하는 등 걷잡을 수 없는 소요 사태와 무력 충돌이 빚어졌고 교회도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3 · 1 사건과 4 · 3 봉기와 초기 무력 충돌 사태 등 4 · 3 사건 초기 제주의 사회적 상황을 직접 겪었던 사제는 제주 본당의 스위니 신부와 도슨 신부였다. 이들은 1948년 4월 28일 제주를 방문한 《뉴욕 헤럴드 트리뷴》(New York Herald Tribune) 특파원 레이몬드(Allen Raymond)와 《타임》(Time)과 《라이프》(Life)의 사진기자 마이던스(Carl Mydans)를 만난 자리에서 4 · 3 사건 발발 초기 제주도 상황에 대해 아래와 같은 의견을 밝혔다.

 

2명의 신부(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 출신의 Austin Sweeney 신부와 에이레 도네갈 출신의 Patrik Dawson 신부)들은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신부들이다. 그들은 태평양 전쟁 시기 본토에서 일제에 의한 투옥 생활을 제외하면 각각 12년, 14년 동안 제주도에서 살고 있다. “모든 이런 소요는 소련의 방식과 맞는다. 그러나 경찰은 좌익을 만들어내고 있다.” 스위니 신부는 오늘 제주도를 방문 중인 미국 특파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이들 경찰관들 가운데 한 명으로부터 폭행을 당하면 당신은 자연적으로 반란군이 될 것이다. 누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 스위니 신부는 제주도의 공산주의자들은 극소수라고 말했다. 극소수 - 이들은 또한 [일제 강점기] 지하에서 일본인들에 맞서 투쟁했다 - 는 산간 지대에 반란군들과 함께 있다고 그는 말했다. 이들 신부는 본토에서 들어온 경찰청장을 포함한 제주도의 경찰력이 “일제 경찰에 비해 더 나쁘다”고 말했다. 신부들은 또한 미국 당국이 현지 경찰에 심문을 위해 경찰 유치장에 있는 수감자 폭행을 중지하도록 자문했지만 방문 중인 미군 장교들이 등을 돌리기만 하면 폭행은 보편적인 방식으로 계속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즉, 제주의 천주교 신부들은 4 · 3 사건 발발 초기 소요 사태의 성격을 소련 방식인 좌익의 무력 투쟁으로 규정하면서도 그러한 무장봉기가 일어난 주요 원인을 경찰의 테러와 탄압에서 비롯된 것으로 인식하였다. 신부들이 미군 책임자에게 경찰의 테러와 고문을 중지하도록 요청했지만 미군정 측은 강력하게 제지하지 않았고, 미군 장교들이 지속적인 관심을 두지 않으면 끊임없이 경찰의 탄압은 계속된다고 보았다.8)

 

제주 지역의 유지들은 1947년 3 · 1 사건(경찰의 발포로 6명의 주민이 사망한 사건) 이후 경찰의 탄압에 대해 천주교 신부들에게 선처를 당부하기도 했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고창무(4 · 3 사건 당시 제주도금융조합 이사)는 뒷날 당시 상황을 《조선일보》에 기고하였다.

 

이러한 큰일(3 · 1 사건)을 저지른 경찰은 추호의 회오(悔悟)도 없이 그들의 죄악을 은폐하고 빨갱이 소탕의 공훈으로 조작하려고 갖은 탄압의 공작에 물샐 틈 없는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이를 우려하는 몇 사람이 천주교 신부(당시 미군정에 대한 발언권이 있다는 말을 듣고)를 방문하여 선처의 수고를 청하였을 때에 “이런 야만적 행동은 그대로 볼 수 없다”는 신부의 말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9)

 

당시 《에이피》(AP)와 《유피》(UP)가 대부분 서울에서 미군 소식통을 인용해 기사를 작성했던 데 견주어 제주도 현지를 찾은 이들 두 명의 특파원은 4 · 3 사건 초기 제주도를 방문한 몇 안 되는 외신기자들이었다. 레이몬드는 ‘경찰의 야만성이 제주도 내전의 원인’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아름다운 제주도에 휘몰아치고 있는 내전의 주요 원인은 경찰의 야만성에 있다”고 진단했다.10)

 

제주 본당 두 신부의 입장은 그들 스스로의 인식이었겠지만, 교회 신도들의 눈과 입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제주 천주교회 측은 4 · 3 사건의 발발을 불행한 상황으로 판단하여 평화로운 해결을 바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태 인식은 당시 제주 주둔 국방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의 인식과 같은 것이었다. 1948년 4월 말 한라산 인민유격대 사령관 김달삼과의 평화협상을 시도했던 김익렬 연대장의 회고록에는 천주교회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어 눈길을 끈다.

 

(제주도 주둔 미군 제59군정중대장) 맨스필드 대령은 귀순공작의 요점으로 민간인을 매개체로 이용하는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민간인은 제주도의 사정에 밝을 뿐만 아니라 도민의 감정을 판단하는 데 확실한 근거가 된다고 했다. 단, 도민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야지 원성을 사는 자를 기용하면 도민이 협조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는 제주도 유지들의 명단을 내놓았다. 나는 끈질긴 설득 끝에 결국 십수 명의 협력자를 구할 수 있었다. 나의 비밀참모 역할을 하게 된 인물들은 제주신보 사장을 중심으로 한 박경훈 씨 형제, 좌달육 · 김대용 씨, 그리고 읍내 천주교 신부와 몇몇 신자였다. 도내 민정의 말단에 관한 정보는 천주교 신자들의 공이 컸다.11)

 

4 · 3 사건의 해결 및 민정 동향을 파악하기 위하여 미군정청의 군 장교들은 제주 현지의 신부들과 자주 면담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군정청에서 제주에 보낸 파견대장 에드워드 콜린(Edward J. Colin) 중위가 제20연대장에게 보낸 아래 보고서를 보면, 1948년 7월 파견대 소속 미군 3명이 성당을 방문하여 두 명의 신부와 당시 대내외 상황에 대한 장시간의 대화를 나누었음을 알 수 있다.

 

1948년 7월 25일(일요일) 오전 9시 파견대(Task Force)에서 본인을 포함하여 3명이 카톨릭 선교 건물을 방문. 스위니(Sweeny), 도슨(Dawson) 두 명의 신부와 전쟁 중 일본인들의 규칙, 한국의 현재 상황 등에 관하여 장시간 대화를 나눔. 그들은 모두 미국인들이 떠난다면 그날로 내전이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언급하였다.12)

 

이러한 제주 천주교회 두 신부의 한반도 내전에 대한 예견은 골롬반 선교회 소속 신부들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광주 천주교회 소속 헨리 신부 또한 아일랜드 골롬반 선교회 마리난 총장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자주 한반도 내전 가능성을 언급했다.

 

도슨 신부가 이 나라에 있습니다만, 그가 언제 올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오스틴 스위니 신부에 대해 편지를 쓰려고 합니다. 그가 집에 갈 수 있는 승인을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다음 6월까지 기다리지 말고 즉시 떠나야만 합니다. 그의 건강이 좋지 못합니다. 집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만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도슨 신부는 오는 대로 곧 제주도에 갈 것이고, 오스틴은 자유롭게 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다소 떠나기를 주저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맥폴린 신부를 대신하여 공식적으로 그에게 명령을 내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그(오스틴 스위니)에게 가도 좋다는 허락뿐만 아니라 안식년을 취해도 좋다는 명령을 내려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나라에 곧 남북 전쟁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만일 공산주의자가 통치하게 된다면, 모든 일들이 힘들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미국이 한국군을 훈련시키고 군대의 장비를 갖추게 한다면 그들이 승리하지는 못할 것입니다.13)

 

오스틴 스위니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미국까지의 3개월의 여행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에게 홍콩 또는 싱가포르까지는 비행기로 보내주고 거기에서 보트를 타고 가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3년 이내에 전쟁이 일어나리라고 봅니다. (5 · 10) 선거 뒤에 미군은 한국에 주둔할 것으로 보이니,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3년 동안 선택적인 봉사법을 미국이 통과시켰을 때 그것은 거래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러한 법은 한정된 기간에 적용하려고 통과되기 마련입니다. 이 때문에 전쟁은 그 한정적인 기간에 발발하기 마련입니다. 그 혼란스러움을 완전히 청소해 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14)

 

이러한 헨리 신부의 계속된 한반도 내전 예견은 1948년 5월 제주도를 방문한 뒤 4 · 3 사태의 현장을 직접 목격한 뒤에 내려진 것이었다.

 

미군은 한국에서 철수할 준비가 거의 되었습니다. 저는 동양으로 오기 위한 모든 미국인들의 여권이 취소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지금 나타나고 있는 현상들을 보면, 저는 1년 안에 한국이 공산화된다는 것에 돈을 걸겠습니다. 한국이 공산주의 국가가 되는 것을 막으려면 엄청난 유혈의 참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방금 전에 에디와 함께 제주도에서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교전 지역을 돌아보았습니다. 우리가 돌아보는 데에 크게 괴로운 일을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마을은 황폐화되고 불탔으며, 그중 일부는 넋이 나간 상태였습니다. 길은 차단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군대가 우리에게 빌려준 지프차를 이용해서 여기저기 돌아다녔습니다.15)

 

라이언 신부가 다리에 약간 문제가 있습니다. 만일 의사가 필요하다고 판단을 내리면, 그를 미국에 보내기 위한 당신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저는 이미 네 명의 새로운 신부를 위한 입국 허가를 신청하였습니다. 도슨 신부의 말에 따르면, 제주도의 상황이 나빠지고 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불투명하다고 합니다. 커피나 설탕, 우유를 사지는 못했지만, 1,200달러어치 식품을 구입했습니다.16)

 

골롬반 선교회 신부들은 제주도의 4 · 3 사태를 다가올 남북 전쟁을 예고하는 사건으로 인식했으며, 결국 2년 뒤 6 · 25 전쟁이 발발함으로써 4 · 3 사건은 한국 전쟁의 축도(縮圖)가 되어버렸다. 헨리 신부의 제주도 및 한반도 상황을 보고받은 아일랜드 골롬반 선교회 본부의 인식 또한 마찬가지였다.

 

라이언 신부의 병환 소식을 들으니 유감입니다. 그가 하루 빨리 좋아지기를 바랍니다. 만일 병 때문에 문제가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그를 미국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미군이 한국에 남기를 희망합니다. 미국 정부는 만일 미국이 한국을 방치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잘 알고 있습니다. 제주도는 공산당의 온상인 것 같습니다. 도슨 신부가 붕괴의 경우를 대비해서 자신을 잘 돌봤으면 좋겠습니다.17)

 

 

3. 교회의 피해 상황

 

4 · 3 사건으로 인한 교회의 피해는 불교 · 개신교 등 다른 종파에 비해서 그다지 심하지는 않았다. 1949년 2월 15일 제주 본당 오스틴 스위니 신부가 서울교구 조지 캐롤(George Carroll)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는 제주도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만약 여기가 문명화된 나라라면, 광범위하게 ‘제주도 주민을 돕는’ 계획을 당장 실시할 것입니다. 여기 가난한 사람들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사망자 명단은 현재 최고 1만5,000명에 이르고 있으며 불에 타 무너진 가옥의 수가 1만을 넘습니다. 한 마을에서 가옥 721채가 습격자들에 의해 소실되었고 주민들은 짐승같이 살고 있으며, 평균 하루에 고구마 한 개를 먹고 있습니다. 그러나, 해안의 읍과 면(산간 지역에는 남아 있는 마을이 없습니다) 주위에는 군인, 경찰, 청년 단체가 만든 담이 쌓여져 있어 현재 상대적으로 안전합니다. 그러나 주변을 여행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군인조차도, 간격을 잘 유지한 최소 5대의 차량으로 적절하게 호송하여 가는 것이 아니라면, 전멸됩니다. 지난 두 달 동안, 그들은 약 130명이 사망하였고 1백 명이 넘게 부상을 입었는데, 거의 모두 도로 매복에 의하여 그렇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총 약 200정을 습격자들에게 잃었습니다. 습격자들은 또한 기관총 3정도 노획했습니다. 여성 중 한 명이 총탄 7발, 즉 M-1 3발과 카빈 4발을 맞고, 소년 중 한 명이 가슴에 총탄을 맞고 발목에 M-2 총탄을 맞았지만, 지금까지 가톨릭 신자는 두 명만 사망하였습니다. 둘 다 회복되고 있으며, 수월히 어려움을 뚫고 나갔습니다. 그녀를 찾아내기 전에 세 시간 반 동안 (구조를) 기다려야 했으므로 미국인 고문관은 그녀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제주도 여성들은 수많은 역경과 고난을 겪고 있지만 잘 견디도록 길러졌습니다. 그녀는 보기에 몸무게도 줄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만약 당신이 가톨릭 사상자를 위하여 한두 개의 ‘혈장’을 차용할 수 있다면, 나는 매우 감사할 것입니다.18)

 

즉, 1948년 겨울의 군 · 경의 강경 진압 작전 실시와 무장대의 반격으로 인해 사망자가 1만5천 명이라고 언급하면서, 천주교 신도 2명이 한라산 무장대의 습격으로 사망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1951년 2월 말에 한라산 잔여 무장대의 습격으로 군경 가족과 더불어 신도들이 희생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희생된 2∼3명의 신도들 시신은 제주 성당 제의실에 안치되었으며, 1951년 3 · 1절에 공동 추모미사가 집전되었고, 임시 제주도청 청사에서 다시 추도식이 거행되었다.19)

 

4 · 3 사건 당시 제주도 천주교회는 2개의 본당과 2개의 공소 모두 읍내 중심지 또는 해안 마을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무장대의 공격을 받거나 거꾸로 무장대와 연결되어 군 · 경의 지목을 받는 사례가 별로 없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특히 외국인 신부들이 미국 군인들과 교류하였기 때문에 천주교회는 한국 군 · 경의 보호를 받는 방패막이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귀포 본당 라이언 신부는 1948년 8월 18일 상효리에서 폭도 40명이 마을 주민 5명의 집을 습격해서 그들을 죽창으로 찔렀으나 사망자는 없었다고 국방경비대 9연대에 통보하는 등 군경 토벌대의 진압 작전에 협조했다.20)

 

서귀중학원 학생이던 변창호(서홍리 거주)는 좌익 서적을 소지했다가 특무대에 연행되어 취조를 받았는데, 서귀포 본당 신도회장 허승천이 신원 보증을 해 줘서 석방되기도 하였다.21) 4 · 3 사건 당시 서홍리에 있던 서귀포 성당에는 호근리 등 주변 마을에서 소개된 주민들이 임시로 거주하기도 했다.22) 호근리 주민 홍재순(여, 사망 당시 36세)은 1948년 11월 5일 토벌대에 의해 자택이 불태워지자 서귀포 성당으로 피신하여 거주하다가 서귀포경찰서에 연행된 후 11월 12일 정방폭포 주변에서 총살당했다.

 

천주교회는 오히려 군 · 경에 협조하여 선무 작전에 나서거나 교회의 지도급 신도들 가운데에는 직접 우익 청년 단체에 가입하여 한라산 토벌 활동에 주역이 되는 사례도 있었다. 서귀포 본당의 신도 강성건(아타나시오)은 1947년 3월 30일 서귀포 천주교회에서 열린 남제주군 독청(獨靑) 결성대회에서 위원장에 선출되어 정치 활동을 전개하여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했으며, 4 · 3 사건 때에는 대동청년단 활동을 하며 경찰로 특채되어 ‘폭도’ 토벌 작전에 직접 나서기도 했다.23)

 

한편 해방 후 결성된 제주읍부녀회의 회장을 맡았던 제주 본당 신자 최정숙은 4 · 3 사건 당시 재산 무장대를 물적으로 협조한 혐의를 받아 처형 직전까지 내몰리기도 하였다. 최정숙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48년 4 · 3 폭동 사건이 일어나자 우리가 만든 부녀회의 거취가 큰 문제였다. 우리는 간부들이 모두 모여서 부녀회를 해체하기로 결의했다. 왜냐하면 부녀동맹이라는 좌익 단체가 결성되어 오해를 받을 염려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해체해 버린 것이다. 그런데 부녀동맹에 가담한 사람들은 우리의 부녀회 해체를 무시하고 부녀회가 곧 부녀동맹인 것처럼 선전하고 다녔기 때문에 나는 軍紀隊에 붙들려 갔다. 부녀회의 해체 일자와 소위 동맹과는 무관함을 설명했으나 독지골 박영효 씨 집을 우리가 썼는데 여기에 우리가 손보지 않은 틈에 인근 주민들이 막걸리를 담아 감추었고 내가 약품을 보관해둔 것이 크게 오해로 번졌다. 내가 폭도들에게 약품을 공급하고 술을 대주기 위해서 독지골 집에 감춰뒀다는 것이다. 나는 공산당으로 몰려 직결처분을 당하게 되었다. 군인들에게 나의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개죽음을 각오한 나는 오직 마음을 정리하고 천주님께 조용히 기도를 드리며 기다렸다. 그때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소대장이 천주교 신자가 공산당에 가담할 리가 없다고 재조사를 하도록 하였고 당시 송요찬 사령관을 만나 오해를 풀고 살아나온 기막힌 일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송 사령관은 곧 나에게 여성 계몽에 힘써달라고 부탁하면서 고인이 된 박경훈 지사와 선무 강연을 나서게 되었다. 나는 주로 부녀회와 부녀동맹은 무관하다는 설명과 반공 강연회로 도 일주를 약 2주간 했다. 이 강연에서 돌아와 보니 부녀회 간부들은 모두 검거되어 천막에서 고생하며 군사재판을 받아 무혐의로 풀려나왔지만 이들의 고생은 나보다 심했다. 이때에 이조 말엽의 친일 정치가이며 1884년 갑신정변에 사대당에 몰려 제주도에 왔다가 한일합방 후 내무대신까지 지낸 박영효 씨에게 우리 집안이 물려받은 독지골 집 8채가 모두 불태워져 버렸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내가 군인들에게 붙들려가니까 소위 빨갱이의 소굴이라고 오해, 주민들이 불을 질러버렸다는 것. 이로 인해 부모에게 물려받은 그림, 서화, 가구 등 값진 물건들이 모두 불타버리는 서러움을 당해야 했다.24)

 

해방 직후 결성된 제주읍부녀회는 1947년 1월 25일 제주도 부녀동맹이 결성되자 곧바로 2월 21일 제주읍 부녀동맹으로 개편되었다. 이때 최정숙은 부녀동맹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부녀회 시절의 많은 동료는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가운데 1948년 11월경 헌병대의 조사를 받고 제주농업학교에 수감되었다가 총살당한 경우도 있었다. 최정숙 또한 부녀동맹 가입 혐의로 조사를 받았지만, 농업학교로 수감되기 직전 제주 본당 신부에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려서 석방되었다는 증언도 있다.25)

 

 

4. 교회의 선무 · 구호 활동

 

1) 선무 작전의 참여

 

1948년 10월 17일 송요찬 제9연대장의 포고문 발표, 11월 17일 계엄령 선포를 계기로 제주도 전역에 강력한 초토화의 진압 작전이 전개되었다. 이때로부터 1949년 2월에 이르기까지 1만5천 명에 가까운 희생자가 속출하였다고 미군정 보고서와 제주 천주교회 선교사들의 편지에는 기록되어 있다. 이 시기에 중산간 마을의 일반 주민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 살상이 가해졌고, 제주 읍내의 유지급 인사들에 대한 좌익 가담 및 협조 혐의로 체포 · 수감 · 고문 · 총살이 수시로 행해졌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제주 본당 최정숙도 이 시기에 헌병대에 끌려가 취조를 받고 사선을 넘나들었던 것이다. 앞의 회고록에서 보듯이, 최정숙은 헌병대에서 석방된 뒤 송요찬 연대장을 만난 자리에서 선무 활동의 제안을 받았다. 그리고 박경훈 전 제주도지사와 2주 동안 제주도 일주를 하며 선무 강연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선무 강연은 자신들의 좌익 가담 혐의를 부정함으로써 주민들에게도 한라산 무장대와의 관계를 끊게 하려는 토벌대 작전의 일환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4 · 3 사건에 대한 본격적인 선무 작전은 1949년 3월 2일 제주도 지구 전투사령부가 출범하면서 시작되었다. 3월 10일 제주도 시찰에 나선 이범석 총리의 ‘선무공작’ 발언과 유재흥 사령관의 전황 인식에 따른 결과였다. 이를 위해 민간인을 중심으로 한 ‘선무공작대’를 발족시켰다.

 

선무공작대의 출범은 제2연대장 함병선이 신성여자중학원 교감인 홍완표에게 민간단체 조직을 위임하면서 비롯되었다. 당시 2연대에 배속되어 통역관으로 근무하던 홍승표 선생은, 제2연대장이 선무공작대를 책임질 담당자를 추천해 주도록 하자 홍완표 교감을 추천하였다고 한다. 홍완표 교감은 같은 학교의 교사인 이기형 · 고창호 · 김종철 등을 집으로 초대하여 선무대 일원으로 나서게끔 설득하였다.26) 홍완표는 선무대의 교화부장을 맡아서 선무 활동을 돕는 화극(畵劇) 〈바른길〉 등을 만들었고, 고영일은 기획차장 겸 작전 보도요원으로 활동하였다. 이기형과 김종철은 선무공작 때 사용하는 노래를 여러 편 작사 · 작곡하였다.27)

 

선무대 활동은 신성여자중학원 교사뿐만 아니라 제주여자중학교의 교사들도 적극 참여하였고, 제주문인협회 회원들도 자진하여 가담하였으며, 여기에 민간 대원들을 호위하는 김동근 소위의 경비대가 포함됨으로써 120명의 선무공작대가 조직되었다. 이후 대원들은 각 마을을 순회하면서 강연과 노래 · 연극 · 의료 활동 등을 통한 선무 활동으로 큰 효과를 얻었으며, 그 결과 중산간 지대를 헤매던 많은 주민이 하산하게 되었다. 당시 한라산 속으로 들어갔던 노형 마을의 현임종은 북교 6학년 담임이던 선무대원 김종철을 만나서 하산한 경험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1949년 봄, 선무공작대가 창설되어 입산한 주민들을 설득하기 시작해 귀순자가 늘어났고, 군경 당국에서도 더 이상 귀순자를 처벌하지 않게 되자 4 · 3의 악순환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게 되었다. 나도 이때 한라산에서 붙잡혀 와 제주 주정공장 창고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석방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때 군인에게 붙잡혀 한라산에서 내려오는 길목에 나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나를 구원으로 이끈 운명적인 만남을 가지게 된다. 한라산 주둔 군인들을 위문 공연하러 올라가던 선무공작대원들과 애월읍 중산간 지대 원(院) 근처에서 서로 마주친 것이다. 마침 선무공작대원 속에 끼어 있던 나의 초등학교 6학년 담임 선생님(김종철)이 나를 먼저 발견하신 것이다. 나를 끌어안고 선생님께서는 눈물을 보이시며 “급장인 네가 행방불명되어 그간 걱정하고 있었다. 그저 한라산 속으로 갔으리라 짐작만 하고 있었다. 이제 나를 만났으니 아무 걱정 말고 수용소로 가 있거라. 내가 책임지고 너를 구해 주겠다” 하고 안심시켜 주셨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공포에 떨고 있던 나도 비로소 선생님을 만나 위안을 삼았고 이젠 살아날 수 있게 되었다는 확신을 얻었다.28)

 

2) ‘유지사건’의 중재

 

6 · 25 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50년 8월 제주도에서 이른바 ‘유지사건’이 일어났다. 1950년 8월 초순 제주 지역의 법원장, 검사장, 제주읍장 및 변호사, 사업가, 교육자 등 유지급 인사 16명이 ‘인민군환영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는 혐의로 제주계엄사령부(사령관 : 신현준 대령)에 연행된 충격적인 사건을 말한다.29)

 

이들 제주 지역 유지들은 8월 8일과 9일에 걸쳐 계엄사령부에 의해 갑자기 체포 · 구금되었다. 약 열흘 정도 정보과 소속 장교 및 하사관들에게 고문과 총살 위협을 받았는데, 8월 14일에는 피의자 장용문이 심한 고문을 받다가 사망하였다.

 

당시 김충희 제주도지사는 이 사건이 특정인을 구속하기 위한 모함으로 보고, 이성주 경찰국장과 협의하여 진상을 밝혀달라는 내용의 진정서를 조병옥 내무부 장관과 신성모 국방부 장관에게 보냈다. 또 공병순 제주특무대장도 이 사건이 사실과는 다르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국방부에 제출했다. 현지 조사를 위해 급파된 선우종원 치안국 정보수사과장은 이 사건이 계엄사령부 정보과장 신인철 대위의 음해 · 조작 사건임을 밝혀냈다. ‘인민군환영준비위원회’는 전혀 실재하지 않은 조직으로서 불순분자의 중상모략으로 드러났다.

 

피의자 이윤희 외 14명은 9월 3일 오후 6시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피의자 대부분은 심한 육체적 ·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고, 김재천 제주지방법원장은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착란을 일으켜 일찍 사망하였다.

 

제주도 유지사건으로 제주 사회는 극도로 위축되었다. 도민들은 현직 법원장 · 검사장이 계엄군에 검속되어 죽을 위기에 처하는 사태를 직접 체험하였다. 더욱이 이 사건은 8월 20일 대규모 집단 학살과 함께 진행되었기 때문에 8월 한 달 동안 제주는 전율과 공포의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 ‘유지사건’의 해결 과정에서 제주 천주교회가 숨은 역할을 했다는 증언이 있어서 주목된다. 당시 제주도청 공무원이던 하두용은 ‘유지사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억하였다.

 

‘인민군환영위원회’를 조직했다는 유지들로는 당시 총무국장, 법원장, 원 검사장, 제주읍장 김차봉, 농고 선생 최광(남)식, 변호사 최원순(최광식 아버지), 백형석, 전인홍, 도청 과장 김대홍, 이윤희(이승택 지사 아버지), 김영희 등이 거론되어 모두 검거되었다. 이들은 제주 주정공장 창고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그런데 최정숙 씨가 아버지와 오빠가 모두 잡혀가 죽게 되자, 성당 신부님께 사정을 했다. 최정숙 씨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사정 얘기를 들은 신부님이 서울 중앙본부에 제주도 유지사건을 알려 사건을 조사하게 된다. 조사 결과, 완전히 개인감정으로 인한 조작임이 밝혀졌다. 어떤 개인감정인지는 모르겠다. 조작극임이 밝혀지자, 검거되었던 제주 유지들은 모두 석방되었다.30)

 

최정숙의 아버지(최원순 변호사)와 오빠(최남식 제주농업학교 교장)가 체포되자 제주 본당 도슨 신부에게 구명 부탁을 했다는 것이다. 현지 조사 책임자인 치안국 선우종원 수사지도과장 또한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조병옥 내무장관의 특명으로 제주에 파견되었다. 선우종원은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제주 본당의 도슨 신부와 신성학교 교감 홍완표를 방문하여 두 사람으로부터 “군 정보과의 횡포에 검찰과 경찰 등이 반발하자 정보과장인 신인철 대위가 이들을 무장대의 활동과 확대 연관시켰다”는 정보를 확인하였다. 특히 미8군 군종 신부를 겸하면서 미국에 있는 ‘전국가톨릭복지협의회’(National Catholic Welfare Conference, NCWC)의 원조를 받아 제주의 피난민 구제에 앞장섰던 라이언 신부는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 이승만 대통령과 관계 요로에 진정까지 하였다.31)

 

3) 이재민 구호 활동

 

1948년 겨울과 1949년 초까지 집중적인 토벌대의 강경 진압 작전의 결과, 중산간 마을 주민 상당수가 죽음을 피해 한라산 속으로 피신해 들어갔고, 마을 대부분은 불타버려 주민들은 생계를 유지하는 데 심각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1949년 2월 15일 제주 본당 오스틴 스위니 신부가 서울교구 조지 캐롤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는,

 

만약 여기가 문명화된 나라라면, 광범위하게 ‘제주도 주민을 돕는’ 계획을 당장 실시할 것입니다. 여기 가난한 사람들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사망자 명단은 현재 최고 1만5,000명에 이르고 있으며 불에 타 무너진 가옥의 수가 1만을 넘습니다. 한 마을에서 가옥 721채가 습격자들에 의해 소실되었고 주민들은 짐승같이 살고 있으며, 평균 하루에 고구마 한 개를 먹고 있습니다.

 

라고 전할 정도로 당시 제주도의 상황은 너무도 비참했다. 산중에 숨어있는 주민들을 하산시켜 사태를 완전히 종결짓기 위해서는 주민 구호 대책이 시급히 요구됐다. 이러한 제주의 비참한 상황을 전한 스위니 신부의 편지 내용은 미국의 《뉴욕타임즈》(The New York Times) 1949년 3월 15일자에도 자세하게 보도되었다.

 

이러한 스위니 신부의 편지 내용에 따라 서울 주재 미국 메리놀 선교회의 조지 캐롤 신부는 1949년 4월에 구호품을 배분하러 제주도를 방문했다. 캐롤 신부는 제주도 현지에서 만난 미국대사관 직원에게 “현재 새로운 정신이 제주도 주민들에게 퍼져있다. 올해 3월 초까지 제주도에 만연했던 패배주의가 이제는 일반적인 낙관주의로 바뀌었다. 농민들이 밭으로 돌아가고 있으며 재건축이 눈에 띄고 있다. 또 중산간 지역의 옛 공산주의 동조자들의 움직임도 줄어들고 있다”고 제주도 방문 소감을 밝혔다.32)

 

캐롤 몬시뇰은 제주도 구호 방문을 끝낸 뒤 1949년 4월 28일자로 〈제주도 방문기〉를 작성하였다. 메리놀 선교회 서한록(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에 수록된 방문기 내용을 간추려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제주도 방문과 관련하여 구호 활동의 책임자로, 또 잡지의 기고가로 다녀오게 되어 다행이었습니다. 저는 한반도 남쪽 끝에서 대략 50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공산주의자에 의해 황폐화된 섬에 두 주를 머물고 막 돌아왔습니다. …해안가를 따라 아직 남은 마을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담에는 망루가 우뚝 솟아 있고, 감시인들이 24시간 망을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마을들의 입구는 총은 아니지만 투창(죽창)으로 무장한 남자와 소년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저는 섬 전체를 돌아볼 기회를 가져 24군데 마을에 들렀습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할 기회가 주어져 그들에게 미국 가톨릭 신자들이 미국 전국가톨릭복지협의회(NCWC) 산하의 가톨릭구제위원회(CRS)를 통해 구호물품들을 그들에게 보내왔다고 말했습니다.

 

사실은 제주도에서 최근에 발생한 어려운 문제 때문에 유례없이 바빴습니다. 지난해 그곳에서는 정규전이 계속해서 일어났고, 사망한 사람만도 1만 명을 훌쩍 넘었습니다. 지난 15년간 제주도에서 사목 활동을 해온 스위니 신부로부터 편지를 받았을 때 그 심각한 상황을 중단시킬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저였습니다. 저는 편지를 미국대사 무초와 한국에 나와 있는 미국 장교인 로버츠 장군에게 보여주었으며, 마침내 한국의 대통령 이승만 박사에게도 보여주었습니다. 그 편지는 굶주림으로 고통받고 입을 옷조차 부족한 불쌍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수많은 일의 시작을 의미했습니다.

 

남원이라는 곳에 갔는데, 저는 피난민들이 살고 있는 가축우리와도 같은 헛간을 방문하였습니다. 말을 꺼내려고 했지만 그만 말문을 잇지 못하였습니다. 그 대신에 눈물이 나와 저는 마치 어린아이와도 같이 울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오두막집을 보고 나니 저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방문 여섯째 날에 폭동자에 의해 파괴된 수천 채의 집을 보았습니다.

 

섬(제주도)의 두 사제들은 아직 한국말을 잘하지 못하는데, 이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이 물품들이 가톨릭에서 온 것이라고 제가 말할까봐 두려워하여 어떤 물건도 하역하기를 거부하던 프로테스탄트 신자에게 달려갔습니다. 마침내 그들이 이 물건들을 목사에게 보내어 그가 받으니 구호물품이 제주도에 수용될 수 있었습니다. 그 목사는 지방 관리에게 구호물품의 9/10를 인도하였으며, 지방 관리는 이를 창고에 두었다가 한 달도 안 되어 모두 나누어 주었고 기부자가 누군지는 별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제가 사람들에게 미국 사람들이 이부자리 등등을 보낸 것이라고 말하였지만, 신부가 매번 짐 실은 트럭과 함께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톨릭교회가 이런 물건을 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와 같은 생각이 교회에 해가 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교회가 이 섬에서 어마어마한 기회를 갖게 된 것이고, 아일랜드 선교사들이 이익을 취하게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통상 6 · 25 전쟁 직후부터 미국의 민간 구호 단체들이 한국에 대한 원조를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캐롤 몬시뇰의 제주도 방문을 통해서 4 · 3 사건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1949년부터 미국의 민간 구호 단체인 ‘전국가톨릭복지협의회’(NCWC) 안의 신설 위원회인 ‘가톨릭구제위원회’(Catholic Relief Service, CRS)33)가 한국에 대한 원조를 시작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6 · 25 전쟁 발발 직후부터 미국의 민간 구호 단체들은 한국에 대한 원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특히 전쟁 첫해에만 280만 달러의 구호금을 모아 한국으로 보내왔는데, 그중 200만 달러 이상은 ‘가톨릭구제위원회’(CRS)에서 모아 보낸 것이었다. 이 구제위원회에서는 1951년에도 많은 구호품을 보내왔다. 이후 전국가톨릭복지협의회의 전재 구제부장 스완트롬 몬시뇰은 1952년 9월 24일에서 30일까지 약 1주일 동안 부산 · 대구 · 서울의 전재 상황을 직접 시찰한 뒤 이에 대한 실정을 미국 각계에 호소함으로써 막대한 구호물자를 모아 한국에 보낼 수 있었다.34) 당시 복지협의회의 한국 지부장은 1949년 제주를 방문했던 캐롤 몬시뇰이었고, 제주도는 부산 사무소의 지원을 받았는데, 한국 지부에서는 구호 활동을 위해 기독교세계봉사회(CCWS)와 협력하기도 하였다.35) 캐롤 신부는 가톨릭복지협의회의 한국 지부장으로서 2만 달러가량의 음식, 의복, 그리고 50만 달러 상당의 의약품 등을 원조하였다. 이 원조 물품은 한국 정부와의 협력 속에서 북한에서 온 전쟁 피난민, 어린이 기관(고아원), 1948년 극심한 홍수의 피해자, 1949년 제주도의 폭력배로 인해 집을 잃고 떠나온 사람들 등에게 공급되었다.36)

 

이러한 교회의 4 · 3 사건 또는 6 · 25 전쟁 이재민 구제 활동은 주민들의 적극적인 호응 아래 이루어졌고, 일면 신자 수의 증가에도 한몫을 하였다. 한편 제주 지역 교회는 피난 성직자들의 활동으로 신자 수가 급격히 증가하는 지역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5. 맺음말

 

4 · 3 사건 당시 제주 천주교회는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충돌과 폭력, 주민 희생의 위험지대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교회의 골롬반 선교회 신부들은 일제 치하에서는 태평양 전쟁 때 옥고를 치렀지만, 4 · 3 사건 때에는 미국 군인들과의 대화와 만남을 통해 민심과 민정을 전달하고 국내외 정세를 판단했으며 교회 신도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하기도 하였다. 골롬반 선교회 신부들은 한결같이 제주도 사태를 남북한 전쟁의 예고 사건 또는 축도로 인식하였고, 미군의 진주와 보호 없이는 제주도와 남한이 공산화될 것으로 우려하였다. 그들은 자연히 미군정 당국과 같이 4 · 3 사건을 공산분자들의 폭력적인 사태로 파악했으며, 1만 5천 명 주민 희생의 원인도 한라산 무장대의 습격에 의한 것으로만 인식하였다. 교회는 신도들의 보호와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았기에 교회 밖의 일반 주민들의 희생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막아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4 · 3 사태의 국면을 처음부터 유심히 관찰해 온 제주 본당의 스위니 신부는 이 사태의 근본 원인을 경찰의 폭력과 테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고, 미군정 당국이 경찰의 폭행을 중지시킬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미국 메리놀 선교회의 캐롤 몬시뇰은 스위니 신부로부터 편지를 받고 직접 미국대사 무초(Muccio), 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장군, 그리고 한국의 대통령 이승만을 만나서 수많은 사람의 희생을 중단시킴으로써 제주도 사태를 원만하게 해결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교회 신도들의 선무공작대 참여, 활발한 구호 활동 또한 4 · 3 사태를 평화롭게 해결하려는 일관된 입장이었다. 교회가 김익렬 제9연대장이 나선 평화협상의 막후에서 협조하는 주요 역할을 담당한 일이나, ‘유지사건’ 당시 수많은 제주의 지도급 인사들의 어이없는 죽음을 막아낸 것 모두 평화적 사태 해결의 원칙을 실천한 것이었다.

 

앞으로 제주 천주교회 신도들의 피해 실태를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작업과 선교사들의 서한 자료 검색, 교회의 주요 인사에 대한 인터뷰 작업 등을 통해서 좀 더 소상하게 진실을 밝히고 정리하며 입체적으로 분석하는 것을 과제로 제시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참고 문헌

 

강용삼 · 이경수 편저, 《대하실록 제주백년》, 1984.

박도원, 《노기남 대주교》, 한국교회사연구소, 1985.

윤선자, 〈1940년대 전시체제와 제주도 천주교회〉,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5, 2005.

인천교구사편찬위원회 편, 《인천교구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제민일보 4 · 3취재반, 《4 · 3은 말한다》 2, 1994.

제주4 · 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제주4 · 3사건자료집[미국자료편]》, 2003.

- - - - - - - - - - - - - - - - - -  -, 《제주4 · 3사건진상조사보고서》, 2003.

천주교 제주교구, 《제주 천주교회 100년사》, 2001.

최선혜, 〈서양 선교사의 한국전쟁 예견 - 외방선교회 관련 문서에 대한 소개를 중심으로〉, 《교회사연구》 23, 한국교회사연구소, 2004.

- - -, 〈냉전시대 캐롤 몬시뇰의 구호 활동과 그 의의〉, 《교회사연구》 34, 한국교회사연구소, 2010.

한용환 · 서상요 편저, 《복음의 증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72.

현임종, 《속(續) 보고 듣고 느낀 대로》, 대동출판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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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고의 제목인 ‘제주 4 · 3 사건’ 명칭은 2003년 확정된 정부의 《제주4 · 3사건진상조사보고서》와 현행 중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 준해서 쓰고자 한다. 줄여서 4 · 3 사건으로 통칭한다. 단, 4 · 3 사건의 기간이 1947년 3 · 1 사건으로부터 1948년 무장봉기를 거쳐서 무력 충돌과 토벌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이 희생되고 사태가 진정된 1954년까지 장시간에 달하고 사건의 성격이 복합적이기 때문에, 시기 상황에 따라 ‘봉기, 사태’ 등의 용어를 적절하게 쓰게 될 것이다.

 

2) 불교계의 피해 실태에 대한 조사 결과로는 다음의 글이 참고된다. 한금순, 〈한국전쟁 시기 제주도 불교계의 피해 현황과 분석〉, 《한국전쟁과 불교문화재》 II(제주도편), 2004, 121∼139쪽 ; 한금실, 〈이세진의 제주불교혁신운동 연구〉, 제주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석사학위 논문, 2006.

 

3) 한국교회사연구소의 최승룡 신부가 자료 열람에 많은 도움을 주셨다. 이 자료를 활용한 최선혜의 다음 두 편의 글도 참고되었다. 최선혜, 〈서양 선교사의 한국전쟁 예견 - 외방선교회 관련 문서에 대한 소개를 중심으로〉, 《교회사연구》 23, 한국교회사연구소, 2004 ; - - -, 〈냉전시대 캐롤 몬시뇰의 구호 활동과 그 의의〉, 《교회사연구》 34, 한국교회사연구소, 2010.

 

4) 이들이 1940년대 태평양 전쟁 시기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형무소에 수감된 경위에 대해서는 다음 글이 참고된다. 《경향잡지》 1946년 9월 1일자 ; 윤선자, 〈1940년대 전시체제와 제주도 천주교회〉,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5, 2005.

 

5) 《경향잡지》 1946년 10월 1일자.

6) 헨리 신부가 마리난 총장에게 보낸 편지(1947. 11. 29).

7) 〈내가 걸어온 길〉, 《제남신문》 1973년 10월 1일자.

8) New York Herald Tribune, 30 April 1948, Series A1838, Item 506/1, National Archives of Australia.

9) 고창무, 〈한라산은 고발한다〉, 《조선일보》 1960년 7월 17일자.

10) 위와 같음.

11) 제민일보 4 · 3취재반, 《4 · 3은 말한다》 2, 1994, 310∼311쪽.

 

12) 제주4 · 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주한미육군 군정청 제주도 제59군정중대 및 분견대 제주도 파견대(Cheju-Do Task Force) 주간일지〉(1948년 7월), 《제주4 · 3사건 자료집 9[미국자료편 ③]》, 83쪽.

 

13) 헨리 신부가 마리난 총장에게 보낸 편지(1947. 11. 29).

14) 헨리 신부가 마리난 총장에게 보낸 편지(1948. 3. 30).

15) 헨리 신부가 마리난 총장에게 보낸 편지(1948. 5. 21).

16) 헨리 신부가 마리난 총장에게 보낸 편지(1948. 8. 1).

17) 마리난 총장이 헨리 신부에게 보낸 편지(1948. 9. 3).

 

18) 제주4 · 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주한미사절단 참사관 에버레트 드럼라이트가 주한미군 사령관 로버츠에게 보낸 공문서(1949. 3. 10)에 첨부된 서한〉, 《제주4 · 3사건자료집 11[미국자료편 ⑤]》, 67∼68쪽 ; 《뉴욕타임즈》 1949. 3. 15 ; 《독립신문》 1949. 3. 16 ; 《자유신문》 1949. 3. 16.

 

19) 박도원, 《노기남 대주교》, 한국교회사연구소, 1985, 331쪽.

 

20) 제주4 · 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주한미육군 제6보병사단 제주도 주둔 제9연대 일일보고〉(1948. 8. 22), 《제주4 · 3사건자료집 8[미국자료편 ②]》, 68쪽.

 

21) 변창호(1931년생, 서귀포시 서홍동 거주)의 증언(2002. 4. 12 채록).

 

22) 서귀포 성당은 1937년 8월 15일 서홍리에서 서귀리로 옮겼으나, 일제 말기 라이언 신부의 수형 생활로 인해 본당으로서 기능을 잃어버렸다. 1947년 10월 라이언 신부가 다시 부임할 때 서귀포 성당은 예전 서홍리 터를 활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4 · 3 사건 당시 서홍리에 있던 서귀포 성당 신자 강순옥(루시아)의 증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23) 《제주신보》 1947년 4월 4일자 ; 〈내가 걸어온 길〉, 《제남신문》 1947년 3월 14일자. 강성건은 1941년 세 명의 신부들이 일제 당국에 검거된 사건에 함께 연루되어 광주형무소에서 1년 10개월간 복역하는 등 서귀포 천주교회의 지도급 신도로서 활동했지만, 4 · 3 사건 당시 그의 사회적 활동이 교회의 입장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24) 〈내가 걸어온 길〉, 《제남신문》 1973년 10월 4일자.

25) 제민일보 4 · 3취재반, 《4 · 3은 말한다》 4, 1997, 224∼226쪽.

26) 강용삼 · 이경수 편저, 《대하실록 제주백년》, 1984, 695쪽.

27) 이기형의 증언, 〈일본 패망을 읽은 청년 비밀조직 백록회〉, 《제주도의 4월 3일은》 3, 제주자유수호협의회, 2011, 209∼210쪽.

28) 현임종, 《속(續) 보고 듣고 느낀 대로》, 대동출판사, 2013, 75∼76쪽.

29) 제주4 · 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제주4 · 3사건진상조사보고서》, 2003, 436∼438쪽.

30) 하두용(1927년생, 4 · 3 사건 당시 공무원, 2001. 6. 28 채록).

31) 한용환 · 서상요 편저, 《복음의 증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72, 152쪽

 

32) 제주4 · 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주한미대사 무초가 미국 국무장관에게 보낸 항공우편〉(1949. 4. 22), 《제주4 · 3사건자료집 11[미국자료편 ⑤]》, 90쪽.

 

33) ‘전국가톨릭복지협의회’는 1917년 미국 천주교회가 교육 사업과 사회사업, 이민 사업을 전개하고자 설립한 단체로, 처음에는 ‘미국 가톨릭전쟁평의회’라 불리었다. 1919년 공식 단체로 승인받았으며, 1922년에 ‘전국가톨릭복지협의회’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이 협의회에서는 필요에 따라 위원회를 두는데, ‘가톨릭구제위원회’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3년 전쟁 포로와 난민 및 빈민들을 돕기 위해 조직되었다. 우리나라에 구제위원회가 들어온 것은 1946년이었고, 1952년에는 외원법(外援法)에 의거하여 외국 원조 단체로 보사부에 등록되었다. 인천교구사 편찬위원회 편, 《인천교구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74∼175쪽.

 

34) 《가톨릭신보》 132, 1953년 9월 10일. 《가톨릭신보》는 《가톨릭신문》의 전신으로, 1953년 3월 7일(제122호)부터 1954년 1월 15일(제137호)까지 사용된 제호임.

 

35) 《가톨릭시보》 206, 1959년 11월 8일.

36) 메리놀 선교회 보고서(1952. 9. 3).

 

[교회사 연구 제46집, 2015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박찬식(제주대학교 평화연구소 특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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