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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포트 아서 항구의 하느님의 어머니 이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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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8-11 ㅣ No.1567

[은총의 성모] 포트 아서 항구의 ‘하느님의 어머니’ 이콘

 

 

포트 아서(Port Arthur, 러시아어로는 Порт-Артур(포르트-아르투르))는 중국의 여순(旅順  Lushun - 현재는 중국 다렌의 일부)에 있던 항구로 이런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19세기 이곳에 정박했던 영국 군함의 함장이름에서 유래 했다. 이 항구는 만주의 랴오둥(요동)반도 끝머리에 위치해 있으며, 주변의 고지가 보호하는 후미진 만(灣)이 있어 천연의 항구 입지를 갖추었으며, 황해와 보하이(발해)만을 감시,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 일찍부터 전략적 요충지로서 그 가치를 주목받았다.

 

1903년 12월11일 러일 전쟁 발발을 두 달여 앞두고 우크라이나 키예프의 페체르스크 수도원 동굴을 베사라비아의 늙은 선원 pogovet가 방문했는데 그는 빛나는 은으로 된 성 제오르지오(조지)가 새겨진 십자 훈장을 가슴에 달고 있었다. 그는 세바스토폴에서 있었던 전투에서 적의 총알에 맞아 심각하게 부상을 당했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수도원을 방문하여 지하 동굴 성인들의 유해를 참배 하였다.

 

그날 밤, 이 늙은 선원은 강한 바람 같은 이상한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하느님의 어머니께서 대천사 미카엘과 가브리엘이 이끄는 천사들에 둘러싸여 계신 모습을 보았다. 바다를 배경으로 하느님의 지극히 거룩한 어머니께서는 구세주의 얼굴이 그려진 보라색 테두리를 두른 직사각형의 천을 들고 계셨다. 하느님의 어머니는 파란색 옷을 입고 계셨고, 겉옷은 갈색이었다. 그녀의 양발은 모두 드러나 있었는데, 숫돌에 갈은 듯 날카롭게 날이 선 두 개의 칼을 밟고 계셨다. 그리고 그 뒤로는 안개 속에서 만의 기슭에 불타오르는 도시가 보였다. 그리고 성모님 머리 위로 구름 속에서 눈부신 광채 속에 천사들이 왕관을 들고 있었다. 그 왕관의 십자가 위로는 무지개가 떠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는 만군의 주 하느님께서 눈부신 광채에 둘러싸여 앉아 계셨다.

 

 

늙은 선원이 본 환시를 정확하게 묘사한 이콘 제작

 

하느님의 거룩한 어머니께서는 러시아가 이윽고 전쟁을 시작하여 커다란 손실과 시험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그에게 말했다. 그리고 하느님의 어머니께서는 이 모든 광경을 보고 두려움에 떠는 선원을 안심시키며 지금 그가 본 환시대로 정확하게 묘사한 이콘을 만들어 포트 아서로 보내 도시의 벽에 내 이콘을 세운다면, 러시아가 승리하도록 돕고 보호할 것이라고 말씀 하셨다. 잠시 후 흰색의 아름다운 빛이 노인을 밝게 비추고 그 환시는 사라졌다. 노인은 즉시 자신이 머물던 수도원의 사람들에게 자신이 본 환시를 전했고, 그 내용은 한 달도 안 되어 키예프뿐만 아니라 러시아 전역에 퍼져 나갔다.

 

그리고 이 환시대로 성화를 만들기 위한 금액을 봉헌하려는 많은 기증자가 몰려들어 교회는 급히 특별위원회를 설립해서 한 사람이 정확히 5센트씩만 내도록 하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받지 않았다. 그리고 봉헌된 금액이 1만 루블이 되자 모금을 중단 하고, 이콘을 제작할 예술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래서 당시 키예프에서 유명한 화가인 PF. Shtronde에게 제작을 위탁하기로 결정했다.

 

그 예술가는 기꺼이 그 일을 맡겠다고 동의하였고, 모금된 금액은 오직 재료 구입에만 쓰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콘은 그날 밤의 현시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던 노인의 증언을 들으며 약 4주간에 걸쳐 제작되었다. 때로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때는 노인이 조용히 자신의 옹이가 박힌 거친 손가락으로 직접 그리기도 했는데, 그림을 그려본 적도 없던 그 선원이 갑자기 전문적인 솜씨로 아주 쉽게 이미지를 그리는 것에 화가와 주변 사람들은 무척 놀랐다. 1904년 여름 모든 작업을 마치고 이 이콘은 극동에 보내졌다.

 

황후 마리아 페오도로브나로부터 이 이콘을 전달하라는 명령을 받은 부 제독은 8월 초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서 잠시 이 이콘을 블라디보스토크 대성당에 보관하도록 했다. 8월2일 블라디보스토크의 주교 유세비우스는 ‘하느님의 거룩한 어머니의 승리’라 불리게 된 이 이콘을 포트 아서로 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콘은 전달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배로 안전하게 이콘을 실어 나를 수가 없어서였다. 즉 1904년 2월8일 포트 아서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 군함을 일본군이 공격함으로써 러일 전쟁이 시작되어 포트 아서는 포위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콘은 포트 아서에 전달되지 못했고 전쟁에 패배해

 

그러나 성모님의 뜻대로 성화를 보내려는 시도는 계속되었다. 이 이콘을 사진으로 찍어 여러 장의 사본을 만들기도 했고, 블라디보스토크의 한 화가가 나무판에 유성 페인트로 크기를 줄여서 그린 또 다른 사본도 만들어졌다. 10월이 되어 임시로 이들 이콘의 몇 사본을 우편으로 치푸 러시아 영사관으로 보냈다. 그러나 심한 폭풍우에 배는 블라디보스토크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다시금 이 이콘을 포트 아서에 전달하는 일을 50세의 니콜라이 페도로프라는 은퇴한 선장이 맡았다. 그는 1877년에서 1878년 사이의 러시아와 터키간 전쟁에서 여왕 폐하의 라이프 가드 창기병 연대의 선장이었다. 그는 신문을 통해 이 이콘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고, 포트 아서에 이콘을 전달하는 어렵고 위험한 모험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의 고백사제 크론슈타트의 요한의 축복을 받고, 10월 초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 1904년 11월7일,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톡의 대성당에서는 11월21일 복되신 동정녀의 성전봉헌축일 전례 후 ‘하느님의 거룩한 어머니의 승리’의 이콘 앞에서 많은 신자들과 함께 장엄하게 감사가를 불렀다. 예식을 마친 후, 이콘은 특별히 준비된 케이스에 담아 노르웨이 증기선으로 보냈다. 그러나 이 또한 전달되지 못했다.

 

당시 그 이콘이 포트 아서 요새에 전달됐다면, 모든 사람들이 믿었던 대로 포트 아서가 그렇게 빨리 항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비록 성모님의 약속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콘은 계속 복사본이 만들어지고 공경을 받았다. 그 후 러시아 혁명 등의 혼란 속에 90년 동안 이 이콘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그러다 1998년 예루살렘을 방문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온 순례자중 한 사람이 우연히 골동품 가게에 있는 이 이콘을 보았다. 전문가들의 검증을 거쳐 그것이 바로 그 동일한 이콘임을 확인한 후 러시아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렇게 이 이콘의 원화는 다시금 발견되어 블라디보스토크 보호의 성모 성당에 모셔져 있다. 포트 아서의 성모성화축일은 8월16일에 지낸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6년 8월호, 장긍선 예로니모 신부(서울대교구 이콘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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