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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원산에서 대구로 온 수녀아줌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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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2-27 ㅣ No.493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원산에서 대구로 온 수녀아줌마들


“누구의 아내도 아니면서, 누구의 엄마도 아니면서, 사랑하는 일에 목숨을 건 여인”이라고 이해인 수녀는 자신의 시(詩)에서 ‘수녀’를 노래했다. 여성들은 결혼하지 않아도 나이가 들면 지나가는 길에 ‘아줌마’라고 불려서 놀라기도 하고 속상해 하기도 한다. 그러나 평생 아줌마라고 불릴 일이 없는 사람들이 수녀들이다. 물론 나이가 아주 많이 들면 ‘할머니 수녀님’이라 하기는 한다. 그러나 아줌마는 아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사에서 수녀들을 아줌마로 부르며 수도복을 벗게 하고, 결혼하라고 내몰던 일이 있었다. 그 황당한 사건을 극복해 나오는 과정은 바로 우리 ‘천주교 공동체의 살아 움직임’을 드러낸다. 이는 믿음이 일구어준 연대감의 장엄함을 현대사회에 증거하기 위해 벌어진 일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대구교구가 그 ‘천주교 공동체’로서 일정 역할을 했음을 우리는 뿌듯하게 기억한다.

대구대교구는 6.25전쟁 동안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공산군의 남침으로 갑자기 기반을 잃은 피난민들이 남쪽으로 피난을 오게 되었다. 당시 서울교구가 부산으로 피난을 할 정도였으니, 대구는 이러한 피난민들을 받아들이고, 또 신앙이 흔들리지 않도록 뒷받침하는데 큰 몫을 해냈다. 전쟁 이후에도 외국으로부터 원활한 협조를 얻어내면서 사회적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앞장섰다. 이때부터 교구는 여러 수도회를 받아들여 교회 일을 나누어 했다.

전쟁이 한창일 때, 최덕홍 주교는 부산에 피난해 있던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를 대구로 초청했다. 그들은 1951년 10월 23일 주교관내에 임시 마련된 집에 도착했다. 이들이 자리잡은 곳은 이후에 남산동 성당의 사제관 겸 식관으로 쓰일 방 두 칸짜리 한옥이었다. 이들은 죽음을 넘어 부산에 와서 정착한 참이었다. 17명의 수녀가 아줌마 행색으로 길을 떠나 따로따로 남한에 와서 모였다.

우리나라에서 베네딕도 수녀원은 식민지시대인 1925년 북한 지역 원산에서 시작되었다. 그 어려운 시절 학교와 병원을 짓고, 신고산, 회령, 함흥, 청진, 흥남에 분원을 세우며 예쁜 성당과 수도원을 오갔다. 그러나 1944년경부터 학교와 유치원 등 교회시설들이 일본군에게 점거당했다. 해방 후에는 이 건물들이 소련군 장교 숙소와 교육관으로 둔갑했으며, 그들은 물건도 앗아갔다. 이어 들어선 공산정권은 1949년 5월 수도원을 폐쇄했다. 그들은 독일 수도자들을 평북 강계군 전천 옥사덕이라는 곳으로 집단 수용했다. 이들은 5년간 강제노동을 하다가 휴전 후 1954년 1월에 독일로 송환되었다. 69명의 독일인 수도자 중 19명이 사망하고 6명은 행방불명되어 44명만이 귀환할 수 있었다.

한편, 한국인 수도자들은 얼마동안 감화소에 갇혀 심문을 받았다. 그 후 그들은 “신복(神服, 수도복)을 벗으시오.”라는 한 마디로 수도복을 벗겼다. 그리고는 “아줌마들은 집에 가서 결혼해서 살라.”고 하며 해산시켜 각각 고향으로 보냈다. 어디를 가든 숙박계를 내야 했고, 또 어디든 내무서원이 따라다녀서 서로 연락도 할 수 없었다. 물론 성사를 볼 수도 없었다.

북한에서 신앙생활을 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한 수도자들은 1950년 2월부터 월남을 시작했다. 수녀들은 해산된 이후 뿔뿔이 흩어져 있고 또 한꺼번에 이동할 수가 없어서 연락이 닿는 대로 각각 떠났다. 원산에 뿌리를 내렸던 나무가 송두리째 대구로 옮겨오는 데는 참으로 오묘한 도움들이 있었다.

공산당원들이 수녀들을 고향으로 보내기 위해 정거장으로 싣고 갔을 때였다. 그들은 지나가는 차의 빈자리에 수녀들을 태워 보내려고 기다렸다. 마당 한구석에 쭈그리고 앉았던 마리아 수녀가 화장실에 갔다 오는데 한 신자 부인이 그를 알아보았다. 수녀는 빨리 돌아가라고 손짓하고 자리로 돌아왔는데, 신자 부인들이 하나 둘씩 역 울타리 밖으로 둘러섰다. 그들은 “마리아 수녀님”을 계속 불렀다. 수녀는 신자들에게 불행한 일이라도 일어날까 염려되어 못들은 척하고 돌아앉아 있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차를 기다리는 수녀를 본 부인들은 종일토록 애타게 그를 불렀다. 그러다가 짐 싣는 트럭이 들어 올 때마다 재빨리 뒤를 따라 들어왔다. 몇몇은 수녀 손을 꼭 잡고 돈을 쥐어 주었다. 또 어떤 이는 수녀가 모시 적삼을 입고 추워서 새파랗게 질려 있는 것을 보고 자기가 입었던 스웨터를 벗어 던지고 말 한 마디 없이 나갔다. 수녀 일행은 그날 차를 못타고 여관에서 하루 묵게 되었다. 수녀들끼리 모였을 때 마리아 수녀는 정거장에서 받은 돈을 부원장 박 골롬바 수녀에게 주었다. 부원장은 이를 돈 한 푼 없이 떠나는 수녀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다. 수도복을 벗었어도 신자들은 수녀들을 찾았으며, 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건넨 도움은 이처럼 모든 수녀에게 고루 미쳤다.

또한 알퐁사 수녀는 공동체가 얼마나 정신적으로 뭉쳐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 수녀는 한 교우를 통하여 서울로 오라는 전갈을 받았다. 그는 1950년 12월 5일 혼자 길을 떠났다. 북한에서 태어나 자란 그는 그저 남쪽을 향해 걸었다. 세상이 온통 눈으로 덮여 있어서 길과 물이 구분이 안 되어 물에 빠지기도 하고 가시밭에 들어가기도 했다. 인가를 발견하면 들어가 잘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날은 눈 위에서 새워야 했다. 물론 공민증도 없고, 피난길이니 드러내놓고 남쪽으로 간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는 1.4후퇴가 시작되기 바로 전날 서울에 도착했다. 아줌마가 되어 남한 경계를 넘던 그는 이번에는 이쪽에서 곤란을 당했다. 수녀라는 표시가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앞서 월남한 수녀의 이름을 대고 통과할 수 있었다. 그는 ‘우리 공동체 수녀들이 있는 곳으로 저를 데려다 주소서.’라는 기도만 했다고 한다.

물론, 이들이 이곳까지 오는 데는 당시 지역사회에서 쌓은 덕도 작용했다. 알퐁사 수녀는 서울에 도착했으나 갈 곳이 없었다. 그때 길에서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원산수녀원에 들어갔다가 건강이 나빠 퇴회한 이였다. 그의 도움으로 명동성당을 찾았다. 그러나 베네딕도회 수녀들은 이미 부산으로 떠난 뒤였다. 그는 또 부산으로 갔다. 부산에서는 수녀들을 만나면 주려고 지녔던 밀가루를 빵으로 바꾸러 들어갔다가 함경도 출신 신자를 만났다. 그의 도움으로 동료 수녀들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수녀회가 함경도 지역에서 쌓았던 덕이 끈이 되었다.

수도공동체 의식, 신자들의 도움, 자신들이 쌓은 덕업에 힘입어 계획도 없고 기약도 없던 한국인 수녀들이 부산에 다시 모일 수 있었다. 흥남철수 때 미군 함선으로 내려온 수녀가 8명, 개인적으로 남하한 2명의 수녀, 평양을 거쳐 내려온 5명의 수녀 등 모두 15명이 부산에 모였다. 이때 알퐁사 수녀가 도착했고, 다른 한 명은 1952년 대구로 도착했다. 그들 십여 명은 부산 중앙성당의 방 한 칸을 얻었으나 함께 생활할 수 없어 교대로 출근하는 일거리를 찾아 나서야 했다. 수녀들은 군인들의 삯빨래, 부상병 치료 등으로 생활을 꾸려나갔다.

낯선 땅에서 그들에게는 다시 ‘천주교 공동체’의 손길이 뻗쳤다. 대구교구 최덕홍 주교가 임시거처를 마련해 놓고 이들을 초청했다. 그리하여 수녀들은 1951년 10월 23일, 대구 주교관내로 옮겨 왔다. 이보다 앞서 광주지목구장 서리인 골롬반회 현 하롤드 주교의 초청으로 7명의 수녀들이 동료들에게 공간도 내주고 빈한한 살림을 덜 겸 광주 남동과 북동 성당에서 전교를 시작했다. 또 전쟁 당시 미군 군종사제였던 베네딕도회의 제럴드 맥카아티 신부는 남녀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겪고 있는 어려운 상황들을 널리 전하며 그들을 도왔다.

수녀들은 남북통일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자 대구에 새 터전을 마련하고 후배를 양성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디모테오 몬시뇰이 대구 공평동(현 삼덕동 성당 지역)에 100여 평 되는 집을 구입하도록 도와주었다. 수녀들은 1952년 10월 2년여의 피란에서 ‘내 집’으로 이사함으로써 남한의 첫 분원을 창설했다.

자신들 생활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수녀들은 이듬해 봄 공평동 분원 안에 조그마한 무료 시약소 ‘성 안토니오 의원’을 시작했다. 4월에는 삼덕유치원을 개원했다. 그리고 지원자들을 받아들여, 1955년 3명이 입회했다. 그러면서 공평동 수녀원은 좁아서 향후 정착할 곳을 물색해야 했다. 그리하여 1956년 대구시 신암동에 두 번째 분원을 설립했는데 이는 곧 본원으로 승격되었다. 수녀회는 동시에 분원 경내에 ‘파티마의원’을 개원했다. 이것이 ‘파티마병원’의 시작이다. 파티마의원이 자리 잡으면서 무료시약소는 폐쇄되었다.(1962) 이 사이, 북한에서 본국으로 송환되었다가 건강이 회복된 독일 선교사들이 남한 대구의 새 본원으로 합류해 왔다.

수녀들은 원산의 본원이 해체된 후 약 5년 동안 참담한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신앙과 공동체 의식, 그리고 자신들이 북한에서 쌓았던 공덕, 그 외 타 수녀원 등 천주교 공동체의 도움으로 새로운 땅에 다시 정착할 수 있었다. 1951년 대구 남산동 주교관은 그들이 발돋움을 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그들은 원산 본원이 폐쇄되던 당시보다 몇 배의 활동을 하고 있다. 시련을 극복해온 선배 수녀들은 수도공동체에 굳건한 버팀목이 되어주었고, 우리에게는 살아 있는 신앙공동체를 증거해 주었다.

천주교 신자가 된다는 사실은 긴 역사를 통하여 이미 앞서 있었던 사람들과 현재 전 세계에 퍼져있는 신자들,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많은 신자들과 하나 되는 문에 들어서는 일이다. 이를 원산에서 온 수녀아줌마들이 다시 보여 주고 있다.(*도움 : 이 베로니카 수녀, 이 루피나 수녀)

* 김정숙 교수는 영남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관덕정순교기념관 운영위원, 교구 100년사 편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월간빛, 2012년 2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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