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7일 (금)
(백) 부활 제7주간 금요일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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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 아! 어쩌나: 말하기가 겁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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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0-29 ㅣ No.659

[홍성남 신부의 아! 어쩌나] (240) 말하기가 겁나요

 

 

Q. 요즘 신문이나 인터넷을 보면 말하기가 겁이 납니다. 글을 잘못 올리거나 말실수를 하면 사방에서 성토하는 글들이 덤벼들고 심지어는 인격모욕 차원을 넘어 아예 사람의 인생을 말 그대로 작살 내는 것을 보면서 저 같이 소심한 사람은 그저 겁만 납니다. 자살하는 연예인들 심정이 이해도 되고요. 소치올림픽 중에 일어난 여러 가지 일들을 보면서도 마음이 착잡하기만 합니다. 왜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렇게 마음이 급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적개심을 드러내는 것일까요? 그리고 이런 병적인 현상을 멈추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A. 형제님 말씀에 공감하는 바가 많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말 속에 한이 품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소위 삼류언론사들이 퍼뜨리는 말들을 닮아가는 병적 현상이 점점 우리 사회를 오염시키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대개 다른 사람들에 대해 심한 말을 하는 사람들은 정서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정신적으로 우울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 극단적 평가를 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분법적으로 사람들이나 상황에 대해 판단하는 것입니다. 흑과 백, 내 편 네 편, 아군과 적군 이런 식으로 무엇이든 갈라 세워놓고 마치 인민재판 마녀재판을 하듯이 사람들에 대해 무차별적 인신공격을 서슴지 않습니다. 

 

이런 현상을 두고 나라에 어른이 없어서 그렇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나라 국민정서가 우울증 모드로 접어들어서 그런 것입니다. 윤리적 차원의 문제라기보다 심리치료적 차원의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 국민들이 이런 병적인 상황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일까? 심리학자들이 관찰한 결과, 사람은 감옥 같은 상황 속에서 오랫동안 살다보면 심리적으로 잔인해져 무리 가운데에서 약한 자를 골라서 공격을 하는 성향이 있다고 합니다. 소위 무리의 공격성을 해소할 희생양을 찾는 병적 습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국민들은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지금 상황이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과 무력감에 시달리면서 국민 정서가 우울 모드로 접어든 지 오래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사는 형편이 달라지지 않으니 몸은 자유로우나 정신은 이미 감옥 안의 죄수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에게도 정신적 폭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런 사회적 병리현상을 위정자들이 나서서 치유해야 하는데 때로는 위정자들이 더 상황을 악화시키기도 합니다. 왜 그런가? 오래 전부터 위정자 중에서 정치적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자신에게 쏟아질 비난을 피하려고 외부에서 희생양을 찾는 변칙적인 방법을 비일비재하게 사용해 왔기 때문입니다. 가톨릭교회 안에서 일어난 마녀재판이나 공산혁명 중에 일어난 인민재판, 2차 세계대전 당시 고지식하기로 소문난 독일 국민이 히틀러의 연설에 넘어가서 유다인 학살에 동의한 것 등이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합니다. 주님 역시 그런 의미에서 희생양이 되신 것이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이런 현상들을 고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답은 미사기도문에 나와 있습니다. ‘내 탓이요’를 해야 합니다. ‘내 탓이요’란 무조건 내 탓으로 여기란 말이 아니라 왜 내가 다른 사람의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자신의 문제를 보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나와는 무관한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분노하고 심지어 적개심을 드러내는 것은 반동 형성 즉 상대방에 대한 부러움이 지나쳐 시기 질투심으로 반대감정을 드러내는 경우나 또는 자신의 열등감을 해소하려는 수단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정도를 넘은 비판과 비난을 서슴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감정표현 정도가 상식선을 넘어선 경우에는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좋은 치유책은 선행을 하는 습관이 사회적으로 확산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선행을 베푸는 것은 동시에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서로를 위해주는 행위는 서로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줄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장벽을 없애주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늘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고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비난은 적을 만들고 선행은 나의 사람을 만든다는 가장 간단한 법칙이 지켜졌으면 하는 아쉬운 시대입니다.

 

※ 상담을 원하시면 010-5032-7422로 ‘문자’를 보내주세요.

 

[평화신문, 2014년 3월 16일, 홍성남 신부(가톨릭영성심리상담소장, 상담전화 02-727-2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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