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 (토)
(백)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성극ㅣ영화ㅣ예술

도서칼럼: 도서 우정일기 - 서울 한복판의 신비가를 그리며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9-18 ㅣ No.93

[도서칼럼] 도서 ‘우정일기’


서울 한복판의 신비가를 그리며

 

 

“미래의 그리스도인은 신비가가 되거나, 아니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20세기 신학자 칼 라너는 또 말합니다. “일상을 살아가며 신비와 만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하느님 체험의 본질이며, 이것 없이 외적인 제도와 형식, ‘소시민적인’ 자기만족의 방편으로서의 종교 생활만이 남을 때 그것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아니다.” 라너가 말하듯, 일상과 신비, 기도와 삶,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통합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과제이며, 이는 결국 신비가로 초대되었음을 뜻합니다.

 

‘신비가’란 말을 들으면 흔히 오상(五傷)의 비오 신부나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처럼 특별하게 하느님의 신비를 직접 체험한 사람들을 떠올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세상 한복판에 살면서 하느님과 우정을 나누고 그 우정으로 사람들을 초대한 ‘신비가’도 많습니다. 에지드 반 브루크호벤(1933-1967)도 그런 사람입니다.

 

에지드는 벨기에 출신으로 브뤼셀의 공장에 들어가 노동 사제로 살다가 34살에 산업재해로 생을 마감한 예수회원입니다. 그는 10대에 하느님과 친밀함에 빠져들어 예수회원이 되고 한때는 봉쇄수도회인 카르투시오회로 이적도 고려했지만, 한 걸음씩 한 걸음씩 하느님과 나누는 우정에 응답해 가며 노동 사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내면 여정을 담은 일기를 꾸준히 썼는데 그의 사후에 《우정일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일기에서 그는 말합니다. “사랑을 감당할 힘이 없는 자는 법 안으로 피신한다.”(1959/9/27) “사도직이란 가장 깊은 우정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 우정은 이런 하느님 나라 사랑의 메신저이다.”(1960/1/23) 친분이 생기자, 아랍 출신의 15살 소년 노동자는 그에게 말했답니다. “담배 필요하면 얘기해요. … 나 아저씨 집에 … 살고 싶다.”(1967/9/12) 그는 점차 그가 살던 브뤼셀을 ‘불타는 떨기나무’와 비교합니다. “혹시 내가 불타는 떨기나무와 브뤼셀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단연코 브뤼셀을 택할 것입니다.”(1966/3/13) 브뤼셀은 하느님 현존으로 불타는 떨기나무이다.”(1967/8/10) 신비가의 말입니다.

 

1960년대 교회는 변화의 시기였습니다. 무엇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중요한 사건이었고, 그 전후로 수에넨스 추기경 같은 지도자, 샤르댕이나 콩가르, 라너 같은 신학자, 또는 예수회의 개혁을 이끌었던 아루페 신부 등 여러 거장이 교회의 쇄신을 위해 애쓰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하느님은 에지드와 깊이 사귀고 있었고, 이 청년은 브뤼셀 한구석 공장에서 무슬림, (이주) 노동자들과 우정을 맺고 있었습니다. 마치 제국의 중심 로마에서 정치와 문화와 군사의 중요한 일들이 전개되고 있을 때 변방 갈릴래아에서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느님과 제자들과 친밀하게 우정을 나누셨던 것처럼!

 

지금도 그럴 것입니다. 뿌연 하늘 아래 약삭빠른 사람들이 숨 가쁘게 살아가고, 피상적으로 ‘매일의 틀에 박힌 시시한 삶’을 살기 쉬운 바로 이 서울 한복판에서, 하느님은 불타는 떨기나무를 보여주며 젊은 영혼과 친밀한 우정을 나누고 계실 것입니다.

 

[2023년 9월 17일(가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서울주보 5면, 김우선 데니스 신부(예수회, 서강대학교 교수)]



52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