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일)
(백) 부활 제5주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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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사목] 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사랑의 다양한 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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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6-06 ㅣ No.1334

[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사랑의 다양한 변주

 

 

사랑은 용서하는 일입니다

 

사랑은 세상의 모든 것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만큼 그 사용 범위가 넓은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숱한 행위들을 합니다. 사랑이라는 말로 수식하지 못할 단어도 없습니다. 모든 것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수식할 때도 사랑이라는 단어가 어쩌면 가장 잘 어울립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 사실, 하느님을 서술하는 숱한 단어와 문장이 있지만, 요한 서간의 이 서술만큼 하느님에 대해 잘 설명하는 구절은 없는 것 같습니다. 세상 모든 것들은 하느님께 속합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니, 세상 모든 것들은 사랑과 결부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용서입니다. 사랑하는 일과 용서하는 일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약점과 부족함을 이해하고 그의 잘못도 용서하려고 노력하는 일입니다(‘사랑의 기쁨’ 105항 참조). 이처럼 사랑은 상대방에 대해 긍정적인 자세와 태도를 지니는 일입니다. 하지만 사랑의 초기에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포용하며 사랑하며 살 것 같았는데,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랑은 자주 무관심과 때때로 싫음과 분노의 모습으로 변해간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사랑의 여정에서도 상처들은 발생합니다. 사랑의 상처는 자기 자신을 힘들게 하고 상대방에 대한 미움과 증오를 낳기도 합니다. 때때로 상대방의 잘못 때문에 “우리 마음 안에 분노가 자리 잡을” 수도 있고, “앙갚음하려는 마음이 매우 깊어”질 수도 있고, 더 나아가 “복수에 대한 집요한 갈증”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105항).

 

상처와 질곡의 과정을 갖지 않는 사랑은 없습니다. 사랑의 여정은 저마다의 아픔과 힘듦을 포함합니다. 이러한 여정에서 진정한 사랑은 용서라는 행위를 통해 가장 잘 표현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용서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상대방에게] 모욕당하거나 실망하였을 때에도, 용서는 가능하고 바람직합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것이 쉽다고 말하지 않습니다.”(105항) 어느 철학자는 용서의 불가능성을 말했습니다. 용서할 수 있는 것을 용서하는 것은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진정한 용서는 이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일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을 통해 우리는 용서에 대한 다양한 시선과 그 불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용서가 그만큼 힘들다는 뜻입니다.

 

진정한 용서는 단순한 화해를 넘어서 있습니다. 상대방의 어떤 잘못된 행위에 대해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일은 용서라기보다는 화해입니다. “화해는 상호 이해라는 조건과 결합된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용서는 무조건적이며, 따라서 모든 합리성, 모든 이해 가능성의 저 너머에서 일어난다. 무조건적 용서는 이성을 거역한다. 최악의 범죄마저 용서하며 더불어 피해자의 참회조차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스베나 플라스푈러, ‘조금 불편한 용서’) 진정한 용서는 무조건적 ‘증여’이며 ‘선물’입니다.

 

진정한 용서는 오직 주님에게만 가능한 일입니다. 주님만이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진정으로 용서하십니다. 사람인 우리는 용서의 주체라기보다는 용서의 대상입니다. 용서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용서를 청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살펴보면 우리는 용서해야 할 일보다 용서를 청해야 할 일이 더 많을 것입니다. 사람인 우리가 감히 누구를 용서한다는 말입니까. 용서는 오직 주님의 몫입니다. 그저 우리는 주님의 용서에 참여함으로써 타자를 용서할 수 있는 작은 힘을 얻을 뿐입니다. 오직 “우리 자신이 하느님께 용서받았고 우리의 공로가 아닌 하느님의 은총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체험”(108항)만이 우리를 용서의 가능성으로 초대합니다. 즉, 우리가 주님의 용서와 사랑을 체험하고 기억한다면 우리는 타자를 향한 용서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 우리가 “다른 이를 용서할 수 있으려면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용서함으로써 자유로워지는 체험이 필요합니다”(107항). 자신을 이해하고 용서한다는 것은 단순히 자기변명, 자기 합리화, 무책임함을 뜻하지 않습니다. 자기반성과 자기 성찰 없이 거짓 위안으로 도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용서하는 일은 자기 잘못과 약점과 한계를 고백하고 인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자신을 진정으로 용서하는 일이 중요한 이유는, 자신을 용서하고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타자를 용서하고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용서를 체험하고 기억하는 사람만이, 자신을 진정으로 용서할 줄 아는 사람만이 타자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이해하는 일이며, 망각하는 일이며, 사랑하는 일입니다. 우리들의 용서는 주로 이해하고 잊는 것에 머뭅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힘듭니다. 잘못한 누군가를, 잘못된 그 행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합니다. 자신에게 상처가 된 사건과 사람을 잊는 일 역시 힘듭니다. 어쩌면 우리가 고작 할 수 있는 일은 잊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나의 용서는 너를 잊는 것”이라고 조용필은 ‘Q’에서 노래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용서는 잊고 이해하려는 노력뿐입니다. 사랑으로서의 용서는 주님만이 온전히 가능할 것입니다. 끊임없이 사랑의 용서로 나아가는 여정이 참 신앙의 길일 것입니다.

 

 

사랑은 함께 기뻐하는 일입니다

 

슬픔을 함께하기는 쉬워도 기쁨을 함께하기란 어렵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아픔과 고통에 연민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동정과 연민은 우리 인간의 소중한 정서와 감정입니다. 하지만 동정과 연민 안에는 때때로 무의식적 우월감과 안도감이 포함되기도 합니다. 실패와 좌절, 고통과 슬픔 속에서 힘들어하는 타자에게 위로와 위안을 건넨다는 시혜적 마음과 태도가 무의식적으로 배어있을 수 있습니다. 또 나의 실패와 좌절, 나의 고통과 슬픔이 아니라는 무의식적 안도감이 내포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뿌리 깊고 본능적인 이 무의식적 이기심에서 벗어날 때만이 참다운 연대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은 끝없는 경쟁과 인정투쟁의 장(場)입니다. 영화 ‘더 와이프’는 남편과 아내 사이에도 성취와 인정을 둘러싼 갈등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우리에게는 “늘 자기 자신을 남과, 심지어 자신의 배우자와 비교하며 경쟁하고, 더 나아가 다른 이의 실패에 남몰래 기뻐하는”(109항) 성향이 존재합니다. 타인의 슬픔에 공감하고 연대하기는 쉽지만, 타인의 기쁨에 동참하고 연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슬픔의 연대보다 기쁨의 연대가 그만큼 더 소중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은 무엇보다 함께 기뻐할 줄 아는 일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특히 다른 이의 행복에서 기쁨을 발견하는 이들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우리가 다른 이의 행복에 기뻐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우리 자신에게 필요한 것에만 집중한다면 기쁨이 없는 삶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110항) 사랑은 함께 슬퍼할 줄 아는 일이며 무엇보다 함께 기뻐할 줄 아는 일입니다. 기쁨을 진정으로 나눌 수 있을 때 사랑은 완성을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처음 당신을 사랑할 때는 내가 무진무진 깊은 광맥 같은 것이었나 생각해봅니다. 날이 갈수록 당신 사랑이 어려워지고 어느새 나는 남해 금산 높은 곳에 와 있습니다.”(이성복, ‘편지1’)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3년 6월호, 정희완 사도요한 신부(안동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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