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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37-38: 최양업이 세상을 떠나고 152년 만에 전해진 두 통의 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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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10-03 ㅣ No.2135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37) 최양업이 세상을 떠나고 152년 만에 전해진 두 통의 서한 ①


조선교회 상황 전하며 박해 막기 위한 도움 요청

 

 

- 1857년 소리웃에서 쓴 서한에는 다블뤼 주교 서품식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 그림은 1857년 3월 다블뤼 주교 서품식 장면을 그린 이종상 화백의 작품으로 대전교구 신리성지 순교미술관에 전시돼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김대건 신부 순교 후 유일한 조선인 사제였던 최양업은 척박하고 모진 길을 마다하지 않고 걷고 또 걸었다. 한 해에 7000리가 넘는 거리를 걸었던 최양업의 사목 열정은 그의 서한에 그대로 담겨있다. 가련한 신자들의 처지에 대한 상세한 묘사뿐 아니라 국가 정세와 조선교회가 극복해야 할 문제까지. 조선의 문화에 익숙하지 않았던 서양 선교사들이 놓칠 수 있는 부분들을 최양업은 서한에 담아 세상에 알렸다.

 

고(故) 정진석(니콜라오) 추기경은 생전에 최양업 신부의 서한에 대해 “최 신부님의 편지 내용은 너무나 감동적이고 충격적이며 교훈적”이라며 “누구나 편지를 통해 영신적으로 큰 도움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한국교회 역사에서 의미를 지닌 최양업 신부의 서한. 땀으로 신앙을 증거한 최양업 신부의 흔적을 찾기 위한 교회의 노력은 새로운 서한을 찾으면서 그 결실을 맺었다. 최양업이 세상을 떠난 지 152년 만에 한국 신자들에게 전해진 두 통의 편지를 소개한다.

 

 

프랑스에서 전해진 최양업의 서한

 

2013년 최양업 신부가 쓴 서한 두 통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당시 한국교회사연구소 고문서고를 담당했던 고(故) 최승룡(테오필로) 신부가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최양업의 친필서한 두 통을 확인한 것이다. 파리외방전교회 고문서고의 중국 관련 문서철에서 찾아낸 첫 번째 서한은 1857년 10월 2일 소리웃에서, 두 번째 서한은 1859년 10월 13일 안곡에서 보낸 것이다. 수신인의 존재도 당시에 주목을 받았다. 기존 서한의 수신인이 스승인 르그레즈와 신부, 리브와 신부였던 반면 이 두 통의 서한은 베롤 주교에게 보냈기 때문이다.

 

초대 만주교구장이었던 베롤 주교는 만주, 요동, 몽고 등의 선교에 힘쓰면서도 조선의 선교를 적극 지원했다. 조선 교우들이 보낸 박해상황과 소식들을 교황청에 보고했고 메스트르, 프티니콜라, 푸르티에, 김대건, 최양업 신부 등의 입국을 도왔다. 최양업은 베롤 주교를 통해 교황청에 조선교회의 상황을 알리고자 서한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두 서한의 발견은 아직 찾지 못한 한국교회 관련 문서들이 곳곳에 남아있다는 가능성과 희망을 안겨줬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두 서한은 중국 관련 문서철에서 발견됐는데, 기존에 조선교회 관련 사료들이 분류돼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고문서고 562권과 563권, 566권 외에도 중국관계 문서철을 재검토할 필요성도 제기됐다.

 

1859년 10월 13일 안곡에서 베롤 주교에게 보낸 친필서한. 2013년 파리외방전교회 고문서고 중국 관련 문서철에서 발견됐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조선교회의 상황 베롤 주교에게 전하다

 

소리웃은 전라도 교우촌, 용인 손골, 불무골이나 오두재 인근 교우촌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최양업 신부의 1857~1858년 사목 경로 중 일부 지역으로 판단할 수 있다. 1857년 10월 20일 소리웃에서 쓴 서한에는 1856년 베르뇌 주교와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가 입국한 사실, 1857년 다블뤼 신부의 주교 서품식, 그리고 성무를 집행할 때 외교인들과 충돌한 사건 등이 담겨 있다. 이듬해 10월 3일, 오두재에 쓴 편지에서 흉년과 가난으로 민심이 흉흉하다고 밝혔던 최양업은 소리웃에서의 편지에서도 “외교인들을 포함한 모든 조선인은 프랑스 배가 와서 조선 사회를 변화시켜 줄 것을 바라고 있다”고 말하며 조정을 불신하는 당시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최양업은 1859년 10월 11일부터 13일까지, 세 통의 서한을 쓴다. 10월 11일에는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12일에는 리브와 신부에게, 13일에는 베롤 주교에게 각각 서한을 보낸다. 앞선 두 통의 서한이 교우촌과 신자들의 이야기에 집중했다면 베롤 주교에게 보낸 서한에서는 조선 조정의 상황, 박해를 막기 위해 필요한 도움을 적고 있다.

 

최양업은 조선에서 외적인 박해가 중단된 이유를 중국에 주둔한 프랑스군의 영향으로 분석함으로써 조선이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프랑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가톨릭신문, 2022년 10월 2일, 민경화 기자]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38) 최양업이 세상을 떠나고 152년 만에 전해진 두 통의 서한 ②


조선교회 신앙의 자유 위한 외부 세력 도움 호소

 

 

- 최양업이 처음 사목을 했던 차쿠성당. 만주대목구장이었던 베롤 주교와 최양업은 차쿠에서 인연을 맺었다. 사진은 중국 차쿠성당의 현재 모습. 양업교회사연구소 제공.

 

 

초대 만주교구장이었던 베롤 주교는 만주, 요동, 몽고뿐만 아니라 조선의 선교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854년 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 주교의 서품식을 주례하기도 했던 그는 조선 신자들이 보내 온 박해 상황과 소식들을 교황청에 보고했다고 전해진다. 메스트르, 프티니콜라, 푸르티에, 김대건, 최양업 신부 등의 조선 입국을 도왔던 그는 최양업이 만주에 머물렀던 시기에 인연을 맺었다.

 

1849년 4월, 사제품을 받은 후 만주 요동 차쿠에서 7개월가량 머물며 베르뇌 신부의 보좌로 사목했던 최양업은 당시 만주교구장이었던 베롤 주교를 만났을 것으로 추측된다. 만주를 떠난 지 8년 만에 최양업은 베롤 주교에게 서한을 보낸다. 베롤 주교가 조선교회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조선교회를 위해 힘써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한 것이다.

 

초대 만주교구장이었던 베롤 주교. 최양업은 1857년과 1859년 베롤 주교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에서 조선교회의 종교 자유를 위해서는 프랑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전한다.

 

 

조선의 복음화를 위한 간절함, 베롤 주교에게 전하다

 

최양업은 베롤 주교에게 1857년과 1859년 두 차례에 걸쳐 서한을 보낸다. 스승 신부들에게 부친 편지에서는 조선 신자들의 가련한 처지와 순교자들의 행적이 주를 이뤘다면, 최양업은 베롤 주교에게 조선이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프랑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명확히 전한다.

 

“날로 조선 전체에, 심지어 외교인들까지도 거의 모두가 프랑스 배들이 왔으면 하고 기대하고 있는데, 프랑스를 통해 조선이 보다 개선되리라는 이런 속된 전반적인 감정이 어디에서 연유하였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지배계층의 수탈과 흉년이 이어진 가운데 민심이 흉흉했던 1850년대, 조선에서는 “차라리 서양 함선들이 빨리 와 더 좋은 상태로 철저하게 개혁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최양업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프랑스 함대가 조선에 들어온다면 조선교회의 상황도 나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또한 조선에서 사목한 지 7년을 넘어선 최양업은 선교사의 힘만으로 신앙의 자유를 찾는 것이 한계가 있음을 알았고, 상황이 나아질 수 있는 방법은 외부세력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따라서 최양업은 베롤 주교에게 보낸 서한에서 외적 박해가 중단된 이유를 중국에 주둔한 프랑스군의 영향으로 분석, 조선이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 프랑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힌다.

 

“북경과의 연락을 통해 중국에서 무시할 수 없는 준통치권을 행사하고 있는 저들(프랑스 군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조선 조정은 공적으로 대놓고 우리 신자들을 박해하거나 적어도 대략은 행방을 알고 있을 우리 선교 신부님들을 체포하지 않는 듯합니다.”

 

양업교회사연구소 차기진(루카) 소장은 프랑스를 통해 신앙의 자유를 찾고자 한 최양업의 행적에 대해 “그가 무력에 의해 상업적 이득을 취하려는 제국주의 내지는 식민주의를 용인한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며 “그는 우호조약을 통한 종교보호 정책 내지는 신앙의 자유를 희망하고 있었으며 그 배경에는 조국의 복음화를 간절하게 원했던 선교 우선주의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고 전했다.

 

 

조선 신자들의 가련한 상황, 편지에 담다

 

조선 신자들의 가련한 상황들도 최양업은 잊지 않고 베롤 주교에게 전하고 있다. “두려움을 모르는 적지 않은 사람들도 있어서 자기의 재산을 던져버리고 온갖 곤궁과 치욕을(감수하면서까지) 신적 소명을 따릅니다. 그들은 충실하게 복음의 법을 실천하는 사람들인데, 바로 올해 저희 관할구역만 하더라도 500명의 예비신자들이 있고 그중에서 200명도 넘는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또한 성무를 집전하면서 외교인들과 충돌한 사건도 전하며 베롤 주교에게 복된 그날을 위해 기도해줄 것을 부탁했다.

 

“성무를 집전하고 있던 마을에 저를 잡으려고 무장을 하고 침입했던 난동자들이 있었습니다… 저들의 난동을 통해서 몇몇 거짓 신자들은 이탈자들이 되었지만 반면에 하느님의 오묘하신 섭리로 같은 기간 중 어떤 마을 전체가 온전히 회두해 전부 신자가 됐습니다.” [가톨릭신문, 2022년 10월 9일, 민경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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