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31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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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자료

[구약] 하느님 뭐라꼬얘?: 아브라함의 생존전략과 하느님께 대한 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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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9-08 ㅣ No.4984

[하느님 뭐라꼬얘?] 아브라함의 생존전략과 하느님께 대한 순명

 

 

“사라는 내 (아내가 아니라) 누이요~”

 

창세기 20장은 아브라함이 아직 정착을 못하고 나그네처럼 떠돌던 때, 낯선 땅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계략을 썼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남쪽 네겝 땅으로 옮겨간 아브라함이 ‘그라르’라는 곳에서 나그네살이를 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라르’의 위치는 알 수 없으나 ‘그라르’와 울림이 비슷한 히브리말 ‘게르’가 ‘나그네살이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아마도 여기서 비롯된 지명인 듯합니다.) 그곳에서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내 사라를 자신의 ‘누이’라고 말해서 목숨을 건졌다는 것입니다.

 

사실 아브라함이 그렇게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게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람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길을 떠나 같은 네겝 땅으로 옮겨 갔을 때였지요. 그 땅에 기근이 들어 아브람은 이집트로 건너가 나그네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도 같은 식으로 위기를 모면했던 것입니다. “여보, 나는 당신이 아름다운 여인임을 잘 알고 있소. 이집트인들이 당신을 보면, ‘이 여자는 저자의 아내다.’ 하면서, 나는 죽이고 당신은 살려둘 것이오. 그러니 당신은 내 누이라고 하시오. 그래서 당신 덕분에 내가 잘되고, 또 당신 덕택에 내 목숨을 지킬 수 있게 해 주시오.”(창세 12,12-13) (참고로 이복누이와의 결혼은 다윗의 시대까지도 가능했으나 후대의 법에서는 금지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과연 아브람은 사라이 덕분에 파라오의 호의를 입었지만, 주님께서는 파라오가 사라이를 탐낸 일로 파라오와 그 집안에 여러 가지 큰 재앙을 내리셨고, 마침내 파라오는 아브람과 그 식솔들을 떠나보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20장에서도 같은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그라르의 임금인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가 범하려고 했지만, 다행히도 그날 밤 하느님께서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 꾸짖으셔서 마음을 돌이키게 하셨습니다. 이에 하느님을 두려워 한 아비멜렉은 양과 소, 남종과 여종까지 아브라함에게 주면서 자기 나라 어느 곳이든 마음에 드는 곳에 자리를 잡도록 해주었지요. 이에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아비멜렉을 위해 기도하였고, 하느님께서는 이방인이면서도 당신을 두려워하는 그를 보고 그 집안의 모든 태를 닫아버리셨던 벌을 거두셨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미래에 이루어질 약속의 상속자, 곧 ‘이사악의 어머니가 될 여인인 사라’를 그 어떤 남자도 육체적으로 가까이 할 수 없었음을, 그리고 그녀는 ‘오직 하느님의 은혜와 섭리로’ 아브라함에게서 약속의 아들을 얻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이 이야기는 만민의 조상이 될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특별히 가까이 나아갈 수 있었던 선택된 사람’으로서 ‘하느님의 예언자요 중재자’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하는 하느님은 당신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벌을 거두시고, 인간적인 술수와 계략마저 축복의 길로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는 이방인을 위한 아브라함의 기도보다도 더 큰 힘을 지닌 중재자 예수 그리스도와 마리아의 기도가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지와 계획을 신뢰하며, 흔들림 없는 열정으로 이 길을 끝까지 걸어가는 마리아의 군사들이 됩시다!

 

 

구원의 역사를 돌보시는 하느님

 

창세기 21장은 하느님께서 약속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그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어주셨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사라는 이제 ‘이집트인으로서 자신의 여종이었던 하가르가 아브라함에게 낳아준 14세쯤 된 아들’ 이스마엘이 자신의 귀한 아들 이사악과 함께 노는 것을 보고서는 (어떤 번역에 따르면 “이사악을 놀리는 것을 보고”),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저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세요. 저 여종의 아들이 내 아들 이사악과 함께 상속을 받을 수는 없어요.”(10절)

 

어찌된 일일까요? 일찍이 16장에서는 사라가 이렇게 말했는데 말이지요. “여보, 주님께서 나에게 자식을 갖지 못하게 하시니, 내 여종(하가르)과 한 자리에 드셔요. 행여 그 아이의 몸을 빌려서라도 내가 아들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잖아요.”(2절) 그러했던 사라가 어쩌다 그들을 이제 사지(死地)로까지 몰아넣으려 한 것일까요? 16장 4절 이후에 그 답이 있습니다. “그 여자는 자기가 임신한 것을 알고서 제 여주인을 업신여겼다.” 때문에 억울해 하는 사라를 보고 아브라함이 ‘당신의 여종이니 당신 좋을 대로 하라’고 했고, 마침내 하가르는 사라의 구박을 피해 광야로 도망을 쳤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가르는 “너의 여주인에게 돌아가서 그에게 복종하여라.”는 주님의 천사의 말씀에 따라 다시 사라에게 돌아갔고 때가 되어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스마엘을 낳아주었습니다.

 

16장에서 하가르가 고생할 것이 뻔한 사라의 집으로 다시 돌아간 것은 “내가 너의 후손을 셀 수 없을 만큼 번성하게 해 주겠다.”(16,10)는 주님의 천사의 말씀을 듣고 희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16장에서와 달리 21장에서 아브라함은 처음엔 사라의 ‘모자추방 건의’에 대해 언짢아했지만, “사라가 너에게 말하는 대로 다 들어주어라. 이사악을 통하여 후손들이 너의 이름을 물려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여종의 자식들도 네 자식이니, 내가 그도 한 민족이 되게 하겠다.”(13절)는 하느님의 말씀에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우유부단하거나 줏대가 없어 사라에게 양보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명백한 지시를 받고 구원의 역사를 돌보시는 그분의 계획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과연 사라에게서 쫓겨나 어미와 함께 광야에서 죽을 위험에 처했던 이스마엘은 하느님의 보호 속에 용감한 활잡이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아이와 함께 계셨다.”(21,20) 이는 창세기가 전하는 우리 모두를 위한 변함없는 하느님의 사랑이야기입니다. 사라의 미움과 원한의 행위 안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역사가 계속된 것처럼 인간의 완고한 마음과 행위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역사가 계속됩니다. 이스마엘이 비록 약속의 자녀가 아니었지만 하느님의 축복을 받았던 것처럼 이방인이었던 우리도 구원의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니 두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0년 9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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