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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혐오 사회: 혐오 문화를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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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2-26 ㅣ No.1630

[경향 돋보기 - 혐오 사회] 혐오 문화를 넘어서

 

 

오랑캐 취급하는 일

 

우리는 내내 누군가를 싫어하고 또 미워했다. 이를테면 ‘화냥년’이란 말이 그렇다. ‘환향녀’(還鄕女)에서 비롯한 말이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끌려갔다 돌아온 여성들을 싸잡아 욕하는 말이다. 애써 고향을 찾아온 여성들을 남편이 있는데도 불륜을 저지른 사람으로 둔갑시킨 거다.

 

그들이 고향을 떠난 것은 원했던 일이 아니었다. 자기 잘못도 아니었다. 국가는 물론, 보호자를 자처하던 아버지, 남편, 오라비가 제 구실을 제대로 못한 탓에 끌려간 것이다. 고향에서 이역만리까지 끌려갔다가 몸을 피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기까지 그들이 겪었을 고통은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참담했을 거다. 그래도 조선 사람들은 그 전쟁 피해자들을 간단하게 악질 가해자로 만들어 버렸다.

 

조선 여성들을 끌고 간 청(淸)도 내내 오랑캐였다. 만주족을 깔보고 업신여겨 그리 불렀다. 명(明)을 물리치고 중국의 지배자가 되어도 오랑캐라 여겼다. 오랑캐란 말은 중국 북쪽의 유목 부족 우랑카다이를 일컫는 말이었지만, 중국에서 한(漢)족을 제외한 모든 민족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조선도 중국에게는 동쪽 오랑캐였다. 북쪽 오랑캐와 다른 것은 그저 방위(方位)뿐이다. 그러나 작은 중국을 지향했던 조선은 한족을 제외한 모두를 오랑캐라 불렀다. 서양 사람들은 서양 오랑캐라 불렀고, 한국 전쟁 때는 같은 핏줄조차 오랑캐라 불렀다.

 

북한 사람들을 오랑캐 취급하는 일은 70년 내내 계속되었다. 어린이들이 따라 배워야 할 대상이라며 초등학교 교정 곳곳에 세운 동상의 주인공은 이승복 어린이였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치는 반공 웅변 대회와 반공 궐기 대회가 하루가 멀다고 열렸고, 더 많이 혐오해야만 칭찬을 받는 게 일상이었다.

 

어느 한쪽 진영에 속해야만 생존을 보장받는 고단한 나날도 반복되었다. 중립 지대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굳이 중립 지대를 선택하려는 사람은 회색분자가 되었다. 상대에 대한 증오를 부채질하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결국 회색분자마저 적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누군가를 혐오하는 일

 

지금 우리의 혐오 문화는 이처럼 전면적이지는 않다. 혐오가 국가적 과제였던 지난날과는 일정하게 단절하고 있다. 북한을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여전하지만, 경제 규모에서 25분의 1도 안 되는 가난한 나라는 더 이상 경쟁 상대가 아니다. 공산권이 모두 붕괴해 버린 지금에 와서 “무찌르자, 공산당!”을 되뇔 수도 없는 일이다. 국민적, 국가적 때론 거족적으로 싫어하고 미워해야 하는 존재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렇다고 혐오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규모만 작아졌을 뿐, 더 많은 혐오 대상이 생긴 것이다.

 

누구나 감정이 있기에 누군가를 싫어하거나 미워한다는 것은 어쩌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문제는 그 까닭일 게다. 자기에게 몹쓸 짓을 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며, 그 감정이 좀 더 적극적으로 미워하는 상태에 이른다 해서 탓할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지금의 혐오 현상은 공연하며 터무니없는 경우가 많다. 그냥 싫다는 경우도 많고, 까닭이나 근거 없이 미워하는 경우는 너무 많다.

 

어떤 개인을 혐오한다면 그 사람과의 경험을 근거로 그러려니 할 수 있겠지만, 미워하는 대상이 어떤 집단이라면 말문이 막힌다. 여성을 혐오한다는 사람들에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라곤 기껏해야 남자만 군대에 간다거나, 여성들이 혜택을 많이 받는다거나 하는 따위다. 남자가 군대에 가는 문제는 군대를 운영하는 국방부와 따질 문제지, 여성을 혐오할 문제는 아니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회원국 가운데 남성 평균 임금과 여성 평균 임금의 격차가 가장 큰 나라다. 성 평등 지위는 100위권에도 미치지 못하는 창피한 수준을 맴돌고 있다. 차별당하는 것은 여성이지 남성이 아니다. 그럼에도 여성 때문에 차별당했다고 느끼는 남성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어떤 경우는 여성에게 무시당한 적이 있다는 아주 개별적인 이유로 여성 전체를 혐오하기도 한다. 어떤 까닭이든 여성 일반을 혐오하는 게 어떻게 가능한지 여전히 모르겠다. 세상의 절반이 여성이고 모든 어머니와 누이가 여성이지만, 여성 혐오가 분명한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며 우리 사회에 똬리를 트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반그리스도적인 혐오

 

혐오는 기본적으로 자기와 ‘다른’ 사람을 향한다. 남성이 여성을, 성적 지향에서 다수자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 소수자를 혐오한다.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내국인이 외국인을,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많이 배운 사람이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을 혐오하는 식이다.

 

그러나 사람을 혐오하는 것은 반그리스도적이고, 반헌법적이다.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되었으니, 높고 낮음이 따로 없다. 대한민국 헌법도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진다고 천명함으로써 적어도 국민 가운데는 높고 낮음이 따로 없다는 원칙을 분명하게 밝힌다. 그러니 신앙이 깊은 사람이나, 공화국의 헌법 이념에 충실한 사람들에게 혐오란 이해할 수 없는 일탈일 뿐이다.

 

지난날에는 교계 제도가 교황 밑에 주교, 그 밑에 신부, 신부 밑에 수녀, 맨 밑에 평신도로 이해하곤 했지만, 요한 23세 교황님이 자신을 일컫던 그 유명한 말 ‘종의 종’으로 높고 낮음의 경계가 완전히 무색해져 버렸다. 모두가 존엄하고 가치 있기에 높고 낮음은 따로 없고, 그저 좀 다른 역할만이 존재할 뿐이다.

 

적어도 개념은 그렇다. 물론 개념이 그렇다는 것과 실질은 많이 다르다. 형편없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혐오 문화를 만들어 낸다. 자기 주변에 하나의 성을 쌓고 그 성안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존엄하지만, 성 밖에 있는 사람들은 가차 없이 혐오하는 방식이며, 이는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에게서도 자주 나타난다.

 

그러나 이 문제도 보편적 가르침으로 해결할 수 있다. 불자들은 낯선 이교도가 아니라,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가르침은 우리가 언제 어디로든 열려 있어야 하고, 공동체 안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구원과 해방이 보장될 수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연결된다. 그래야 1784년 이전의 조선인들과, 세례를 받지 않은 ‘무죄한’ 갓난아기들에게도 구원의 길이 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원칙은 그렇지만 상당히 많은 기독교인은 여전히 배타적 혐오 문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개교회 중심주의가 강화되어 자기 교회에 나와야만 구원이 담보된다는 논리를 끝없이 펼쳐가고 있다. 한국적 상황에서 개신교회는 혐오 문화의 최선봉, 그 극단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슬람교도나 불자를 혐오하는 것은 물론, 가톨릭도 그들의 혐오 대상이 된다. 같은 개신교라도 자기 교단이 아니면, 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자기 교회에 출석하지 않으면 곧바로 혐오 대상으로 여긴다.

 

국가나 국적을 혐오의 기준으로 삼는 사람도 많다. 그래서 제주에 온 예멘 사람들에게 그렇게 모질게 대했나 보다. 현대적 개념이지만, 국가라는 틀을 적용해서 소크라테스를 그리스 사람으로 여기고, 미켈란젤로는 이탈리아 사람으로 여긴다면, 예수도 순도 100%의 외국인이다.

 

팔레스타인 출신의 예수는 전형적인 셈족이다. 영양 공급이 좋지 않았을 테니, 150cm를 갓 넘겼을 작달만한 키에 완전히 검지는 않더라도 까무잡잡한 낯빛에 곱슬머리였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예수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성경이 주목한 것은 예수의 얼굴과 키 등의 인종적 특징이나 입고 다닌 옷들 따위가 아니라, 오로지 그의 말과 행동이었다. 복음사가들과 사도들이 우리에게 전해주고 싶었던 것은 오로지 그의 말과 행동이었다. 따라서 신앙의 핵심은 예수의 말과 행동이 어땠는가를 살피는 데 있다.

 

한번은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온 적이 있었다. 부모 자식이, 형제자매가 만나는 데 따로 까닭이 있을 리 없다. 주고받을 이야기도 많았을 거다. 예수의 제자들이 어머니와 형제들이 스승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다고 말하자, 예수는 정색을 하며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 12,48) 하고 반문하였다.

 

마르코 복음과 루카 복음에도 함께 소개된 유명한 일화다. 아들을 찾아온 어머니가 얼마나 무안하셨을까 생각해 보면, 예수의 말과 행동이 모질고 단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그랬을까? 왜 제자들에게 반문하며 가족 관계마저 부인했던 걸까? 진짜 가족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이라는 가르침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게다.

 

그러니 신앙인의 선택은 명확하다. 가족의 경계마저 넘어서야 하니, 인종이니 국적이니 하는 따위가 경계의 근거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천만다행으로 예멘 난민들에 대해서는 제주교구가 따뜻한 나눔을 실천하고 있기에 한국이 그렇게까지 엉터리 국가는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줄 수 있었다. 그들이 이슬람교도이고, 국적이 다른 사람들에, 말도 통하지 않더라도 같은 ‘사람’이라는 신앙적 고백이 제주 교구민들을 움직였던 것이다.

 

우리 신앙은 구체적인 상황과 선택에서 진짜인지 아니면 그저 신앙을 흉내 내는 것인지로 구별된다. 혐오란 말 자체가 발붙일 수 없게 노력하는 것이 바로 신앙인의 기본적인 책무여야 한다. 무엇보다 그리스도 교회는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 오창익 루카 - 인권연대 사무국장.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으로도 일했다. 인권 운동을 천직으로 여기며 살고 있다.

 

[경향잡지, 2019년 2월호, 오창익 루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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