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레지오ㅣ성모신심

허영엽 신부의 나눔: 존경하는 신부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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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1-07 ㅣ No.611

[허영엽 신부의 ‘나눔’] 존경하는 신부님께

 

 

신부님,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올해 기해년 돼지의 해는 작년보다 조금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무작정 가져봅니다. 제가 초등학교 시절, 학교 가는 길에 지나치던 시장 골목 어느 상점에는 웃는 모습의 돼지머리가 놓여 있곤 했습니다. 그 머리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절로 웃음 짓던 날들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돼지는 오래전부터 복의 상징으로 여겨졌지요. 그래서인지 돼지해인 올해에는 더욱 더 희망을 갖고 싶어집니다.

 

우리는 또 다시 새로운 시작의 순간에 서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삶을 되돌아보면 이렇다 할 열매를 맺지 못한 것 같아 초조하기도 합니다. 신부님! 언젠가 저에게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반드시 흔적을 남긴다’고 하셨지요? 물론 그 흔적은 기쁨이나 행복, 고통이나 상처로 구별된다고 하셨습니다.

 

그 누구와의 만남이든 상처나 고통을 주기보다는 작은 기쁨과 도움이 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것이 모두의 바람일 테지요. 그러나 어디 세상일이 그런가요! 살다보면 생각조차 싫은 만남도 생기게 됩니다. 그럴 땐 뒤도 돌아보지 않고 헤어지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은 만남과 이별, 그리고 다시 만남, 그리고 다시 이별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살면서 사람은 사람에게 가장 큰 영향을 받기 마련입니다. 만남이라는 것은 일생에서의 가장 큰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신부님을 만났던 것이 저에게는 일생의 큰 행운이었습니다. 사람을 만나다 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약점이 더 눈에 잘 띄는 것이 보통이지만 신부님과의 만남은 그 반대였습니다. 신부님은 참으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기시는 분이셨습니다. 모두를 한 결 같이 대해 주시는 고매한 그 인품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집니다. 저는 신부님이 사람들을 대할 때 화를 내시거나 얼굴을 찡그리시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언제나 항상 잔잔한 미소를 띤 신부님의 얼굴은 만나는 이들에겐 작은 기쁨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시간이 많이 지나서도 신부님을 생각하면 절로 미소가 지어집니다.

 

 

사제는 사제로 ‘항상 되어 가야 하는 존재’

 

눈이 흩뿌리던 어느 겨울 날 신부님을 신학교 마당에서 처음 만났을 때, 저에게 사제로 살면서 제일 필요한 것은 바로 ‘인내’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저는 그 날 이후 그 단어를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살아가면서 사제로 산다는 것, 참다운 사제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게 느껴집니다. 삶이라는 것은 이론이나 체계가 아니라 살면서 터득되는 현실이기 때문에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선배 신부님들을 뵈면, 오랜 시간을 사제직 자체에 머물고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숙여집니다.

 

사제도 약점을 지닌 한 인간이고 그것을 지닌 채 사제로 살아가기에 많은 실수와 잘못은 필연적인 결과인 것 같습니다. 신부님 말씀대로 신자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사제는 어쩌면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제로 ‘항상 되어 가야 하는 존재’여야 한다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러나 해를 거듭하면서 현실에 안주하려고 하는 안일한 마음과 귀에 거슬리는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는 편협함이 제 마음에 자라고 있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신학교 시절 거듭 다짐하던 사제상과 지금의 나의 모습에는 큰 거리가 있음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오래 전 어떤 초등학생이 저에게 다가오더니 심각한 얼굴로 “신부님, 신부님은 외로우시죠?”하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니?”라고 되물으니, “신부님은 늘 혼자 계시고, 가족도 없으시잖아요.”라고 대답해주더군요. 그 어린아이의 눈에도 사제는 외롭고 고독한 존재로 보였나 봅니다. 사실 어떤 선배 사제는 ‘사제란 스스로 가난과 고독의 길을 걷는 사람’이라고까지 했습니다. 인간이 고독을 이겨낸다고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우리 사제들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평생 숙제라고 생각합니다. 그 숙제를 안고 가는 내내, 신부님의 모습을 기억하며 함께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인지 또 다시 맞이하는 새해에 신부님이 더욱 그리워집니다.

 

신부님, 저도 새해에는 좀 더 여유 있고, 넓고, 깊은 마음의 인간으로 살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신부님이 그러하듯이, 시간이 흘러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는 따듯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럴 수 있도록 노력하고 기도하는 새해를 살겠습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9년 1월호,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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