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27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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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자료

[구약] 구약 성경의 물신: 이스라엘의 바알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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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6-20 ㅣ No.3734

[구약 성경의 물신] 이스라엘의 ‘바알님’

 

 

고대 이스라엘인의 일부는 바알을 숭배했다. 바알은 권력과 부의 소유주였고, 매력적인 하위 신들을 거느렸으며, 혼돈과 죽음을 이기고 질서와 생명을 보장하는 것 같았다. 인간의 본성을 자극하는 바알에 사람들은 매료되었다. 이번 호는 바알 숭배자들에 대해 잠시 들여다보자.

 

 

바알의 ‘멍에를 메다’

 

이집트 탈출 직후부터 바알 숭배는 시작되었다. 민수기 25장은 이집트에서 탈출한 백성이 “프오르의 신 바알의 멍에를 메자,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셨다.”(3절)고 기록한다. ‘멍에를 메다.’라고 번역한 히브리어는 본디 ‘(말에게) 마구(馬具)를 매다.’는 뜻이니, 우리말 ‘멍에를 얹다.’가 잘 맞는다.

 

여기서는 수동형(니팔)으로 쓰였는데, 이 말의 수동형은 흔히 ‘복종하다’(to subjugate onself to)는 뜻으로 쓰인다. 바알 숭배자들은 바알의 마구에 매인 사람이다. 멍에를 멘 가축처럼 바알이 부리는 사람들이다. 구약 성경은 이집트 탈출 직후부터 권력과 부의 소유에 얽매인 사람들을 이렇게 불렀다.

 

 

존엄의 복수

 

비록 일부이긴 하지만 고대 이스라엘인 가운데 바알을 숭배한 사람들은 구약 성경에 독특한 흔적을 남겼다. 그래서 구약 성경 히브리어를 자세히 분석하면, 바알 숭배자들이 바알을 하느님처럼 ‘바알님’으로 부른 흔적과 그 흔적을 애써 후대에 남기지 않으려는 성경 번역자들의 노력을 동시에 볼 수 있다.

 

먼저 우리에게 낯선 히브리어의 특징 하나를 보자. 히브리어로 ‘하느님’은 ‘엘로힘’이다. 이 낱말의 형태는 ‘남성 복수형’이다. 유일신을 단수형이 아니라 복수형으로 일컫다니 어찌 된 일인가? 히브리어 문법서는 이런 복수형을 ‘존엄의 복수’라고 설명한다.

 

한국어는 단수와 복수를 명확히 나누지 않을 때가 많아서, 우리는 외국어의 단수형을 그저 ‘한 개’로, 복수형을 ‘여러 개’로 단순히 인식하곤 한다. 그러나 복수형은 ‘의미의 다수’, 곧 ‘더 큰 의미’ 또는 ‘더 높은 인격’을 표현하는 데도 쓰인다. 독일어와 프랑스어에서 볼 수 있는, 2인칭 대명사의 용법을 예로 들 수 있다. 가깝고 친근한 사이에는 2인칭 단수로(‘너’, du, tu), 거리감 있고 예의를 차릴 때는 2인칭 복수로 표현하는 용법이다(‘귀하, 당신’, Sie, Vous).

 

엘로힘은 ‘존엄의 복수’의 대표적인 예다. 그러므로 이 표현에는 특별히 하느님에 대한 ‘섬기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 하느님은 그저 ‘하나의 신’이 아닌 분이기에 이렇게 특수한 형태로 그분의 크심과 높으심을 표현한 것이다.

 

하느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때, 히브리어로 ‘아도나이’라고 하는데 이것 또한 존엄의 복수형이다. ‘주님’을 뜻하는 ‘아돈’의 복수형과 ‘나의’(my)라는 1인칭 단수 의존 대명사의 합성어이다. 그러므로 ‘아도나이’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직역하면, ‘나의 주님들’이 된다. 만일 단수형으로 부른다면 ‘아도니’이다. 이 표현도 유일신을 복수형으로 불러 그 크심과 높으심을 표현한다.

 

이런 ‘존엄의 복수’는 구약 성경에서 일관되게 사용된다. 유배 이후에 본격화된 지혜 문학에서 하느님은 ‘지혜’(호크마)와 동일시된다. 그런데 일부 본문에서 하느님을 복수형인 ‘호크모트’로 부르는데, 이 또한 위엄의 복수로 이해할 수 있다(잠언 1,20; 9,1 등). 남성 복수형으로 쓰인 트라핌과 스라핌 등도 마찬가지다. 주님 곁을 지키는 상상의 짐승들마저 어느 정도 거룩한 존재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이런 표현에 깃들어 있다.

 

이런 히브리어의 독특한 뉘앙스를 우리말로 옮길 수 있는 적당한 방법이 있다. 바로 ‘님’을 붙이는 것이다. ‘엘로힘’을 하느‘님’으로, ‘아도나이’를 주‘님’으로 옮기면, 엄위의 복수가 지닌 의미를 매우 가깝게 표현할 수 있다. 히브리어 남성 복수형 어미가 ‘-임’이니, ‘-님’으로 옮기면 발음마저 비슷하다. 하느님에 대한 마음을 섬세하게 옮기면서 동시에 순우리말도 살린 좋은 번역어 아닌가. 이런 의미에서 지혜가 복수형으로 등장하는 곳, 곧 ‘호크모트’를 우리말로 ‘지혜님’으로 옮길 가능성을 조심스레 생각해 볼 수 있다.

 

 

고대 이스라엘의 ‘바알님’?

 

그런데 구약 성경에 바알을 ‘브알림’, 곧 ‘바알들’이라고 복수형으로 표현한 곳이 있다. 그 가운데 혹시 존엄의 복수형이 적용되었다고, 곧 ‘바알들’이 아니라 ‘바알님’을 의미한다고 짚어 볼 만한 곳이 몇 군데 있다. 그리고 그런 표현을 신학적으로 조심스럽게 다루려는 칠십인역 번역자들의 세심한 성찰을 느낄 수 있다. 지면의 한계 때문에 두 곳만 보겠다.

 

‘사무엘의 고별사’(1사무 12장)를 보면, 사무엘이 “여러분의 조상들은 주님께 울부짖었소. ‘저희가 … 주님을 버리고 바알(브알림)과 아스타롯을 섬겼습니다.’”(10절)라는 표현이 나온다. 여기서 ‘바알’이 복수형으로 쓰였기 때문에 존엄의 복수형으로 이해하여 “저희가 … 주님(=야훼님)을 버리고 바알님과 아스타롯을 섬겼습니다.”라고 이해할 가능성이 있다.

 

다른 예는 예레미야 예언자다. 그는 “네가 어찌 … 바알들을 따라다니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느냐?”(2,23)고 말했는데 여기서도 바알이 복수형으로 쓰였다. 본디 히브리어 구문은 이 구절이 직접 화법으로 되어있기에 “네가 어찌 … ‘나는 바알님을 따르지 않았소.’라고 말하겠느냐?”라고 직역할 가능성이 있다(예레 10,10 참조).

 

바알의 복수형인 히브리어 ‘브알림’을 과연 단순한 복수로 이해하여 ‘바알들’로 볼 것인지, 존엄의 복수가 적용된 표현으로 이해하여 ‘바알님’으로 볼 것인지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섣불리 어느 하나의 이론을 지지하기 전에, 칠십인역 번역자의 태도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스어로 이 구절은 거의 모두 ‘바알림’(Bααλιμ)으로 옮겨져 있다. 곧 히브리어 ‘브알림’을 소리대로 표기한 것이다. 그리고 대중 라틴말 성경(불가타)도 칠십인역의 전승을 따라 거의 모두 바알림으로 옮겼다.

 

왜 고대의 성경 번역자들은 히브리어 브알림을 단순히 소리대로 표기하는 방식을 택했을까? 필자는 아마도 히브리어 존엄의 복수가 지닌 의미, 곧 바알을 ‘바알님’으로 인식할 가능성을 미리 차단한 것이라는 추측을 해 본다. 곧 이들의 표기는 브알림에 묻어 있는 거룩한 느낌을 제거하고 중성화(neutralization)하려는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고대의 번역자들은 바알을 숭배한 일부 이스라엘인들의 마음까지는 굳이 후대에 전하지 않으려고 한 것 같다. 필자는 성경 본문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면서도 가장 훌륭한 번역을 위해 애쓰는 충실한 번역자들의 고뇌를 느낀다. 이런 전승을 살려 영어나 독일어나 프랑스어 현대 번역본들도 일부는 ‘바알들’(Baals)로 옮기지만, 일부는 바알림(Baalim)으로 옮긴다.

 

 

기드온 이야기

 

과연 바알을 숭배하는 자들이 이스라엘에서 소수였을까? 판관 기드온이 부르심을 받은 이야기를 보면(판관 6장) 오히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소수파 같은 상황을 엿볼 수 있다.

 

기드온이 하느님께 처음 받은 명령은 바알 제단을 허물라는 것이었다(25절, 28절). 기드온은 의로운 사람이었기에 하느님의 명을 충실히 따랐다. 그런데 그가 하느님의 명을 이행하는 과정을 보면, 마치 소수파가 몰래 자신의 신념을 집행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그는 “아버지 집안사람들과 성읍 사람들이 두려워, 그 일을 낮에 하지 못하고 밤에 하였다”(27절). 뒤에서 보겠지만, 그의 아버지는 그의 편을 들었다. 하지만 집안사람 가운데는 분명 바알 숭배에 쏠린 사람이 있었을 것 같다. 집안사람이니 아마 아버지도 어쩌지 못할 것을 두려워한 것일까? “종들 가운데 열 사람을 데리고”(27절)나선 것도 이런 정황 때문인 듯하다. 기드온은 가장 신뢰하는 종만 데리고 야밤에 신속하게 마치 군사 작전을 감행하듯 바알 제단을 부수었다.

 

아침이 되었다. 바알 제단이 산산조각 난 것을 보고 사람들이 놀랐다. 성경은 사람들이 “‘누가 이런 짓을 하였나?’ 하고 서로 물었다.”(29절)고 전했다. 바알 신전을 부순 기드온은 야음을 틈타 전격적으로 일을 처리했지만, 사람들은 바알 제단이 무너진 일을 두고 대낮에 크게 떠들며 상의했다. 그것도 모자라 “그들은 조사하고 캐물은 끝에”(29절)그 범인이 기드온임을 밝혀내었다.

 

결국 그들은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에게 “그대의 아들을 끌어내시오. 그는 죽어 마땅하오.”(30절)라고 말하였다. 마치 범죄자를 찾듯이 수사하고 색출하는 과정도 그렇지만, 대낮에 당당하게 사형을 요구하는 것도 모두 다수파가 소수파를 다루는 듯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한편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는 기가 막혔다. 그가 사람들에게 내뱉은 다음의 말은 그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을 한마디로 웅변한다. “그대들은 바알을 옹호하는 거요?”(32절)

 

기드온 이야기의 결말을 보면, 아쉽게도 “기드온이 죽자 이스라엘 자손들은 다시 바알들(브알림)을 따르며 불륜을”(판관 8,33) 저질렀다고 한다. 판관 기드온의 노력은 과연 헛된 것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다음 호부터 이스라엘의 바알 숭배의 의미를 조금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 주원준 토마스 아퀴나스 - 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으로 고대 근동과 구약 성경을 연구하는 평신도 신학자이다. 주교회의 복음화위원회 위원이자 의정부교구 사목평의회 위원이다. 저서로 「구약 성경과 신들」과 「신명기 주해」 등이 있다.

 

[경향잡지, 2017년 6월호, 주원준 토마스 아퀴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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