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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석공예가 이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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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1-10 ㅣ No.961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석공예가 이순석 (상)


전통미와 현대미 조화 이룬 석공예 작품 제작에 헌신

 

 

- 하라 이순석 선생(1905~1986).

 

 

이순석 선생은 자신이 직접 집필했던 ‘석학들의 회고기’(경향신문, 1974.3.9.)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일생 동안 도안과 석공예를 중심으로 몰두해 왔고 지금도 내 작품 속에 파묻혀 살고 있으며 종교적으로는 출생 이후 현재까지 천주교 교인으로서 살아왔다.”

 

여기서 말한 바와 같이 이순석 선생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 이병무(李秉武) 선생의 9남매 중 막내로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원명은 평래(平來)다. 

 

한국 예술의 태두이며 현대 공예 발전을 이끌었던 거목, 하라(賀羅) 이순석 선생은 대한민국 예술의 원로회원으로서 그 생애를 마칠 때까지 일관된 신앙생활과 고매한 예술의 경지를 소신껏 불태운, 금세기 이 나라의 지울 수 없는 별이었다. 선생이 이 땅에 남긴 선구자적인 예술 활동은 다시 후학들의 손에 의해 꽃피워짐으로써 유구한 민족 문화의 초석이 되고자 했던 그의 꿈이 헛되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1970년대 초반에 서울 미대 조소과에서는 석조 과목을 개설하면서 나에게 그 교과 담당을 맡겼다. 나는 돌을 깨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서 꽤 당황스러웠다. 당시 하라 이순석 선생(바오로, 1905~1986)은 한국디자인센터 초대 소장으로 있었는데, 그 건물이 연건동 미술대학 운동장 한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생각 끝에 이 선생의 연구실을 찾아갔다. 각종 돌들이 방안 가득히 널려 있었고, 만들고 있는 작품과 완성된 작품 등을 유심히 바라보니, 그 풍경이 정말 볼 만했다. 내가 선생께 묻기를 “돌을 어떻게 깨야 됩니까?” 했더니 답하시기를 “깨 나가다 보면 된다” 하셨다. 

 

“망치를 들고 돌을 때리다 보면 방도가 절로 터득되는 것”이라는 말씀으로 알아듣고 나는 돌 깨는 연습을 시작했다. 돌이라는 재료는 흙처럼 단숨에 되는 것이 아니라서 답답했다. 하루는 구멍을 뚫어야겠는데 며칠을 때려도 쾅 뚫리지가 않았다. 마침 돌 일을 전공으로 하는 친구를 만나서 돌에 구멍 내는 일을 물었더니, 세월아 네월아 하고 두들기다 보면 뚫린다 했다. 앞서 이순석 선생의 말씀하고 똑같은 얘기였다. 

 

이순석 선생은 우리나라 석공예 분야에서 전무후무한 대예술가이다. 뒤를 잇는 후배가 없음에 늘 섭섭해했다. 일찍이 동경예대에서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도안을 전공으로 공부하고,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 선생을 알게 되면서 한국 민예품에 대해서 안목을 키웠다.

 

그 후 조선으로 돌아와서 골동품 수집을 시작했다. 그 무렵 서울 소공동체 찻집 ‘낭랑파라’를 만들고 문인, 화가들과 교유했는데, 그게 1932년 칠월칠석날 시작된 일이라 했으니, 우리나라에서는 이른바 최초의 다방이었던 것이다. 그 뒷날 유치진, 이상이 한때 이 찻집을 경영한 일이 있다고 한다.

 

선생은 호를 ‘하선’(荷仙)이라 했다가 ‘하라’로 고쳤는데, 어느 날 기자가 그 연유를 물었더니, 왜정 때는 ‘해선’ 안 될 일들이 있어서 그런 뜻으로 지은 것이고, 해방이 되면서 이제는 ‘마음껏 하라’는 하늘의 뜻으로 알고 그렇게 지었다고 토로한 걸로 보아서, 그의 민족정신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훗날 ‘하라 석 미술원’을 개설하면서 인사말로 쓴 글에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적고 있었다. 

 

“원래 천성적으로 돌을 좋아했지만, 돌의 굳건한 의지와 영원함, 그 침묵에 이끌려 돌을 사랑하고 믿음이 깊어지면서 돌 미술은 나의 전부가 되어 버렸다. 조상의 빼어난 슬기와 솜씨가 빛나는 석조미술의 전통을 오늘에 되살리고….” 

 

이순석 선생의 일생을 압축한 선언문같이 들린다. 그는 30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는데, 그중 2500점이 돌공예품이라 한다. 아무도 손댄 일이 없는 그런 분야를 평생의 업으로 삼고 흔들림 없이 온 생을 통해서 그 일을 완수했다. 그의 애정 어린 돌 작품들을 바라보고 있으 면, 민족의 얼과 현대적 미가 어울려 살아 숨 쉬는 숭고한 드라마를 연출하고 있는 것을 금방 알아볼 수 있다. 

 

선생네는 원래 서울 남산골(지금의 명동)에서 살았다. 그러다가 천주교 박해를 피해서 충남 아산에 은거하던 중에 이순석이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돌을 가지고 놀기를 좋아해서 ‘순돌’(順石)이라 불리었다. 그 ‘순돌’이란 이름으로써 돌 예술가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으니, 사람의 운명이란 참으로 묘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그는 아산 공세리본당에서 서양 신부의 사랑으로 음악과 미술과 영적 지도를 받게 되었고, 그 후 신부가 될 꿈을 안고 서울로 올라와 대신학교까지 가게 되었다. 그러나 주변의 강력한 권유들이 있어서 타고난 재주를 키우고자 동경으로의 유학길에 올랐다 하니, 그에게는 예술과 종교가 처음부터 하나되게 태어난 것이 아닌가 싶다. 

 

언젠가 김덕근 신부를 만나러 후암동성당에 갔더니 이순석 선생의 제대가 있는 것이 아닌가. 나중에 알고 보니 후암동성당은 선생의 지휘 하에 지어졌고, 그는 초대회장으로 23년간 봉사했다. 그에 앞서 1935년에는 약현성당에서 ‘베드로상’과 ‘바오로상’ 두 점을 유화로 그려서 걸었다 했는데, 지금은 그 행방을 알 수가 없다.

 

또 한 번은 최광연 신부를 만나러 성수동성당에 갔더니, 그곳에 오석으로 된 제대가 있었다. 바로 이순석 선생의 작품이었다. 절두산성당 마당에는 오석으로 된 커다란 순교자상이 서 있고, 청담동성당과 한강성당 등지에도 작품들이 있다 하는데, 선생이 교회에서 한 일이 얼마나 있는지 정리가 안 되어 다 알 수는 없다.

 

* 최종태 서울대 명예교수(조각가) - 서울대 미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공주교육대와 이화여대 교수를 거쳐 1970년부터 30여 년간 서울대 미대 교수를 역임했다. 조각전을 비롯해 소묘전, 파스텔화전, 목판화전, 유리화전 등 국내외에서 수십 차례의 개인전을 가졌다.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자 서울대 명예교수, 김종영기념사업회 회장, 장욱진미술문화재단과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이사 등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6년 11월 6일, 최종태 서울대 명예교수(조각가)]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석공예가 이순석 (하)


차디찬 돌에 예술의 온기를 불어넣은 ‘돌의 시인’

 

 

서울 청담동성당에 있는 ‘성 유대철 베드로 부조석상’.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한번은 선생께서 내게 전화를 하셨다. 청담동성당 마당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와서 봐 달라는 말씀이었다. 뜨거운 여름날이었다. 거대한 오석을 갖다 놓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노인네가 혼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 돌에 새겨지는 조각을 봐 달라는 것이 아닌가. “잘 깎으셨는데요” 하고 더 할 말도 없었다.

 

인물 조각들도 여럿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순석 선생은 조각을 좋아해서 공예가이긴 하지만 조각적 안목과 솜씨도 아주 훌륭했다. 석굴암 조각을 좋아하면서 그것을 석공예로 보고, 금동미륵반가상을 좋아하면서 그것을 금속공예로 보았다. 하기야 옛날에는 공예니 조각이니 하는 구분도 없었으니, 오늘의 눈으로 굳이 구분하지 않아도 될 일이 아닐까도 싶었다.

 

아무튼 선생은 조각을 좋아해서 수반을 만들어도 오늘날의 조각적 품성을 갖게 했고, 또 실제로 성모상도 여러 점 만들어 놓은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괴석 수석을 좋아해서 조금만 손댄 재미있는 작품들도 많이 있었다. 이순석 선생은 조각과 공예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야말로 큰 예술가였다.

 

“쓸모와 아름다움이 조화를 이룬 생활 속의 작품을 만든다는 일념으로, 이름 없는 돌들을 찾아 그에 알맞은 용도를 생각하고, 그 생김새에 맞게 예술성을 부여하는 돌 예술은 어려움도 많지만, 재료와 기법의 다양성만큼 보람 또한 크다.”

 

“동방에 빛나는 예술의 나라 한국은 고려청자, 조선백자의 뛰어난 도자 예술을 낳았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조선의 역대에 걸쳐 세계에 자랑할 만한 아름다운 석조 예술 문화를 창조했으니, 이는 고대 그리스와 이탈리아의 석조 예술에 비길 만한 우리 조상의 빼어난 창조성과 솜씨가 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한반도에서 산출되는 풍부한 돌 자원의 산 증거이다. 석굴암, 다보탑, 석가탑, 쌍사자석 등 전국 각지에 산재한 우리의 돌 예술품들은 동서고금에 유례를 볼 수 없는 조형미의 극치이거니와, 이는 서양의 그것들과 표현이 다를 뿐만 아니라 중국의 기술미나 일본의 인공미와도 근본적으로 취향을 달리하는 것으로서, 단순 소박한 선의 흐름과 석질의 자연미에 조화를 이룬 우아한 한민족 고유의 멋을 잘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이제는 우리 민족의 돌 다루는 천부적 재능과 풍부한 돌 자원을 오늘의 생활환경에 맞게 개발하여 보다 인간다운 생활의 영위에 기여하는 새 시대의 새 석조예술 문화를 창조해야 할 때이며, 우리의 마음과 솜씨로 만들어진 새로운 석조예술을 세계에 널리 알려야 할 때이다.”

 

구구절절한 이순석 선생의 돌 예술 예찬이며, 특히 한국의 조형미에 대한 지극한 애정을 엿볼 수 있는 말씀들이고, 누군가 이어야 할 절체절명의 사명감을 절절하게 표현하고 있는 대목들이다.

 

1983년 이순석 선생의 작품 제작 모습.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1972년 서울 태릉 푸른동산에서 ‘하라석미전’(賀羅石美展)이 대대적인 행사로 열렸다. 이순석 선생의 첫 제자이며, 도예가인 권순형은 당시를 회고하는 글에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적고 있었다.

 

그때 한 기자가 여러 가지 질문을 하는 중에 “우리나라에도 우리나라만의 어떤 특출한 예술관이 있느냐?” 하고 물었다. 선생께서 답하시기를 “우리 문화 예술을 논하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일이 있는데, 요즈음 우리는 너무나도 서양 문명과 실리만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어, 우리의 고유한 멋과 양속을 잃어가는 모습이 안타깝고, 그보다도 더 큰 문제는 동양권의 윤리도덕이나 예술이 모두 중국에서 온 것으로 착각하는 데 있다. 우리는 이 그럴듯한 함정 속에서 정신을 차리고 하루속히 탈출해야 한다. 중국이 무슨 동양 문명의 종주국이나 되는 양 오인하고 있는 고질적인 폐단이 문제이니, 여기서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적 상관성이나 종교관의 차이 등 그 정체를 꼭 밝히고 넘어가야 하겠다”고 전제하시며 점심을 하는 자리에서 한국미에 대한 열변이 있었다고 한다.

 

“이순석의 예술, 특히 그가 심혈을 기울여 창작한 석공예술, 돌이라는 민족의 얼이 깃든 재료를 남달리 사랑한 창작 공예가로서의 뛰어난 역사의식과 장인의식, 디자이너로서의 뛰어난 조형감각 그리고 가톨릭 신자로서의 깊은 신앙생활이 하나로 집약되어 격조 높은 독창성과 위대함을 보여주고 있다. 석조예술의 전통을 오늘에 되살리고 새 시대의 한국공예를 창조하는 개척자의 외로움을 돌의 의지와 공예가의 덕성으로 극복한 이순석. 그의 삶과 예술은 한국공예의 전통과 현대를 잇는 역사의 다리이다.”

 

“한국 산천의 여기저기 흩어져 있거나 지하에 잠자고 있는 돌들을 발견하여 그것에다 빛을 주고 아름다움을 주고 의미를 주는 석공예가 이순석의 작품은, 어떤 의미에서는 하느님의 협동이고, 그의 공부를 더욱 발전시키는 충실한 작업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무기물인 돌을 끌로 파고 다듬으면 이상하게도 거기에 생명이 부여된다. 차디찬 돌이건만 따사로운 감각이 생긴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벅찬 감격을 돌이라는 재료 위에 표현하는 공예가 이순석은 확실히 ‘돌의 시인’인지도 모른다.”

 

미술평론가 몇 분의 글을 인용해서 나는 석공예가 이순석 선생의 삶과 예술 세계를 부각시키고자 한다. 그의 돌 사랑, 나라 사랑, 민족 사랑, 그리고 그의 열정, 누군가의 말처럼 전통과 현대를 잇는 다리라는 표현이 참으로 실감 나는 이가 이순석 선생이다. 누가 민족의 감정을 그토록 절절한 사랑으로 다양한 돌을 찾아내 생명을 부여할 수가 있었겠는가.

 

이순석 선생은 다시는 이 땅에 태어나기 어려운 큰 장인이요, 깊은 신앙인이요, 그것이 어울려 아름다운 돌 예술을 창조해낸 말 그대로 전무후무한 석조 예술가이다. 이순석 선생은 이 땅에 현대 디자인을 심고 기초를 닦고 수많은 후진들을 길러낸 교육자요, 그리고 가톨릭교회에 돌 미술을 접목시킨 최초의 공예미술가이다. 수천 점의 작품들과 그가 한국교회에 봉헌한 성미술품들이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 정리가 돼야 할 터인데, 그 점이 못내 아쉽다. [가톨릭신문, 2016년 11월 13일, 최종태 서울대 명예 교수(조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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