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토)
(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강론자료

루카복음 10,25-37(2016. 7. 10. 연중 제15주일)

스크랩 인쇄

남충희 [korangpo] 쪽지 캡슐

2016-07-08 ㅣ No.2098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은 사실 두 가지의 계명이 아니라 단 하나의 계명이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자신은 영적자아를 가리키는 상징어이다. 육적자아는 반드시 남과 다투고, 남을 시기하고 미워할 수밖에 없다. 육적자아는 생존경쟁의 원리를 따르기 때문이다. 육적자아가 이웃을 사랑할 때에는 그로부터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다. 가령 가난한 사람에게 자선을 베푸는 경우 자선을 받는 당사자와 세상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거나, 자신은 선한 사람이라는 자기만족을 얻을 수 있다. 영적 사랑은 육적 사랑과 달리 사랑을 받은 당사자에게나 세상 사람들에게나 비웃음을 당하기 일쑤이다. 육적자아는 영적 사랑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위에는 다양한 종류의 이웃이 있다. 그렇다면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가? 율법학자의 질문은 다분히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나보다 못한 사람’, 흔한 말로 불우이웃을 염두에 두고 있다. 예수의 비유는 그의 예상을 뛰어넘는다.

 

어떤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 또는 하늘나라의 제자이며 강도는 거짓스승을 가리킨다. ‘예루살렘은 하늘나라이며 예리고는 삶의 현실인 이 세상이다. 강도는 재물과 목숨을 아울러 빼앗는다. 거짓스승은 백성으로부터 재물을 갈취하면서 그들이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것을 가로막으므로 강도이다. ‘은 성령의 지혜를 상징한다. 하늘나라의 제자가 성령의 지혜를 박탈당하면 영적 생명을 잃을 수밖에 없다. 거짓스승은 사후(死後)의 복락을 약속하면서 하늘나라와 현실을 분리한다. 현실에서 괴리된 하늘나라는 이미 하늘나라가 아니다. , 이웃을 영적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이미 영적인 생명을 잃은 사람, 곧 육적자아이다. 같은 이 세상이 영적자아에게는 하늘나라이되 육적자아에게는 지옥이다.

 

사제레위인은 종교지도자들로서 거짓 스승을 대표한다. ‘길 반대쪽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방향이다. 그들은 늘 하늘나라를 들먹이기를 좋아하며 하느님을 형식적으로 예배하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지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들 자신이 바로 백성의 재물과 생명을 빼앗는 강도이므로 자신의 경쟁자인 다른 강도에게 피해를 입은 사람을 동정할 줄 모른다.

 

사마리아인은 형식적인 예배에는 서투르지만 참된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하늘나라의 제자이다. 하늘나라의 제자는 누구나 참된 스승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웃을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강도를 당한 사람을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기름포도주는 용서와 격려이며 노새는 봉사이다. 기름은 상처를 치유하며, 포도주는 기운을 북돋우며, 노새는 겸손한 자세로 묵묵히 힘든 일을 한다. 모두 성령의 권능을 가리키는 상징어이다.

 

여관은 이 세상이며 여관 주인은 영적자아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을 거쳐 가는 나그네이다. 그런데 영적 자아는 삶의 현실을 완전하게 다스리면서 이 세상의 주인노릇을 한다. ‘두 데나리온은 신덕과 망덕이다. 신덕과 망덕은 반드시 애덕을 불러일으킨다. 애덕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다.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것은 사람의 일이며, 사람에게 사랑의 힘을 주는 것은 하느님의 일이다.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라고 한 것은 자신의 생명을 잘 관리하라는 뜻이다. 스스로 살아있는 사람만이 남을 사랑할 수 있다. ‘비용이 더 들면 운운은 신덕과 망덕을 지니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율법학자는 강도를 당한 사람의 이웃으로 사마리아인을 지목하였다. 셋 중에서 오직 사마리아인이 그를 도왔기 때문이다. 그가 정답을 맞춘 것은 소가 개구리 밟은 격이어서 그가 실제로 예수의 말뜻을 이해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가 예수의 말뜻을 이해하려면 그 자신이 강도였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라는 질문이 누가 강도를 당한 사람의 이웃인가?’라는 질문으로 바뀐 것을 주목해야 한다. 강도를 당한 사람을 도와주려면 그가 강도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아보는 눈이 있어야만 할 것이다. 이 또한 성령의 권능임을 말할 것도 없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이웃을 사랑할 능력이 있다.



2,275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