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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성사] 혼종혼인을 대하는 사목자의 정신과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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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5-01-07 ㅣ No.90

혼종혼인을 대하는 사목자의 정신과 자세

 

 

시작하는 말

 

사랑에 빠진 젊은이들이 빛나는 미래를 축복해 달라고 요청할 때 상기된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늘 주님께 감사드릴 수 있다면 좋겠다. 이런 젊은이들을 만날 때마다 앞으로 생길 귀여운 아기의 세례명은 무엇으로 할까 고민하며 즐거운 상상에 빠질 수만 있다면 좋겠다. 그 귀여운 아기가 어느 날 주님의 기도를 외우고 첫영성체를 하며 성장해 가는 모습을 부모들과 함께 지켜볼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그러나 혼인하겠다고 함께 온 사람이 개신교 신자일 때 마냥 즐겁고 기쁘지만은 않다. 그들이 앞으로 짊어지고 가야 할 녹록하지 않은 십자가가 보이기 때문이다. 교회 분열의 십자가를 짊어지고자 하는 그들은 아직 자신들이 걸어야 할 십자가 길에 어떤 돌부리와 웅덩이가 놓여있는지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때 사목자는 무엇을 생각하여야 하고, 그들에게 어떤 내용의 가르침을 전달해 주어야 하는지를 정리해 보았다. 먼저 현재 한국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용어의 정립을 위한 문제 제기까지 포함하여 ‘혼종혼인’의 개념부터 정리하였다. 발전을 위한 출발이길 기대한다. 그리고 개신교 세례의 유효성 문제와 혼인 전 교육의 중요성도 언급했다. 나아가 사목자들이 예비부부와 함께 나눌 대화와 가톨릭 배우자에게만 전달해 주어야 할 내용을 구분하여 다루었다. 참고가 되었으면 좋겠다. 

 

 

1. 혼종혼인의 용어 정립

 

먼저 현재 우리나라에서 사용되고 있는 관면혼인과 혼종혼인의 법적 개념부터 정리해야 할 것 같다. 두 가지 점에서 문제를 지적하고 싶다. 

 

첫 번째는 우리 한국 천주교회에서 현재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는 혼인의 유형에 관한 문제이다.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해마다 발표하는 천주교회 통계를 보면, 혼인을 성사혼인과 관면혼인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리고 통계표 하단에 주석을 달아 관면혼인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관면혼은 이교혼과 혼종혼으로 구별하나 당분간 그 구분을 보류한다”(「한국 천주교회 통계 2003」, 32면). 그 결과 한국에서는 이교혼인과 혼종혼인 모두가 관면혼인으로 취급되고 있으며, 통계 자료에 따르면 2003년 한 해 동안 이와 같은 관면혼인율이 61.5%이다. 

 

그러나 혼종혼인은 관면이 필요한 혼인이 아니다. 허가만 받으면 된다. 관면을 받아야 하는 혼인이 관면 없이 치러졌다면 그 혼인은 무효이다. 그러나 허가 사항인 혼인이 허가를 받지 못하면 불법이지만 유효한 혼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혼종혼인을 관면혼인율에 포함해서는 안 된다. 한국에서의 현행 용어 정착의 역사적 과정과 한국적 특수성을 모르는 바 아니나 ‘관면’이라는 법적 용어를 이렇게 계속해서 사용한다면 혼종혼인에 대한 개념을 파악하는 데 오히려 혼란만 지속시킬 것이기에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지적한다. 법적인 논의는 다른 기회에 본격적으로 다룰 수 있으리라 여기며 여기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필자의 결론부터 말하고 싶다. “현행 용어의 적용이 잘못되었기에 관면혼인에 대한 통계치는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두 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혼종혼인의 개념이다. 국내에 출간되어 있는 혼인 관련 교회법 해설서들을 보면 하나같이 혼종혼인이라는 용어 안에 미신자혼인(이교혼인)과 본래의 혼종혼인(세례 받은 개신교 신자와의 혼인)을 포함시키고 있다. 넓은 의미에서 그렇게 해석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1970년에 발표된 바오로 6세의 자의 교서 「혼종혼인」(Matrimonia Mixta)에서 혼종혼인의 의미를 이와 같이 광의로 사용했던 데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교회의 공식 문헌에서는 더 이상 이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 않다. 혼종혼인과 미신자혼(이교혼)을 구분하여 법적 개념의 차이를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1983년에 반포된 법전에서는 이를 명문화하였다(교회법 제1124-1129조 참조). 서로 다른 혼인이기 때문이다. 

 

한국 천주교회의 용어 사용 설명에 따르면 혼종혼인은 관면혼인으로 결론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결론을 내린다면 용어를 잘못 사용하는 것이고 법 개념을 틀리게 파악하는 것이다. 따라서 단지 허가만 얻으면 되는 혼종혼인은 허가혼이라고 해야 한다. 

 

가뜩이나 교회법이 줄 수 있는 경직된 이미지와 혼인법 조항의 복잡함 때문에 다들 머리를 절레절레 흔드는데, 현재 한국교회 안에서 사용하고 있는 잘못된 용어들이 혼란을 가중하고 있어 야전 사령관 격인 사목자들이 혼종혼인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파악하고 그 내용을 이해하는 데 이중고를 겪고 있다. 그리고 많은 노력을 들여 해마다 전국 통계를 내고 있는데 아무리 정확한 통계를 내어도 현재의 구분 기준에 적용할 때에는 잘못된 통계가 될 수밖에 없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져 있기 때문이다. 하루빨리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혼종혼인이라는 용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고, 관면혼인과 허가혼인의 차이점은 무엇인지를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의 간단한 도표가 이를 설명해 줄 것이다. 

 

위의 비교 내용을 보면 두 혼인의 차이점이 분명히 구분된다. 서로 다른 혼인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혼종혼인의 개념을 정리해 볼 수 있다. 혼종혼인은 세례 받은 두 남녀의 결합인데 한 사람은 가톨릭 신자이고 다른 배우자는 유효한 세례를 받은 개신교 신자일 때 맺어지게 된다. 교회법 제1124조에서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세례 받은 두 사람 중 한편은 가톨릭 교회에서 세례 받았거나 혹은 영세 후에 이 교회에 수용되고 정식 행위로 교회를 떠나지 아니한 자이고, 상대편은 가톨릭 교회와 온전한 친교가 없는 교회나 교회 공동체에 등록된 자 사이의 혼인은 관할권자의 명시적 허가가 없이는 금지된다.”

 

이 글에서는 위의 내용을 바탕으로 개신교 신자와의 혼인인 혼종혼인이 안고 있는 문제들과 이에 대한 사목적 해결 방안에 대해 다루어보겠다.

 

 

2. 개신교에서 유효한 세례를 받았는가?

 

개신교 신자가 유효한 세례를 받았는지를 먼저 따져야 한다. 왜냐하면 개신교에 몸담고 있는 자라 하더라도 세례를 받지 않은 자와의 혼인은 미신자 혼인으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혼종혼인의 범주에 들려면 혼인 당사자 둘 다 세례를 받은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면 개신교 신자의 세례 유효성 문제를 사목자는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먼저 교회의 정신을 살펴보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과로 나타난 가장 큰 변화 가운데 하나가 개신교와의 일치를 위해 교회가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것이다. 그들을 더 이상 이단(Haeresis, 열교)이나 배교(Apostasia) 또는 이교(Schisma)라고 호칭하지 않았다(참고로 교회법 제751조에서는 다음과 같이 명확히 개념을 정리하고 있다. “이단이란 세례 받은 후 천상적 가톨릭 신앙으로 믿어야 할 어떤 진리를 완강히 부정하거나 그것에 대해 완고히 의심하는 것이고, 배교란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부 포기하는 것이며, 이교란 교황에게 대한 순종 또는 그에게 종속하는 교회의 구성원들과의 친교를 거부하는 것이다.”). 

 

오히려 개신교의 세례의 유효성을 의심하지 않음을 천명하면서 그들을 헤어진(갈라진) 형제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형제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는 비록 그들이 가톨릭 교회의 일원은 아니나 유효한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교회의 지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과 일치해야 할 유일한 이유는 바로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유효한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가톨릭 교회가 불교나 회교를 ‘일치의 대상이 아니라 대화해야 할 상대’로 봄으로써 개신교와 차이를 두고 있음을 언급하고 넘어간다. 

 

그러면 우리 한국교회는 지금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살펴보자. 1995년에 인준된 『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는 제58조에서 비가톨릭 신자의 세례의 유효성 문제를 다루면서 성공회의 성직자가 집전한 세례는 유효한 것으로 인정한다고 명시하였다. 그리고 기타 교파 신자의 세례는 제59조에서 유효성이 의심된다고 지적하면서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하였다. 첫째는 그 교파의 교리가 세례성사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아니하는 경우가 있고, 둘째는 그 교파의 교리는 세례성사를 인정하더라도 교역자가 세례성사를 올바로 집전하지 아니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61조에서는 세례의 사실이나 그 유효성이 의심되는 비가톨릭 신자가 가톨릭 교회로 입교하는 경우 조건부로 세례를 줄 것을 권고하고 있다. 

 

정리하자면 한국 천주교회는 개신교에서 수여된 세례의 유효성을 인정하면서도 성공회를 제외하고는 개신교의 세례의 유효성 문제를 적잖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내 개신교의 특수한 사정으로 그동안 유연하고 탄력적인 법적용이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인정하면서도 한국 가톨릭 교회의 수구적인 경직성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의 사목 지침서 규정은 제8대 조선 대목구장(1890-1933년)이었던 뮈텔 (Gustavus Carolus Maria Mutel) 대주교가 1922년에 발표한 『서울교구 지도서』(Directorium Missionis de Seoul)의 내용과 일치한다. 이때 처음으로 한국 가톨릭에서 개신교의 세례의 유효성 문제를 다루었는데 그 내용이 80여 년이 지났어도 거의 글자 그대로 한국교회에 적용되고 있다. 당시의 지침서 136조를 옮겨보겠다. “이단자(열교인)들을 주님의 성교회에로 받아들이기 전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그들이 유효하게 세례를 받았는지 혹은 의심스럽거나 무효인 세례를 받았는지를 모든 경우에 있어서 특별한 방법으로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성공회의 교역자들에게서 받은 세례는 유효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다른 개신교 교역자에 의해 수여된 세례는 의심스러운 방법으로 행해졌다고 여긴다”(『서울교구 지도서』, 65면). 

 

이와 같은 이해를 바탕으로 사목자들이 던질 수 있는 질문을 다음과 같이 추정해 보았다. ‘사목자들은 개신교 신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많은 경우에 개신교 신자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려 할 때 사목자들은 교리를 가르치고 그들에게 조건부로 세례를 다시 주고 있는데 이것이 교회의 정신과 가르침에 부합하는가? 또 이들과 혼인할 때 세례의 유효성이 의심된다고 하여 미신자 혼인 장애 관면까지 주고 있는데 꼭 그렇게 해야 하는가? 현 상황이 이런데도 일치 주간이면 여러 형태의 포럼이나 기도회를 개최하며 개신교 신자들과 일치운동을 전개하는데 이와 같은 형식적인 제스처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현재의 어정쩡한 태도로 얼마나 더 그들과의 일치를 진전시킬 수 있을까?’ 이와 같은 많은 질문이 가능할 것이다. 나중에 이러한 문제를 하나하나 짚어볼 기회가 있으리라 믿으며, 여기에서는 현재 우리나라 사목 지침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간결하게 전향적인 사목적 해결방법을 모색해 보겠다.

 

먼저 개신교 신자의 세례의 유효성 문제는 보편교회가 이미 인정한 것이다. 1967년 3월 17일에 교황청에서 「일치 지침서」(Directorium Oecumenicum)를 발표하였는데, 여기에서는 가톨릭 교회로 개종하려는 개신교 신자들에게 무분별하게 조건부로 세례를 주지 말 것과 그들이 받은 세례의 유효성에 대해 의심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다. 

 

그러면 도대체 세례의 유효성을 인정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현행 교회법과 교회 문서들을 통해서 교회가 가르치는 세례의 유효성에 대한 판별 기준은 세례성사 집전 때에 질료와 형상을 제대로 갖추어 수여했느냐는 것이다. 세례 때의 질료는 물이고 형상은 성삼의 호칭이다. 다시 말해 물을 이용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가 베풀어졌다면 유효한 세례를 받은 것이다. 세례 주는 자의 지향은 세례의 유효성과 무관하다. 

 

필자는 이 문제를 연구하면서 한국 개신교의 주류를 이루는 감리교와 장로교의 세례 예식서를 살펴보았다. 현행 우리의 예식과 같았다. 세례의 유효성을 의심할 소지가 없었다. 따라서 사목자들은 나름대로의 분별력을 가지고 이 문제에 대해 접근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른 나라의 경우와 같이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 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루어 대표적인 한국의 개신교 교단과 협약을 하여 세례 증명서를 동일한 양식으로 주고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하루빨리 조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미 많은 다른 나라에서는 1970년대 초반에 이와 같은 작업을 끝냈다. 

 

더 이상 개신교에서 이미 유효한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조건부로 세례를 수여함으로써 서로에 대한 불신을 조장할 필요는 없다. 이를 위해서는 사목자들이 제도적 장치가 마련될 때까지 높은 분별력을 지니고서 유연성 있게 대처해 나가야 할 것이다. 혼인할 때 사용하는 관면서에도 타 교파(개신교) 혼인 금지와 미신자 장애를 동시에 주어야 하는 이상한 관례도 하루빨리 개정되어야 한다. 세례 받지 않은 사람이면 미신자 장애로 족하고 세례 받은 사람은 타 교파 혼인 금지의 허가면 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주교회의에서 새롭게 결정해 주길 바란다.

 

 

3. 혼인 전 교육을 충분히 시키자

 

『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 제104조의 규정은 다음의 내용을 명시하고 있다. “혼인 예정자는 적어도 혼인하기 1개월 전에 사목구 주임사제와 의논하고 혼인과 가정에 관한 교리를 교육받아야 한다. 혼인 예정자는 혼인성사를 받기에 합당한 내적, 영적 준비에 우선적으로 주력하고 외적, 물질적 준비는 절도 있게 하여야 한다.” 교회법 제1063조에서도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그리스도인 혼인의 의미와 그리스도교인 부부 및 부모의 임무에 관하여 교육되어야 함을 일깨우고 있다. 그런데 혼종혼인의 경우에는 나라마다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각국 주교회의에 전적으로 위임되어 있다.

 

현재 우리나라 대부분의 교구에서는 혼인강좌 등을 통해 혼인할 젊은이들에게 혼인 전 교육을 시키고 있다. 2003년 통계를 보면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 혼인 대상자(50,722명) 가운데 42.7%(21,666명)가 혼인강좌를 이수했다. 강좌를 이수하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 적잖은 젊은이들은 사제에게 개인적으로 혼인교육을 받았으리라 여기면서도, 기본적인 교육 없이 치러진 혼인도 상당수가 되기에 심히 걱정된다. 교회 법원에서 일하다 보면 안타까운 경우를 너무도 많이 접하기에 이를 추정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혼인강좌를 개최하는 교구에서 얼마나 질 높은 교육을 전달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가톨릭 신앙인들 사이의 혼인이나 불교인과의 혼인, 개신교 신자와의 혼인 모두를 뭉뚱그려 4시간 남짓 하는 일괄적인 프로그램으로 끝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계신 분들에게 박수를 보내면서도 좀 더 세련된 접근방식이 필요함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혼종혼인의 경우는 특별한 경우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먼저 개신교 신자들과의 혼인과 미신자와의 혼인, 그리고 가톨릭 신자끼리의 혼인을 구분하여 교육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준비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시간도 좀 더 늘려야 한다. 시간을 늘리면 젊은이들이 오지 않는다고들 야단인데 그렇게 젊은이들의 세속적 성향과 타협하여 빚어진 현재의 결과는 어떠한가? 만족스러운가? 아니다. 교회에서조차 높은 이혼율과 파괴된 가정을 발견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결과는 우리에게 자괴감을 느끼게 하고 있다. 어쩌면 그동안의 우리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는 적극적인 현실 판단이 필요한 때가 바로 지금이 아닌가 생각한다. 과거에 대한 허탈감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떨쳐버리고 본래의 교회의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 단호하고 엄격한 혼인교육이 현재의 혼란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4. 사목자가 예비부부와 함께 나눌 대화

 

혼종혼인에서 교회가 지향하는 바는 부부가 서로 다른 종파이지만, 서로의 신앙을 인정하며 평화로이 각자의 신앙생활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우리 가톨릭 신자는 가톨릭 신앙을 온전히 보존하고 앞으로 출산할 자녀들을 모두 가톨릭 교회에서 세례를 주고 교육시키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언과 약속을 하기는 쉬우나 이를 실현시키기는 결코 쉽지 않다.

 

일단 교회를 찾은 예비부부에게 사목자는 그들이 청하는 혼종혼인은 역사 안에서 빚어진 교회의 분리라는 원죄의 결과를 고스란히 아픔으로 간직한 혼인임을 인식시켜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새롭게 진전되고 있는 교회일치의 표상임을 일깨워주어야 한다. 많은 대화와 인내가 필요할 것이다. 

 

그들이 앞으로 겪게 될 부정적인 결과에 대해서도 충분한 정보를 전해주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지금 선택하고자 하는 삶에 대해 비판적 안목을 지닐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또한 가톨릭 교회가 신자의 구원을 위해 존재하며 이는 신앙을 지킬 때 가능한 것이기에 혼종혼인은 이와 같은 내용이 확인될 때 비로소 허가해 줄 수 있음을 비가톨릭 배우자에게 인식시켜 주어야 한다. 다시 말해 서로가 서로의 신앙을 강요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여야 하며, 적어도 가톨릭 배우자의 의무이며 권리인 신앙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주지시켜야 하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만일 혼인 때문에 가톨릭 신앙생활을 더 이상 하지 못할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시 말해 배우자가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종파에 귀의하도록 종용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물론 최종 결정권은 본인에게 있다. 그리나 사목자들에게는 교회의 가르침을 또렷이 전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그와 같은 조건에서는 혼인을 허가해 줄 수 없으며 나아가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보다 구원 문제가 우선시됨을 분명히 인식시켜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목자들이 특별한 주의를 갖고 경계해야 할 문제는 혼종혼인의 결과로 나타날 수 있는 무관심과 거짓 평화이다. 곧 서로 다른 종파의 사람들이 만나 가정을 꾸미면서 나타날 수 있는 종교적 무관심과 형식적 평화주의의 행태이다. 다시 말해 서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려는 방법으로 둘 다 신앙생활을 접어버리는 경우이다. 이는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차라리 다른 사람을 배우자로 선택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아일랜드의 경우, 가톨릭과 성공회 그리고 다른 개신교 지도자들은, 혼종혼인을 하려는 두 남녀가 각각의 교역자들을 만나 혼인에 대한 교리를 듣고 각각의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면서 평화로이 가정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이들이 혼종혼인으로 야기될 수 있는 신앙생활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앞으로 생길 자녀들의 세례 문제와 종교교육 문제에 대한 결정까지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이끈다. 그리고 교회법적 혼인의 형식과 장소 그리고 전례 문제까지도 서로 다른 종파의 입장을 듣고 그들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이끈다. 우리나라에서도 하루빨리 이와 같은 문제를 평화로이 해결하기 위한 종파 간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5. 가톨릭 배우자와 사목자의 대화

 

제일 먼저 가톨릭 신자는 가톨릭 신자와 혼인하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가장 바람직한 선택임을 사목자는 잊지 말아야 한다. 많은 젊은이들이 가톨릭 신자 가운데에서 미래의 배우자를 선택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사목적 지혜가 어리석은 충고로 끝나리라는 예단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가 9.1%밖에 되지 않는 우리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개신교 신자와의 만남은 불가피한 현실이다. 그래서 관할권자의 허가가 필요한 것이고 이와 같은 허가를 위한 조건이 교회법에 명시되어 있는 것이다. 

 

가톨릭 배우자에게는 혼종혼인을 금하는 두 가지 이유를 분명히 인식시켜 주어야 한다. 첫 번째는 혼종혼인을 함으로써 가톨릭 신자의 신앙생활이 위협받을 수 있고, 두 번째는 혼인한 다음에 태어날 자녀들을 가톨릭 교회의 세례와 교육으로 보살필 수 없는 상황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여교우의 신앙상담 내용을 살펴보자.

 

“신부님, 저는 유아세례를 받고 성장하여 습관처럼 성당에 다녔지만 2년 전 목사의 아들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혼인하였습니다. 물론 혼인조당입니다. 그런데 지금 깨달은 것은 이 결혼생활을 도저히 계속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온갖 독설로 천주교를 모독하고, 천주교 신자였던 저를 마귀 취급하는 시어머니를 이제는 더 이상 바라볼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이런 상태를 남편에게 이야기하면서 날 좀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지만 오히려 저를 악독하고 못된 여자라고 온갖 위협을 합니다. 고통이 너무 큽니다. 도저히 함께 살 수가 없습니다.”

 

안타까운 일이다. 열면 불행해질 판도라 상자를 열고 후회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너무도 자주 만난다. 주일마다 부부 가운데 한 사람은 성당에 가고 다른 사람은 예배당을 찾는 생활을 죽을 때까지 평화로이 유지할 수 있는 경우가 얼마나 되겠는가? 혼인이란 두 사람만의 만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문과 가문의 만남이며, 가풍이 더없이 중시되는 한국사회에서 얼마나 평화로이 서로의 신앙을 인정하며 살아갈 수 있겠는가? 더욱이 시댁이나 처가댁에 얹혀서 살아가고 있다면 이 문제는 부부의 침실 문지방을 넘어 함께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의 평화를 위협하게 된다. 어쩌면 한 사람의 순교자(?)를 발생시킬 수 있는 문제로까지 확대될 수 있다. 자녀들의 세례 문제와 종교교육 문제는 어찌 되겠는가?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혼종혼인은 갈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그러므로 신앙을 초월한 사랑으로 만나 혼인을 부탁하는 부부들에게 사목자들은 아무런 준비도 시키지 못한 채 무작정 축복만 해줄 수는 없는 것이다. 모든 위험요소를 각오할 준비를 갖추어줘야 한다. 예견되는 어려움을 극복할 용기와 소신이 필요함을 일깨워 줘야 한다. 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자신이 없다면 아직도 늦지 않았음을 분명히 밝혀주어야 한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들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신앙의 모범을 보일 것도 요청하여야 한다. 가톨릭 신앙이 참으로 소중하고 이를 통해 가정의 평화를 이룩할 수 있음을 상대 배우자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신앙 안에서만이 자신이 가정에서의 역할을 온전히 수행할 수 있음을 상대 배우자에게 주지시킬 수 있도록 교육시켜야 한다. 또한 자기 종파의 편협한 주장 때문에 제대로 인식할 수 없었던 가톨릭 교회의 정신과 살아있는 신앙의 내용이 상대 배우자에게 온전히 전달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함을 알려주어야 한다. 이와 같은 삶의 태도가 자신의 배우자와 대화를 가능하게 하고, 이를 통해 가족 전체를 위한 신앙의 합의를 도출해 낼 수 있다면 더없이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6. 혼인 후 사목적 배려

 

교회법 제1128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교구 직권자들과 그 밖의 영혼의 목자들은 가톨릭 신자 편 배우자와 혼종혼인에서 출생한 자녀들이 그들의 의무들을 이행하기 위한 영적 도움이 부족되지 아니하도록 보살펴야 하고, 또한 부부생활과 가정생활의 일치를 증진하도록 부부들을 도와주어야 한다.”

 

영혼의 목자들은 혼종혼인을 한 이들이 참으로 그들 신앙의 결단대로 생활할 수 있도록 특별한 관심을 갖고 섬세한 배려를 해야 한다. 비록 가톨릭 신자가 가톨릭 신앙을 포기하고 다른 종파에 귀의하여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결단을 내렸을지라도 사목자들은 마지막까지 그들의 구원을 위해 고뇌해야 한다. 참으로 필요한 것은 이들이 서로를 인정하는 것과 자신들의 결단에 따라 그리스도인으로 평화로이 생활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식들을 그리스도인으로 교육시킬 책임과 의무를 동시에 느끼고 갖는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있을 결단에 따른 결과가 마치 자신의 종파를 배신하는 행위나 패배로 여겨서는 안 된다. 오히려 지금까지 여전히 존재하는 교회 분열의 고통스러운 결과를 십자가로 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맺는 말

 

지금까지 혼종혼인에서 발생하는 문제와 이 문제를 대하는 사목자의 정신과 자세에 대해 살펴보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아직 개신교 교역자들과 함께 작업하지 못하였으므로 조금은 일방적인 주장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우리 가톨릭 교회의 기본 정신은 영혼의 구원에 있고, 2,000여 년의 경험을 통해 나온 일반 규범들이기에 받아들이는 데에 큰 불편이 없으리라 여긴다. 우리 사목자들이 이와 같은 내용을 잘 숙지하여 좀 더 질 높은 봉사를 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리고 혼종혼인은 다른 종파와의 만남이기에 필연적으로 그들과 함께 작업해야 할 내용을 지니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1997년에 서로 다른 종파 간에 발표한 지침서에서 네 가지 원칙을 제시하고 있는데, 우리에게도 참고가 된다고 생각하여 이 원칙을 소개하면서 글을 맺고자 한다. 첫째, 자녀들의 교육에 대한 권리와 의무는 배우자 모두가 동등하게 갖고 있다. 둘째, 거짓 평화와 무관심은 피해야 하며, 종교교육의 문제를 아이들이 성장할 때까지 미루는 일은 없어야 한다. 셋째, 가톨릭 교회나 그 외의 종파에서 그들에게 어떤 형태의 압력을 주어서는 안 된다. 넷째, 부부가 합의한 결정은 온전히 존중되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개신교 교역자들과 함께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어느 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고 영혼의 구원을 위해 바람직한 것인지 고민하며 작업할 시간이 오길 기대한다.

 

[사목, 2004년 8월호, 홍기선(춘천교구 송우리본당 주임신부 · 서울대교구 법원 재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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