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자료

[구약] 성경 인물 이야기: 마카베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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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9-25 ㅣ No.6758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마카베오 (1)

 

 

지금부터 소개할 성경 인물은 마카베오입니다. 마카베오라는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마카베오가 살았던 때는 헬레니즘(어원은 ‘그리스어를 말하는 사람’입니다), 즉 그리스 언어, 풍속, 예술, 사상 등이 세계로 뻗어 나가던 시대입니다.

 

이러한 그리스 문화의 세계화를 가능케 한 사람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입니다. 기원전 (BC) 336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동방 원정길에 오릅니다. 그는 BC 334년 소아시아를 점령하고, BC 332년 이집트를 정복합니다. 그리고 다음 해 메소포타미아로 돌아와 지금의 모술 북동쪽으로 30㎞ 떨어진 가우가멜라에서 다리우스 임금을 꺾고 페르시아를 멸망시킵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자신이 정복한 모든 지역에 그리스 문화를 전파했습니다. 그리스어는 정복지의 공용어가 됐고, 그리스풍의 도시 ‘폴리스’들이 건설됐습니다. 그리스 문화는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빠르게 확산하였습니다. 어떤 역사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숨만 쉬어도 그리스 문화가 흡수되었다.” 사실 유다인 가운데도 대사제 야손을 비롯하여 헬레니즘에 빠진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유다교의 전통을 고수한 사람들 또한 많았습니다.

 

BC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바빌론에서 병사한 뒤 그의 제국은 ‘디아도코이’(후계자들)라 불리는 부하 장군들에 의해 쪼개집니다. 안티고노스가 마케도니아를, 프톨레마이오스가 이집트를, 셀레우코스가 시리아와 지금의 튀르키예를 차지해 왕조를 수립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셀레우코스 왕조 사이에 낀 유다는 처음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를 받다가 BC 199년부터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셀레우코스 왕조가 강성해져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아래로 밀어내고 영토를 확장했다는 말입니다.

 

비록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는 처지가 되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때는 물론이고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3세와 셀레우코스 4세 임금의 치하에서도 그들이 펼친 관용 정책 덕분에 유다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바칠 수 있었고 종교적 특권도 어느 정도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다 BC 175년 안티오코스 4세가 셀레우코스 왕조의 임금이 되면서 혹독한 박해가 시작됩니다. [2023년 9월 24일(가해) 연중 제25주일(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마카베오 (2)

 

 

안티오코스 4세는 자신을 스스로 ‘에피파네스’, 즉 신의 현현이라고 불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비슷한 발음을 따서 그를 ‘에피마네스’(미친 사람)라 불렀지만요. 이렇게 안티오코스 4세는 사람들로부터 신에 준하는 공경을 받길 원했으나, 유일신 하느님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그것은 우상숭배에 불과하였기에 당연히 거부당했습니다. 이러한 유다인들의 태도는 안티오코스 4세를 분노하게 했습니다.

 

이 외에도 안티오코스 4세가 유다인들을 박해한 현실적인 이유 세 가지가 더 있습니다. 첫째, 유다인들이 헬레니즘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제국 내의 다른 민족에 동화되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은 자신들의 전통만을 고집하며 고유한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이것은 통일 제국을 꿈꾸던 안티오코스의 정책에 반하는 것이죠.

 

둘째, 안티오코스 4세는 오랜 전쟁으로 고갈된 국가 재정을 메우기 위해 과도한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그리고 유다에서 가장 큰 부가 축적된 예루살렘 성전의 보물까지 약탈합니다. 당연히 유다인들은 저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셋째, 안티오코스 4세는 이집트와의 접경지대에 자신에게 충실한 민족을 둬 정치, 사회, 군사적으로 안정을 추구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유다인들은 잔혹한 안티오코스 4세의 셀레우코스 왕조보다 오히려 이전의 통치자였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더 가까운 경향을 보였습니다. 이렇게 유다인들이 셀레우코스 왕조의 방패가 되기는커녕 잠재적 위협 세력이 된 것은 박해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안티오코스 4세는 기원전 167년에 유다인들의 박해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질투심 많고 편협한 신이 제정했다는 이유를 붙여 안식일을 비롯한 유다 축제를 금지했습니다. 또한, 유다인의 민족 정체성을 상징하는 할례도 금지했습니다. 그리고 부정한 음식인 돼지고기를 먹도록 강요했습니다. 율법 준수도 금하고 율법서를 불태웠으며, 예루살렘 성전의 번제단 위에 제우스의 제단을 세워 제사를 바치게 했습니다. 안티오코스 4세는 이러한 조치를 따르지 않는 유다인들을 사형에 처했습니다.

 

이때 적지 않은 유다인이 죽음이 두려워 배교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유다인은 각자의 방식으로 완강히 저항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순교로써 저항했고, 다른 이들은 칼을 들고 일어섰습니다. 무장 항쟁의 대표적 인물이 마타티아스 사제와 그의 아들들입니다. [2023년 10월 1일(가해) 연중 제26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마카베오 (3)

 

 

항쟁은 예루살렘에서 서북쪽으로 27㎞ 떨어진 작은마을 모데인에서 시작됐습니다. 이 지역의 사제인 마타티아스는 이교 의식을 거행하려던 유다인들과 관리를 죽입니다. 그리고 아들들인 요하난, 시몬, 유다, 엘아자르, 요나탄과 동지들을 데리고 유다 광야로 몸을 숨겼습니다.

 

이 일은 우발적인 사건으로 끝날 수도 있었는데, 본격적인 무장 투쟁으로 발전하도록 힘을 보탠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하시딤’이 그들에게 합류한 것입니다.

 

하시딤은 ‘하시드’의 복수형으로 ‘경건한 자’라는 뜻입니다. 하시딤은 율법과 조상들의 전통을 철저히 지켰고 어떤 이념에도 타협하지 않았던 이들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사이들은 이들로부터 유래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서 한여름에도 검은 정장에 검은 모자를 쓰고 구레나룻을 한 사람들을 볼 수 있는데, 이들이 하시딤의 후예들입니다.

 

율법에 충실했던 그들은 처음에는 안식일에 셀레우코스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안식일 법을 지키기 위해 맞서 싸우지 않아 1,000명이나 학살당했습니다. 이후에는 안식일이라도 전쟁은 허용하게 됩니다.

 

탈무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 여러 번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려고 한 번의 안식일을 범하는 것은 허용한다. 한 번의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죽는 것보다는 살아남아 더 많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내면 되는 것입니다.

 

마타티아스가 죽은 뒤 용맹한 장수일 뿐 아니라 뛰어난 전략가이기도 한 셋째 아들 유다가 항쟁의 우두머리가 됩니다.

 

그에게는 독특한 별명이 있습니다. ‘마카베오’인데, 유래에 대하여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 ‘망치’를 뜻하는 아람어 ‘마카바’에서 유래했다는 의견도 있고, 탈출 15,11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 구절의 우리말 성경의 번역은 이러합니다: “주님, 신들 가운데 누가 당신과 같겠습니까?” 그런데 히브리어 본문의 각 단어 첫 글자를 합치면 마카베오가 됩니다. 한 인물의 별명이었던 마카베오는 나중에 가문 전체의 이름이 됩니다. 그래서 마타티아스 가문이라고 부르지 않고 마카베오 가문이라고 부릅니다. [2023년 10월 8일(가해) 연중 제27주일(군인 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마카베오 (4)

 

 

유다 마카베오는 자기 군대의 강점과 약점, 그리고 적군의 강점과 약점을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셀레우코스 왕조 군대의 핵심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에서 그 파괴력을 증명한 중무장 보병 팔랑크스였습니다. 그런데 팔랑크스는 강력한 공격력과 방어력을 갖췄지만, 기동성이 떨어진다는 약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에 비해 유다 군대는 무장도 보잘것없고 조직력도 정교하지 않았지만, 날렵하고 지형에 익숙하다는 것이 강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작전을 세울 때 하나의 원칙을 정했습니다. 절대로 적군에게 전장과 전투방식을 선택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넓은 평야에서 대형을 갖추고 기다리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군대에 정면으로 마주치는 것은 자살행위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다가 궁리해 낸 방법은 전쟁의 주도권을 유지한 채 철저한 게릴라전으로 일관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다 군대의 활발한 게릴라 활동으로 예루살렘의 셀레우코스 주둔군의 지원이 끊길 상황까지 이르게 되자 사마리아의 통치자 아폴로니오스가 토벌에 나섭니다. 하지만 그는 유다 군대에 대패하고 죽임을 당합니다.

 

아폴로니우스가 패하자 세론 장군이 나섭니다. 하지만 그 또한 벳 호론 근처에 매복한 유다 군대에 패배합니다.

 

유다 마카베오가 이끄는 무장 항쟁이 거세지자 안티오코스 4세는 기원전 165년에 그의 반란을 진압할 임무를 신뢰하는 왕족인 리시아스 총독에게 맡깁니다. 리시아스는 프톨레마이오스, 니카노르, 고르기아스 장군을 유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보냅니다. 그들은 보병 4만, 기병 7천의 대군을 이끌고 엠마오에 진을 쳤습니다. 그에 비해 유다의 군대는 수적으로 훨씬 열세였고, 그것도 제대로 무장이 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바라는 만큼 갑옷과 칼을 갖추지 못하였다.”(1마카 4,6)

 

당연히 유다의 패배가 예상되었습니다. 마카베오기 상권은 상인들이 전쟁 포로가 될 것이 뻔한 이스라엘 노예를 사려고 몰려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마카 3,41). 하지만 유다는 이들을 기습공격으로 물리칩니다.

 

이에 리시아스는 다시 군을 소집합니다. 이번에는 보병 6만과 기병 5천의 대군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상대할 유다의 군대는 일만 명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벳 추르 전투에서 다시 승리합니다. [2023년 10월 15일(가해) 연중 제28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마카베오 (5)

 

 

리시아스의 대군을 물리친 유다 마카베오는 기원전 164년 예루살렘을 수복하고 성전을 탈환합니다. 그리고 그해 12월 25일 예루살렘 성전 정화 의식을 거행하고 새 제단을 축성했습니다. 3년 전 성전에 제우스 제단이 세워진 치욕을 겪은 바로 그날입니다.

 

유다인들은 이날을 기념해 성전 봉헌 축제 곧 ‘하누카’를 제정했습니다. 하누카는 촛대에 불을 밝히는 예식이 중심이 되어 ‘빛의 축제’라고도 불리는데, 8일간 거행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할 때 등잔에 기름이 하루치밖에 없었는데도 8일간 꺼지지 않고 타올랐다는 전승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안티오코스 4세는 기원전 163년에 죽습니다. 하지만 그의 사후에도 셀레우코스군과 마카베오군의 전투는 계속됩니다.

 

리시아스는 이전보다 더 큰 규모의 군세를 갖춘 보병 10만, 기병 2만, 코끼리 32마리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진격해 옵니다. 유다가 이 대군의 공격마저 막아내자, 리시아스는 화친을 맺고 돌아갑니다. 셀레우코스 왕조로부터 공식적으로 신앙의 자유를 보장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셀레우코스 왕조는 유다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새로 임금이 된 데메트리오스 1세는 보병 2만과 기병 2천으로 이루어진 군대를 보냅니다. 그리고 유다는 단 8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맞서 싸우다 전사합니다.

 

이것이 연전연승을 거두던 유다 마카베오의 첫 패배입니다. 이미 죽음을 예감한 유다는 도망치자는 군사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저들 앞에서 달아나다니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죽어야 할 때가 닥쳤다면, 동포들을 위해서 용감하게 죽어 우리의 명예에 오점을 남기지 말자.”(1마카 9,10)

 

이렇게 유다 마카베오가 구차하게 살아남는 대신 장렬한 죽음을 선택한 덕분에 그의 사후에도 항쟁의 불씨는 꺼지지 않습니다.

 

이후의 항쟁은 그의 형제들 요나탄과 시몬이 이끌게 됩니다. 그리고 기원전 142년 시몬이 드디어 독립한 유다의 임금이 되어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조인 하스모니아 왕조를 엽니다. [2023년 10월 22일(가해) 연중 제29주일(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전교 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마카베오 (6)

 

 

유다 마카베오는 그 이름대로 단단한 망치처럼 하느님의 백성을 짓누르는 거대한 바위와 같은 셀레우코스 왕조를 깨부쉈지만, 미국 영화의 주인공 람보가 아닙니다. 자신의 힘만을 믿고 수많은 적을 향해 홀로 뛰어드는 할리우드식 영웅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는 오직 하느님의 힘을 믿은 참 신앙인이었습니다:

 

“전쟁의 승리는 군대의 크기가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힘에 달려 있다. 그분께서 친히 우리 앞에서 저들을 무너뜨릴 것이니, 너희는 저들을 두려워하지 마라.”(1마카 3,19. 22)

 

그리고 마카베오기가 유다 마카베오의 이름을 땄지만, 사실 이 책은 그의 이야기만으로 채워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카베오기의 주인공은 한 명의 영웅이 아니라, 마카베오기 하권 7장에 기록된 일곱 아들과 어머니처럼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순교자입니다.

 

이들의 순교의 배경에는 부활에 대한 믿음이 깔려있습니다. 비록 신약의 부활 사상과는 차이가 있지만,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믿음은 순교의 강력한 동기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생겨날 때 그를 빚어 내시고 만물이 생겨날 때 그것을 마련해 내신 온 세상의 창조주께서, 자비로이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다시 주실 것이다.”(2마카 7,23)

 

마카베오기는 유다 땅에 하느님의 자비를 불러온 것이 이 순교자들의 피라고 증언합니다:

 

“죽은 이들의 피가 당신께 하소연하는 소리를 들어 주시며, 무죄한 아기들이 당한 무도한 학살과 당신의 이름이 받은 모독을 기억하시고, 악에 대한 당신의 혐오감을 드러내시기를 간청하였다. 마카베오가 군대를 조직하자마자 이민족들이 그를 당해 내지 못하게 되었으니, 백성에 대한 주님의 분노가 자비로 바뀐 것이다.”(2마카 8,3-5)

 

하느님과 백성의 적 앞에 서서 용감하게 싸운 이는 유다 마카베오였지만, 그의 승리가 가능했던 것은 순교자들의 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순교의 역사는 결코 패배의 역사가 아닙니다! [2023년 10월 29일(가해) 연중 제30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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