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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가톨릭 문화산책: 건축 (4) 나르텍스, 구원을 바라며 정화하는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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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6-01 ㅣ No.171

[가톨릭 문화산책] <19> 건축 (4) 나르텍스, 구원을 바라며 정화하는 장소

거룩한 곳으로 가기 전 거치는 참회의 장소, 열린 공간


- 베즐레 수도원 성당(프랑스).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해 하느님의 집 안에 있는 거룩한 영역, 곧 회중석에 들어서려면 잠시 멈추고 문과 회중석 사이에서 나를 정화하는 장소를 거쳐야 한다. 성당의 문은 이쪽과 저쪽, 안과 밖을 구분하는 곳이다. 이 문이 열리면 거룩한, 그래서 두려운 저쪽을 향하며 구원을 향한 희망을 준비하는 장소가 나타난다. 그래서 새 성전이 봉헌될 때 주교는 성당 문턱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문턱을 넘어서는 모든 이가 여기에서 구원과 축복, 도움과 위로를 얻을 것입니다." 이를 두고 종교학자 반 델 레우는 "사람이 제일 처음 하는 거룩한 행위는 정화"라고 말한 바 있다. 오늘날에는 성당 안쪽 문에 둔 성수대가 거룩한 영역에 들어가기 위한 이러한 정화 행위를 표현해주고 있다.

본래 초기 그리스도교와 비잔틴 바실리카나 성당 앞에는 사람들이 모이는 중정이 있었는데, 그 성당 정면에 붙어 있는 중정의 아케이드는 성당의 입구도 된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산탐브로지오(Sant' Ambrogio) 성당 정면에 붙은 열려 있는 중정의 아케이드가 그렇다. 그러던 것이 성당 앞 중정이 없어지면서 로마의 산타 아그네제(Santa Agnese) 성당처럼 그 안에 옆으로 긴 공간이 하나 더 나타나게 됐다. 이렇게 생긴 입구와 회중석 사이에 있는 부분을 나르텍스(narthex)라고 불렀다. 나르텍스가 건물 안쪽에 있으면 에소나르텍스(esonarthex), 바깥쪽에 있으면 엑소나르텍스(exonarthex)라고 불렀다.

솔로몬 성전은 3개의 방으로 돼 있었는데, 그것은 각각 세속의 세계, 새로운 지상의 낙원, 하느님의 나라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솔로몬 성전 동쪽에는 현관인 울람(ulam)이 있고, 그 현관과 성소 사이에 있는 첫 번째 방을 통해 성소(hekal)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방과 성소 사이는 벽으로 완전히 분리된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성전과 그 앞마당을 엄격하게 분리했다. 현관에 두 기둥을 세우고 오른쪽 기둥은 야킨, 왼쪽 기둥은 보아즈라 했고, 그 기둥 꼭대기에는 나리꽃 모양으로 만든 것을 얹었다(1열왕 7,21-22). 이것을 보면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의 나르텍스는 울람과 성소 사이에 있는 '세속의 세계'를 이어받은 것이다.

- 산탐브로지오 성당(이탈리아 밀라노). - 산탐브로지오 성당(이탈리아 밀라노).


로마네스크 성당에서는 서쪽 정면 좌우에 높은 탑을 두었으므로 이 앞부분의 아래쪽은 나르텍스로 사용됐다. 이곳은 기둥이 많아서 어두웠기 때문에 밝은 안쪽 회중석과 제대와는 크게 구별됐다. 1000년 무렵부터는 성당 서쪽에 아트리움을 두지 않게 되면서 나르텍스는 성당을 특징짓는 서쪽 현관 쪽으로 발달했다. 클뤼니(Cluny)나 베즐레(Vezelay) 수도원 성당에서는 나르텍스가 13세기까지 사용됐다. 그러던 것이 고딕 건축에 들어와서는 나르텍스가 사라졌다. 그 대신에 그 자리에 세 개의 출입구가 생겼고, 그때부터 벽 없이 기둥으로만 열려 있는 곳을 포치(porch, 현관)라고 부르게 됐다. 나르텍스와 포치가 서로 혼동돼 설명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따라서 나르텍스는 아직 적당한 번역어가 없지만, 그렇다고 '현관'이라고 번역할 수는 없다.

세례를 받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몸을 영하는 이들은 회중석(nave)에 모일 수 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아직 세례를 받지 못했을지라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예비신자들은 단지 주님의 몸을 영하지 못할 뿐이지 당연히 회중석에 앉을 수 있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나 비잔틴 교회에서는 세례를 받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성당 안에서 구분됐다. 예비신자나 회개하는 자들은 말씀 전례가 끝나면 회중석에서 나가 있었는데, 나르텍스는 이들이 나가 서 있는 장소였다.

또 나르텍스에서는 세례를 줬다. 세례대는 오늘날에도 성당의 바깥쪽 또는 안쪽 입구에 종종 놓이는데, 미국 오하이오의 성 미카엘 대천사 성당에서는 나르텍스에 십자가 형태의 세례대를 뒀다. 때문에 이미 세례를 받은 사람은 이 장소에서 세례로 거듭난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성주간의 소시간경과 같은 참회예절을 회중석이 아닌 나르텍스에서 거행하기도 하며, 러시아 정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장례식을 이곳에서 한다. 이곳에서는 구마도 이뤄졌고 초도 살 수 있었다.

이렇듯 나르텍스는 전통적으로 참회와 갱신의 장소였다. 나르텍스는 대개 폭이 길고 깊이가 얕으며, 회중석과는 낮은 벽이나 스크린으로 구분돼 있었다. 이곳은 각 사람이 전례를 더 잘 준비할 수 있도록 마음을 준비하며, 거룩한 저쪽으로 넘어가기 위한 중간 지대와 같은 곳이다. 프랑스 베즐레의 로마네스크 순례 성당에서 볼 수 있듯이, 회중석으로 들어가는 입구 위에는 위엄 있는 조각이 얹혀 있기도 했다. 시편은 "저의 하느님 집 문간에 서 있기가 악인의 천막 안에 살기보다 더 좋습니다"(시편 84,11)라고 노래하고 있는데, 이 말씀을 사용한다면 나르텍스는 '하느님 집 문간'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나르텍스는 구분만을 하기 위한 장소가 아니었다. 미사에 참례하지 못하고 성체를 영할 수는 없는 이들도 이곳에서 복음과 가르침을 들었다. 나르텍스는 교회의 성사적 부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교회 바깥도 아니었다. 따라서 나르텍스는 예비신자와 아직 교회의 지체가 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장소, 성체성사의 신비에 허락되지 못한 참회자나 아직 일치를 이루지 못한 이들을 위한 장소, 피난처이자 이들을 초대하는 장소였다. 오늘날엔 이 신중한 의미를 지닌 공간이 거의 다 사라져 버렸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전례에 참례할 수 없는 사람이나 참례하려 하지 않는 사람 등을 구분하지 않고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깊은 뜻을 가진 영역이었다.

- 성 미카엘 대천사 성당의 나르텍스에 있는 십자가 형태 세례대(미국 오하이오).


교부들에게 나르텍스는 죄가 완전히 사해지지 못한 세계의 상징이었다. 그것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방인의 뜰' 또는 '바깥 뜰'과 비교됐다. 이곳은 성전 안에 있는 1m 남짓한 낮은 벽이나 난간으로 둘러싸인 장소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곳은 이방인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개방돼 있었으며, 이 낮은 벽이나 난간을 통해 그 안을 볼 수는 있었다. 그렇지만 유다인은 성전 안에 들어갈 수 있었고, 이방인들은 그 이상 들어갈 수 없었으므로 이 뜰이 유다인과 이방인을 분리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낳았다. 정결법에 따라 거룩한 돈인 옛 히브리 화폐로 성전세를 내려고 환전해 주던 곳이 '이방인의 뜰'이었다.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요한 2,13-22)고 하시며 상인들을 쫓아내시고 환전상의 탁자를 엎어버리신 곳이 이곳이었다.

가톨릭 개혁 이후에는 세례를 받지 않은 이들을 분리해 나르텍스에 있게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교회 건축가들은 회중석에 들어가기 전에 방 하나를 계속 만들어 두었다. 그리고 이 방이 회중석의 일부이면 이곳을 '안쪽 현관'(vestibule)이라 불렀고, 확실하게 구분되면 '바깥 현관'(porch)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회중석에 들어가게 되었는데도 전통적인 이름을 사용해 회중석에 들어가기 전 구역을 나르텍스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성당에서 나르텍스는 왜 중요한가? 그것은 바깥 세계에서 하느님의 집 안에 들어가기 위한 도입부이며 일종의 완충 지대요 환영의 장소다. 성당 제단을 향해 가기 전 멈춰 서서 미사의 의미를 되새기는 나르텍스가 있기에 사람들은 더 큰 기쁨으로 제대를 향할 수 있다. 또 미사를 드리러 가기 전이나 미사를 마친 후 모든 신자가 함께 모이는 공간이기도 했다. 이처럼 나르텍스는 전례를 마친 후에는 일상생활 속에서 미사의 신비를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는 곳이다.

오늘 우리의 성당에는 이런 깊은 의미를 가진 공간이 아예 사라져 버렸다. 나르텍스라는 이름은 없어지고 그 대신 그곳을 홀이라 부른다. 거의 모든 성당이 면적을 절약하다 보니 문에서 들어오자마자 몇 발만 걸으면 금방 회중석으로 이어지고, 그 홀조차도 좁고 짧다. 이런 홀도 회중석의 중심축 위에 있지 않고 측면에 놓이게 되면 결국 긴 복도가 회중석 뒤에도 이어지는 셈이 된다. 이 홀에는 주보나 성가책, 헌금 봉투 등이 놓이고 게시판도 걸린다.

그러나 일상 공간에서 전례 공간으로 넘어가는 곳, 성당에 들어서기 전 다시 세례와 미사의 의미를 되새기는 곳, 내가 정화되는 곳, 세례를 받은 이든 그렇지 않은 이든 모든 이가 구원의 희망을 가지게 되는 장소였던 나르텍스의 진정한 의미를 이제라도 우리의 성당 건축 속에 다시 살려내야 한다.

[평화신문, 2013년 6월 2일, 김광현(안드레아, 건축가,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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