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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에서 배운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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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2-07 ㅣ No.489

[교회사에서 배운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왜 내가 역사 공부를 하게 됐는지 누군가가 묻는다면 뭐라 답할까? 어느 대통령의 말처럼 운명일까? 고등학교 시절에 문과였던 나는 인문지리, 국토지리, 국사 과목을 좋아했다. 국사 선생님이 여선생님이셨는데 재미있게 잘 가르치시는 모습이 좋아 더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신학교에 와서는 지금의 광주대교구 교구장님이신 김희중 히지노 대주교님의 자상함이 좋아 교회사연구소에 들어가 열심히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인생에서 사소한 이유가 평생을 좌우할 결과를 낳기도 하듯이 나의 역사 공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1980년대를 살면서, 대학생인 막내 누님이 읽고 있던 「한미 관계의 재조명」 등은 역사를 통한 이해의 지평을 넓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신학생 때 교회사 논문을 쓰게 된 것은 루터의 종교개혁 이유가 알고 싶기 때문이었고, 써가는 과정에서 접한 논문을 통해 신교와 구교의 역사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가 살아왔던 서글픈 역사들, 예를 들자면 십자군, 종교재판, 갈릴레오 사건 등을 공부할 때는 왜 교회는 이렇게 하느님의 뜻과 다른 길을 걸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해소
하고 싶었다.

그 의문은 쉽게 풀리지 않았었는데 로마에서 교회사를 전공하면서 점점 풀렸다. 역사의 큰 그림을 보게 되면서 좀 더 넓은 이해를 가지게 된 것이다.

로마에서 공부할 때 “교회사를 배울 때 신앙이 없는 사람은 교회사를 공부할 수 없다.”고 하신 교회사 학부장 얀센 교수의 말이 떠오른다. 교회의 역사는 흔히 말하는 세계사의 한 부분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인간사와 더불어 하느님의 섭리 안에 이뤄진 일이기에 그러하다.

교회의 역사는 사건들이 단순히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개입이 있고 하느님의 섭리가 자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믿는 사람이 교회사를 바로 볼 수 있다고 배웠다. 사실 교회사 안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알아낼 수 있다면 교회사 공부의 핵심은 거의 완성했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역사 공부는 과거와의 대화라는 말이 있듯이 오늘의 시점에서 과거의 일을 바라보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바라볼 때 주의할 것이 많다. 과거의 역사적 사건을 단순히 오늘날의 윤리적 척도로 단죄해서는 안 된다. 그 당시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서 상황을 인식해야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잘못한 역사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잘못에 대한 반성을 통해 새로운 미래의 지평을 열어야 한다. 과거와 오늘에 대한 반성이 없다면 미래의 지평을 열 수도 희망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2000년 대희년을 앞두고 그동안 교회가 잘못한 일들에 대한 반성을 담아 「제삼천년기」라는 교서를 통하여 다가오는 제삼천년기를 준비하고자 하셨다.

그 교서에서 “교회는 자기 자녀들이 참회를 통해 과거의 과오와 불충한 사례들, 항구치 못한 자세와 구태의연한 행동으로부터 자신을 정화하도록 노력하지 않고는 새로운 천년기의 문턱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과거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강화하도록 도와주는 정직하고 용기 있는 행동입니다. 그것은 오늘날의 유혹과 도전에 직면하도록 우리를 각성시키고 이를 극복하도록 준비시키는 것입니다(요한 바오로 2세 교황교서 「제삼천년기」, 33항).”라고 밝히고 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고백이었다. 우리의 과오와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이 정직하고 용기 있는 행동이라는 가르침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회개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바탕으로 각 나라에서도 역사 안에서 잘못했던 과거에 대한 반성의 글과 책들이 나왔다. 그중에서 관심을 가져볼 만한 것으로 일본가톨릭중앙협의회 복음선교연구실에서 나온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이 책은 전시 체제하에서 일본 가톨릭교회의 입장과 신사참배에 대한 고백을 담고 있다. 일본 군부의 잘못에 침묵한 일본 천주교회의 반성을 담아 아시아의 형제자매들에게 용서를 청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소수의 목소리였다. 대다수의 일본 국민은 그런 책이 나온 줄을 아직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다수는 여전히 역사 안에서 반성을 게을리하고 있는 게 슬픈 현실이다.

최근에 쓰나미로 후쿠시마 원전이 파괴된 일본의 사태에 우리나라는 아무런 조건 없이 헌금을 모아 보내고 자원봉사자가 자원해서 봉사하며 이웃나라의 자연재해에 안타까운 마음을 함께했었다. 또한 일본에서 활동하던 한국의 연예인들도 그들의 아픔에 함께하고자 하였다. 우리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한국에 오랫동안 살아온 한 선교사는 “한국 사람들에게는 선교가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미 용서와 사랑을 온몸으로 실천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했다.

그런데 일부 정치인들이 독도 문제를 들고 나오자 순식간에 온정의 마음은 사라지고 싸늘한 이웃이 되고 말았다. 정말 역사적으로 가까운 이웃이 될 수 있는 좋은 계기였으며 역사 안에서 화해하고 미래의 동반자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한다.

성숙한 용서와 화해의 분위기가 ‘역시 당신들은 어쩔 수 없구나.’ 하고 뒤돌아서야 하는 마음으로 바뀌어서 역사를 전공한 사람으로서 안타깝다. 지나고 나서 그때 이렇게 전개되었더라면 하고 후회해도 지나가 버린 역사는 되돌릴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후손들에게 더 나은 세상을 마련하고자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역사 앞에서 책임이 크다.

과거 우리 선조들의 신앙을 살펴보면 오늘날의 신자들과 사제들의 삶을 반성케 한다. 을묘년(1795)에 있었던 주문모 신부 실포사건(失捕事件)의 내용은 이러하다.

밀고자에 의해 주문모 신부 체포령이 내려진 사실을 알게 된 신자들은 곧바로 주문모 신부의 거처를 창동(현중구 남창동)에 있는 강완숙의 집으로 옮겼다. 대신 집주인 최인길이 그대로 정동에 남아 신부 행세를 하기로 하였다.

그는 역관 출신이었으므로 어느 정도 중국어를 구사할 줄 알았기에 주문모 신부인 척하였다. 그래서 포졸들은 처음에 최인길을 중국인 신부로 알고 체포하였다. 그러나 이내 그의 신분을 파악하고는 그를 통해 신부의 거처를 알아내고자 하였지만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을묘년에 일어난 주문모 신부 실포사건이었다.

최인길을 체포한 다음날에 포졸들이 주문모 신부의 입국을 위해 함께 노력했던 윤유일과 지황을 체포하여 곧바로 포도청으로 압송하였고 문초하였다. 포도청에서는 그들로부터 모든 사실을 알아내려고 노력하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결국 이들 세 명은 그날 밤 곤장을 맞고 포도청에서 순교하고 말았으니, 이때 윤유일은 36세, 최인길은 31세, 지황은 29세였다. 순교 후 그들의 시신은 강물에 던져져 찾을 길이 없게 되고 말았다.

조선의 유일한 사제였던 주문모 신부를 구하려고 젊은 신자들이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몇 년을 숨어 다니며 선교했던 주문모 신부를 조정에서는 누구보다도 먼저 체포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룰 수는 없었다.

당시 주문모 신부는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피신 생활을 하였는데, 책롱사건(정약종이 천주교 서적과 일기와 주문모신부의 서한 등을 농짝에 넣고 보관하다가 1801년 천주교 금교령이 내려지자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운반하던 중 발각돼 물품을 압수당하고 체포된 사건이다.) 이 발생하자 한때 양제궁에 은거해 있다가 2월 24일에는 서울을 빠져나가 황해도 황주까지 가게 되었다. 그러나 자신 때문에 신자들이 입게 될 피해를 생각한 나머지 서울로 되돌아와 3월 12일(양력 4월 24일)에는 의금부에 자수하였다.

주문모 신부의 자수는 조정을 놀라게 하였다. 이후 위정자들은 포도청과 의금부에서 그를 문초하는 동안 교회의 모든 사정을 알아내고 특히 강완숙과의 관계를 들어 천주교 신자들을 통색(通色)의 무리로 단죄하고자 하였다. 게다가 양제궁이나 일부 양반 계층이 관련된 사실이 드러나자 ‘천주교 세력은 곧 국왕과 국가 전복을 꾀하는 모반 집단’임을 부각시키려고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도 주문모 신부는 이미 드러난 사실과 체포된 신자들에 대해서만 실토하였고 다른 일들은 철저히 숨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그에게 군율을 적용하였고, 이에 따라 주문모 신부는 4월 19일(양력 5월 31일)에 서소문 밖이 아니라 중죄인의 처형지인 새남터(서울 용산구 이촌동)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이 사건은 한국 천주교회사 안에서 신자들은 사제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사제는 신자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좋은 모범이 된다.

그러나 과연 오늘날 이러한 일을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을까? 과오든 잘못이든 역사 안에서 반성할 것은 반성하며 미래를 위해 나아가야 한다. 역사에서 배울 사건들은 참으로 많이 있다.

최근에 이태석 신부님의 삶이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한 개인의 삶이 오늘날 한국교회에 큰 울림이 되듯이 개개인의 역사 역시 중요하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제목을 달아 이 글을 시작하면서 앞으로 역사 전문가들의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를 기대한다. 더불어 시대를 바꾸는 좋은 모범이 되는 역사의 증인들이 이 땅에 많이 태어나기를 희망해 본다.

* 옥현진 시몬 - 광주대교구 보좌주교. 교황청립 그레고리오대학에서 교회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2년 1월호, 옥현진 시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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