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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ㅣ미사

[대림성탄] 생명의 말씀이 나타나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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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13 ㅣ No.964

생명의 말씀이 나타나셨도다

 

 

저의 조그만 방에는 예수님 얼굴을 그린 동방 교회의 이콘이 있습니다. 주님의 눈은 저를 항시 응시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주님의 눈길은 항상 같지는 않습니다. 늘 그윽하고 인자한 눈으로 저를 보시다가도 제가 엉뚱한데 정신을 팔 때는 아주 무서운 눈으로 제 내면의 어두움을 질타하십니다. 이처럼 한 장의 이콘은 성찰과 묵상을 통하여 우리를 늘 깨어있게 합니다. 흔히 이콘을 전통적 방법으로 그린 동방 교회의 성화로 알고 있지만, 사실 이콘은 우리 신앙의 표현이고 보이지 않으시는 하느님 말씀의 현현(顯現)입니다. 성 바울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라 했습니다 (골로 1,15). 이 ‘모상’ (eikon)이란 단어에서 이콘이라는 명칭이 나왔습니다. 이콘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신비와 말씀을 눈으로 경청할 수 있게 표현한 것입니다. 동방 교회에서 이콘은 성서와 같은 권위가 있고 특히 전례 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오늘 귀를 기울여 듣고자 하는 이콘은 15세기 경 러시아의 루블료프 (Rublev) 학파가 그린 성탄 이콘입니다. 이콘에서 구약의 예언서를 비롯한 마태오 복음서와 루가 복음서와 요한 복음서에서 말하는 성탄의 신비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이 이콘의 전체 배경은 금색입니다. 이 색깔은 하느님이 계신 ‘하늘’ (ouranos)과 하느님의 ‘빛’ (phos)을 상징합니다. 이 배경으로 말미암아 이콘에 등장하는 지상의 인물이나 사물들은 하느님 영광의 상징으로 변합니다. 다시 말해서 지상적 역사의 차원이 천상적 초자연적 신비의 차원으로 높아집니다.

 

먼저 아기 예수님을 눈여겨봅시다. 아기 예수님의 머리 위에 “IC XC”라는 글자는 “예수 그리스도” (Ιησου? Χριστο?)의 그리스말 약자입니다. 그런데 아기 예수님의 모습을 자세히 보면 마치 죽은 사람 같습니다. 예수님을 싼 포대기는 수의를, 구유는 석관을, 그리고 동굴은 돌무덤을 연상케 한다. 그러니까 이콘은 예수님의 성탄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봅니다. 다시 말해서 육화의 신비에서 파스카 신비를 보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은 등장인물들 가운데 가장 작게 그려져 있습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는 자신을 높이는 교만 때문에 죄를 짓고 낙원에서 쫓겨나서 죽음의 어둠 속에 있었습니다 (창세 3,1-24). 그러나 하느님이신 예수님은 가장 비천하고 낮고 작은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케노시스 (kenosis), 곧 비움의 신비입니다 (필립 2,6-11).

 

아기 예수님은 빛으로 빛나면서 동굴 속 어두움에서 두드러지게 구별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탄 낮미사 때 듣게 될 요한복음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빛이 어둠 속에 비치고 있건만 어둠은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요한 1,4-5). 예수님이 태어나신 장소는 동굴입니다. 동굴은 어두운 색깔로 그려져 있습니다. 이 어두운 굴은 땅 속으로 들어가는 입구이고 막 태어난 아기를 집어 삼키려는 용의 아가리이고 죽음의 세력을 상징합니다 (묵시 12,4-5 참조). 사실 예수님은 악의 세력을 없애시려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콘의 중심에 계시는 성모님께 자연히 눈길이 갑니다. 여러 등장인물 가운데 가장 크게 그려져 있고 동정녀께서 누워계신 침상의 색이 진홍색인 것은 어머니의 존귀함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성모님의 자세를 보면 이상하게도 성모님은 아기 예수님을 보지 않고 목자들을 향해 비스듬히 누워계시고 그 표정도 밝지 않으십니다. 제가 수도원 피정집에서 이 이콘을 가지고 성탄전례 피정을 지도할 때 그 이유를 물었더니, 한 자매님 대답인즉 “산후 우울증!” 이 대답에 얼마나 웃었는지 모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마리아를 모세와 비교하는 것입니다. 그 아무도 살아있는 상태에서 하느님을 볼 수 없습니다 (출애 33,20). 그래서 사람이신 동정녀 역시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맞대고 볼 수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성모님을 고통의 어머니로 드러냅니다. 수의에 싸여 계시는 아드님한테서 이미 수난과 죽음을 꿰뚫어 보시기 때문에 고통스러워서 아드님을 직접 보지 못하십니다 (루가 2,34-35; 요한19,25-27 참조).

 

성 요셉은 왼쪽 아래에 앉아 있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근심과 고뇌에 싸여 턱을 손에 받치고 있는 요셉은 마리아도 아들 예수님도 보지 않는 모습입니다. 이 모습에서 우리는 요셉이 자신과 혼인하기 전에 임신한 마리아 때문에 고민한 사실을 읽을 수 있습니다 (마태 1,18-19). 요셉의 이 모습에서 이콘은 두 가지 신비를 말해줍니다.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하느님의 아들이고, 마리아는 동정으로 낳은 어머니임을 증거합니다. 요셉 앞에 서 있는 노인은 아담이라 합니다. 그는 막대기를 들고 있는데 이것은 아론과 이새의 막대기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 막대기는 새 하와인 마리아를 상징합니다. 아담은 요셉에게 동정녀의 출산으로 성취된 예언을 상기하게 합니다. 곧 구약의 여러 예언자들이 예언한 대로 메시아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신다는 사실을 아담은 요셉에게 일러줍니다. 우리는 오른편 아래에 아기 예수님을 씻고 있는 두 여인을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있는 여인은 아르메니아 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우리의 첫 어머니 하와라고 합니다 (창세 3,20). 하와는 성모님과 비교됩니다. 첫째 하와의 불순종으로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둘째 하와이신 마리아의 순종으로 죄 사함과 구원이 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서 있는 다른 여인은 이집트 곱트 교회 전승을 따르면 살로메라고 합니다. 성가정이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신 할 때 같이 따라간 여인입니다. 두 여인이 예수님을 목욕시키는 장면은 아기 예수님께서 참 인간이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성탄 이콘은 아담과 하와를 등장시킴으로써 성탄 신비가 잃어버린 인간의 품위를 회복시킨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새 아담이시고 동정 마리아는 새 하와이십니다.

 

이콘 왼쪽 위에 동방박사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마태2,1-12). 교부들은, 이들이 하느님 백성의 일원이 된 이방인들을 상징하고 바빌로니아 이방 세계에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첫 선교사들을 상징한다고 해석합니다. 점성가들이 바친 황금은 왕께 드리는 존경으로, 유향은 하느님께 드리는 공경으로, 몰약은 장례를 위해 바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왼쪽 중간에는 베들레헴의 목자 두 사람이 있습니다. 당시 목자들은 사회에서 아주 비천한 계층에 있었습니다. 이들은 성모님을 경배하고, 성모님은 그윽한 눈길로 이들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목자들은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증거하는 이들이고 사도들과 순교자들과 견줄 수 있습니다. 이들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신앙의 선물을 수호합니다. 역설적으로 아기 예수님이 참으로 그들의 착한 목자이시고 목자들은 그분의 양떼입니다. 천사들은 두 무리로 등장합니다. 왼쪽 중간에 자리한 천사들은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고, 오른쪽 위에 자리한 천사들 가운데 둘은 “지극히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루가 2,14)이라고 환호하고, 하나는 목자들에게 구세주의 탄생을 예고합니다. “겁내지 마시오. 자,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전하겠소. 오늘 다윗의 고을에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곧 주님 그리스도이시오. 한 갓난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운 것을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여러분을 위한 표징이오” (루가 2,10). 이처럼 천사들의 서로 다른 자세는 그들의 이중 사명, 곧 하느님을 찬양하고 인간들에게 봉사하는 임무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성탄 이콘에는 항상 구유 옆에 황소와 당나귀가 있습니다. 교부들에 따르면 황소는 유다인을, 당나귀는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이 두 민족이 모여 한 교회를 이루고 주님을 경배합니다 (이사 1,3 참조).

 

우리가 이콘을 통해서 관상한 성탄의 신비를 대림과 성탄 전례에서 직접 체험합니다. 작은 이콘이 하느님의 구원 신비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잘 것 없는 우리 역시 전례를 통하여 하나의 이콘이 됩니다. 곧 주님의 탄생하심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증거하는 살아있는 이콘이 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계셨으며 우리가 듣고 눈으로 보고 살피고 또 손으로 만졌던 생명의 말씀, 과연 생명이 나타나셨고 이에 관하여 우리는 증언하며 여러분에게 알립니다” (1요한 1.1-2).

 

[성서와함께, 2004년 12월호, 인 끌레멘스 신부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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