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5일 (토)
(자) 대림 제1주간 토요일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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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 별별 이야기: 죽지 말아야 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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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7-14 ㅣ No.999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4) 죽지 말아야 할 이유

 

 

30대 초반의 아들을 데리고 부모가 함께 찾아왔다. 아버지는 아들이 자주 자살시도를 해 한 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감시를 하느라 하루하루 사는 게 아니라고 하였다. 어머니 역시 아들이 혹시라도 세상을 떠날까 봐 노심초사하며 긴장과 불안으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고 하소연하였다. 부모님 말씀에 의하면 아들은 20대 중반 처음으로 자살을 시도한 이후 지금까지 몇 차례 자살시도가 있었으며 지금도 생을 마감하기 위한 기회만을 엿본다고 하였다.

 

아버지는 아들을 향해 신부님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으면 다 물어보고 도움을 청하라고 하였다. 하지만 아들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으며 가끔 허공을 쳐다보며 한숨을 짓곤 하였다. 어머니는 옆에서 그저 안타까운 표정으로 앉아있을 뿐 어떤 말도 할 힘이 없는 듯이 보였다. 세 가족이 찾아와 상담을 받겠다고 앉아 있었지만 어떤 대화도 이어지지 않은 채 어색하고 답답한 분위기만 한동안 지속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사제인 내가 먼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나서야 할 필요는 느끼지 않았다. 가끔 침묵은 대화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긴 침묵이 흐르면서 부모는 속이 타들어 가고 있었지만, 정작 이 청년과 나는 그 가운데서도 서로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 적어도 이 친구는 내가 교리나 윤리를 내세워 가르치거나 훈계할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나 역시 이 친구가 진정 죽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나에 대한 청년의 탐색이 끝났는지 드디어 그가 입을 열게 된 것은 상담이 시작된 후 30분이 지나서였다. 청년이 입을 열고 던진 첫 마디는 바로 이 말이었다.

 

“신부님, 제가 죽지 말아야 할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만일 그 말씀을 듣고 제가 충분히 알아들으면 저는 죽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 이유가 지금까지 제가 들었던 얘기와 별다른 차이가 없다면 저는 꼭 자살할 것입니다.”

 

이 청년의 질문은 “자살은 삶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라는 말을 생각나게 하였다. 이 청년이 바라본 인간의 삶은 고통과 허무 그 자체였다. 따라서 살아간다는 것은 고통을 참아내는 과정이기에 사실 아무 의미가 없어 보였던 것이다. 아마도 청년은 지금까지 자신의 삶이 고통의 연속이었고 그 안에서 어떤 위로나 희망도 가져보지 못했던 것 같았다. 이러한 청년에게는 살아야 할 이유를 설명하기보다는 죽지 말아야 할 이유를 설명한다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울 것이다.

 

나는 사제의 입에서 나올법한 어떤 조언이나 충고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그런 진부한 훈장질(?)이 통할 법한 인물이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죽지 말아야 할 이유를 말해달라는 청년의 말은 사실 당신은 나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느냐는 말로 들렸다. 청년은 자신을 공감할 수 있는 한 사람만이라도 세상에 존재한다면 죽지 않겠다는 말을 돌려서 표현한 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을 수 있었다.

 

첫 만남 이후 나는 이 청년과 20회 이상을 만났다. 지금은 새로운 일을 찾고자 시험을 준비하고 있으며 상처를 받아 너덜너덜해진 마음이 들 때 가끔 나를 찾아오는 사이가 되었다. 그렇다고 그가 느끼는 삶의 고통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한 사람이 있다는 생각이 그를 절망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도록 이끌어주었던 것 같다.

 

사실 “죽고 싶다는 말”은 “살고 싶다는 말”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12월 25일, 박현민 신부(영성심리학자, 성필립보생태마을 부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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