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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페레올 주교의 조선 입국 후 사목활동: 김대건 신부 현양 및 양반중심 교회운영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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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1-14 ㅣ No.1110

페레올 주교의 조선 입국 후 사목활동


- 김대건 신부 현양 및 양반중심 교회운영을 중심으로 -

 

 

1845년 10월 페레올 주교가 조선대목구의 제3대 감목으로 조선에 입국한 후 1853년 2월 병으로 선종하기까지 약 7년 4개월 동안 수행한 그의 사목활동을 시기순으로 정리해보면, 첫째, 김대건 신부를 비롯하여 기해박해와 병오박해로 희생된 조선순교자 82위에 대한 현양운동, 둘째, 양반 신자들을 활용한 공소순방을 통해서 신자들의 신앙생활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하였던 점 등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페레올 주교는 조선 입국과정에서 보여준 김대건 부제의 대담한 행동과 투철한 신심을 확인하고서 그를 동료 최양업보다 먼저 1845년 8월 17일 사제품에 올려서 서해를 횡단하여 입국하였다. 그러나 입국한 지 7개월여 만에 김대건 신부가 선교사들의 해상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해 황해도 연안에 나갔다가 체포되고, 수감, 투옥되었는데, 이러한 전 과정을 김 신부의 편지를 통해 소상히 보고를 받고서도 김대건 신부에 대한 어떠한 비난도 가하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김대건 신부의 입장을 옹호하고 그의 순교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리하여 1846년 11월 3일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병오박해 순교자 9위에 대한 최초의 공식적 교회기록을 작성하고 여기에 그의 전임 앵베르 주교 때부터 조사해오던 기해박해 순교자 73위의 기록을 더하여 유럽의 선교단체와 교황청에 전달하게 함으로써 1857년 조선순교자 82위가 가경자(可敬者)로 선포되도록 한 커다란 공적을 남겼다. 그러므로 페레올 주교야말로 김대건 신부에 대한 공식적인 현양운동을 추진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페레올 주교가 김대건 신부를 전적으로 신뢰하게 된 데에는 만주에서 함께 조선입국을 준비하던 시기부터, 만주 지역을 최대한 활용하여 조선왕조에 복음을 전하려던 페레올 주교의 선교전략과, 한반도와 만주를 아울러 우리민족의 동일문화권 내지 동일생활권으로 인식했던 김대건의 역사지리인식이 서로 합치되는 부분이 있었다는 점에서도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한편으로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신부가 감옥에서 올린 서한을 통해서, 조정의 고관들이 한때나마 김대건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그를 파견하여 프랑스와 외교적 교섭을 추진하려고 했다가, 세실 함대의 성급한 회항(回航)으로 오히려 조정의 논의가 급변하여 결국 김대건 신부가 순교하기에 이른 과정들을 보고받으면서, 제국주의 무력을 활용한 조선왕조의 개방과 복음화 방안을 포기하고 평화적인 외교교섭을 통한 선교를 주창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그와 동시대에 활동하던 프랑스 동료 선교사들보다 앞서는 선구적인 인식의 전환이다.

 

페레올 주교는 병오박해의 여파가 잦아들자 곧바로 산재한 교우촌을 순방하여 그들에게 필요한 성사(聖事)를 집행함으로써 교우들 신앙생활의 안정을 도모하는데 주력했다. 이에 그는 여행길의 안전을 도모하고 교우들의 교리교육들을 이끌어갈 양반 출신의 지식인들을 자신의 수행원으로 채택하였고, 그중에 일부가 양반 특권을 과시하여 교우들간의 불화를 일으켜 최양업 신부가 그들을 배제하도록 건의함에도 불구하고, 끝내 그들을 옹호하고 그 비리를 묵인하는 등 양반신자 중심으로 교회를 운영해갔다. 또한 자신의 임종이 가까워지는 데에도 불구하고 그 곁에 대기하고 있던 다블뤼 신부를 공소순방길로 파견하다가 끝내는 사제가 없는 속에서 성사도 받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이로서 페레올 주교는 자신의 전력을 순방사목 활동에 쏟아 붓다가 끝내 체력이 소진하여 병사(病死)하기에 이르렀던 또 한분의 “땀의 순교자”가 되었다.

 

 

Ⅰ. 머리말 - 페레올 주교와 관련한 연구사 정리 -

 

박해시기 한국에 입국하여 사목활동을 하던 한국천주교회의 교황대리감목(敎皇代理監牧) 주교들 중에서 순교하지 않고 질병이나 기타 원인으로 선종한 유일한 분을 꼽는다면, 제 3대 감목 페레올 고(高) 주교를 들 수 있다. 물론 페레올 주교 이전에도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Bruguiere, Barthelemy, 蘇, 1792~1835) 주교가 조선입국을 눈앞에 두고 병사했다. 반면에 제2대 대목구장 앵베르(Imbert, Laurent Joseph Marius, 范世亨, 1796~1839), 제4대 대목구장 베르뇌(Berneux, Simeon Francois, 張敬一, 1814~1866), 제5대 대목구장 다블뤼(Daveluy, Marie Nicolas Antoine, 安敦伊, 1818~1866) 주교 등은 참수형(斬首刑)으로 피를 흘려 순교하였기에, 외형상으로는 페레올 주교와 분명한 대조를 이룬다. 페레올(Ferreol, Jean Joseph Jean-Baptiste, 1808~1853, 高) 주교는 프랑스 아비뇽(Avignon) 교구의 퀴퀴롱(Cucuron)에서 출생하여 20대 후반에 사제서품을 받고 1838년 9월 23일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1839년 4월 28일 프랑스를 출발하여 이듬해인 1840년 1월 23일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1843년 12월 31일 개주(蓋州)의 양관(陽關)에서 주교 서품식을 갖고, 1845년 10월 12일 김대건 신부, 다블뤼 주교와 함께 조선에 입국해서 약 7년 4개월간 활동하다가 1853년 2월 3일 병으로 선종했다.1)

 

본고는 페레올 주교가 조선에 입국한 1845년 10월 이후 국내에서의 사목활동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본고의 주제와 관련된 연구사를 살펴볼 때, 우선 현재까지 페레올 주교만을 독립적으로 다룬 논문은 2008년 10월 미리내 성지에서 개최된 학술 심포지엄에서 발표되어 본서에 게재된 두 논문을 제외하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2) 둘째로, 페레올 주교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논문은 아니나, 그와 동시대에 함께 활동하였던 김대건, 최양업 등 한국인 사제들이나 다블뤼, 매스트르(Maistre Joseph Ambroise, 李, 1808~1857) 등 프랑스 선교사들에 대한 개별 인물 연구나 이들이 포함된 연구서들이 주목되는데 이를 통해서도 페레올 주교의 여러 가지 면모들이 파악될 수 있다.3) 셋째로, 페레올 주교가 소속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사상, 영성이나 선교회의 방침 등과 관련된 연구논저들은 그의 사목활동의 특징적인 면모들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4) 넷째로, 페레올 주교가 활동하였던 19세기 초중반 한국사 및 한국교회사와 관련된 정치, 경제, 사회, 사상, 대외관계 분야의 연구논저들이 그가 활동한 시대적 배경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5)

 

이상에서 언급한 연구 성과들 중에서 페레올 주교의 활동과 업적을 주된 관심사로 다루고 있는 피숑(Pichon, 宋世興, 1893~1945) 신부, 최석우 몬시뇰 등 두 연구자의 연구성과를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피숑 신부는 일제 때인 1936년《가톨릭청년》지에 기고한 그의 글〈高主敎 管理時代의 朝鮮 가톨릭〉(一),(二)에서 페레올 주교가 사목하던 시기의 주요한 화두(話頭)로, 유구(琉球)에 대한 페레올 주교의 재치권(裁治權) 행사문제, 만주에 설립한 신학교에서 조선신학생을 양성한 것, 마카오 경리신부로서 조선 부감목의 직책을 맡고 있던 리브와(Libois, , 1805~1872) 신부가 매스트르, 베르뇌 신부 등을 추천하자 페레올 주교가 베르뇌 신부를 그의 보좌주교로 요청한 일, 페레올 주교를 포함한 선교사 일행의 조선 입국 등을 거론했다.6) 그런데 피숑 신부가 거론한 이 일들은 모두 페레올 주교가 중국에 체류하고 있을 때 거론되고 처리된 일에 해당되므로, 본고에서 본격적으로 다룰 문제는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그 다음으로, 페레올 주교의 필기체 서한문을 정리, 수집하여 이를 활자화하여《페레올(J. Ferreol, 高) 문서》라는 제목의 단행권으로 편집하여 출간한 한국교회사연구소 최석우 몬시뇰은 페레올 주교가 천신만고 끝에 조선입국에 성공하여 7년 4개월 동안 활동하는 가운데, 우선 시급히 해야 할 일들로 (기해)박해로 흩어진 교우들을 찾아 성사를 집전하는 일, 매스트르(Maistre, 李) 신부와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부제를 입국시키는 일 등이 있었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페레올 주교가 한 일 가운데, ① 선배들에 의해 시작된 방인 성직자 양성을 정성어린 보살핌으로 유종의 미를 거두게 한 것, ② 기해박해와 병오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깊은 감명과 신심에서 그들의 시복(諡福)과 시성(諡聖)에 대비하여 거의 완벽한 순교 전기를 작성해 놓은 것 등이 두 가지가 가장 큰 공적이라고 평가했다.7) 이중에서 ①은 이미 그가 1844년 12월, 만주에서 김대건, 최양업 두 신학생에게 부제품을 수여한 후, 1845년 8월 17일, 상해에서 김대건 신부를 사제로 서품함으로써 본격화되어, 1849년 4월 최양업마저 같은 상해에서 사제로 서품됨으로써 일단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이루어진 장소가 모두 중국 땅이다. 그러므로 본고의 주된 관심 대상은 아니다.8) 그러나 ②는 조선 입국이후 조선 내에서 주로 이루어진 일이며, 그것도 김대건 신부의 순교로 촉발된 병오박해 전후에 수행한 업무로서, 순교자 현양운동의 일환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므로 필자의 연구 대상이 된다. 그러나 앵베르 주교로부터 비롯된 순교자 현양운동의 자세한 전개과정의 구체적 내용은 지면의 한계와 필자의 역량 부족으로 차후의 독립된 연구과제로 돌리고, 본고에서는 기해 · 병오박해기 순교자 중에서도 김대건 신부를 현양하고 옹호한 페레올 주교의 인식과 활동에 대해서만 집중해서 분석해보고자 한다.

 

한편 최 몬시뇰이 페레올 주교가 입국 당시 가장 시급했던 현안으로 분류했던 업무들, 즉 신자들을 방문하여 성사(聖事)를 베풀며 신앙생활을 돌보는 일과, 최양업, 매스트르 신부를 입국시키는 일 중에서, 후자는 이미 중국에 체류할 때부터 페레올 주교가 주력해온 업무 중의 하나였으므로 본고에서 간략히 다루고자 한다9). 그러나 신자들을 방문하여 성사를 집행한 일은 본고의 주된 관심사 중의 하나가 된다. 여기에 필자는, 페레올 주교의 활동시기와도 일정한 관계가 있는 국내에서의 신학생 양성 문제가 2000년 이후 그 양성장소와 관련하여 비교적 활발하게 거론되고 있는 점에 주목하여10), 페레올 주교의 조선입국 이후 주요 활동 중의 하나로 신학생 양성 문제를 거론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페레올 주교 시기의 사목활동 지역의 문제나 신학생 양성 문제는 이미 선행 연구자의 연구성과가 있으므로 이를 정리하여 간략히 인용하는 데 그치고, 본고에서는 교우촌 순방을 비롯한 페레올 주교 시대 사목활동의 중요한 특징으로 부각되는 양반중심 교회운영의 배경에 대해서만 살펴보고자 한다. 그 방법으로 필자는 페레올 주교와 입장이 달랐던 최양업 신부와 선교정책 및 사목활동 방침상의 인식 차이를 규명해보고자 했다. 이상의 두 가지 고찰 대상 외에도 필자는 페레올 주교의 서한에 나타나는 제국주의 인식의 변화상에 대해서 검토해보고자 한다. 이 문제는 박해시대 선교사들의 선교정책과 대외인식의 특징을 파악하는 것과도 관련된 매우 중대한 문제이지만, 기존의 연구업적들 가운데에서는 페레올 주교의 제국주의 인식에 대해서만 다루었을 뿐11) 그 인식의 시기적 변화과정에 주목하고 그 교회사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해명하려는 시도는 없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면서, 필자는 페레올 주교의 조선 입국 이후 사목활동의 내용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김대건 신부의 순교(1846. 9)를 전후한 시점에서 중점적으로 추진된 ‘한국교회 순교자 현양활동’을 김대건 신부 현양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둘째, 병오박해(丙午迫害)로 조성된 한국 교회의 위기상황을 극복한 후 재개된 공소순방을 통한 선교 사목활동을 일관하는 한 특징으로서 양반 중심 교회운영의 실상과 배경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셋째, 김대건 신부의 순교를 전후하여 나타나는 페레올 주교의 제국주의 인식의 변화를 살펴보고 그 배경을 이해하고자 한다. 본고의 제2장과 3장, 4장은 각각 첫째와 둘째, 셋째 주제를 다룬 것이다. 그 다음 결론으로 제5장에서 페레올 주교의 국내 사목활동을 이해하는 하나의 시각을 제시하면서, 페레올 주교 시대와 관련된 향후의 좀더 본격적인 연구의 과제들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Ⅱ. 페레올 주교의 순교자 현양과 김대건 신부 옹호론

 

페레올 주교는 1838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하고 1839년 4월 28일 극동을 향해 출발하여 조선을 전교지로 배속 받을 때를 전후하여 이미 순교를 각오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각오는 조선으로의 입국과정과 입국 이후에 작성한 서한들에서 수차례 거듭 발견된다. 1843년 초 만주에서, 자신을 조선교구의 계승권을 가진 보좌주교로 임명하는 교황의 칙서를 받고 그는 다음과 같이 조선선교를 위한 자신의 각오를 피력하였다.

 

우리는 가서 비통에 빠진 이 백성을 위로해주고 그들의 눈물을 씻어주고 아직 피가 흐르는 그들의 상처를 싸매주고 … 그리고 우리들의 피가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필요하다면 천주께서는 또한 우리에게 망나니의 도끼 밑에 머리를 숙이러 가는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 소문으로는 그곳이 복음의 일꾼들을 잡아먹는 땅이랍니다. 그러니까 나는 십자가의 유산을 받는데 있어서 매우 유리한 처지에 있습니다. 그로 인하여 내 처지는 더 부러운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12)

 

순교에 대한 찬양은 무수한 난관을 뚫고 기적적으로 서해를 횡단하여 강경포로 입국한 직후에도 지속되었다13). 김대건 신부의 순교로 촉발된 병오박해(丙午迫害)를 당해서는, 충청도 수리치골에 은신하여 박해의 전말을 바랑 신부에게 전달하는 서한에서 순교자(殉敎者)를 승리자(勝利者)로 부르고, 그 승리자들의 첫머리에 김대건 신부가 있다고 말했다.14) 이처럼 페레올 주교는 순교를 고귀하고 본받아야 할 가치로 찬양했지만, 김대건 신부의 순교가 그에게 기쁨과 감탄만을 자아낸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크나큰 손실이었고, 기둥과 같이 믿고 있던 든든한 버팀목 또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희망 덩어리의 상실과 같은 것이었다. 위 서한에서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신부를 그가 가까이 데리고 있던 유일하게 유능한 인물이었다고 말하면서15) 다음과 같이 김대건 신부에 대한 애정과 안타까움, 그리고 존경을 표하였다.

 

친애하는 신부님, 이 젊은 방인 신부를 잃은 것이 제게 얼마나 가혹한 것이었는지를 신부님은 쉽사리 생각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를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듯 사랑하였습니다. 그러니 그가 받은 행복만이 그를 잃은 데 대한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 나라에서 사제품에 오른 사람으로는 처음이고 또 지금까지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성직자로서의 교육에서 그의 동포보다 훨씬 뛰어난 사상을 얻었습니다. 그의 열렬한 신앙심, 솔직하고 진실한 신심, 놀란 만큼 유창한 말씨는 대번에 신자들의 존경과 사랑을 그에게 얻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성직을 행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그는 저희가 바라던 것보다 더 나았고, 몇 해 동안만 실천을 하였더라면 지극히 유능한 신부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가 조선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거의 알아차리지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어떤 일이라도 맡길 수가 있었으니 그의 성격과 태도와 지식은 그 성공을 확실히 하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조선 전교지가 지금 처해 있는 처지로 보아서 그를 잃은 것은 엄청나고 거의 회복할 수 없는 불행이 되는 것입니다.16)

 

사실 김대건 신부는 만주 요동에서 신학생으로 수업을 받을 때인 1842년 말, 라틴어 이해가 부족하여 동료 최양업과는 달리 프랑스어 학습을 금지당할 정도로 학습 능력이 그다지 탁월한 편이 아니었다.17) 그러나 위 인용에서 페레올 주교가 언급한 대로 그는 열성과 신앙심으로 장상(長上)의 명령에 순종하면서도 프랑스어 학습을 포기하지 않고 틈틈이 공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18) 그리하여 위기가 닥쳐온 순간에 그가 배운 외국어 실력을 한껏 발휘하여, 위기에서 벗어남은 물론 결정적인 일의 성사를 이루는 단호하고도 끈질긴 성품을 보여주었다. 1845년 4월 30일 당시 김대건 부제(副祭)는 프랑스 선교사를 서해상으로 영입하고자 조선의 낡은 배를 몰고 대부분 급조된 조선인 사공들을 10여명 대동한 채 한강을 출발한 지 1개월 만에 모진 풍랑의 위험을 극복하고, 겨우 중국의 상해 부근 오송항(吳淞港)에 도착했다. 그때, 그는 중국 관헌에 나포되어 조선으로 강제 송환될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배를 영국배들 가운데 정박시키고 그곳에서 영국 군함의 장교에게 유창한 프랑스어로 자신은 조선 사람인데, 당신들의 보호를 요청한다고 하자 뜻밖에 놀란 장교들이 그를 관대하게 환영하면서 그의 일행을 무사히 프랑스 선교사에게 인도해 주게 되었다.19) 이러한 사실은 김대건 부제가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국제정세에 대해 개략적인 이해를 하였으며, 특히 청조(淸朝)가 영국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굴복하여 체결한 1842년 남경조약(南京條約)의 조인식 현장에 직접 참관함으로써 영·청 관계의 구체적인 면까지 파악하게 되었기에 비로소 가능한 일이었고, 동시에 외국어 학습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체감하고 이를 활용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였기에 또한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김대건 신부의 장점은 이러한 끈기와 순명의 정신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남들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주저하고 단념하는 일마저도 용감하게 추진하는 담대함을 지녔다. 그가 1842년 12월 말 안내자도 없이 단독으로 책문(柵門)을 통과하여 의주(義州) 변문을 통해 조선입국을 시도하다가 주민들의 고발에 시달리며 추위와 굶주림과 피로에 지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겨우 다시 중국으로 돌아간 일이나, 1844년 2월 페레올 주교의 명을 받고 두만강 하류의 함경도 경원(慶源)과 마주하는 중국 땅 훈춘(琿春)을 통한 조선입국로 개척에 나선 일 등을 비롯하여, 1845년 1월 책문에서 조선 밀사와 상봉하여 조선으로 귀국한 후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페레올 주교의 지시대로 선교사 영입을 위해 1845년 4월 30일 조선인 교우들을 대동하고 낡은 목선으로 제물포를 출발하여 약 한 달 후인 5월 28일 오송(吳淞) 항구에 도착하기까지 황해를 횡단한 일 등은 그의 남다른 용기와 진취적 기상을 충분히 보여주고도 남는 사건이었다. 이러한 그였기에 그는 프랑스 성직자들의 애초 기대 수준을 훨씬 초월하여 성직수행에 탁월함을 드러냈고, 어떠한 일이라도 맡기면 해낼 수 있는 유능한 인물이라고 평가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김대건 신학생의 됨됨이를 일찍부터 간파한 페레올 주교는 1844년 5월 이전에 이미 최양업보다 김대건을 먼저 사제로 서품하려는 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20)

 

사실 페레올 고(高) 주교가 김대건을 그의 조선 입국과 전교활동의 개척자 겸 동반자로 우선적으로 선택한 이유는 고·김 두 사람의 성격 자체가 솔직하고 직선적인 점에서 의기투합(意氣投合)할 수 있었다는 점 외에도, 천주교를 절대 허용하지 않으려는 조선왕조의 지배세력이 둘러쳐놓은 강고한 박해의 장벽을 뚫고 들어가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진취적이고 행동적이며 굳센 기상을 지닌 일꾼이 우선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대건의 진취적인 면모는 그의 역사의식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21) 그가 손수 제작한 <조선전도>에는, 18세기부터 두만강 남쪽의 함경도 지방에서 하나둘씩 진출하다 1850년대 이후에 와서는 집단적인 월경민(越境民)들의 본격적인 이주와 정착으로 인하여 실질적인 우리민족의 영토로 재편되고 있던 간도(間島)가 우리 영토의 북방한계선 안에 분명히 포함되어 있고, 동해의 울릉도 옆에는 독도(우산도)가 분명하게 기입되어 있다. 여기서 독도가 표기된 것은 김대건 신부의 활동시기인 18세기 정상기의 〈동국지도〉 등의 영향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우리나라 지도의 북방 한계선이 압록강과 두만강이 아닌 그 북쪽의 간도지역까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은 18세기 조선에서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도성팔도지도(都城八道地圖)〉나 북경에 거주하던 프랑스 선교사들이 18세기에 그린 당빌(D'Anville) 등이 그린 〈황여전람도〉 등의 영향으로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김대건과 동시대 조선의 대표적인 지도제작자 김정호의 〈동여도〉나 〈대동여지도〉 등을 비롯한 무수한 지도들에서 간도의 영역을 조선왕조에 포함된 것으로 표시하지 않은 점들을 고려해본다면 상대적으로 김대건 신부의 선구자적 혜안(慧眼)과 조국애(祖國愛) 등 국가의식(國家意識)이 이러한 지도제작의 바탕이 되었을 것임을 추정하게 된다.22)

 

이러한 그의 국가관은 1844년 초, 페레올 주교의 지시를 받고 두만강 하류를 통한 조선입국로를 개척하려고 만주(滿洲)를 동서로 횡단하여 임무를 수행하고 귀환한 후에 올린 보고서23)에서 만주 일대가 옛날 고구려의 영토였다는 것을 인식하고, “여러 세기 전에 조선이 본시 만주인(滿洲人)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나라에까지 경계가 뻗어 있었고 두 나라가 같은 민족이 사는 한 왕국에 지나지 않았다”24)고 하거나 “백두산을 포함한 장백산맥이 중국과 조선 두 나라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데, 이러한 분열은 조선사람들이 반도로 격퇴당한 이후에 존재해온 모습이다”25)라고 기술한 점 등을 미루어 보아서도 입증된다. 한반도와 만주를 아우르는 고대(古代) 한국의 영토에 대한 인식이 김대건 대외인식(對外認識)의 중요한 한 부분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위 <조선전도>에도 그 같은 북방한계선이 그어진 것으로 보인다.26) 사실 조선 전교를 위해서 프랑스 선교사들은 1830년대 중반까지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보호권 하에 있었던 만주, 요동지역을 1838~1840년에 별도의 독립된 선교지로 분할하고 이 중에 조선과 가까운 만주교구를 교황이 직접 파견한 선교사인 자신들의 선교지역으로 편입하는 데 성공한다.27) 이러한 조치는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입국을 위해 중국대륙을 종단하면서 도중에 포르투갈 선교사들과 그들의 수중에 있는 중국인 신자들의 악의적인 방해에 많은 고통을 겪고 난 후, 조선 전교를 위해서 만주를 파리외방전교회가 관할하도록 건의한 것을 교황청이 수락한데서 비롯된다.28) 제3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된 페레올 주교도 중국대륙을 북상하면서 북경 일대와 요동지역에서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냉대와, 그 관할하의 신자들로부터 번번히 쫓겨나는 수모를 당했다. 이러한 체험을 바탕으로 그는 만주지역을 하루 속히 조선전교를 위한 중간기지(中間基地)로 건설해야겠다고 생각하였고, 이를 위해 우선적으로 이곳 만주에 조선 신자들을 성직자로 양성하는 신학교를 건립하려고 계획했다.29) 이러한 그의 구상은 본질적으로는 한반도 전교와 만주지역 전교를 긴밀하게 연관지어 상호협조 체제를 구축한 가운데 사목활동을 펴고자 했던 것으로, 앞서 언급했듯이 원래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가 제기하여 교황청이 수용한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전략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는, 만주와 한반도를 동일한 문화권(文化圈) 내지 동일 민족의 생활권(生活圈)으로 인식했던 김대건 신부가 전혀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계획이기도 했다. 따라서 선교적 관점에서 본 페레올 주교와 김대건 신부의 인문지리 인식이 서로 합치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김대건 신부와 페레올 주교는 직선적이고 활동적이며 대담한 성품에서 서로 상통하는 점이 있었고, 또한 만주를 둘러싼 역사 인식과 선교전략상의 구상도 서로 절묘하게 부합되었기에 서로에 대한 호감도(好感度)는 남다른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여기에 김대건은 장상의 지시에 철저히 순명(順命)하였기에 순교(殉敎)를 목전에 두고 포도청 감옥에서 쓴 서한에서 김대건은 페레올을 영신적(靈神的) 아버지로 인식하기까지 하였으며30), 이러한 편지를 건네받은 페레올 주교의 김대건 인식은 부자유친(父子有親)의 수준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애초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순교자들의 땅인 조선에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입국하던 때부터 지녀온 순교자에 대한 남다른 존경심과 김대건 신부에 대한 각별한 신임과 애정 등은 페레올 주교로 하여금 김대건 신부를 포함한 조선 순교자들에 대한 본격적인 현양운동(顯揚運動)을 추진하는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그는 조선의 순교자들을 현양하기 위해 기술한 그의 서한에서 김대건 신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31)

 

ⓐ 김 안드레아는 1821년 8월 충청도에서 태어났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그의 가족은 조선이 아직 작은 여러 국가들로 나누어져 있었을 때 조선의 남쪽에서 다스리던 한 옛 왕가의 후예라고 한다. 이와 같이 저명한 (집안의) 유래에도 불구하고 안드레아의 가족은 조선 왕국에서 그렇게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다. 현 왕조는 400년간 존속되어 오는데 안드레아의 가족 중 여럿은 종의 신분같이 낮은 계급에 속해 있었고, 그래서 그들은 왕족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그러나 안드레아의 가족은 그 후손들에게 또다른 공적, 즉 교회를 위해 많은 순교자를 낸 공적을 세웠습니다. 안드레아는 어려서부터 가족으로부터 신심 깊은 교육을 받았다. ………

 

ⓑ 팅해, 상해, 그밖에 다른 항구에서 이 젊은이는 중국인들에게 프랑스인의 관대함에 대한 높은 사상을 심어주는 데 전념하였고 또한 이 백성을 존경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드레아의 성격은 자신을 가지게 되었고 점차 그의 마음에 대담성이 발전하여 그의 앞날에 하느님의 섭리가 계획한 것을 완수하게 만들었다. 이때부터 그의 사상은 자라고 모험적인 원정들은 그를 두렵게 하기는커녕 그의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

 

ⓒ 안드레아는 그의 대담성만 믿고 밀사의 의견을 무시하고 떠났다. … 낮에는 눈으로 덮힌 산속에 숨었고 밤에는 여행을 계속하였다. 돌아오면서 그는 세관을 피하고 황야로 들어갔다. 3일 전부터 아무 것도 먹지 못한데다 피곤과 잠을 이겨낼 수가 없어서 눈위에 누워서 휴식을 취하려 하였다. 추위는 혹독하였고 밤은 칠흑 같았다. 그는 잠이 들자마자 “일어나 가라”는 소리에 깨어났다. 동시에 그는 암흑 속에서 그에게 길을 가리키는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 그는 내게 이 이야기를 하면서, “저는 이 목소리와 이 환영이 3일 간 먹지 못한데다 무서운 고독 때문에 일어난 환상의 결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마 얼어 죽어 저승에서 깨어났을 것이기 때문에 그것들이 제게는 매우 유익하였습니다”라고 말하였다. … 그는 살아있는 신앙과 성모님께 대한 깊은 의뢰심으로 이 모든 여행의 피로를 큰 인내로 이겨냈다. ………

 

ⓓ 상해에서 안드레아는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리고 2개월 후 김 신부는 2명의 서양 선교사들을 조선 해안에 상륙시켰다. 이리하여 그는 하늘로부터 받은 사명을 다행히 완수하였다. 그런 후 하느님은 가장 영광스러운 죽음을 통해 김 신부를 당신에게로 부르셨다. ………

 

위 인용문은 페레올 주교가 병오박해 직후 충청도 산골 수리치골에 숨어 지내면서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의 바랑(Jean Barran, 1798~1855) 신부에게 보낸 서한 중에 일부분으로, 원문의 내용은 김대건 신부가 순교 20일 전(1846년 8월 26일자)에 옥중에서 페레올 주교에게 쓴 그의 체포, 감금, 형벌과 관련된 보고 및 동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집행된 김대건 신부에 대한 참수형 집행과정을 기록한 후에 뒤이어 기술한 일명 ‘병오일기(丙午日記)’로 불리우는 “병오박해 순교자 8인의 행적” 중, 맨 먼저 나오는 김대건 신부에 관한 일종의 약전(略傳)이라고 할 수 있다.32) 본고에서 필자는 그 전문의 내용을 대폭 축소 정리한 후, 4가지 소주제로 나누어, ⓐ 김대건 신부의 가문과 출자(出自), ⓑ 김대건의 대외관 및 담대한 기질을 갖게 된 배경, ⓒ 입국로 개척을 위한 김대건 신부의 모험과 신앙심, ⓓ 김대건 신부의 사제로서의 사명 및 순교에 대한 평가 등으로 살펴보았다.33) 우선 ⓐ에서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신부가 양반 가문 중에서도 신앙심이 깊은 집안 출신임을 분명히 밝혔는데, 이러한 서술을 통해서 페레올 주교는 조선에서 사목활동을 전개할 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계층으로 김대건 신부와 같은 양반 신자들을 지목하고 이들에 의지하는 경향을 보이게 된 것 같다. 한편 ⓑ를 통해서는 김대건 신부에게 세계관과 신앙심을 키워준 선교사들의 고국인 프랑스에 대해 우방내지 은인의 나라로 생각하는 긍정적 인식과 해외여행을 통해서 형성된 김 신부의 모험적 기질에 대해서 알 수 있다. ⓒ를 통하여 페레올 주교는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기 위해 여행하는 선교사에게 필요한 모든 자질과 성모신심, 순교신심이 김대건 신부에게 갖추어져 있음을 잘 인식하였음을 보여준다. ⓓ를 통해서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신부의 사제로서의 사명을 프랑스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로 개척으로 요약하고 그의 순교를 영광스러운 것으로 평가했다. 이상의 내용을 통하여 우리는 페레올 주교가 김대건 신부의 체포와 순교과정에 대해 조금도 비판을 가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인식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김대건 신부가 조선의 관가에 체포될 때 내세웠던 다소 과도한 양반신분에 대한 자존심이 결국 그와 동료들의 순교라는 비극적 결과를 초래하게 된 원인이었음을 알면서도 이에 대해 아무런 비판을 가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순교자에 대한 단순한 공경심 이상의 깊은 신뢰심 때문이었고, 향후 그가 조선에서 활동할 때 김대건 신부와 같은 양반 신자들을 협조자로 중용(重用)할 수 있는 가능성을 예고해 주는 것으로 해석된다. 또한 순교자 김대건 신부에 대한 페레올 주교의 이와 같은 긍정적 평가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여러 지인들을 거치는 동안 찬사와 존경심을 더하여 로마 교황청에 보고되었고, 그 결과 교황청이 김대건 신부를 1857년 가경자로 선언하고 1925년 복자로 시복하는 과정을 거쳐, 이후 김 신부가 조선교회의 수선탁덕(首先鐸德)으로서 조선에서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가톨릭 신자들에게서도 존경을 받고 그 덕택으로 조선까지 유명해지도록34) 한 최초의 공식적인 교회기록으로서 주목된다. 그러므로 김대건 신부에 대한 교회 내의 공적인 현양운동은 결국 그의 스승이자 장상인 페레올 주교가 김 신부의 순교 48일 후인 1846년 11월 3일자 서한에서 쓴 김대건 신부 약전에서부터 촉발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페레올 주교가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바랑(Barran) 신부에게 보낸 이 서한은 김대건 신부뿐만 아니라 김 신부와 함께 순교한 동료 순교자들의 순교행적을 공적으로 드러내는 첫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서한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여러 가지 내용을 담은 장문의 서한으로서 김대건 신부가 8월 26일 감옥에서 페레올 주교에게 보낸 라틴어 편지를 불어로 번역하여 전재(轉載)하면서, 동시에 그의 행적과 순교 위업(偉業)을 기리고 그의 동료 순교자들 즉 현석문 가롤로, 남경문 베드로, 한이형 라우렌시오, 임치백 요셉, 김임이 데레사, 이간난 아가타, 우술임 수산나, 정철염 가타리나 등 8명의 순교자의 주요행적을 소개하였다. 이어서 이러한 서한을 보내는 목적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친애하는 신부님, 저는 신부님께 1839년의 몇몇 순교자들의 행적들을 보냅니다35). 이 시기의 박해에 관한 소식들과 함께 순교자들의 행적들을 드러내 보일 수가 없었던 것은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이제는 약간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행적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전교회지의 편집자들께서 주요 순교자들과 인상적인 인물들의 순교 행적들을 적어도 몇 가지나마 출판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 출판물은 유럽의 신자들에게 많은 교훈을 줄 것입니다. 저는 장상들께서 그토록 흥미로운 이야기에서 그들을 제외시키지 않기 위하여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시리라 의심치 않습니다. 로마에서는 몇 명을 시복 혹은 시성시키고자 하시지 않을까요? 조선의 불쌍한 교우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겠습니까! 그들의 고통과 역경 가운데에서 얼마나 큰 용기가 되겠습니까! 저는 아울러 복자들의 대열에 올라 선 자기네 형제들의 표양을 눈앞에서 보게 되면 그들이 고통 속에서도 훨씬 더 강건한 모습을 보일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저는 장상들께 로마 교황청에 이 문제를 청원하는데 큰 관심을 보여주실 것을 간청합니다.36)

 

페레올 주교의 순교자 현양운동은 그의 선임 앵베르 주교 때부터 추진되어온 1839년 기해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의 수집과 정리작업을 계승하는 것이었다.37) 동시에 그것은 기해박해 순교자들과 함께 김대건 신부 등 1846년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기록까지 모두 정리하여 전교회지(傳敎會誌, APF, Annales de la Propagation de la Foi) 등에 게재함으로써 프랑스 등 유럽교회의 신자들에게 신앙생활의 교훈을 주기 위한 것이었고, 또한 궁극적으로는 로마 교황청에 이러한 사실을 알려서 조선교회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 · 시성(諡福諡聖) 운동을 추진하고, 이를 귀감(龜鑑)으로 삼아 조선교회 신자들이 김대건 신부를 그 필두로 하는 순교자들을 본받아 어떠한 박해나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도록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의도에서 페레올 주교의 순교자 현양운동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고, 자신이 자식 이상으로 사랑하고 신임하던 김대건 신부의 순교를 긍정적으로 수용하려는 일련의 과정에서 더욱 큰 동력을 얻게 된 것으로 보인다.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들을 파리의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전달하고자 하는 페레올 주교의 의지는 위 서한에 이어 이틀 후인 1846년 11월 5일자로 리브와(Libois) 신부에게 쓴 편지를 통해서 더욱 분명하게 확인된다.38) 이러한 페레올 주교의 순교자 보고서는 1847년 초 마카오에서 홍콩으로 이전된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 머물던 최양업 부제와 매스트르 신부가 프랑스어로 기록된 원문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거쳐39), 파리외방전교회 르그레즈와(Legregeois) 신부에게 보내졌고, 이어서 로마 교황청에 보내졌다. 그리하여 1857년 교황은 기해박해 순교자 73위와 병오박해 순교자 9위를 합친 82위의 조선 순교자를 가경자(可敬者, Venerabilis)로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앵베르 주교 때부터 시작된 조선순교자 현양운동이 페레올 주교와 그의 동료 선교사들의 노력에 의해 마침내 첫 번째 가시적인 결실을 맺었던 것이다.

 

병오박해로 인한 조선 교우들의 피해는 그 규모면에서 기해박해만큼 크지는 않았다. 그러나 육로를 통한 입국로 개척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졌다. 의주 변문과 함경도 경원의 경계가 3중(重)으로 가중되어 삼엄하게 진행되었기에40), 결국 육로를 통해 1846년 말 조선에 입국하려던 최양업 신부는 입국을 포기하고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홍콩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로 옮겨갔던 것이다. 동시에 기해박해로 인해 흩어진 신자들을 다시 불러모아 성사(聖事)를 집전하고, 냉담해진 신자들의 회두를 위해 공소순방에 나섰던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는 즉시 순방을 중단하고, 박해자의 추적을 피해서 충청도와 전라도로 피신하여41), 박해가 잠잠해질 때까지 숨어 지내야만 했다. 그리하여 신자들은 다시 성사를 받을 수 없게 되었음은 물론이고 박해자의 추적과 감시가 두려워 일상적인 신앙생활도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병오박해로 인한 새로운 위기가 조성된 것이었다.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조선 교회의 수장인 페레올 주교는 신자들이 더욱 큰 용기를 내어 박해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신앙생활을 꿋꿋하게 할 수 있는 정신적 지주를 마련할 필요를 느꼈고, 그것을 성모성심(聖母聖心)께 의탁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1846년 11월 2일, 충청도 공주의 수리치골에서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는 1830년대 프랑스에서 일어난 성모신심 운동을 조선에서도 부흥시켜 박해로 조성된 난국을 타개하고자 조선 신자들로 조직된 성모성심회(聖母聖心會)를 조직하고42) 11월 6일자로 프랑스에 있는 승리의 성모성당(Notre-Dame-des-Victoires) 주임인 데쥬네트(Desgenettes) 신부에게 보내는 서한을 통해, 조선의 성모성심회를 정식으로 인준하여 그들의 회원 명부에 올려달라고 요청하고 두 성직자가 공동서명을 하였다.43)

 

앞서 살펴본 바를 종합해보면, 1846년 11월 초에, 페레올 주교는 성모성심회의 조직과 동시에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조선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을 위하여 순교자 기록을 정리하여 교황청까지 보내려고 했었다. 이러한 순교자 현양운동 또한 박해로 야기된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유익한 방안이었을 것이다. 즉 순교자들과 관련된 기록을 모으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순교자들의 전구로 조선교회를 보호해달라고 기도하면서 그들의 영웅적인 용기를 신자들에게도 고취시켜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1년 전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중국의 상해에서 조선의 강경포로 안내해온 김대건 신부가 라파엘 호에서 거센 풍랑을 만나 배가 전복되거나 파선되는 위험에 닥칠 때마다, 성모께서 보호하신다고 외치면서 동승한 조선 신자들을 격려하고 성모님께 항해의 안전을 간청하는 기도를 바친 경험을 회상하면서, 페레올 주교는 성모신심과 순교신심의 고취를 함께 도모함으로써 조선교회의 영적 버팀목을 더욱 굳건하게 유지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순교자들에 대한 페레올 주교의 현양운동은 자연스럽게 성모신심의 흥기(興起)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동시에 추진될 수 있었고, 이는 병오박해로 조성된 조선교회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큰 정신적 도움을 주게 되었던 것이다.

 

 

Ⅲ. 페레올 주교의 양반중심 교회운영 및 최양업 신부와의 관계

 

앞서 제1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페레올 주교의 국내 사목활동 시기(1845.10~1953.2)의 큰 특징 중에서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조선순교자에 대한 현양과 성모성심회 조직을 통한 성모신심의 진작을 제외하면, 기해박해 이후 중단된 공소순방을 다시 재개함으로써 조선 신자들의 성사생활을 보존한 것과 국내외에서 신학생을 교육하여 방인사제로 양성한 일을 또 하나의 큰 특징으로 들 수 있다. 그런데 공소순방 및 신학생 교육과 관련해서는 이미 기존의 연구성과가 있으므로44) 이를 활용하면서 본장에서는 김대건 순교 이후 페레올 주교와 동료 사제들 및 평신도 일꾼들 사이의 대인관계를 주교의 사목활동과 관련해서 분석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자 한다. 그것은 곧 페레올 주교가 양반 출신 신자들을 그의 측근으로 중용하여 사목활동을 전개한 배경과 그에 따른 문제점을 분석하는 일이다. 주지하듯이 이러한 주제와 관련하여, 이미 연구자들 사이에는 페레올 주교와 최양업 신부 간에 양반 신자들의 문제에 대한 의견 차이가 있었고, 그것은 최양업 신부의 서간을 통해서 잘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이 지적되어 왔었다.45) 그러나 이러한 문제의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해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페레올 주교 시대 사목활동의 특징을 구조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46) 이제 이러한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 페레올 주교 시기 사목활동에 나서는 선교사들의 행차에 대해서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박해시기 프랑스 선교사들의 공소순방 등 행차는 외형적으로는 조선 양반 상주(喪主)들의 그것을 모방한 것이었다.

 

길을 나서자마자 우리는 억수같이 내리는 비를 만났지. 이 비는 걷고 있는 내 수행원들에게 골탕을 먹였어. 그러면서 힘이 넘치는 말 위에 올라타고 기름종이로 된 망토를 푹 쓰고 있는 나를 거의 젖게 만들었지. … 넓은 강을 만났지. … 뱃사공은 비에, 진흙에, 조수에 겁을 먹고서 갈 수가 없다는 거야. 힘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지. 다행히 내게는 수행원들이 많았어. 이들이 소리치고 협박을 했어. 아무런 효과가 없자 뱃사공 하나를 잡고는 때리기 시작하는 거야. 그때서야 뱃사공들은 우리를 건네주겠다고 했지. … 우리는 기품을 하나도 잃지 않고 어디든지 양반 행세를 하며 다녔어. 그날부터 우리는 우리가 가는 주막마다 방을 차지하고 있던 사람들을 몰아내었지. 그러면 어떤 때는 그 가엾은 사람들은 추위에 몹시 떨어야 되었어. 아이들을 데리고 밖에서 자야 하니까. 난 마음속으로 그들을 불쌍하게 여겼지. 그렇다고 어떻게 하겠어? 이렇게 하는 것이 불행한 만남을 피하고 우리를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인 걸. … 엄한 말투로 말하고 가끔은 협박도 하고, 조선의 양반들이 평소에 하는 대로 했어. 우리들을 밀쳐내지 못하도록 하면서 말이야.47)

 

위의 행차는 페레올 주교와 동시에 입국한 다블뤼 신부(1857년 주교 서품) 일행의 공소방문길을 묘사한 것이었다. 다블뤼 자신도 이런 방법이 다소 정도에 벗어난 무례한 일인 줄 알았으나 선교사를 체포하려는 박해자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서는 부득이한 방법이자 때로는 아주 편리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 자신들의 행동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지옥을 지키는 머리가 셋 달린 무서운 개’를 의미하는 ‘세르베르(Cerbere)’의 난폭한 행동 바로 그것이었다고 실토했다. 페레올 주교의 행차가 어떠했는지 알 수 없지만, 주교가 권위의식에 사로잡힌 양반 신자들을 측근으로 중용했다는 최양업 신부의 지적을 통해서 추론해볼 때, 적어도 높은 관리가 많지 않은 한적한 지역에 있는 공소들을 순방할 때만은 아마도 다블뤼 신부의 위 진술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같은 기록은 박해시대라 몰래 인기척도 내지 않고 산길로만 숨어서 다닐 것처럼 생각되었던 선교사의 나들이 모습과는 너무나도 달라서 다소 황당한 느낌마저 주지만, 이런 모습도 도망자처럼 깊은 산길을 소리없이 다니는 선교사들의 일반적인 행차와 마찬가지로, 당시 선교사들이 종종 써먹은 실상이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하겠다. 특히 순방 지역이 여러 도에 걸쳐서 있는 경우, 선교사들의 고단한 일상생활, 체력의 한계 및 자주 풍토병으로 고생하던 육신 등을 고려하면 단독으로 도보여행(徒步旅行)을 하고 싶어도 그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불가능한 경우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다블뤼 주교의 행차의 경우, 그가 자리잡은 충청도를 벗어나 자주 전라도 깊숙한 지역까지 공소 순방길에 올랐던 점을 고려하면, 말을 동원한 단체여행이 불가피했던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48) 여기서 향촌사회의 세도가나 양반 행세를 하면서 공소 순방에 나서는 선교사들이 누구를 대동하고 다니는지 거의 명백하다. 그 수행원들 중에는 분명히 양반 출신의 신자들이 있어서 문제가 있을 때 앞장서서 상대방을 언변으로 제압하였을 것이고, 또 그들 중에는 거의 무뢰한이나 건달의 수준에 가까운 유랑민 신자도 섞여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길에서 만나는 외교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공소를 차린 교우촌의 가난한 신자들에게도 같은 행세를 했을 것이므로, 선교사의 순방을 맞아 모욕을 감수하며 이들을 접대해야 했던 신자들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불평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기에 최양업 신부는 그 폐단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우리 조선에서 양반이라는 자들에 대한 여론을 말하면 대단히 부정적입니다. 건전한 정신을 가진 양반 자신들까지 포함하여 모든 백성이 양반 계급의 독선, 오만, 횡포, 부도덕이 모든 (사회) 악의 근원이고 (백성들의) 온갖 비참함의 원인임을 시인하며 지겨워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페레올) 주교님은 양반 계급만 너무 편애하시어 이미 너무도 높아져 있는 양반들을 더 높이 추겨 주고, 그 반면에 이미 너무나 비참하고 억눌려 있는 일반 서민들을 더욱 억누르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신자들 사이에 더욱 불화가 심해지고 많은 이들이 의분을 느끼고 자포자기에 빠졌습니다. 또한 교우들의 열심히 날로 감퇴되어 가고 악한 사정이 더욱더 악하게 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49)

 

이에 최양업 신부는 몇 번이고 페레올 주교에게 주교를 보좌하는 양반 복사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이들을 내보내라고 진언하였으나 오히려 꾸중만 들었고 그 복사들로부터는 미움을 받았다고 한다.50) 그런데 페레올 주교는 최양업 신부의 이처럼 정당한 건의를 왜 들어주지 않았을까? 그리고 오히려 자신의 복사들을 두둔하려 했을까? 그 배경의 일단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선교사가 사목방문을 나설 때 박해자들의 눈을 피하면서 효과적인 여행을 하기 위해서 양반 신자들이 그를 수행하게 함으로써 든든한 보호를 받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유는 그 뿐만이 아니었다. 다블뤼 신부는 공소 순방을 통한 사목활동의 어려움을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이런 순회의 피로와 고생이 어떤 때는 매우 큽니다. 길이 멀고 험한 것, 잘 알지 못하는 말 때문에 일이 복잡해지는 것, 신자들의 무식과 무례함, 이 모든 것이 곤란을 더하게 하는 데 힘을 합치는 것입니다. 조선 사람들은 말이 많고 게을러서 신부들이 없으면 별로 배우지를 않습니다. 그들이 종교에 무관심한 것은 아니지만, 트이지 않은 정신을 가진 그들은 조선에 선교사들이 없는 동안은 종교교육이 쓸 데 없다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기본적인 진리를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외교인 여자가 신자 신랑과 결혼하는 날 그 여자가 무슨 일인지 알지도 못하는데 그에게 세례를 준 일이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머리에 물을 붓는 것이 신자들의 혼인예식인 줄 알았습니다. 세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51)

 

위의 인용을 통해서 우리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겪은 사목활동상의 여러 가지 어려움을 알 수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신자들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교육 문제를 해결할 마땅한 방안이 없다는 점에서 선교사들의 고민이 컸던 것을 알 수 있다. 박해시기 선교사들은 대개 조선말에 서투를 뿐만 아니라, 신자들과 직접 대면할 수 있는 기회가 1년에 1~2번으로 제한되어 있었으므로, 신자들의 재교육과 예비신자 교리교육은 으레 교우촌, 공소회장의 몫이었다.52) 그런데 페레올 주교의 시기에는 이러한 회장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신자집단은 튼튼해져 갑니다. 목자 없이 홀로 지낸 7년 동안 그 안에 들어왔던 여러 가지 폐단이 차츰 사라져 갑니다. 그리고 박해가 남긴 상처도 아물어 갑니다. … 우리가 가장 고통을 받는 것은 좀 능력있는 신자들이 부족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와 동행하기 위한 복사(服事)들을 두기도 힘이 듭니다. 사실 아무 복사나 신부를 인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수단이 있고 학식이 있고 슬기롭고 이 일에 훈련을 쌓은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지금은 전혀 없다시피 합니다. 이런 사람 없이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 어떤 주막에 발을 들여놓을 수도 없고, 조금만 길을 가려해도 넘을 수 없는 장애물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특히 회장이 부족합니다. 프랑스의 어떤 순진한 농부가 회장이 되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래도 (이 비유는) 지금의 우리 회장들에 대해서 너무 높이 평가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어떤 회장들은 이 수준을 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숫자는 미미합니다. 지금으로서는 학식 있는 계급에서 입교하는 사람이 적습니다.53)

 

위의 진술은 페레올 주교 시기 다블뤼 신부가 한 말이다. 이러한 사정은 페레올 주교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조선 입국을 전후하여 유일하게 유능한 인물로 평가했던 김대건 신부가 순교했고, 김대건 신부와 함께 그를 수행하던 조선교회의 유명한 평신도 지도자들, 현석문, 남경문, 한이형 등 지식 있고 용감하며 성실했던 일꾼들이 모두 순교했기 때문에, 이들을 상실한 페레올 주교의 낙심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페레올 주교가 쓴 다음의 편지를 통해 이러한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올해의 박해는 저희들에게서 두 명의 지도급 인물을 빼앗아갔습니다. 안드레아 신부와 현 가롤로입니다. 저희는 활동 능력을 갖춘 인물들의 극단적인 부족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올해는 마카오로 신학생들을 보내는 것이 불가능하며, 선교사들을 입국시키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 행동력을 갖춘 남자들과 열렬한 신자들이 대단히 드물었던 이 불행한 시절에 개종은 텅빈 상태였습니다.54)

 

위 인용에서 알 수 있듯이, 페레올 주교는 병오박해 직후, 다른 해와 달리 마카오로 신학생을 파견하는 일도, 프랑스 선교사들을 입국시키는 일도 모두 불가능했으며, 외교인에 대한 선교를 통해 입교를 권장하는 일은 더욱 힘들었다고 고백하면서, 그 가장 큰 원인은 이러한 일들을 수행할 인재의 상실에 있다고 했다. 병오박해 직후 조선교회의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도 페레올 주교는 그의 측근으로 능력있고 활동적인 인물을 절실히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와 현석문 가롤로 회장 등 당시 조선교회의 지도급 인물들이 사라진 상황에서 페레올 주교의 안타까움은 단순한 망연자실의 상태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페레올 주교는 그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잃은 것이 날로 더욱 슬프고 더욱 쓰라리게 느껴집니다. 막대한 손실입니다. 조선 포교지가 불쌍하고 교우들이 불쌍합니다 ! …55)

 

이러한 페레올 주교와 마찬가지로 그의 동료 다블뤼 신부도 인재부족의 심각성에 대해 고민하였다. 그리하여 앞서 살펴본 인용문에서처럼“이런 (훈련받은) 사람이 지금은 전혀 없다시피 합니다”고 하였던 것이다. 페레올 주교의 측근 인물로 김대건 신부와 함께 중요한 인재로 생각했던 현석문 가롤로는 역관 출신으로 중인계급에 속한다. 그러므로 페레올 주교가 그의 측근으로 무조건 양반 출신만을 고집했던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양업 신부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은 주교가 양반 중심의 교회운영을 해갔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과연 양반 신자들이 교회 내에서 그처럼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선교사들의 충실한 협조자요 유능한 일꾼들이었을까? 이와 관련해서는 주로 병인박해기의 양반 신자들(215명)에 대한 기록을 통계학적 방법으로 분석 처리한 서종태 박사의 논문이 주목된다.56) 이 논문에 의하면, 당시 신자들 중 대략 14.4% 정도를 차지한 양반 출신 신자들은 성직자들의 영입, 복사와 공소회장의 역임, 성직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와 청소년 교육을 위한 학교의 설립과 운영, 교리서나 기도서를 번역하고 필사하거나 간행하여 널리 보급하는 일 등의 다양한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 분석이 병인박해를 전후한 시기를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페레올 주교의 시기와는 대략 10년 이상의 간극이 있다고 할 수 있으므로, 위 분석결과가 페레올 주교의 시기에도 전적으로 합치된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그가 분석한 양반 신자들의 역할만은, 앞서 분석한 다블뤼 신부의 서한이나 기타 유관한 연구논저들 을57) 통해서 볼 때, 대체로 페레올 주교의 시기에도 그러했다고 보여진다.

 

이러한 양반 신자들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이들에게 크게 의지한 사람이 바로 페레올 주교였다. 그의 이러한 양반 편향성은 이미 양반 신분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김대건 신부가 그를 중국에서 보좌하던 시절부터 익숙해져서 수년간 지속된 관습이었다고 보여진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만약 김대건 신부의 순교를 몰고 왔던 그의 체포과정을 살펴보더라도 만약 김 신부가 자신의 양반 신분을 내세우기 보다는 적당히 관가의 비위를 맞추고 고개를 숙였더라면 체포를 면할 수 있었을 것이며, 그랬더라면 페레올 주교도 인정하는 그의 유능한 능력을 발휘하여 훨씬 더 더많은 사목 활동상의 공적을 남길 수도 있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58) 그런데 이러한 체포과정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페레올 주교가 극도의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표현하면서도, 김 신부에 대해서 한마디도 비난하지 않았음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다. 이는 아마도 김대건 신부가 처했던 체포의 순간이 인간의 능력을 벗어나는 불가피한 상황이었다고 페레올 주교가 인식한 때문이었을 것이며, 따라서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양반 신자들에 대한 페레올 주교의 긍정적 인식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부자간(父子間)의 정(情) 이상으로 김대건 신부를 전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했던 페레올 주교에게 김대건 신부 순교 이후에 김 신부와 맞먹는 활동능력과 친분을 가진 협조자가 나타나서, 성직자가 양반 신자만을 편애할 때 발생하는 여러 가지 폐단에 대해 충고를 하지 않는다면 그로서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기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또 한 사람의 유능한 사제였던 최양업 신부가 페레올 주교에게 충언을 올렸지만, 페레올 주교는 불행히도 그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마도 대담하고 직선적이었던 김대건 신부와는 정반대의 기질을 가졌던 신중하고 섬세했던 최양업 신부에게서 페레올 주교는 평소 호감을 느끼지 못했던 데다가 양자 간에 충분한 대화(對話)를 통한 의사소통(意思疏通) 노력이 부족했던 것이 그 한 원인으로 지적될 수 있을 것인데,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곧 양자 간에 양반 신자들의 긍정적 역할과 그들의 폐단에 대한 인식과 평가를 둘러싸고, 나름대로 객관적 사실에 바탕을 둔 분명한 견해 차이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 차이가 그들 사이의 사소한 감정이나 기질의 충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크고 근본적인 의사불통(意思不通)의 요인이었다고 판단된다. 즉 페레올 주교는 공소를 순방할 때에 안전하게 길 안내를 하고 성사를 받을 신자들에게 적절한 교리교육을 실시하고, 평소 신자집단을 잘 추슬러 지속적인 신앙생활을 하도록 이끌 수 있는 평신도 지도자들 중에 양반 출신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비록 양반 계층만을 그의 측근으로 삼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59) 그의 주위에 몰려드는 양반 신자들을 애써서 물리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에 비해 최양업 신부는 페레올 주교의 현명한 분별력을 흐리게 하면서 교우들간에 출신 신분 문제로 불화를 일으키는 주교 측근의 일부 양반 신자들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고 보았으며, 이는 그들이 비록 주교의 공소 순방 업무를 안전하게 인도하고 신자들에게 필요한 교리를 가르치는 일부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하더라도 한국 교회의 발전을 위해서 반드시 제거되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페레올 주교는 양반 신자들의 활용을 통해서 공소 순방의 안전성을 확보하고 신자교육을 원활히 하겠다는 선교전략을 가진 반면에, 최양업 신부는 그런 측면을 수긍하면서도 신자들간의 불화를 일으키는 고압적인 일부 신자들의 허위적(虛僞的) 양반의식의 제거를 통한 신자들간의 단합이 더욱 중요하다고 보아,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기교회의 평등하고 화합하는 공동체상을 구현하려는 사목방침을 한사코 견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양자간의 의견충돌은 단순한 감정상의 문제가 아니라 페레올 주교 시기 조선교회의 당면과제에 대한 인식의 차이와 이로부터 야기되는 사목방침상의 차이라는 보다 현실적이고 중대한 문제가 적어도 페레올 주교 시기에는 해결되지 못한 채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평가는 이와 관련된 제반 문제와 실상을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충분한 자료가 확보될 때까지 일단 유보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60) 이러한 의견충돌에도 불구하고 페레올 주교는 최양업 신부를 매우 소중하고 고마운 조선대목구의 일꾼으로 생각하고 자주 그의 건강을 염려하였던 사실이 페레올 주교의 서한 곳곳에서 드러난다.61)

 

 

Ⅳ. 페레올 주교의 제국주의 인식의 변화와 그 배경

 

페레올 주교의 서한을 주의깊게 검토해볼 때,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측면이 있다. 그것은 곧 선교사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인 선교지 국가나 그 백성에 대한 인식의 측면이다. 기존의 연구에 의하면 페레올 주교는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서, 곧 선교하기 위해서는 무력(武力)의 사용까지도 정당화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보았다.62) 이러한 평가로 페레올 주교는 곧 19세기 중반 서구 제국주의 세력의 동아시아 침략이 본격화된 시점에서 제국주의 침략에 편승하여 가톨릭 신앙을 전파하려 했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페레올 주교의 이같은 견해는 19세기 중엽 프랑스 선교사들의 보편적인 선교의식(宣敎意識)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선교 내지 신앙이라는 도덕적 가치를 자연법적(自然法的) 기본권(基本權)의 하나로 인식하는 ‘양심(良心)의 자유(自由)’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이 양심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무력의 사용도 가능하다”고 판단한 집단적 인식에서 비롯된 일이었다.63) 그렇다면 페레올 주교만 나무랄 일이 아니라, 당시 조선에 진출한 프랑스 선교사들 사이에 약간씩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부분의 선교사가 페레올 주교와 유사한 선교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식은 1836년부터 1840년대 중후반까지 10년 전후의 기간 동안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교육을 받고 성직자로 양성된 김대건, 최양업 등 조선인 사제들에게서도 기본적으로 이식(移植)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64) 그렇다면 성직자나 평신도를 막론하고 박해시대 한국 천주교회의 주요 활동인물들 중에서 제국주의에 조금도 오염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한편 서구문명(西歐文明) 우월주의 의식에 입각하여 조선사회의 문화와 전통을 비하하거나 야만시하는 경향에 있어서도 페레올 주교만이 아니라, 대다수의 프랑스 선교사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으로 파악된다.65) 그런데 이러한 부정적 인식을 가진 프랑스 선교사들에 대해 한국인 성직자였던 김대건, 최양업은 어떻게 생각했으며, 이를 시정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궁금하지만, 필자의 제한된 능력 때문에 현재까지는 구체적인 관련 자료를 찾을 수가 없었다. 다만 조선에 들어와서 조선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하고 평신도 회장들을 통하여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과정을 여러 해 반복하면서 점차 조선의 전통문화에 대한 오해를 해소하고 조선 사람들의 장점을 발견하게 된 “일부 프랑스 선교사들은 조선과 조선사람, 조선문화를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고 하는 최근의 연구 성과를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66) 또한 이러한 일부 선교사의 조선인식 변화와 함께 대략 1860년대의 극동사태 이후 상당수의 선교사가 이러한 사태에 대해 부정적, 회의적으로 인식하면서 프랑스 함대의 무력적 개입보다는 평화적 외교적 교섭에 의해서 조선왕조가 전교를 자유를 허용하도록 하는 방안을 선호하는 경향도 보여준다.67)

 

그런데 페레올 주교의 경우는 1846년 병오박해 직후부터 이전의 무력개입에 대한 강한 긍정론이 서서히 회의적인 인식으로 바뀌다가 1848년 이후부터는 무력개입이 아닌 외교적 교섭론으로 분명히 전환하는 것을 그의 서한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병인박해 전후에야 제기되는 ‘제국주의 군함의 조선출병 반대론’의 선구자였다고도 말할 수 있게 된다.

 

㉮ 영국 배가 제주도에 출몰한 것은 (조선) 왕국 전체를 충격에 몰아넣었습니다. 그들은 유럽 사람들이 자기네 동포들의 죽음을 복수하려고 오지나 않았는지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만약 신부님이 세실 씨나 다른 함장(艦長)에게 조선으로 와서 우리 동료 신부님들의 죽음에 대한 이유를 묻도록 마음먹게 할 수 있다면 이것은 종교(=천주교)에 큰 자산이 될 것입니다. …… 조선의 백성들은 여전히 정말로 야만적인 상태에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그리스도교를 통하여 문명화되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용서받을 것입니다.68)(*1845.12.27. 발신)

 

㉯ 만약 그들(=프랑스 군함)이 온다면, 우리 동료 신부님들의 죽음에 대한 이유를 요구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왕에게 종교의 자유를 선언하라고 강요하기를 바랍니다. 또다른 좋은 수단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북경의 재중국 영사의 중재를 통해서 중국 황제에게 간청하는 것입니다. 조선의 왕에게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조용히 내버려두라고 경고하도록 말이지요.69)(*1846.9.6.)

 

㉰ 지금 이 순간까지도 우리는 정말 그(=세실)의 행동을 납득할 수 없습니다.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만약 그들이 우리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질 뿐 교우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면,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었으면 합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바랄만한 유일한 영광마저 우리에게서 빼앗아버리고 우리, 전교지에 치명적인 타격을 줍니다. 만약 그들이 우리에게 유익한 것 같은 무언가를 하고자 한다면, 사람에게 포악한 이 호랑이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러 오십시오. 이것은 쉽습니다. …… 친애하는 신부님, 영사님께 부탁하여 황제의 주변에서 중재를 하여 조선의 교우들에게 자유를 주도록 하실 수 없을까요? 이것은 영사님께서 대단히 칭송받을 만한 공적이자 인류에 바치는 탁월한 봉사가 될 것입니다.70)(*1846.11.5. 발신)

 

㉱ 분명한 것은 그들(=프랑스 군함)이 조선에 출몰한 일이 우리에게 썩 좋은 결과를 가져다 주지는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 조선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협박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중국과 일본 외에는 세상을 알지 못해서 그다지 겁을 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부는 교우들에게 더 난폭하게 될 뿐입니다. …… 만약 신부님이 영사의 권한을 중재로 하여 조선에서 (종교의) 자유를 얻게 해 주신다면, 이것은 천주교를 위해서, 그리고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서 대단히 유익하고도 칭송받을 만한 업적이 될 것입니다.71)(*1847. 11.25 발신)

 

㉲ 이 야만적인 민족이 도덕적인 영향력을 받아들일까요? 이들은 최강자의 법칙을 인정합니다. 약한 자는 힘있는 자 아래에 굴복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가진 이론의 전부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우리가 대포와 총검의 사용을 요청한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주십시오. 당국자의 말 한 마디면 우리를 평화롭게 하는 데 충분합니다.72)(*1848.11 발신)

 

위에서 인용한 ㉮~㉲까지 1845년부터 1848년까지의 발신 날짜 순서대로 배열된 페레올 주교의 이 서한들은, 프랑스 군함의 무력개입에 대한 강력한 희망(㉮)에서, 차츰 이에 대한 회의적인 반응이 나타나지만, 여전히 무력개입의 정당성이나 필요성을 옹호하다가(㉰), 무력개입(武力介入)의 무용론(無用論)과 무력개입의 폐단(弊端)을 확실히 깨닫는 단계(㉱)에 이르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그는 무력개입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김대건 순교 이후에는 무력개입과는 별도의 방안으로 평화적(平和的)인 외교중재론(外交仲裁論)을 병행해서 개진하다가(㉯, ㉰), 이후 무력개입론을 완전히 포기하고 평화적인 외교교섭 내지 외교적 중재에 의한 조선왕국의 복음화를 도모하고 있음(㉱, ㉲)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페레올 주교는 병오박해를 전후하여 김대건 신부를 구출하고 교우들을 보호하는데, 기대를 걸었던 프랑스 군함의 무력시위가 아무 소용이 없음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고, 이에 무력적 방법을 완전히 포기하고, 재중국 프랑스 영사의 외교적 중재와 중국 황제와의 교섭에 큰 기대와 희망을 거는 쪽으로 조선 전교의 방법론이 크게 전환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조선의 문화나 조선인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는 서구우월주의(西歐優越主義) 문명관에 입각한 조선비하의식(朝鮮卑下意識)을 입국 전(㉮)부터 입국 후 2년이 지날 때(㉲)까지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도 함께 확인할 수 있다.

 

페레올 주교의 제국주의 인식상에 있어서 이처럼 중대한 변화를 초래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문제는 김대건 신부의 체포와, 때마침 김 신부가 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때에 조선 해안에 함대를 이끌고 1839년 기해박해 선교사들의 부당한 살해에 대한 문책성 외교문서를 던져주고 간 세실 함장의 행동, 그리고 그 이후에 벌어진 김대건 신부에 대한 조정내 강경론자의 득세 및 이로 인한 김대건 신부의 순교과정 등 일련의 모든 과정을 지켜본 페레올 주교의 의식 속에서 이루어진 변화였기에, “김대건 신부의 순교”라는 사건이 분명히 그 변화의 중대한 요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단순히 김대건 신부의 체포, 감금, 순교과정에서 전해들은 사실 때문에 이같은 인식의 변화를 일으켰을까? 이와 관련하여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페레올 주교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김대건 신부의 서한은 페레올 주교의 제국주의 인식에 어떤 변화를 일으켰던 요인이 무엇이었는지 암시해 준다.

 

판관이 프랑스 것으로 생각되는 군함 세 척이 외연도(外煙島) 근처에 정박하였다는 소식을 제게 전하였습니다. 또 그는 이 배들이 프랑스 황제의 명령에 의해 조선에 와서 조선에 큰 불행이 있을 것을 것이라고 위협하고 있는데 두 척은 내년에 다시 올 것이라고 단언하며 떠났고, 셋째 배는 아직 조선 바다에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조선정부는 겁을 먹고 있는 것 같습니다. 1839년에 순교한 세 명의 프랑스 인의 죽음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배들이 온 이유를 아느냐고 제게 묻기에 저는 그들에게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어쨌든 프랑스인들은 이유없이 어떠한 해도 입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도무지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또 그들에게 프랑스가 강국이고 그러나 그 정부가 아량이 있음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은 그 말을 믿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 명의 프랑스인을 죽였지만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다고 하며 반박했습니다. 실제로 프랑스 선박들이 조선에 왔는지 주교님께서는 그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영국의 세계지도 한 장을 번역하라고 제게 주었습니다. 컬러로 두 장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그들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한 장은 임금을 위한 것입니다. 지금 저는 대신들의 지시로 작은 지리(地理) 개설서를 편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저를 큰 학자로 여기고 있습니다. 불쌍한 사람들이죠! 73)

 

위 서한은 김대건 신부가 감옥에 갇혀있던 1846년 8월 26일자로 페레올 주교에게 보낸 라틴어 서한을 페레올 주교가 불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 서한에서 김대건 신부는 조정의 대신들과 판관들마저 김 신부를 훌륭한 학자로 생각하고, 장차 그 국경을 벗어난 죄를 없애주고 대외업무에 활용하려고 생각하게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74) 그러나 이때 갑자기 조선 해안에 나타난 세실 함대의 협박성 문책 편지에 조정 공론이 바뀌면서 결국 김대건 신부는 순교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건의 전개과정을 김대건 신부로부터 직접 글로 보고받아 잘 알고 있었던 페레올 주교였기에, 앞서 살펴본 그의 1847년 11월 25일자 서한㉱와 같이, “조선사람에게는 협박이 필요하지 않으며 협박을 가하면 오히려 교우들에게 더 난폭하게 대할 뿐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또한 주교는 조선의 조정 대신들이 한 때나마 김대건 신부를 훌륭한 학자로 여기고 서양사람들과의 대외업무에 활용하려는 생각이 있었다는 사실에서 평화적인 외교교섭론(外交交涉論)이 조선 정부에 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75) 그리하여 페레올 주교는 앞서 살펴본 서한 ㉯~㉲와 같이 김대건 신부의 사형이 집행되기 전인 1846년 9월 6일부터 김대건 신부와 동료들이 순교한 지 2년이 더 지난 1848년 11월까지 끊임없이 외교적 중재, 특히 프랑스 군함의 함장이 아닌, 북경에 주재하는 프랑스 외교관의 중재에 의해서, 조선왕조에 문호개방을 권고하고 복음을 전하는 방식을 꾸준하게 요청했던 것이다. 특히 마지막 서한에서는 분명하게 우리(=프랑스 선교사들)가 요구하는 것은 “결코 대포와 총검의 사용이 아니다”고 분명하게 선을 그음으로써 제국주의 프랑스의 무력을 동원하여 군사적인 시위를 벌임으로써, 조선왕조에 그리스도교 선교를 강요하는 방법이 잘못된 것임을 분명히 드러냈다. 이와같이 김대건 신부의 옥중서한에 직접적 자극을 받은 페레올 주교가 그의 선교정책 또는 대외관에 있어서 서구 제국주의 무력을 배제하고 평화적 외교교섭론을 견지하게 된 변화의 과정은 페레올 주교뿐만 아니라 점차 그의 동료 사제들, 즉 조선에 입국한 프랑스 선교사들에게까지도 그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에게 편지를 쓰기 한 달 쯤 전인 1846년 7월 30일자로 당시 만주교구에서 사목하던 베르뇌 신부, 그리고 조선선교사 메스트르 신부, 그리고 파리외방전교회의 리브와 신부, 르그레즈와 신부 등에게도 감옥에 갇힌 자신을 구하고 조선 교우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얻게 해줄 방안으로 다음과 같은 평화적 교섭론을 개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프랑스 영사가 중국 황제에게 신부들을 죽이는데 대한 잘못을 설득시키고, 또 황제가 조선 왕에게, 프랑스인들을 그렇게 쉽게 깔보고 죽이지 말도록, 그리고 신자들에게 자유를 주도록 명하게끔 황제에게 편지를 보낸다면 대단히 좋을 것입니다.76)

 

이와 같은 김대건 신부의 외교적 교섭론에 대해서 페레올 주교를 제외한 다른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들과 해외에 있던 파리외방전교회의 사제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아직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1860년대 초반 중국에서의 극동사태 이후 상당수의 천주교 선교사들이 제국주의의 무력개입이 빚어낸 부정적 결과를 비판하면서 평화적 외교론을 선호하는 쪽으로 변화된다고 하는 선행 연구 결과77)를 통하여 추론해 보면, 페레올 주교의 외교적 교섭론은 김대건 신부와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형성된 것으로, 이같은 대다수 선교사들의 인식변화를 훨씬 앞서서 제기된 것이므로, 향후 이러한 페레올 주교의 인식이 극동의 프랑스 선교사들의 인식에 준 영향에 대해서 면밀히 추적하고 검토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78)

 

 

Ⅴ. 맺음말 - 페레올 주교의 조선입국 후 사목활동에 대한 이해의 한 시각 -

 

파리외방전교회의 동아시아 선교는 대략 선교지의 현지인[邦人] 성직자 양성, 신자집단의 돌봄, 미신자 전교 등의 순서로 사목활동의 중점을 두고 추진되었다.79) 1843년 연말 만주에서 주교성성식(主敎成聖式)을 가진 제3대 조선 대목구장 페레올 주교의 경우도 이러한 전교회의 방침에 기본적으로 충실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중국에서 조선입국을 준비하며 머물 때 김대건과 최양업 두 조선 신학생을 착실히 교육하여 1844년 12월 만주에서 부제로 서품하였고, 이중 김대건을 조선입국의 우선 동반자로 선택하여 1845년 8월 17일 상해에서 사제서품식(司祭敍品式)을 거행함으로써 방인성직자 양성의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그러나 힘겨운 해상 입국과정을 거쳐서 조선에 들어온 지 7개월 만에 김대건 신부가 서해 입국로(西海入國路)를 개척하다가 체포되어 몇 달 후 순교하고 그의 동료들까지 함께 순교함으로써 조선교회 전체가 박해에 휘말리게 되었다.(1846년 병오박해)

 

입국 직후부터 신자집단을 순방하여 기해박해 이후 흩어지고 냉담해진 신자들을 찾아나서서 부지런히 이들을 다시 교회로, 신앙생활로 돌아오게 하던 페레올 주교 일행의 사목순방은 1846년의 병오박해로 중단되었고, 선교사들은 관가의 추적에 시달려 수개월간 지방의 깊은 산곡에 은신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대로 움츠려들고만 있을 수 없었기에 그들은 충청도의 은신처 수리치골 교우촌에서 김대건 신부와 그의 동료들, 즉 병오박해 순교자들을 포함하여 선임 교구장 앵베르 주교 때부터 추진되어온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수집하고 정리하여 중국, 프랑스를 거쳐 로마 교황청에 보내 시복시성을 추진함으로써 본격적인 현양운동을 추진하였다. 아울러 위축된 신자들에게 정신적 용기와 영적인 힘을 고취시킬 목적으로 프랑스에서 데쥬네트 신부를 중심으로 흥기했던 성모신심운동을 조선에도 도입하여 성모성심회를 조직하여 지속적인 기도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순교자 신심과 성모신심으로 교우들이 신앙생활에 충실을 더하고 열성을 배가하도록 지도하였다. 페레올 주교와 최양업, 매스트르 등 그의 동료 선교사들의 헌신적 노력으로 조선 순교자 현양운동은 마침내 첫 결실을 맺어, 1857년 9월 23일,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인 앵베르 주교와 그의 동료 등 모두 82위의 순교자가 교황 비오 9세에 의해서 가경자(可敬者, Vernerabilis)로 선포되기에 이르렀다.80) 이러한 순교자 현양과정에서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신부에 대한 교회의 기록으로서는 최초의 공식적인 보고서를 직접 작성하여 파리외방전교회 등 유럽의 선교사들에게 널리 알리고, 한편으로 최양업과 매스트르 신부 등을 통하여 라틴어로 번역하여 로마 교황청에 전달하도록 했다는 점에서 김대건 신부 현양 운동을 시작한 최초의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페레올 주교는 1846년 김대건 신부와 그의 동료들의 순교로 촉발된 병오박해의 여파가 잠잠해진 1847년 연말부터 다시 박해로 순방하지 못한 교우들을 방문하여 성사를 집행하는 일에 진력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839년 기해박해 당시 약 1만명에 이르렀던 신자들을 잘 수습하고 신앙생활에 안정을 되찾도록 노력한 결과, 그가 선종하기 직전 해인 1852년 연말에는 대략 12,450명으로 신자수가 착실하게 불어나게 되었다.81) 이러한 성사집행을 통한 신자들의 신앙생활 정착과 함께 신자교육의 필요성 때문에 그는 양반 신자들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게 되었고 동시에 순방길의 편리함과 안전함을 도모하기 위해서, 최양업 신부의 거듭되는 반대와 간곡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다소 폐단이 많고 교회 공동체 내의 신분적 위화감(違和感)을 조성하는 일부 양반 신자들을 한사코 두둔해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 신자들을 교육할 회장과 신부의 순방을 보좌할 복사 등 유능한 평신도들의 필요성 못지않게 선교사들의 필요성도 계속 증가되었기에 김대건 신부가 개척한 중국 상해~조선 백령도를 잇는 서해횡단 선박을 통한 선교사 입국로의 개척에 몇 번씩의 시도를 거듭한 결과, 1852년에는 매스트르 신부가 입국하고, 1854년에는 장수 신부, 1856년 3월에는 베르뇌 주교와 푸르티에, 프티니콜라 신부 등 3명이, 이후에도 선교사들이 계속해서 이 해로를 이용하여 속속 조선입국에 성공할 수 있게 되었다. 김대건 신부를 활용, 서해 해상입국로를 개척하여 프랑스 선교사들이 병인박해기까지 지속적으로 국내에 입국할 수 있도록 한 것은 페레올 주교의 공적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순교자 현양운동과 성모신심의 고양, 그리고 서해 해상을 통한 선교사 입국로의 개척 등은 페레올 주교가 김대건 신부를 활용하여 이룩한 업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공적은 김대건 신부와 페레올 주교의 개인적인 성품이 직선적이고 실천적인 측면에서 서로 일치했다는 점 외에도, 만주와 한반도를 아우르는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페레올의 선교전략과 김대건의 역사지리인식이 일정하게 서로 합치되는 부분, 즉 대외관(對外觀)과 지리인식상(地理認識上)의 공감대가 형성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성격의 일치와 인식의 공감대가 양자의 협력(協力)을 통한 선교활동의 효율성을 한층 높여주었기에, 비록 여러 가지 난관이 있었지만 이를 차례로 극복하고 위와 같은 업적을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공감대를 바탕으로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신부의 체포와 순교과정을 모두 긍정하려는 태도로 임했고 일체의 비판을 가하지 않았던 것이며, 부자간의 정(情) 그 이상으로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순교과정을 최초의 공식적인 교회기록에서 정리하고 이를 교황청을 비롯한 유럽 교회에 전달함을 통하여 결국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82위의 조선 순교자들이 1857년 가경자로 선포되는 결실을 거두게 되었던 것이다. 이점에서 김대건 신부에 대한 공식적 현양운동은 그의 스승이자 장상인 페레올 주교가 직접 시작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 페레올 주교는 신학생 육성에도 힘을 기울여, 조선 입국 전 한때 구상하였던 만주신학교 건설을 일단 접어둔 채 조선 국내에서의 신학생 육성에 진력하였다.82) 그리하여 질병으로 사목순방에 나갈 수 없던 다블뤼 신부로 하여금 조선교구 신학교를 운영하게 하였고, 그로 하여금 조선 순교자들을 비롯하여 전교지(傳敎地) 조선의 문화, 풍속, 사람 등 인문지리 전반의 연구를 통해 가톨릭 선교전략을 수립하는데 필요한 연구작업을 진행하도록 허용해주었다. 특별히 그는 교회사(敎會史) 서적의 도입을 매우 중시하였고, 성사집행을 위한 사목순방이 본궤도(本軌道)에 들어서고 어느 정도 선교사의 여력이 남게 된다면, 전교지에 필요한 일로 교회사연구를 비롯한 문화적인 사업을 하고자 했다.83) 그런데 이러한 계획은 실제로는 후임 교구장의 시대에 가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곧 문화사업을 시행할 여건이 어느 정도 충족된 시기인 베르뇌 주교가 입국한 1856년 연말부터 다블뤼 신부는 사목순방보다는 선교전략을 위한 연구작업, 즉 교회 내 문화사업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순교자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교회사(韓國敎會史) 연구에도 본격적으로 돌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해 보면 페레올 주교는 다블뤼 신부로 하여금 조선 선교의 활성화를 위한 선교지(=조선) 문화와 역사에 대한 연구활동을 할 수 있는 기초적 여건을 마련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같은 결과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은 물론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의 인간적인 유대관계가 돈독했던 점도 작용했을 것이나, 근본적으로 그들의 선교지 조선에 대한 인식이나 조선왕조에 대한 복음화 방안이 서로 일치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즉 그들은 입국을 전후해서는 프랑스 함대에 의한 무력개입이야말로 미개한 조선을 선교하기 위한 유력하고 효과적인 방안으로 보았지만, 점차 무력개입의 무용성을 느끼고 오히려 그로인한 교우집단에 대한 폐단마저 인식하게 됨으로써 외교적 교섭이나 중재에 입각한 조선 전교를 선호하는 쪽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병오박해 직후부터 비롯된 페레올 주교의 이같은 인식변화는 그의 사후, 다블뤼 신부, 푸르티에 신부를 비롯한 몇몇 선교사들에게서도 드러났다. 그러나 다블뤼 주교의 인식이 어떤 점에서 페레올 주교의 인식을 계승한 것인지 또는 아예 별개의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향후 좀더 면밀한 고찰이 요청된다.

 

이상에서 언급한 페레올 주교의 공적에도 불구하고 그는 공소 순방길의 편의와 신자교육의 필요성 때문에 양반 출신 지식인 신자들을 회장이나 복사 등 그의 측근으로 중용하였고 이들의 지나친 신분의식 때문에 신자들 사이에 불화가 번지고 위화감이 조성되는 등 폐단이 있었으나 이를 개선하려는 노력보다는 묵인해 버렸다. 페레올 주교의 이같은 양반 중심 교회운영에 대해 최양업 신부는 여러 차례 비판적인 건의를 올렸으나 그때마다 묵살되거나 오히려 반감을 불러 일으켰는데, 이는 양자 간의 단순한 감정이나 기질의 차이에서 논의될 수 있는 성격의 일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이 문제는 교회운영 방향 및 선교활동의 중점적 과제에 대한 인식의 문제였던 것이다. 양반 신자 중심의 교회 운영이 페레올 주교의 사후에 어떻게 바뀌었는지 그 구체적인 양상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연구과제로 남겨둔다. 한편 페레올 주교는 최양업 신부와의 의견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목순방 활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그의 건강을 염려하는 모습까지도 보여준다.84) 또한 중국에서부터 자신에게 비판적 충고를 아끼지 않았던 매스트르 신부의 입국을 위해 수차례의 입국 실패를 거듭하는 그를 원망하거나 나무라지 않았다.85) 이러한 측면들을 종합해 볼 때 페레올 주교는 19세기 중반 한국교회의 발전을 위해서 많은 업적을 남겼을 뿐 아니라 인간적인 면에서도 훈훈한 정을 지닌 인격의 소유자라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그의 임종을 직접적으로 초래한 병고(病苦)에 시달리면서도 그의 곁에서 시중을 들던 다블뤼 신부를 공소순방에 내보면서까지 교우들에 대한 성사집행에 집념을 보이다가, 마침내 사제의 임종경도 듣지 못하고 외로운 죽음을 맞이하게 된 과정86)을 보면 한국 교회와 신자들에 대한 그의 남다른 애정이 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가 유언으로 자신의 시신을 자신의 선임 교구장 앵베르 주교의 곁이나, 조선인 사제 김대건 신부의 무덤 옆에 묻어주기를 소망했던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결국 순교자(殉敎者)의 정신으로 조선교회를 위해 땀흘려 헌신했던 그가 생전에 가장 소망하면서 주력했던 일이 무엇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즉 페레올 주교는 순교자 김대건 신부에 대한 최초의 공식적 교회보고서를 작성하여 이를 유럽교회와 교황청에 알렸을 뿐만 아니라, 죽어서까지도 선임 앵베르 주교의 무덤 곁이나, 사랑하는 제자요 아들과 같이 여긴 김대건 신부의 무덤 옆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김으로써, 오늘날 우리로 하여금, 페레올 주교야말로 ‘김대건 신부 현양운동’을 최초로 시작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동시에 그가, 교우들을 향한 순방 사목활동을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길 정도로, 여기에 전력을 쏟아 부었기 때문에 결국 체력의 고갈로 풍토병에 걸려 임종을 맞이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를 최양업 신부에 비견하는 ‘땀의 순교자’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라고 잠정적 결론을 내려본다.

 

이상에서 페레올 주교의 입국 후 사목활동을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순교자 현양, 양반신자 중심의 교회운영과 이를 통한 공소순방에의 주력, 그리고 제국주의 무력을 배제하고 평화적 외교교섭론으로 조선왕조의 복음화를 시도한 것 등 3가지의 측면에서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향후 페레올 주교의 사목활동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연구과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첫째로, 앵베르 주교 때부터 추진되어온 순교자 현양운동, 즉 기해박해와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기록을 모으고 조사하고 이를 보편교회에 전달하여 마침내 가경자로 선포되기에 이르는 전 과정을 구체적으로 추적하여 그 역사적 의미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둘째로 페레올 주교 시기의 공소순방 사목활동이 당시 선교사들에 의해서 어떻게 분담되어 추진되었는지 그 시기적 변화과정을 면밀히 추적하면서 아울러 그 결과로 드러난 신자수와 예비자수의 증가 및 이로인한 교세의 확대에 대한 구체적인 상관관계를 조사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페레올 주교의 제국주의 무력사용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김대건 신부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라면, 김대건 신부의 인식은 또 어떻게 형성되어 어떠한 모습으로 변모해갔는가 하는 내용을 조사해보아야 할 것이고, 아울러 페레올 주교와 동시대에 활동하면서 그의 직접적 간접적 영향을 받았던 메스트르, 다블뤼, 최양업 신부의 대외관 내지 제국주의 인식의 구체적인 형태들에 대해서도 시기의 변화를 염두에 두고 하나씩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김대건 신부와 페레올 주교의 공통된 선교전략과 지리인식상의 공통분모로 추정된 만주(간도)에 대한 영유권 인식이 어떤 계기로 형성되었는지 구체적인 검토를 해봐야 할 것이다. 또한 최양업 신부의 거듭된 충고와 건의에도 불구하고 양반 중심 교회운영이란 방침을 끝까지 견지한 페레올 주교의 방식이, 그의 사후 메스트르 신부가 교회장상으로 있을 때와, 그후 베르뇌 주교가 입국하여 조선교회를 이끌어간 시기에 이르기에는 어떻게 변모해갔는지 또는 그대로 유지되었는지에 대한 보다 자세한 연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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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우, 〈파리외방전교회의 한국진출의 의의〉 《교회사연구》 제5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최석우, 〈한국 교회 회장의 위치와 역할〉 《한국교회사의 탐구Ⅲ》(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최용규, 〈己亥 · 丙午敎難期 天主敎徒의 分析的 考察 - 1802~1846年을 중심으로 -〉 《교회사연구》 제6집(1988, 한국교회사연구소)

홍순호,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한국진출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태도〉 《교회사연구》 제5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홍이섭, 〈다브뤼신부의 조선연구에 대하여〉 《향토서울》 제2집,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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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현범, 《조선의 선교사, 선교사의 조선》(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총서 제7집)(2008. 한국교회사연구소) 참고. 페레올 주교가 조선에 입국하기 전까지의 생장과정 및 교육배경, 그리고 파리외방전교회 입회 후 중국에서의 활동과 관련해서는 본서에 함께 게재된 조현범 선생의 논문을 참고.

 

2) 본고와 조현범, 〈중국 체류시기 페레올 주교의 행적과 활동〉 《교회사학》 5호(2008.12, 수원교회사연구소)를 제외하면, 宋世興,〈高主敎 管理時代의 朝鮮가톨릭〉(一, 二) 《가톨릭청년》(1936년 7, 8월호, 가톨릭청년사)이 있을 뿐이다. 또 본격적인 논문은 아니지만 페레올 주교의 서한을 활자화하고 정리하는 책자를 간행하면서 그 서두에 페레올 주교의 활동과 업적들을 간략하게 요약해 놓은 최석우 몬시뇰의 글이 주목된다. 《페레올(J. Ferreol, 高) 문서》(한국교회사연구소 편, 1997) 중 <간행사>

 

3) 홍이섭, 〈다브뤼신부의 조선연구에 대하여〉 《향토서울》 제2집,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58 ; 정양모, 〈병인박해 순교자 다블뤼 주교〉 《종교신학연구》 제6집, 서강대 종교신학연구소, 1993 ; 김정숙, 〈깔래 신부 활동을 통해서 본 1860년대 조선 가톨릭 문화〉 《방곡황종동교수정년기념사학논총》 1994 ; 조현범, 〈모방 신부의 조선 전교〉 《교회사연구》 제22집(2004, 한국교회사연구소) ; 차기진, 〈金大建 신부의 활동과 업적〉 《교회사연구》 제12집(1997, 한국교회사연구소) ; 최석우,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 《한국교회사의 탐구Ⅲ》(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 최석우, 〈최양업 신부의 선교활동과 시복추진의 의미〉 《한국교회사의 탐구Ⅲ》(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 차기진, 〈최양업 신부의 生涯와 宣敎活動의 背景〉 《교회사연구》 제14집(1999, 한국교회사연구소) ; 차기진, 〈최양업 신부의 사목 중심지에 대한 연구 : 요동 차구와 진천 동골 · 배티를 중심으로〉 《최양업 신부의 사목 지역과 선종지 연구》(2007.12, 양업교회사연구소) ; 류한영, 〈최양업 신부의 서한에 대한 교의 신학적 고찰〉 《교회사연구》 제14집(1999, 한국교회사연구소) ; 류한영 · 차기진, 《교우촌 배티와 최양업 신부》(양업교회사연구소, 2000.6) ; 류한영, 〈동료 선교사들의 서한을 중심으로 한 최양업 신부의 선종지 연구〉 《최양업 신부의 사목 지역과 선종지 연구》(2007.12, 양업교회사연구소) ; 류한영, 〈다블뤼 주교의 서한에 나타난 사목활동과 구역 - 1845년에서 1857년까지의 편지를 중심으로 -〉 《한국사회와 천주교》(천산 김진소 신부 고희기념논총, 2007.12, 디자인 흐름) pp.161-210 ; 서종태, 〈최양업 신부의 사목 순방지 연구〉 《최양업 신부의 사목 지역과 선종지 연구》(2007.12, 양업교회사연구소) ; 박금옥, 〈최양업 신부의 선교 활동과 그 의미〉 《교회사연구》 제14집(1999, 한국교회사연구소) ; 조규식, 〈최양업 신부의 영성〉 《교회사연구》 제14집(1999, 한국교회사연구소) ; 정양모, 〈최양업 신부의 사목과 사상〉 《韓國 가톨릭 文化活動과 敎會史》(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4) 유원동, 〈기해박해 이전의 불란서신부의 활동상〉 《이선근고희논집》, 동간행위, 1974 ; 김정옥, 〈박해기 선교사들의 한국관〉 《한국교회사논문집》Ⅱ, 한국교회사연구소, 1985 ; 최석우, 〈재한 천주교 선교사의 한국관과 선교정책〉 《한국근대종교사상사》, 원광대출판국, 1984 ; 최석우, 〈파리외방전교회의 한국진출의 의의〉 《교회사연구》 제5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 홍순호,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한국진출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태도〉 《교회사연구》 제5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 배세영, 〈파리외방전교회〉《韓國 가톨릭 文化活動과 敎會史》(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 배세영, 〈한국 파리외방전교회와 그 선교방침〉 《한국교회사논문집》Ⅰ,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 이병호, 〈프랑스선교사들의 영성과 한국교회〉 《교회사연구》 제5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 조현범, 〈19세기 프랑스 선교사들의 문명관 - 1836년부터 1886년까지 -〉 《교회사연구》 제15집(2000, 한국교회사연구소) ; 조현범, 〈철종대 프랑스 선교사들의 조선활동과 일상생활〉 《교회사연구》 제19집(2002, 한국교회사연구소) ; 조현범, 〈19세기 중엽 프랑스 선교사들의 조선인식과 문명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철학종교전공 박사학위논문(2002.3) ; 조현범, 〈19세기 중엽 프랑스 천주교 선교사의 조선 인식〉 《종교연구》 제27집, 한국종교학회, 2002 ; 조현범, 〈1803년 사천성 시노드 연구〉 《교회사연구》 제24집(2005, 한국교회사연구소) ; 조현범, 《조선의 선교사, 선교사의 조선》(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총서 제7집)(2008. 한국교회사연구소)

 

5) 최용규, 〈己亥·丙午敎難期 天主敎徒의 分析的 考察 - 1802~1846年을 중심으로 -〉 《교회사연구》 제6집(1988, 한국교회사연구소) ; 고흥식, 〈丙寅敎難期 信徒들의 信仰 - 《捕盜廳謄錄》을 中心으로 -〉 《교회사연구》 제6집(1988, 한국교회사연구소) ; 방상근, 〈19세기 중반 천주교도의 경제 기반〉 《교회사연구》 제22집(2004, 한국교회사연구소) ; 방상근, 〈19세기 중반 한국 天主敎史 자료 연구〉 《교회사연구》 제24집(2005, 한국교회사연구소) ; 방상근, 《19세기 중반 한국 천주교사 연구》(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총서 제5집)(2006, 한국교회사연구소) ; 조 광, 〈19세기 중엽 西勢東漸과 朝鮮 - 金大建 殉敎의 歷史的 背景 -〉 《교회사연구》 제12집(1997, 한국교회사연구소) ; 장동하, 〈병인박해에 대한 프랑스의 대응과 강화점령사건〉 권희영 외 《병인양요의 역사적 재조명》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1 ; 장동하, 〈배론 신학교 교육과정에 관한 연구〉 《가톨릭 신학과 사상》 제51호, 가톨릭대학교 출판부, 2005 ; 문형만, 〈한국의 근대학교 발달과 배론 성요셉 신학당〉 《신학전망》 제68호, 1985 ; 노명신, 〈韓國天主敎 神學敎育의 敎會史的 意義 試考〉 《교회와역사》 제34호(1978년 6월, 한국교회사연구소) ; 서종태, 〈병인박해기 신자들의 사회적 배경과 신앙 - 양반 신자들을 중심으로 -〉 《민족사와 교회사》(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 원재연, 〈박해시대 천주교 신자들의 사회적, 경제적 생활 - “邪學漢家舍汁物放賣成冊”의 분석을 중심으로 -〉 《민족사와 교회사》(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6) 宋世興, 앞의 글, 《가톨릭청년》(1936년 7, 8월호, 가톨릭청년사) 1936년 합권호 pp.572-575, 644-647

7) 《페레올(J. Ferreol, 高) 문서》(한국교회사연구소 편, 1997. 5) 최석우 신부의 간행사

8) 앞서 언급한 조현범 박사의 논문에서 다루는 문제에 포함된다.

 

9) 이 부분은 앞서 언급한 조현범 박사의 논문에서 본격적으로 다룬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김대건 신부의 순교와 관련하여 그가 체포된 직접적 계기를 설명하는 수준에서 간략히 언급하는데 그치고자 한다.

 

10) 앞서 언급한 류한영, 차기진 등의 2000, 2007년 논저와 서종태(2007년) 논저가 이에 해당된다.

11) 조광 앞의 논문(1997) ; 조현범 앞의 책(2008) (제3부) 제10장 <선교사들의 문명관과 조선 출병론>

 

12) 페레올 주교의 1843년 3월 5일자 서한 A-MEP : Vol.577, ff. 729-732, 달레(저), 최석우 · 안응렬 역 주 《한국천주교회사》 (하) pp.41-43

 

13) 페레올 주교의 1845년 10월 29일자 서한 APF t. 19, 1847, pp. 232-241 ; On souffre beaucoup dans cette Mission ; mais cela dure peu, et le ciel recompense bien amplement ces peines en les couronnant du martyre. **이 부분을 비롯하여, 이하 본고에서 프랑스 선교사의 서한을 직접 번역하여 인용하는 데에는 조현범 박사의 도움에 전적으로 의존하였음을 밝혀두며, 깊은 감사를 표한다. 기존에 이미 프랑스어 원문을 번역한 출간물이 있을 때에는 동 출간물의 역주내용을 인용하고 원문은 따로 부기하지 않았다.

 

14) 페레올 주교의 1846년 11월 3일자 서한 A-MEP : Vol.577,ff961-972 ; Je vais vous parler des triomphes de la chretiente de Coree … a la tete de ces demiers se trouve M. Andre Kim, pretre indigene.

 

15) 같은 서한 ; … a la tete de ces demiers se trouve M. Andre Kim, pretre indigene. Seul homme capable que jeusse sous la main, …

 

16) 달레(저) 앞의 역주서(하), p.121

 

17) 리브와 신부의 1839년 8월 11일자 서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활동과 업적》(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1996) p.131 ; 이에 의하면 김대건은 종종 판단 착오를 하였고, 최양업과 균형이 도무지 안 맞는다고 할 정도로 학습능력상의 차이가 있었으며, 거기에다가 건강도 좋지 않아서 자주 위통, 두통 등의 통증을 호소하였기에 그의 스승 리브와 신부의 걱정거리였다. 이러한 사실과 관련하여 원로 교회사가 최석우 신부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 … 사실인즉 김대건이 동창인 최방제나 최양업에 비해 능력과 판단 면에서 뒤떨어져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인간이란 완전할 수가 없다면 자신의 약점을 깨닫고 그것을 극복하여 인간적으로 완성하려는 노력이 더 중요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김대건 신부에게 있어서도 약점을 극복하여 자신을 인간적으로 완성하고 나아가 순교의 영광까지 차지하게 한 그의 영성이 더 중요하다. 그만큼 그의 영성이 더욱 빛날 것이기 때문이다.” 최석우, 〈성 김대건 신부에 대한 연구와 현양의 의의〉 《한국교회사의 탐구Ⅲ》 p.332(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 반면에 김대건이 프랑스어 학습을 금지당한 것은 프랑스 군함의 통역에 활용되어 선교사의 본 목적을 충실히 이행하는데 방해될 것을 염려한 매스트르 신부의 건의 때문이었다고 본 학자도 있다. 조광, 〈19세기 중엽 서세동점과 조선 - 김대건 순교의 역사적 배경 -〉 《교회사연구》 제12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97. p.62

 

18) 김대건 신학생의 1842년 12월 9일자 서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서한》(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1996) p.79

19) 달레(저) 앞의 역주서(하), pp.73-74

 

20) 매스트르 신부의 1844년 5월 19일자 서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활동과 업적》(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1996) p.235 ; 매스트르 신부는 이러한 페레올 주교의 태도에 불만을 표시하고 오히려 김대건 부제의 경솔한 행동을 비판하면서 서해항로 개척에 나서는 김대건의 태도를 무모하다고 비판했다. 한편으로 페레올 주교가 최양업에게 반감을 품었는데, 이는 입국로 개척 등의 어려움에 직면한 주교의 성격이 까다로와진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러한 내용은 이미 기존 연구에서도 밝혀졌다. 차기진, 〈최양업 신부의 生涯와 宣敎活動의 背景〉 《교회사연구》 제14집(1999, 한국교회사연구소) 및 《최양업 신부의 선교활동과 천주가사》(양업교회사연구소,2003) pp.23-30, 조규식, 〈최양업 신부의 영성〉 《교회사연구》 제14집(1999, 한국교회사연구소) 및 《최양업 신부의 선교활동과 천주가사》(양업교회사연구소,2003) pp.172-174

 

21) 이에 대해서는 최석우, 〈金大建의 朝鮮全圖〉 《한국교회사의 탐구》(한국교회사연구소, 1975) pp.277-297 참고

22) 이에 대한 구체적인 추적 작업은 향후 별도의 과제로 남겨둔다.

23) 달레(저), 역주본(하) pp.44-59

24) 위 책 p.55

 

25) 〈김대건 신부의 아홉 번째 서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서한》(성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 기념 전기 자료집 제1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96) p.121

 

26) 최석우 신부는 이 부분이 아마도 선교사들의 육로를 통한 입국로 개척에 도움되는 자료를 제공하기 위해서라고 해석했다.(최석우 앞의 책, 1975, pp.284-286.) 필자도 여기에 동의한다. 그러나 단순히 이런 입국상의 편의만을 제공하기 위해서 그처럼 뚜렷한 북방한계선을 그려놓았다고 해석하는 것에는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 든다. 향후의 본격적인 연구가 필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27) 최석우, 〈중국교회와 조선교회〉 《한국교회사의 탐구Ⅲ》 p.108(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28) 위 논문, 같은 곳

29) 페레올 주교의 1847년 11월 25일자 서한 A-MEP, v. 579, ff. 222-225.

 

30) 페레올 주교의 1846년 11월 3일자 서한 A-MEP, v. 577, ff. 961-972 ; Prosterne en esprit aux pieds de votre Grandeur, je salus pour la derniere fois mon bien aime Pere et mon Reverendissime Eveque.

 

31)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성 김대건 신부의 체포와 순교》(성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 기념 전기자료집 제3집, 1997) pp.167-175

 

32) 위의 책 p.167

33) 같은 책 pp.167-175 ; 부호 ⓐ~ⓓ는 필자가 편의상 붙인 것이다.

34) 같은 책 pp.185~195

 

35) 현재 남아있는 페레올 주교의 위 서한(1846년 11월 3일자)에서는 1839년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약전 같은 것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내용은 원래 이 서한에 동봉된 별지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36) 같은 서한 ; Je vous envoie, Monsieur et cher confrere, les Actes de quelques maretyrs de 1839. Il est regrettable qu’on n’ait pas pu les faire paraitre avec les nouvelles de la persecution de cette epoque. Aujourd’hui c’est un peu tard, cependant ils sont tous si beaux que les redacteurs de ces notes ne feront pas de difficulte, je crois, pour en publier quelques uns des principaux et des plus frappants. Cette publication edifierait beaucoup les fideles d’Europe. Je ne doute pas que MMrs les Directeurs ne fassent tout ce qui depend d’eux pour ne pas les priver d’une histoire si interessante. Et l’Eglise ne pourrait-elle pas en beatifier et canoniser quelques uns? Quelle consolation ce serait pour les pauvres chretiens de Coree. Quel encouragement ce serait pour eux au milieu de leurs souffrances et de leurs tribulations! Je suis porte a croire aussi qu’ayant devant les yeux l’exemple de leurs freres places au rang des Bienheureux, ils s’en montreraient que plus fermes dans les tourments, je prie donc MMrs les Directeurs de vous occuper de cette affaire en cour de Rome.

 

37) 앵베르 주교는 순교하기 몇 개월 전에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일을 정하상 바오로와 현경련 베네딕타에게 맡겼는데, 신자들은 이같은 일을 주교가 이경천 요한과 최영수 필립보와 현석문 가롤로에게도 맡겼다고 단언했다. 달레(저) 앞의 역주서(하) p.15

 

38) 페레올 주교의 1846년 11월 5일자 서한 A-MEP, v. 579, ff.211-213 ; 이에 의하면 조선 순교자들에 관한 이 기록은 반드시 프랑스에 전달되어야 하므로 비용이 걱정된다면 조선 전교지의 자금에서 환불받으라고 부탁하면서 수에즈 운하를 통해서 기록이 운송되기를 희망했다. Je vous prie, Mon cher Monsieur Libois, de faire passer nos lettres et les Actes des Martyrs par Suez, le tout ensemble. Si la depense vous effraie, remboursez vous sur l’argent de notre Mission. N’oubliez pas, je vous en conjure, cette recommandation car les Actes de nos martyrs sont admirables a et pour l’edification des fideles, la gloire de Dieu et l’honneur de ses genereux martyrs, il est a desirer qu’ils parviennent jusqu’en France. Nous ferons des prieres pour cela.

 

39) 기해박해 순교자 73위의 행적은 최양업 부제가, 병오박해 순교자 9위의 행적은 매스트르 신부가 각각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차기진, 〈최양업 신부의 生涯와 宣敎活動의 背景〉 《교회사연구》 제14집(1999, 한국교회사연구소) p.49

 

40) 위의 페레올 주교의 1846년 11월 5일자 서한 ; Le Nord et l’Ouest de la Coree sont fermes il est impossible pour le monet de faire passer des missionnaires par ces endroits.

 

41) 1846년 5월 12일(음력)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고 이 소식이 알려지자 페레올, 다블뤼 두 선교사는 곧 7월을 전후하여 오리골로 피신해서 같이 숨어 있다가 다시 각자 흩어졌는데 다블뤼 신부는 현재의 전라도 천호성지 부근의 성치골로 피신했다가 박해의 기운이 가라앉은 후에 11월 경 공주의 수리치골(현재의 충남 공주시 신풍면 봉갑리)로 가서 페레올 주교와 함께 성모성심회를 조직했던 것이다.

 

42) 성모성심회의 조직을 비롯한 박해시대 성모신심 운동에 대해서는 정종득, 〈박해시대 순교자와 성모공경의 전통〉 《교회사학》 제3호(2006.12, 수원교회사연구소) pp.13-62

 

43) 페레올 주교의 1846년 11월 6일자 서한, A-MEP, v. 577, ff. 973-975 ; Ainsi, vous voudrez bien, Monsieur le cure, inscrire sur votre registre la petite Confrerie erigee par nous dans une pauvre cabane de la vallee de Souri, et le 2 novembre 1846, a l’occasion envoyez-nous la lettre d’aggregation.

 

44) 차기진, 〈최양업 신부의 사목중심지에 대한 연구〉 《최양업 신부의 사목지역과 선종지 연구》(양업연구총서 제4집, 양업교회사연구소, 2007) ; 이에 의하면 박해시기 조선교구 신학교로 1854년 배론 신학교 형성 이전에, 1850년 9월 이전부터 1853년 여름 사이에 다블뤼 신부가 운영하던 신학교가 있었다. 먼저 이동형 신학교(경기도 손골과 충청도 배티에 각각 하계와 동계 거점을 둠)를 운영하다가 1851년 11월 배티에 거점을 둔 정주형 신학교로 전환했다. 1853년 여름부터 배티 신학교를 최양업 신부에게 인계했는데, 1854년 3월 3명의 신학생들이 말레이반도의 페낭신학교로 유학을 감에 따라 배티 신학교는 자동 해체되었고, 그 대신 배론에 새로운 학생들을 모집하는 신학교가 세워졌다고 한다. 한편 류한영 신부는 페레올 주교의 재임기를 포함하여 다블뤼 주교가 활동하던 시기에 선교사들의 사목활동 구역과 그 거점에 대해 다블뤼 서한분석을 통해 연구하였다. 본고와 관련이 있는 페레올 주교 시대의 내용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입국 초기 페레올 주교는 서울과 경기도를 맡았고, 다블뤼 신부는 충청도 공주 인근의 교우촌에서 사목하다가 차츰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까지 순방했다고 한다. 1850년 초부터 다블뤼는 발병하여 순방구역을 대부분 최양업 신부에게 넘기고, 가을부터는 조선교구 신학교를 전담했는데 그 근거지는 배티와 손골이었다가 나중에 배티로 고정되었다. 1852년 페레올 주교가 병석에 눕자 다블뤼 신부는 주교를 대신하여 서울과 경기도를 순방하였고 이즈음 입국한 매스트르 신부는 내포와 충청도 동쪽과 경상도 일부를, 최양업 신부가 공주와 그 인근, 경상도와 전라도의 남부지방을 각각 순방하여 페레올 주교가 선종하고 베르뇌 주교가 입국할 때까지 이러한 지역분담은 지속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류한영, 〈다블뤼 주교의 서한에 나타난 사목활동과 구역〉 《한국사회와 천주교》(천산 김진소 신부 고희기념논총, 디자인 흐름, 2007) 이들 논문에 대한 구체적인 검증작업은 차후의 과제로 돌린다.

 

45) 앞의 주 20) 참고. 이에 언급된 차기진, 조규식의 글

 

46) 위와 같은 곳 참고. 기존 연구는 페레올 주교가 최양업에 대해 한때 반감을 품었던 점이나 서품을 미룬 이유에 대해 다만 페레올 주교와 동시대의 인물인 매스트르 신부가 “많은 난관에 부딪힌 페레올 주교의 성격이 까다로와져서 그렇다”고 한 서한 문구를 인용하는 수준에서 그치고 있다. 한편 최양업 신부가 입국한 후 페레올 주교 주위의 양반신자들의 횡포를 물리치도록 여러 차례 간곡히 건의했으나 빈번히 거절당했다는 점을 언급했을 뿐, 페레올 주교가 왜 이같은 양반신자 옹호론을 고집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마도 이 문제를 섣불리 언급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47) 《성 다블뤼 주교의 생애》 샤를샤몽 저, 정현명 역, 대전가톨릭대 출판부, 2006) p.279

 

48) 선교사들이 말을 타고 공소순방 길에 나선 경우는 박해시대의 경우, 입국 직후인 1850년 초반부터 북부지방을 제외한 조선의 중·남부 지방을 두루 순방한 최양업 신부의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원재연, 〈최양업 신부의 선종지 연구〉 《최양업 신부의 사목지역과 선종지 연구》(양업연구총서 제4집, 양업교회사연구소, 2007.12) pp.88-89

 

49) 최양업 신부의 1857년 9월 15일자 서한,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서한》(배티사적지편, 1996)

50) 위 서한 같은 곳

51) 달레(저), 앞의 역주서(하) pp.137-138

 

52) 최석우, 〈한국 교회 회장의 위치와 역할〉 《한국교회사의 탐구Ⅲ》(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 이글에서 최석우 몬시뇰은 “회장이 좋으면 좋은 공소가 되고 회장이 부족하면 부족한 공소가 된다”는 한국교회의 속담을 인용하면서, 교회 내 평신도 회장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지 재삼 강조했다.

 

53) 달레(저) 앞의 역주서(하) pp.173-174

 

54) <페레올 주교가 공주 수리치골에서 바랑 신부에게 보낸 1846년 11월 3일자 서한> ; La persecution de cette annee nous a enleve encore deux tetes : le Pere Kim Andre et Charles Hien, nous sommes donc dans une penurie extreme d’hommes capables d’agir. Il est impossible cette annee d’envoyer des eleves, impossible d’introduire des missionnaires, …… ; … et sa mort laisse un vide en ces temps malheureux, ou les hommes capables d’agir en fideles serviteurs sont si rares.

 

55)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성 김대건 신부의 체포와 순교》(성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 기념 전기자료집 제3집, 1997) p.177

 

56) 서종태, 〈병인박해기 신자들의 사회적 배경과 신앙 - 양반 신자들을 중심으로 -〉 《민족사와 교회사》(한국교회사연구소,2000) ; p.288-298에는 당시 양반 출신 신자 215명의 출신과 입교 당시의 사회경제적 처지를 분석하고 그 자료적 전거(典據)를 일일이 달아놓았다.

 

57) 19세기 중반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통계적 분석을 가한 논저로는 石井壽夫, <李太王朝の 天主敎とその 迫害-特に 捕盜廳謄錄を 素材にして-> 《史學雜誌》 제52권 5호(1941)[한국어번역문, <高宗朝의 朝鮮 天主敎와 그 迫害 - 特히 捕盜廳謄錄을 素材로 하여 -> 《韓國天主敎會史論文選集》 제2집(한국교회사연구소, 1977), 최용규, 〈己亥·丙午敎難期 天主敎徒의 分析的 考察〉 《교회사연구》 제6집(한국교회사연구소,1988), 고흥식, 〈丙寅敎難期 信徒들의 信仰〉 《교회사연구》 제6집(한국교회사연구소, 1988), 원재연, 〈박해시대 천주교 신자들의 사회적, 경제적 생활 - “邪學漢家舍汁物放賣成冊”의 분석을 중심으로 -〉 《민족사와 교회사》(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방상근 《19세기 중반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한국교회사연구소, 2006) 등이 있다.

 

58) 앞의 주 17) 참고 ; 김대건 신부가 그의 양반 신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 점은 그의 서한 끝머리에 발신자인 자신의 이름 앞에 김해(金海)라는 그의 본관을 덧붙여 사용한 예가 많은 것에서 잘 알 수 있는데(《성 김대건 신부의 서한》(성 김대건 신부순교 150주년 기념 전기자료집 제1집,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1996) 이러한 예가 김대건 신부에 못지않은 양반출신인 그의 동료 최양업의 서한에서는 한 번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만의 특징적인 가문의식(家門意識)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최양업 신부의 서한》(최양업 신부의 전기자료집 제1집, 천주교 배티사적지 편, 1996, 천주교 청주교구 발행 ; 임충신 · 최석우 역주, 《최양업신부서한집》(한국교회사연구소 총서 제3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p.5. 한편 김대건 신부가 순위도에서 체포된 이유에 대해 김대건 신부 자신의 서한을 보면, 순위도에서 체포된 것은 “관리들에게 고압적인 자세로 대하는 것이 그들에게 매우 지체 높은 가문의 양반으로 알려진 자신에게 오히려 유리하다”고 말해준 그의 수행 신자 베난시오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을 뿐이라고 말한다.(김대건 신부의 1846년 8월 26일자 서한, 《성 김대건 신부의 서한》(성 김대건 신부순교 150주년 기념 전기자료집 제1집,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1996년, p.365). 이를 사실로 인정한다면 그의 체포를 유발한 책임은 오랫동안 조선을 떠나서 국내 사정을 잘 몰랐을 가능성이 있는 김대건 신부에게 잘못된 해결방법을 가르쳐준 그의 동료 베난시오에게 전가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향후 별도의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모든 책임을 베난시오에게 돌리는 것도 그다지 타당하지 않다고 본다. 오히려 김대건 신부도 실수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앞의 주 17)에서 인용한 최석우 몬시뇰의 견해가 가장 적절한 평가가 될 것 같다. “… 김대건 신부에게 있어서도 약점을 극복하여 자신을 인간적으로 완성하고 나아가 순교의 영광까지 차지하게 한 그의 영성이 더 중요하다. 그만큼 그의 영성이 더욱 빛날 것이기 때문이다.”

 

59) 앞서 살펴본 현석문 가롤로의 경우가 바로 그러한 대표적인 예에 속한다.

 

60) 구체적으로 페레올 주교의 측근으로서 문제를 일으킨 양반 출신의 신자들이 누구였으며, 구체적으로 어떠한 문제를 일으켰는지 그 실재의 사례를 말해주는 자료를 찾기가 현재로서는 매우 어렵다. 이는 현재 필자의 능력을 벗어나는 문제이므로 향후의 연구과제로 돌리고자 한다.

 

61) <페레올 주교가 리브와 신부에게 쓴 1850년 11월 17일자 서한> … 최도마 신부가 없었을 적에는 모든 부담이 제 어깨 위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최 도마 신부를 통하여 저에게 보내주신 도움이 얼마나 소중한지 신부님께서는 느끼시겠지요. Sans le Pere Thomas, tout le poids tomberait sur mes epaules. Vous sentez combien est precieux le secours que Dieu m’a envoye par lui. ; <페레올 주교가 리브와 신부에게 쓴 1851년 12월 20일자 서한> … 최 도마 신부가 성무집행에서 나를 도와줍니다. Le Pere Thomas m’aide dans l’administration. ; <페레올 주교가 리브와 신부에게 쓴 1852년 9월 20일자 서한> … 최 도마 신부는 자기가 태어난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매년 어렵게 간신히 다닙니다. 그러니 다른 신부들처럼 그렇게 (기진맥진하게) 될 우려가 있습니다. 이곳에서의 사제 직무는 대단히 가혹합니다. 쉼 없이 계속된다는 점, 도로 상황이 어렵다는 점, 그리고 절반의 박해라는 우리 상태가 허용할 수도 있는 완화의 조짐이 별로 없다는 점 때문에 그렇습니다. Le Pere Thomas lui-meme malgre l’air natal se traine difficilement chaque annee et menace de faire comme les autres. Le ministere ici est accablant a cause de sa continuite, de la difficulte des routes st du manque d’adoucissement que ne permet pas notre etat de demi-persecution. …

 

62) 조 광, 앞의 논문(1997) p.60

63) 조 광, 앞의 글 p.61 참고

 

64) 이점에서, 박해시대 한국 천주교회가 선교의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제국주의 침략세력을 일정한 정도로 허용한 잘못이 있다는 것을 고백한 한국천주교회 주교회의의 선언문(2000.12.3, “대희년, 쇄신과 화해”)은 정당했다고 본다. 그러므로 박해시기 천주교 신자나 선교사를 막론하고 제국주의 편승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인물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조 광 교수의 경우, 매스트르 신부나 김대건 신부는 제국주의 프랑스나 영국의 무력을 선교에 활용하면서도 제국주의의 궁극적 목적인 상업적, 정치적 야심 때문에 선교의 순수성이 훼손되거나 오히려 복음선포에 방해를 받아서는 안된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했다. 조광, 앞의 논문(1997).

 

65) 조현범, 《조선의 선교사, 선교사의 조선》(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총서 제7집)(2008. 한국교회사연구소) pp.209-281 제2부, <선교사의 조선 : 선교사들의 조선인식>

 

66) 조현범, 위 책(2008)에 의하면 다블뤼 주교와 푸르티에 신부 등의 경우가 이러한 예에 속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67) 같은 책, (제3부) 제10장 <선교사들의 문명관과 조선 출병론>

 

68) 페레올 주교의 1845년 12월 27일자 서한 A-MEP : Vol.579, ff.206-207 ; L’appariton du navire anglais a l’ile de Quelpart a mis tout le royaume en emoi. Ils tremblent en pensant que les Europeens viennent venger la mort de leurs compatriotes. Si vous pouviez decider Mr Cecile ou un autre commandant a venir en Coree demander raison de la mort de nos confreres, ce serait un grnad bien pour la religion. …… Le peuple Coreen semble etre encore dans la barbarie, s’il se laissait civilise par le missionnaire ce serait bien, mais il se montre dur et cruel.

 

69) 페레올 주교의 1846년 9월 6일자 서한 A-MEP : Vol.579, f.210 ; S’ils viennent et qu’ils demandent raison de la mort de nos confreres et qu’ils contraignent le roi a proclamer la liberte de religion! Un autre bon moyen serait par l’entremise du ministre a Pekin de prier l’empereur de Chine d’avertir le roi de Coree de laisser les chretiens tranquilles.

 

70) 페레올 주교의 1846년 11월 5일자 서한 A-MEP : Vol.579, f.211-213 ; Jusqu’a cette heure vraiment nous ne pouvons expliquer leur conduite, qui nous inquiete. Si on veut s’occuper seulement de nous et non des chretiens, qu’on nous laisse tranquilles, car cela nous prive ici de la seule gloire desirable qu’il y ait et on donne un coup mortel a notre Mission. Si on veut faire quelque chose qui nous soit utile, qu’on vienne museler, c’est facile, ……, Monsieur et cher confrere, prier Mr le Consul de s’interposer aupres de l’Empereur pour faire donner la liberte religieuse aux chretiens de Coree, ce serait un acte bien meritoire pour lui et un service eminent a rendre a l’humanite.

 

71) 페레올 주교의 1847년 11월 25일자 서한 A-MEP : Vol.579, f.222-225 ; Ce qui est certain, c’est que leur apparition en Coree n’a pas eu un tres bon effet pour nous …… Ce ne sont pas des menaces qu’il faut aux Coreens, qui ne connaissent du monde que la chine et le Japon, car elles ne vont quere les intimider et cela rendra le gouvernement encore plus furieux contre les chretiens. ……, si vous pouviez par l’entremise de Mr le Consul faire obtenir la liberte de religion en Coree, ce serait une oeuvre bien meritoire et bien utile a la Religion et au salut des ames.

 

72) 페레올 주교의 1848년 11월 15일자 서한 A-MEP : Vol.579, f.232-234 ; Est-ce que ce peuple est susceptible d’etre influence moralement? Il connait la Loi du plus fort. Le faible doit plier devant le plus puissant, voila toute sa theone. Cependant n’allez pas vous imaginer que nous reclamons ici les coups de canons et les baionnettes et qu’un coup d’autorite va nous mettre en paix.

 

73) 〈김대건 신부의 스무 번째 서한〉 앞의 책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의 서한》(1996) pp.379-380

 

74) 피숑(Pichon, 宋世興) 신부, “Pro Corea Documenta”(朝鮮聖敎史料) pp.4~13 및 이의 번역문인 〈1857년 가경자 절차 문헌〉(발췌문) 앞의 책 《성 김대건 신부의 체포와 순교》 pp.200~203 ; 이에 의하면 당시 김대건을 심문한 좌포도대장 이응식(李應植)은 날마다 김대건을 불러서 자기와 같은 돗자리 위에 함께 앉게 하고 김 신부에게 천주교와 외국에 대한 것을 질문하면서 그에게 조선 8도의 지도와 전 세계의 지도를 제작해줄 수 있는지 물었으며, 조정의 어떤 고관은 “조선왕조를 위하여 그렇게 유능한 생명(김대건)을 형벌로 끊는다는 것은 손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 한편 페레올 주교가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1846년 9월 2일자 서한에 의하면, “조정에서는 김대건 신부를 외국인과 통할 수 있는 첫째 지리학자요 가장 큰 학자로 공표했으며, 다만 당시 조선의 천주교회가 처해있는 상황이 이와 같은 새로운 학식을 채용할 수 없게 한다”고 하였다. 앞의 책,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1996) p.297 ; 또 페레올 주교가 김대건 신부의 순교 1년 후에 언급한 사실이지만 “김대건 신부가 서울의 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때 조정에서는 김대건 신부를 세실 함장과 담판을 하도록 파견할 예정이었으며, 조정에서 그를 위해 필요한 복장을 만들고 있을 때 세실 함장 일행이 떠났다”고 했다. 같은 책 p.301

 

75) 앞의 책, 달레(저), 최석우 · 안응렬 역주 《한국천주교회사》하권 p.118 ; 이에 의하면 김대건 신부의 재질을 아까와한 대신들이 임금께 그의 목숨을 구명하는 요청을 했고, 김 신부가 세계지도 사본 한 벌을 임금에게 바치자 임금이 매우 만족하여 대신들의 건의를 들어줄려고 했는데, 그때 마침 프랑스 함대가 왔다는 소식이 들렸고 곧 배교하지 않는 사람들은 사형에 처하라는 명령이 내려서 결국 김대건 신부는 순교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76) 〈김대건 신부의 열아홉 번째 서한〉 앞의 책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의 서한》(1996) p.357

77) 조현범 앞의 책(2008) (제3부) 제10장 <선교사들의 문명관과 조선 출병론>

 

78) 한편 앞서 언급한 조광 교수의 견해(1997)도 필자와 상통하는 점이 있는데, 이는 곧 “김대건 신부가 감옥에 있을 때 조정의 관리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원칙적으로 제국주의 국가들의 무력개입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피력했다”고 밝힌 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김대건 신부나 메스트르 신부가 제국주의 프랑스나 영국의 무력을 선교에 활용하면서도 제국주의의 궁극적 목적인 상업적, 정치적 야심 때문에 선교의 순수성이 훼손되거나 오히려 복음선포에 방해를 받아서는 안된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파악했는데, 이점은 제국주의 무력에 대한 김대건 신부나 메스트르 신부의 신중하면서도 긍정하는 태도를 나타낸다. 필자는 이러한 인식이 나타난 시기를 구체적으로 추적해서 시간의 흐름에 따른 그들 인식의 변화를 추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79) 조현범 앞의 책(2008), pp.121-165 제4장 <선교방침> 참고 ; 이에 의하면 동아시아로 파견된 파리외방전교회원들은, 1658년 포교성성의 훈령, 1664년의 지침서(모니타), 1700년의 회칙 외에도 19세기부터는 1803년의 사천성 시노드의 규정들을 따라서 그들의 선교방침을 정했다고 한다. 

 

80) 달레(저) 앞의 역주서(중), p.458

81) 페레올 주교의 1852년 9월 19일자 서한, A-MEP : Vol.577, ff.1095-1098

82) 이와 관련된 구체적인 자료의 체계적인 검토작업은 향후 또하나의 연구과제로 남겨두고자 한다.

 

83) 페레올 주교의 앞의 서한 1852년 9월 19일자 ; L’histoire de l’Eglise entre autres choses, devra etre d’un bien vif interet, ……, mais veuillez bien croire que d’une part je ne suis pas de ceux qui veulent faire l’histoire d’un pays avant meme d’y etre arrive et d’autre part n’ayant ete jusqu’lci que deux pour faire face a toute la besogne de la Mission, vous comprendrez facilement qu’il ne soit pas possible de consacrer ses soucis a des choses etrangeres a l’administration. 페레올 주교는 입국초기 성사집행에 여념이 없어 교회사 연구와 같은 문화사업에 엄두도 못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교회사(敎會史) 연구가 선교지에 매우 유익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필자는 본문과 같이, 그가 언젠가 여건이 되면 문화사업을 펼칠 것이라고 추정해본 것이다.

 

84) 같은 서한 ; le pere Thomas, bien qu’indigene, a fait ses deux administrations avec toutes les peines du monde et a failli etre malade.

 

85) 매스트르 신부가 여러 차례 거듭 입국에 실패하자 그의 입국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고 입국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책망이나 견책은 하지 않았다. 페레올 주교의 1851년 12월 20일자 서한 A-MEP : Vol.579, ff.253-255 ; Je lui ai ecrit que l’annee prochaine j’essaierai de nouveau et que si les tentatives pour son entree deviennent encore inutiles comme par le passe, il n’a plus a penser a la Coree …

 

86) 달레(저) 앞의 역주서(하) pp.196-199 

 

[학술지 교회사학 vol 5, 2008년 12월(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원재연(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원본 : http://www.casky.or.kr/html/sub3_01.html?pageNm=article&code=99921&Page=20&year=&issue=&searchType=&searchValue=&journa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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