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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3·1 운동과 한국 천주교회: 3·1 운동 전후 한국 천주교회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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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4-02 ㅣ No.1015

[경향 돋보기 - 3·1 운동과 한국 천주교회] 3·1 운동 전후 한국 천주교회의 활동

 

 

1919년 3·1 운동에 한국인들은 전 민족적으로 한국 독립을 외쳤다. 소략하지만 한국 천주교회도 이 큰 대열에 참여하였다.

 

 

3·1 운동에 대한 제도 교회의 인식

 

일제 강점기 한국 천주교회가 제도 교회로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례는 발견하기 어렵다. 그 당시 한국 천주교회는 두 명의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주교의 관할 아래 있었다. 그들은 일제로부터 한국에서의 선교권을 보장받고자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우며 한국인 천주교 신자들의 독립운동 참여를 금지하였다.

 

서울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가 남긴 ‘일기’를 보면 그는 한국인들이 전개한 3·1 운동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또한 한국의 독립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한국 천주교회가 만세 운동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일제에 좋은 모범을 보였다고 생각했다.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는 신자들에게 만세 운동에 참여하면 ‘대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는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일본 정부는 합법적이므로 천주교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마태 22,21)는 말씀을 지켜 신자들이 만세 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선교 일선에서 활동하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도 3·1 운동에 부정적이었고 일제의 한국 지배를 인정하였다.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우며 신자들이 만세 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만류하거나 금지하였다. 성베네딕도회 선교사들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과 같은 태도를 취했다. 그들의 모국인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일본과 프랑스의 적성국이었기에 선교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았다. 그런 이유로 그들이 운영하던 숭공학교의 학생들이 만세 운동에 참여함으로써 발생할 불편한 관계를 예방하고자 조기 방학을 결정했다.

 

그렇다면 한국인 성직자들의 민족의식과 독립운동에 대한 태도는 어떠했을까? 3·1 운동 당시 한국인 성직자는 23명이었고 지방의 여러 본당에서 활동하였다. 민족 문제와 독립운동에 대한 의식이 있었다면 활동 지역의 만세 운동에 중심 역할을 할 수 있는 위치였다. 하지만 이들이 프랑스인 주교에게 보낸 서한을 살펴보면 이들의 생각과 행동도 외국인 성직자들과 큰 차이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사회와 유리되어 오랜 시간 신학만을 공부한 뒤 신부가 되었던 데에 일차적인 원인이 있었다. 세속과 격리된 곳에서 몇몇 프랑스인 신부에게 전달받은 신학 지식은 민족 현실에 대한 의식을 마비시켰다. 정교분리론에 기초한 경직된 사고방식도 민족 문제를 인식하는데 장애가 되었다.

 

민족보다 교회를 우선시하는 교회 중심주의와 선교 우선주의, 선교지의 특성을 고려치 않는 보수적인 선교 정책으로 한국 천주교회는 민족 문제를 외면했다. 교계 제도상 교구장의 사목 방침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교구장의 태도가 곧 교회 자체는 아니다. 교회는 하느님 백성 모두를 포함한다. 성직자뿐 아니라 신자들이 개인적으로 취했던 행동도 교회의 활동으로 함께 고찰해야 한다.

 

 

한국인 천주교 신자들의 만세 운동

 

한국인 천주교 신자들은 민족 문제를 외면하지 않았다. 동족이 전개하는 만세 운동에 초연할 수 없었다. 한국의 독립은 한국인 신자들에게 신앙 못지않게 중요하고 간절했다. 신자들은 개인 자격으로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교회가 금지했지만 천주교 신자들이 3·1 운동에 참여한 사례는 적지 않게 발견된다. 이것은 성직자와 신자들 사이에 괴리감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천주교에서 3·1 운동과 관련하여 가장 먼저 관심을 집중한 곳은 대구의 성유스티노신학교였다. 외부와 격리된 채 생활했지만 신학생들은 한국인으로서의 민족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1919년 3월 5일 약 60명의 신학생이 신학교 운동장에 모여 독립 만세를 외쳤다. 또한 3월 9일 약전 골목에서 있을 만세 행렬에 합류하기로 계획했다. 이들은 교사인 홍순일에게 ‘독립 선언문’을 얻어 유인물을 복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일을 분담하여 준비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이 프랑스인 교장 신부에게 알려져 유인물과 태극기를 모두 압수당했다.

 

이 상황을 보고받은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는 신학교를 방문하여 신학생들을 체육실로 집합시킨 뒤 만세 운동의 참가를 금지하며, 만일 만세 운동에 참가하면 신학교를 폐쇄하겠다고 밝혔다. 신학생들은 주교에 대한 순명을 약속했고, 만세 운동 참가는 무산되는 듯했다. 그렇다고 해서 신학교 담장 밖에서 전 민족적으로 진행되는 만세 운동으로부터 신학생들을 격리시킬 수는 없었다. 신학생들은 수업에 거의 참석하지 않음으로써 학교에 불만을 표시했다. 4월 3일 신학생들은 다시 한번 만세 운동에 참가하고자 계획하였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수업을 계속할 경우 신학생들의 만세 운동 참여를 막을 수 없다고 우려했는지 드망즈 주교는 방학을 5월 1일로 앞당겨 실시했고, 홍순일을 파면하였다.

 

서울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신학생들도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 3월 23일 일요일 밤, 신학생들은 신학교 문을 나와 만세 군중에 합류하였다. 이튿날 이 사실을 보고받은 서울교구장 뮈텔 주교는 신학교로 달려갔다. 신학생들은 주교의 훈계가 끝나자 일본인들에게 짓밟힌 조국을 외면할 수 없다며 만세 운동에 참여하겠다고 눈물로 호소하였다. 그럼에도 뮈텔 주교는 신학생들이 만세 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심지어 만세 운동에 참여하려면 신학교에서 나가라고 하였다. 뮈텔 주교는 만세 운동 참가에 대한 징계 조치로 그해의 서품식을 연기하였고, 만세 운동을 주도한 신학생들을 퇴학시켰다.

 

이와 같이 천주교 신학생들의 만세 운동은 제대로 시작해 보지도 못한 채 막을 내렸다. 성직자가 되려면 만세 운동을 포기해야 했고, 만세 운동에 참여하려면 신학생 신분을 포기해야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3·1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또한 3·1운동 준비 단계에서 배제되었던 천주교와 이웃 종교들과의 연합도 이루어졌다. 3월 10일 황해도 해주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은 천도교와 개신교, 불교, 그리고 천주교 신자들이 협력하여 이끌었다. 각 종교인들은 한민족이라는 민족적 공감대를 형성함으로써 종교색을 떠나 민족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었다.

 

천주교 신자가 주도했던 만세 운동은 경기도 광주와 용인, 황해도 신천, 경북 대구였다. 참가자 가운데 천주교 신자로 밝혀진 이가 많지 않은데, 각지에서 만세 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된 천주교 신자는 5월 말까지 53명으로 집계되었다. 만세 운동에 참여했으나 체포되지 않았거나 체포되었더라도 풀려난 사람들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충청도와 전라도에서는 신자들의 만세 운동 참여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당시 전라도와 충청도의 신자 수는 경기도와 경상도 못지않게 많았다. 이는 신자 수가 많다고 만세 운동에 많은 이가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세 운동 사례만 볼 때 3·1 운동에 참여한 천주교 신자는 대부분 공소 신자였다. 이는 선교사와 한국인 성직자들의 신자들에 대한 제재 빈도나 강도가 본당보다 약한 공소 신자들이 주로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 반면 선교사나 성직자가 상주하는 지역에서는 신자들의 만세 운동 참여가 어려웠고, 만세 운동에 성직자들의 제재가 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3·1 운동 직후의 민족 운동

 

3·1 운동은 일제의 잔학한 탄압과 고문, 학살로 많은 희생을 내고 4월 말부터는 점차 약화되었다. 그러나 3·1 운동은 한민족의 독립 염원을 모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데 원동력이 되었다.

 

1919년 4월에 수립된 임시정부는 천주교와의 연계를 위해 노력했다. 천주교의 국제적인 규모에 주목한 것이다. 프랑스의 이해와 협조로 프랑스 조계 내에 정착할 수 있었던 점도 임시정부가 천주교에 주목한 또 하나의 이유였다. 한국 천주교회를 관할하는 선교사들이 프랑스에 본부를 둔 파리외방전교회 회원이고, 제1차 세계 대전 종결을 위한 ‘파리 강화 회의’에 ‘한국 독립 청원서’를 제출하는 데에 파리외방전교회 회원인 빌렘 신부가 도움을 주었다는 점도 인식하였다. 임시정부의 파리 위원부가 베네딕토 15세 교황에게 ‘한국의 자유와 행복을 기원한다.’는 위로 서한을 받기도 했다.

 

임시정부와 관련하여 언급되는 한국인 성직자는 윤예원 신부이다. 윤 신부 또한 3·1 운동이 한창일 때 신자들에게 만세 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했지만, 그 뒤 적십자 운동을 통해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했고, 또 한국인 신부들과 신자들에게 적십자 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권고서’에 서명할 것을 권유했다. 이를 알게 된 뮈텔 주교는 윤 신부의 행동에 제재를 가했고, 윤 신부는 교구장의 명령에 순명하였다. 교구장에게 독립운동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이후에도 윤 신부는 일제의 감시망 안에 있었다.

 

천주교회를 중심으로 일제강점기의 민족사를 다룬 필자의 저서 「일제의 종교정책과 천주교회」의 내용을 요약하며, 한국인 천주교 신자들의 독립운동을 이번 글에 상세히 다루지 못한 점이 아쉽다. 물론 3·1 운동에 참여했던 천주교 신자는 개신교나 천도교에 비해 소수이지만 이들의 참여는 한국 천주교회를 관할하던 외국인 선교사들과 대부분의 한국인 성직자가 적극 만류하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었기에 의미가 크다. 한국 천주교회가 한국인이 중심이 되어 움직였다는 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한국인 천주교 신자들은 민족의 현실에 눈감지 않았고, 독립운동을 외면하지 않았다.

 

* 윤선자 도미니카 - 전남대학교 사학과 교수. 한국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여성 독립운동가의 생애를 다룬 「한국 최초의 여류비행사 권기옥」을 펴냈으며, 한국 근현대사와 관련한 다수의 저서와 논문을 냈다.

 

[경향잡지, 2019년 3월호, 윤선자 도미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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