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16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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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읽기: 그리스도교 사상의 지각 변동을 일으킨 아리스토텔레스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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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2-26 ㅣ No.507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읽기] 그리스도교 사상의 지각 변동을 일으킨 ‘아리스토텔레스의 재발견’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이나 「신국론」을 읽은 독자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을 펼치면 그 낯선 서술 방식에 당황하게 된다. 「신학대전」은 구체적인 삶 속의 사건이나 다양한 일화로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아우구스티노의 책들과는 대조적으로 매우 무미건조한 문체와 이해하기 힘든 개념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두 사상가는 그리스도교 안에서 가장 존경받는 스승들이며, 성경에 기반을 둔 그들의 신학적인 결론은 매우 유사해 보인다. 그럼에도 그들의 저술이 이렇게 큰 형식적인 차이를 보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아우구스티노가 죽고 난 뒤 700년 동안은 그가 ‘사상의 귀족’이라고 불렀던 신플라톤주의가 가장 영향력이 큰 철학이었다. 그러나 12세기에 들어서면서 커다란 문화적인 지각 변동이 일어났고, 그 변동이 완성되었을 무렵 토마스 아퀴나스는 학문적 활동을 시작했다. 그 가장 중요한 변동의 복판에는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 기원전 384-322년)의 전체 작품이 새롭게 라틴어로 번역된 사건, 곧 ‘아리스토텔레스의 재발견’이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재발견

 

아리스토텔레스는 매우 박식한 학자답게 광범위한 분야에서 많은 저작을 남겼다. 그렇지만 신플라톤주의를 통해 지속해서 존경받았던 스승 플라톤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서구 세계에서 거의 잊히고 말았다. 단지 보에티우스가 번역해서 전해 준 「범주론」과 「명제론」 덕분에 ‘논리학자’로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11세기부터 변증론이 발전하면서 아벨라르두스의 제자들을 비롯하여 많은 학자가 호기심에 가득 차,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라진 저서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들이 원했던 책들을 주로 발견한 곳은 ‘재정복 운동’(Reconquista)을 통해 다시 그리스도교화된 스페인 중부, 이태리 남부와 시칠리아 지역 등이었다. 아랍 철학자들이 연구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과 그 주해서가 이곳에 남아 서구 학자들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아랍어와 그리스어에 능통했던 현지 학자들의 도움으로 금세 대규모 번역 운동이 벌어졌다. 교회(톨레도의 라이문도 대주교 등)와 국가(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지원까지 더해져 번역의 속도는 더욱더 빨라졌다.

 

1120년부터 1200년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 대부분이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이 번역은 중세 서구인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쉽게 접근하게 해주었고, 플라톤주의 일색이던 학문 풍토에 새로운 학풍을 태동시켰다.

 

이 시기에 아리스토텔레스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다른 문화의 학문적인 원전(text)을 받아들이는 경향은 더욱 뚜렷이 나타났다. 이슬람과 유다교 문화권에서 다양한 주석서가 소개되었다. 신학자들도 파리대학 인문학부의 교수들처럼 처음에는 전혀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이슬람(특히 아비첸나, 주석가 아베로에스)에서 유래된 주석과 저작들을 당연하게 사용했다. 이 책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훌륭한 보조 수단이었다. 그렇지만 일부 주제에 대해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합치될 수 없는 점을 내포했기 때문에 수용 과정에서 긴장을 발생시켰다.

 

 

새 철학과 그리스도교의 긴장 관계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안에 그리스도교 신앙과 충돌을 일으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는 비판이 분명하게 제기되었다.

 

먼저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 학자들은 형상의 부여와 이탈을 통해 물체들이 생겼다가 사라지더라도 그 기본이 되는 질료만은 계속해서 지속한다고 생각했다.

 

곧 질료는 영원으로부터 존재했고, 영원히 존재하리라는 것이다. 이를 후대 학자들은 ‘세계의 영원성’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그리스도교의 창조 이론과 충돌을 일으켰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절대자인 창조주가 ‘무로부터’(ex nihilo)형상은 물론이고 질료를 창조하면서, 시간도 함께 시작했다고 가르쳤다. 이 가르침에 따르면, 창조 이전에 무언가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주장을 인정할 수 없었다.

 

두 번째로, 아랍 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을 주해하는 과정에서 ‘단일 지성론’이 등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질료 형상론’에 따라 “질료가 되는 육체와 형상이 되는 이성혼이 결합하여 인간을 이룬다.”고 주장했다. 질료와 형상이 따로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는 그의 이론에 따르면, 육체가 죽는 순간에 영혼을 포함해 인간은 모두 사라져 버린다는 결론이 기대된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지성이 육체와 독립된 기능이라고 말함으로써 죽음 이후에도 존속될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이런 모호한 설명을 명확히 하려고 아랍 철학자들은 “한 인간이 죽게 되면 그 지성은 단일한 우주 지성으로 되돌아간다.”라는 ‘지성의 단일성’을 주장했다.

 

만일 이 결론을 받아들이면, 보상이나 처벌을 받을 개별적인 인간이 남아 있지 않게 된다. 그럴 경우 그리스도교의 최후 심판과 인간의 구원 전체를 뒤흔들 수도 있었다.

 

세 번째는 자연 과학적 성찰을 강조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법칙의 필연성을 강조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자연법칙이 절대적이라면 성경에서 언급된 기적과 같은 예외는 일어날 수 없으므로 신의 섭리가 위협받을 수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 강의 금지령

 

이런 이유 때문에 결국 1210년 파리 종교 회의에서, 그리고 1215년에는 파리 대학 학칙에서 아리스토텔레스 강의 금지령이 내려졌다.

 

“형이상학과 자연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를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가르치는 것을 금한다.” 그 당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은 대학에서 다양하게 활용되었을 뿐 아니라, 12세기부터 새롭게 번역 소개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기 때문에 이 금지령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이 금지령이 아리스토텔레스 저서의 소유나 연구를 금지한 것은 아니었다. 대학교수들은 비판하기 위해서라도 자유롭게 그 저서들을 읽고 연구할 수 있었다.

 

다만 아직 비판적인 사고 능력을 갖추지 못한 학생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막으려고 강의를 금지했을 뿐이었다.

 

강의 금지령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내려졌는데, 이것은 그 명령이 잘 지켜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오히려 방증한다.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더 큰 궁금증을 가지고 그의 사상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몇몇 선구적인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저서 안에는 그리스도교에 부합하는 내용이 더 많으므로 교회를 위해서도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1231년의 금지령은 “신학위원회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저서에서 위험한 부분을 수정 또는 제거할 때까지만”이라는 단서를 달고 약화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절충적 태도는 학자들에게 더 큰 호기심만 불러일으켰다.

 

 

아리스토텔레스를 향해 가는 토마스 

 

토마스 아퀴나스는 바로 이러한 상황이 벌어지던 1224년에서 1225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에 이탈리아 남부 아퀴노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여섯 살이 되기 전에 그를 가까이에 있던 유서 깊은 몬테 카시노(Monte Cassino) 수도원에 대수도원장이 되기를 바라면서 ‘봉헌된 자’(oblatus)로 보냈다.

 

토마스는 그곳에서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교양 교육을 받았다. 그런 토마스가 어떻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 학문 방식에 심취하게 되었을까?

 

토마스가 1239년 청소년기에 접어들었을 때, 교황령에 속한 몬테 카시노에 황제군이 들이닥쳤다. 외국인 교사가 모두 추방되자 수도원 학교는 정상적인 운영이 어려워졌다. 어쩔 수 없이 토마스는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 사이 육체와 정신이 모두 성숙해진 아들을 본 토마스의 어머니는 그를 계속해서 공부시킬 방안을 찾고 있었다. 마침 멀지 않은 곳인 나폴리에 새로운 대학이 설립되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우연히 선택된 나폴리에서 토마스의 운명을 바꿔 줄 두 가지 소중한 만남이 있었다.

 

그 만남이란 과연 무엇일까?

 

* 박승찬 엘리야 - 가톨릭대학교 철학 전공 교수. 성심대학원장과 김수환추기경연구소장을 맡고 있으며 한국가톨릭철학회 회장으로 활동한다. 라틴어 중세 철학 원전에 담긴 보화를 번역과 연구를 통해 적극 소개하고, 다양한 강연과 방송을 통해 그리스도교 문화의 소중함을 널리 알린다. 한국중세철학회 회장을 지냈다.

 

[경향잡지, 2019년 2월호, 박승찬 엘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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