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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예수회 회원들의 영성: 칼 라너 (2) 예수회 수련생활 마친 후 철학과 신비주의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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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1-20 ㅣ No.1097

[예수회 회원들의 영성] 칼 라너 (2) 예수회 수련생활 마친 후 철학과 신비주의 탐구

 

 

칼 라너.

 

 

조용하고 신중하게 예수회 입회 결정

 

칼 라너는 교구 사제보다는 공동생활의 수도 사제를 선호하였다. 그래서 그는 성 베네딕도회 입회를 생각해보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전례에 대한 자신의 이해가 성 베네딕도회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그곳의 입회를 포기하였다. 아울러 그는 성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는 것도 생각해보았지만, 사변적이고 숙고하는 자신의 성격이 성 프란치스코회의 분위기와 맞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칼 라너의 관심의 폭은 사실 성 베네딕도회나 성 프란치스코회가 보여주는 차원보다 더 넓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회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당장 입회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냐시오의 영성에 대하여 공부하였고, 오스트리아의 펠트키르흐(Feldkirch)에 있는 예수회 수련원에 방문하기도 하였다. 당시 그의 형 후고가 그곳에서 수련을 받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곳에서 형을 만나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은 것도 아니었다. 동생 칼보다 3년 먼저 입회한 후고도 동생의 성소를 알지 못하였다. 이는 ‘알레만 사람’의 특징이기도 하다. 알레만 출신들은 자신에 대하여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형은 동생의 편지로, 부모는 학교 종교 교사를 통해서 칼의 예수회 입회를 알게 되었다. 사실 종교 교사인 포겔바허 박사는 칼이 사람들과의 접촉이 적고 또 투덜대는 성격이기에 예수회원이 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유한한 것에 얽매이지 않도록 기도 강조

 

칼 라너는 1922년 4월 20일 예수회에 들어가게 된다. 그의 수련 동기는 무려 56명에 이른다. 수련장은 오토 단네펠(Otto Danneffel)이었다. 예수회원이 되기 위하여 수련원에 들어가는 것에는 크게 두 가지 목적이 있다. 하나는 수도회 영성을 자신의 것으로 통합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자신의 삶과 성소를 시험하고 숙고하는 것이었다. 그는 수련원의 규칙 생활에 크게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을 즐겼다. 이러한 습관은 수련원에서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평생 그의 삶의 모습이기도 했다. 그는 아침에 일하는 것을 선호하였기 때문에 모든 일을 주로 오전에 다 해결하였다. 

 

수련원에서 살면서 그는 자신만의 어떤 특별한 목표를 추구하지는 않았다. 그는 어떠한 공명심이나 신학적인 관심을 표명하지도 않았다. 단지 수도 생활의 기초와 영적인 저자들에게 집중하였다. 그는 ‘등대(Leuchtturm)’라는 잡지에 기도에 관하여 기고하였는데 이 글은 훗날 그의 철학과 신학의 기조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의 것에 매달리게 됩니다. 우리는 그들처럼 작아지고 좁아지며 결국 그들에 의하여 질식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가까이하는 자는 하느님께서 그를 가까이 하십니다.”(야고 4,8 참조) 이 글에서 이미 하느님과 관계하는 인간 정신의 무한성이라는 그의 연구 주제를 엿볼 수 있다. 유한한 것을 넘어서는 정신은 지상의 것에 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칼 라너는 평생 주장하였다.

 

 

철학, 양봉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

 

2년간의 수련생활을 마치고 그는 펠트키르흐에서 1924년 4월 27일 첫 서원(誓願)을 하였다. 서원 후 그는 뮌헨 근교인 풀라흐(Pullach)에로 이주하여 1926년까지 철학 공부를 하였다. 이 시기 철학을 공부하였던 내용과 다양한 철학 서적에 관하여 적어놓은 두꺼운 공책을 말년까지 갖고 있었다. 그의 집중적인 공부 대상은 칸트(I. Kant), 요셉 마레샬(Josef Marchal, 1878~1944) 그리고 피에르 루세로(Pierre Rousselot, 1878~1915)였다. 라너는 특별히 마레샬의 영향을 받았다. 마레샬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을 칸트의 철학과 접목하려고 시도하였는데 그의 철학적 방법론이 바로 초월적 방법론이라고 일컬어진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토미즘적 인식론이 한결 더 풍부해졌다고 할 수 있다. 

 

라너는 이와 더불어 신비주의와 신비경험에 대한 공부를 병행하였다. 그는 현대의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어떻게 이해되는지 골몰하게 된다. 그에게 철학자의 재질이 엿보여서인지 이미 그는 후에 풀라흐에서 철학사 교수로 봉직하도록 내정되었다. 일단 그는 수련원이 있는 펠트키르흐에서 라틴어 교사로서 활동하였다. 

 

이 기간 그는 예수회원으로서 훗날 시복된 알프레드 델프(Alfred Delp, 1907~1945) 신부를 알게 된다. 알프레드 델프 신부는 당시 수련자로서 라너에게 라틴어를 배웠다. 델프 신부는 뮌헨에서 사회학자로 활동하게 된다. 그는 가톨릭 입장에서 사회를 비판하는 잡지인 ‘슈팀멘 데어 자이트(Stimmen der Zeit)’의 편집위원이자 뮌헨의 신학 동아리 회원이기도 하였다. 칼 라너도 이 신학 동아리의 회원이었다. 델프 신부는 1944년 7월 28일 히틀러에 대한 저항 운동 혐의로 체포되어 1945년 2월 2일 베를린에서 교수형을 당하게 된다. 라너는 그와의 관계를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2년간의 실습 기간을 끝낸 후 칼 라너는 네덜란드의 발켄부르그(Valkenburg)에서 신학 공부를 하였다. 이곳은 그의 형인 후고 라너가 공부한 곳이기도 하였다. 칼 라너는 이 시기에 라틴 교부와 그리스 교부들의 저서를 통독하였다. 그는 오리게네스에 대하여 첫 논문을 쓰기도 하였다. 고대 그리스도교의 저작들을 공부하면서 그는 색다른 취미를 갖기도 하였다. 바로 양봉(養蜂)이었다. 그의 부지런함은 아마도 꿀벌을 본받았을 것이라는 이들도 있다. 

 

1932년 3월 그는 부제품을 받고 4개월 후인 1932년 7월 6일 뮌헨의 상트 미하엘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서품식 주례 주교는 뮌헨 프라이징 대교구장인 미하엘 파울하버(Michael Faulhaber) 추기경이었다. 칼 라너는 서품 닷새 후인 7월 31일 이냐시오 로욜라 축일에 프라이부르그에서 첫 미사를 봉헌한다. 그의 첫 미사 상본 구절은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 것입니다. 이것은 믿을 만한 말씀입니다’(2티모 2,11)였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1월 21일, 이규성 신부(서강대 신학대학원 교수, 예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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