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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한국 천주교회와 교계제도 종합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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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12 ㅣ No.841

[2012년도 심포지엄] 한국 천주교회와 교계제도 종합토론

 

 

사회자 : 노길명 명예교수 · 고려대학교 

 

토론자

한윤식 신부 · 부산가톨릭대학교

박선용 신부 · 한국가톨릭사목연구소

조광 교수 · 연세대학교

박문수 선생 · 한국가톨릭문화연구원

 

 

노길명 : 이 심포지엄의 종합토론 사회를 맡게 된 노길명 세례자 요한입니다. 주말을 맞아 바쁘실 텐데도 자리를 함께해 주신 청중 여러분께 이 심포지엄을 진행하는 사회자로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지정토론자들의 논평과 질의, 그리고 그에 대한 발표자들의 답변이 끝난 다음, 많은 질의와 논평을 해 주시어 토론의 열기를 높여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종합토론의 진행은 먼저 발표자들의 발표 논문에 대한 지정토론자들의 논평과 질의를 듣고, 그에 대한 발표자들의 답변을 듣는 것으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지정토론자께서 발표자의 답변 내용에 대해 이의나 또 다른 의견이 있을 경우에는 한 차례 더 말씀드릴 수 있는 기회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다음, 방청석에 계시는 청중 여러분으로부터 질의와 논평을 듣고, 그에 대한 발표자와 토론자의 답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한윤식 신부님께 제1 주제인 “세계 교회의 흐름과 교계제도의 설정”에 대한 논평과 질의를 부탁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한 신부님께서는 현재 부산가톨릭대학교 교수로서 세계 교회사를 전공하고 계십니다.

 

 

한윤식 : 반갑습니다. 방금 소개받은 한윤식 신부입니다. 교계제도의 설정은 개별 교회(지역 교회)의 설립과 이를 통한 보편 교회의 구현이라는 측면에서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런데 한 나라에서의 교계제도 설정은 그 나라에서 천주교의 성장과 발전을 둘러싼 역사적 상황을 반영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아울러 교회사의 세계사적 전개 과정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특정한 교계제도의 설정이 지니는 의미를 보다 풍부하게 찾아내기 위해서는 교회사의 세계사적 전개 과정이라는 보다 거시적인 시각이 요구된다고 하겠습니다.

 

조현범 선생님의 글은,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됩니다. 1962년 한국에서의 교계제도 설정이라는 사건을 ‘세계 교회의 흐름’, ‘동아시아 천주교 전체의 변화상’이라는 보다 넓은 관점에서 바라보고 또 그 의미를 찾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통해, 1962년 한국에서의 교계제도 설정을 세계 교회사적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시야를 더 넓혀주신 조현범 선생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토론자로서 몇 가지 질문 혹은 소견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발표문의 제목에 ‘세계 교회의 흐름’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여기서 ‘세계 교회의 흐름’의 핵심적 내용은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1622년 포교성성의 설립을 통해 가톨릭 해외 선교의 주도권을 확보하고 아울러 현지인 사제가 이끄는 지역 교회를 설립하고자 한 교황청의 일련의 노력을 그 핵심적 내용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1962년 한국에서의 교계제도 설립도 이러한 교황청의 노력에 따른 결실이라고 보이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 발표자께서는 20세기 초반 교황 베네딕도 15세(1914~1922) 재위 시기에 가톨릭 선교 활동이 일대 전환기를 맞이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며, 1919년 11월 30일에 제시된 문헌 〈막시뭄 일룻〉(Maximum illud)과 그 실천을 위한 교황청의 구체적인 노력들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하지만 20세기 초반 가톨릭 선교 활동이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 역사적 배경, 즉 1800년대 후반 중국 가톨릭 선교의 문제점 그리고 1914년 발생한 이른바 ‘천진 문제’와 사도 순시관 파견(1919)에 대한 언급은, 이 글의 논리 전개상 간단한 언급이라도 필요한 듯한데, 보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20세기 초반 가톨릭 선교 활동의 대전환이 뱅상 레브 신부 개인의 주도적 역할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오해를 초래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발표자께서는 20세기 가톨릭 선교의 ‘대헌장’이라고도 불리는 〈막시뭄 일룻〉, 그리고 이를 계승한 비오 11세의 〈레룸 에클레시애〉(Rerum Ecclesiae)의 중요성과 거기에 담긴 주요 선교 지침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셨지만, 그 주요 지침들이 1659년 포교성성 훈령에서부터 시작하여 이후 3세기 동안 교황청이 지속적으로 견지해 온 주요 선교 지침들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지 않은 듯합니다. 이러한 언급은 1962년 한국에서의 교계제도 설정을 세계 교회사적 관점, 특히 현지인 사제가 이끄는 지역 교회를 설립하고자 한 교황청의 선교 지침과 관련하여 파악하는 데 있어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보입니다.

 

아울러 〈막시뭄 일룻〉(본 책 25쪽)은 ‘대회칙’이 아니라, ‘교황 서한’(Lettera Apostolica)이며, 〈레룸 에클레시애〉(본 책 26쪽)는 ‘선교 회칙’으로 표현을 정확하게 하였으면 합니다.

 

3. 포교성성의 교황대리 감목구 제도 도입과 관련하여, 그리고 파리 외방전교회의 설립과 관련하여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 알렉상드르 드 로드 신부의 역할을 소개하셨습니다(본 책 13쪽). 베트남에서 선교사로서의 활동에 대한 소개가 있다면 좋겠습니다.

 

4. 발표자께서는 1851년 상해에서 열린 시노드에 대해 소개해주셨습니다(본 책 19~20쪽). 개인적인 관심으로 이 시노드의 개최 배경과 이후의 경과에 대해 서술된 글을 읽어본 적이 있는데, 발표문에 서술된 것과는 그 내용이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한 확인을 부탁드립니다. 제가 알아본 바 Fortunato Margiotti, “La Cina cattolica al traguardo della maturia”, Sacrae Congregationis de Propaganda fide Memoria Rerum III/1(1815-1972), Verlag Herder, Roma 1973, pp. 523~526에 따르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만주 대목구장 베롤(Verrolles) 주교는 1847년 8월 22일자로 로마에 접수된 그의 보고서에서, 중국의 북경과 청두(중국 사천성에 위치), 그리고 통킹에 각각 대주교좌를 설치할 것을 건의함으로써, 아시아 지역에 교계제도 설립을 제안합니다. 이 제안은 거절되었습니다. 그러나 중국과 주변 지역들의 모든 주교들이 참석하는 시노드 개최에 관한 그의 제안은 적극적으로 채택되었고, 그 결과 교황청은 1849년에서 1850년 겨울, 홍콩에서 시노드를 개최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중국에 있는 주교들의 의견 불일치, 포르투갈을 대신하여 보호권을 행사하고 있던 프랑스의 반대와 외교적 압력 행사로 교황청은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이듬해인 1851년 먼저 9월 닝보(寧波, 영파)에서 그리고 11월에서 12월에 걸쳐 상하이에서 각각 회합이 이루어집니다. 두 번째 회합에는 6명의 주교들, 즉 앞서 닝보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한 3명의 주교들과 남경의 마레스카 주교와 그의 보좌 주교 스펠타 그리고 일본 대목구장 포르카드 주교가 참석하였습니다. 상하이에서 열린 회의는 마레스카 주교가 주도한 것이 분명하지만, 중국 전 지역의 주교들이 참여하는 회의는 아니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홍콩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시노드를 위해 포교성성이 준비한 34개의 사안이 12번의 회기 동안 논의되었습니다. 1852년 로마에 도착한 이 회의의 결정 사항은 1856년 1월에 가서야 소개되었지만, 승인을 받지 못했습니다. 상당히 주의를 기울일 만하고 숙고할 만하지만, 제안하는 바가 다른 선교지에 적용할 수는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5. 1879년 4월 27일, 교황 레오 13세는 중국과 그 인접 국가에 설립된 다양한 가톨릭 선교지에서 복음 전파 사업을 효과적이고 체계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들 지역을 8개의 시노드 지역으로 분할하는 계획을 승인하고, 동년 6월 23일 관련 교령을 통해 이를 확정하였습니다. 중국에 설립된 선교지들은 5개의 시노드 지역으로 분할 편성되었고, 코친차이나(오늘날의 베트남 남부 메콩 삼각주를 중심으로 한 지역)와 통킹(오늘날의 하노이를 중심으로 하는 베트남 북부 지역)이 각각 독립된 시노드 지역으로 설정되었으며, 시암, 말라카, 캄보디아 그리고 버마를 아우르는 지역이 또 하나의 시노드 지역을 형성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노드 지역 편성에 있어 한국과 일본이 간과되었음을 알게 되자, 교황청은 1884년 4월 16일자 교령을 통해 이들 두 나라를 포괄하는 또 하나의 독립된 시노드 지역을 설립하기에 이릅니다.

 

그런데 중국에서의 교계제도 설립과 관련하여 1874년 9월 28일자로 제시된 교황청의 결정(rescriptum)도 주목할 만합니다. 이를 통해 교황청은 비록 교계제도의 설립을 쉽게 하기 위하여 시노드 그룹들을 설립하는 것에는 동의하였지만, 즉각적인 교계제도의 설립은 완전히 논외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1800년대 후반 교황청은 아시아 지역에 당장 교계제도를 설립하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하였지만, 이를 쉽게 하기 위한 전 단계로 먼저 시노드 그룹을 형성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발표자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이상입니다.

 

 

노길명 : 네. 감사합니다. 지금 여러 가지를 지적해주셨습니다. 이 내용에 대해서 발표자이신 조현범 박사께서 답변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조현범 : 네. 감사합니다. 한윤식 신부님께서 제가 놓친 부분들을 많이 지적해주셔서 보완을 해야 할 부분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계 교회의 흐름에 대한 저의 생각은 대략 이렇습니다. 먼저 16세기 이래로 포교성성이 아시아 지역에서 포르투갈의 선교 보호권을 축소하기 위한 노력들을 벌였고, 그 대체 방안으로서 대목구를 증설하였습니다. 이것이 보호권하에서 운영되던 교계제도 자체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현지인 성직자를 양성하는 토대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 뒤 20세기에 들어와서 각종 교황 문헌이 반포됨으로써 현지인 주교들이 독립적으로 지역 교회를 운영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역사적 흐름이 하나로 모이면서 20세기 중엽에 한국을 비롯한 여러 아시아 교회에 새로운 교계제도가 설립되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한윤식 신부님께서 지적하신 내용에 저도 동의합니다. 제가 빠뜨리고 있는 점들을 지적해주신 것에 대해서는 추후에 보충하도록 하겠습니다.

 

1659년 포교성성 훈령에 관한 설명을 추가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저도 많이 고민하였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1659년 포교성성 훈령은 굉장히 혁신적이고 혁명적인 선교 방안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헌이 실질적으로 발굴되어 소개된 것은 20세기 초입니다. 그래서 판본도 여러 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이 훈령 자체가 파리 외방전교회 설립자였던 팔뤼 주교와 랑베르 드 라 모트 주교에게 보낸 서한인 까닭에 오랫동안 그 원본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포르투갈 출신의 주교들이나 성직자들의 감시를 피해서 동아시아 지역에 가는 여로에 관한 정보도 담겨 있고, 또 포교성성에 선교 활동 내용을 보고하는 절차에 대한 지침들이 많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헌이 널리 공포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과연 1659년 포교성성 훈령이 이후 동아시아 지역의 천주교 선교 역사에서 어떤 위상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연구를 해서 별도의 지면을 통해서 발표하겠습니다. 그밖에 지적하신 문제들에 대해서는 오늘 발표문을 완성된 논문으로 만들면서 보완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에 제기하신 문제에 대해서는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음을 솔직히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천주교회를 시노드 그룹으로 나눈 것이 교계제도를 설립하는 문제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 문제를 해명하려면 시노드 그룹에 어떤 권한들이 부여되었으며 또 어떤 전망을 가지고 움직였는지를 우선적으로 파악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한윤식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교계제도 수립의 과정에서 시노드 그룹 결성이 지니는 교회사적 의미도 그런 연구 작업이 선행된 뒤에야 가능하리라고 봅니다. 제가 놓치고 있던 부분들을 꼼꼼하게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부분 역시 좀 더 숙고해서 저의 교회사 공부를 심화하는 기회로 삼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노길명 : 제1 주제에 대한 논평은 이것으로 일단 끝내도록 하고, 이번에는 제2 주제인 “교회법에서 본 교계제도 설정의 의의”에 대한 질의와 논평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이 주제에 대해 토론을 해 주실 분은 한국가톨릭사목연구소 부소장으로 계신 박선용 신부님이십니다. 박 신부님께서는 교회법을 전공하고 계십니다.

 

 

박선용 : 1. 한국 교회 교계제도 설정 50주년을 지내면서 개최되는 이 심포지엄에서 교계제도 설정의 교회법적 의미를 설명하는 기회가 마련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교회법은 그 자체로 독립적이고 창의적인 학문의 영역이 아닙니다. 교회의 신앙과 신학 전반의 영역을 깊이 있게 성찰하여 교회와 신자들의 생활에 꼭 필요한 내용을 종합한 규범의 총체입니다. 따라서 때로는 규범이라는 형식적 한계로 인하여 모든 신앙과 신학의 내용을 풍성하게 담을 수는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내용을 정리 요약한 것이기에 오히려 교회 가르침의 정수를 파악하는 데 가장 유용한 학문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교계제도와 그 설정에 관한 신학적 내용의 핵심을 요약하여 규범으로 정리한 교회법적 설명은 교계제도 개념 이해에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2. 김효석 신부님은 〈교회법에서 본 교계제도 설정의 의의〉에 대한 발제문을 통해서 이러한 취지에 가장 적합한 내용을 담은 글을 작성해주셨습니다. 교계제도가 무엇인지, 그렇다면 1962년 교계제도가 설정되었는데 그 이전까지 한국 교회의 구조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정식 교계제도 설정으로 변화하게 된 내용은 무엇이고 그 의미는 무엇인지를 단계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김효석 신부님은 1962년 3월 10일 교황 요한 23세가 한국 교회의 교계제도 설정을 반포한 교황 교서 〈복음의 비옥한 씨〉(Fertile Evangelii semen)의 본문 분석을 통해서 교계제도 설정으로 인한 변화와 그 의미를 명확하고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대목구에서 교구로의 승격의 의미, 관구와 산하 교구 설정의 의미, 명의 주교에서 정주 주교로 임명의 의미, 주교좌 성당 지정의 의미, 포교성성(인류복음화성) 관할의 의미 등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는 그 자체로 교회 제도가 가지는 교회법적 특성을 설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이처럼 김효석 신부님의 발제문은 순전한 의미에서 교계제도 자체에 대한 교회법적 해설을 담고 있기에 그 자체로 어떤 논쟁이나 토의의 대상이 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교회법전 규정과 역사적 사실(Fact)에 근거한 명확한 해설이기에 논평 자체가 불필요한 내용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다만 이 발제문의 범주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앞으로 한국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이에 걸맞은 구조를 모색한다는 취지에서 함께 생각해 보고 싶은 문제 한 가지만을 살펴보며 논평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4. 일반적으로 종교의 구성 요소로 세 가지를 꼽습니다. 첫째는 경전(經典)이고, 둘째는 의식(儀式)이며, 셋째는 조직(組織)입니다. 우리식으로 표현한다면, (각각) 성경과 전례와 교회 조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과 성전은 우리 믿음의 본질적인 내용이고, 전례와 성사(기도 포함)는 믿음의 내용을 끊임없이 기억하고 기념하는 형식이며, 교회 조직은 믿음의 내용을 구체적인 실천하기 위한 조직 체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계제도란 그런 의미에서 대단히 포괄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구성원(신분)을 기준으로 할 때, 성직자뿐만 아니라 (수도자와) 평신도가 포함되며, 직무를 기준으로 할 때는 예언직, 사제직, 왕직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 교계제도를 이야기할 때에는 주로 협의의 의미로 사용되어 교회 안에서 공적인 직무를 맡고 있는 성직자들과 그들의 단체만으로 한정해서 이해하게 됩니다. 김효석 신부님도 이런 협의적 이해 안에서 “가톨릭교회의 교계제도란 개별적이든(교황, 교구장 주교, 본당 사목구 주임 등) 단체적이든(주교단, 보편 공의회, 주교 대의원회의, 주교회의, 사제 평의회 등) 교회의 일치와 복음 선포를 위해 권한을 행사하는 모든 공적 직무 전체와 그 구조를 일컫는 말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관인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는 비단 공적 직무자들인 성직자들만이 아니라, 수도자, 평신도를 포함하는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공동체로 이해하고 있고, 이 내용 역시 교회법전 제2권 〈하느님 백성〉 안에 담아내고 있습니다. 즉 제2권 제1편은 “그리스도교 신자”, 제2편은 “교회의 교계 구조”, 제3편은 “봉헌 생활회와 사도 생활단”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아울러 같은 맥락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폐막 20주년을 기념하여 개최된 1985년 세계 주교 대의원회의 제2차 임시 총회에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깊은 일치와 친교를 드러내는 표지로서 “친교(Communio)의 교회론”이 모든 공의회 문서의 핵심적인 통찰이라고 선언하게 됩니다.

 

한국 교회는 이러한 공의회의 정신과 해석을 구현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지난 1990년부터 20여 년 가까이 소공동체 사목을 추진해왔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백성을 구성하는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모두가 깊은 일치와 친교 속에서 함께하는 교회를 구현하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교계제도에 대한 이해의 범주 역시 단지 교회의 공식적 직무를 가진 성직자들과 그들의 단체에 국한되는 개념을 넘어, 실제적으로 교회 안의 하느님 백성 모두가 참여하는 교계제도로의 이해와 더불어 그 구조를 실제 사목 영역에서 만들어가고 실천해야 할 때임을 절감하게 됩니다.

 

교회는 2000년의 역사 안에서 교회 자신의 이해를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해는 그 시대와 환경 안에서 해석된 교회론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 시대에, 앞으로 다가올 시대를 위한 교회의 자기 이해는 성령의 인도하심 안에서 늘 새롭게 펼쳐질 것입니다. 그 인도하심을 주의 깊게 살피고 겸손하게 응답하는 것이 오늘 우리 신앙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가져야 할 마음 자세일 것입니다.

 

 

노길명 : 네. 신부님 감사합니다. 신부님께서는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관련해서 교계제도를 성직계급론을 지칭하는 협의의 개념을 넘어서서 하느님 백성 전체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을 지적해주셨습니다. 이러한 신부님의 지적과 그 지적에 따른 앞으로의 방향에 대한 질문을 발표자인 김효석 신부님께서 답변해주시도록 하겠습니다.

 

 

김효석 : 네. 박선용 신부님께서 제 부족한 글에 대한 논평을 맡아 주시고 훌륭한 말씀으로 이야기 주제를 꽃피워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가톨릭교회의 교계제도가 교회가 실현하고자 하는 정신을 모두 구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어떤 제도도 정신을 온전히 다 구현할 수 있는 제도는 없겠다는 자기 한계를 느끼면서 신부님께서 질문해주신 내용에 대해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저도 전적으로 신부님의 의견에 동감한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신부님께서 저에게 어떤 질문을 던져주셨다기보다는 가톨릭교회의 교계제도를 전망할 수 있도록 새로운 시각, 종교학적인 시각에서 우리에게 전망을 열어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부님께서는 교계제도를 포함한 종교의 모든 제도적인 요소는 그 종교가 지향하는 정신과 내용을 보다 온전히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가톨릭교회의 교계제도 역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핵심 정신인 친교의 교회상을 어떻게 적합한 모습으로 구현할 것인가에 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제가 좁은 의미에서 교계제도 개념을 바탕으로 설명해 드렸었습니다. 일단 한국 교회의 교계제도 설정 50주년이라는 제목 자체가 좁은 의미의 교계제도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해보자는 것으로 저는 이해했기 때문에 교회가 말하는 교계제도가 구체적으로 무엇이냐, 좁은 의미가 될 수 있지만 현실적인 의미로 교계제도를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말씀드렸듯이 교회의 교계제도는 교회 안에 살아계시는 성령의 이끄심, 그리고 그 활동을 어떻게 더 잘 보호하고 표현하며 실현할 것인지에 대해 어떻게 봉사할 것인지를 제도화 시켜놓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교회가 만들어놓은 제도들은 이 시대의 정신 안에서 새롭게 해석되어야 하고 그 모습을 갖추어가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이것은 교계제도 설정 50주년을 맞이한 한국 가톨릭교회의 사명만이 아니라, 오히려 전 세계 보편 교회에 던지는 끊임없는 교회의 자기반성을 위한 빼놓을 수 없는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교계제도의 폭과 깊이를 넓힐 것인지 저에게 질문해주셨지만, 사실 이 자리에서 다 말씀드릴 수 있는 부분은 아닙니다. 저 역시 신부님과 똑같은 생각으로 교회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어떻게 더 잘 실현할 것인지에 대해 집중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부족하지만 답변을 마칩니다.

 

 

노길명 : 네. 감사합니다. 박선용 신부님께서 지적해주신 것은 질문이라기보다는 앞으로 우리가 교계제도에 대한 시각을 이렇게 넓혀 나가야 할 것이 아니냐는 측면에서 말씀해주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번에는 제3 주제인 “교계제도 설정에 대한 한국 교회의 인식”에 대해 조광 교수님께서 논평을 해주시겠습니다. 한국 교회사를 전공하시는 조광 교수님은 고려대학교 명예교수와 연세대학교 석좌교수로 활동하시면서 한국교회사연구소 고문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조광 : 양인성 선생의 논문을 잘 읽었습니다. 이 주제에 관해서는 기존의 연구 업적이 없는데도, 이를 새롭게 밝혀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생각됩니다. 우선 이 점은 높이 평가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글의 완성도를 조금이라도 높이는 데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몇 가지의 문제를 제기하고자 합니다.

 

먼저 역사학도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한 부분으로 자료에 대한 문제에 대해 말씀드려 볼까 합니다. 흔히 사료, 혹은 자료라고 할 때 문건 자료가 중요시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발표문에서 문건 자료의 범위를 잡지와 신문을 집중적으로 검토하신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같은 교회 내의 기록이라고 하더라도 잡지와 신문 이외에 여러 고위 성직자들, 아니면 연세가 높은 성직자들의 회고담들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심포지엄을 시작하면서 김성태 신부님이 인사 말씀에서도 이야기하셨던 노기남 주교의 언급이라든지 당시를 살면서 기록을 남기신 오기선 신부님이나 그리고 김수환 추기경님의 기록에서도 교계제도에 관한 그분들 나름의 입장을 추출해낼 수도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문헌 자료의 범위를 신문과 잡지로만 국한하지 마시고 좀 더 넓혀주실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한편, 이 당시의 정부와 사회에서도 천주교의 교계제도에 대해서 일정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사실보도인 경우도 있었고 해설기사를 통해서 그 의미를 나름대로 규정한 부분도 있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비록 1단 짜리의 짧은 기사거나 단순한 사실보도라 하더라도 재음미하는 과정에서 당시에 천주교 교회 내라기보다는 한국 전반에 대한 인식도 같이 다루어주시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제목이 한국 교회의 인식이라는 것으로 국한이 되어있습니다마는 한국 교회의 인식도 한국 사회라고 하는 당시의 정신 구조가 가지고 있었던 전체 컨텍스트에서 살펴볼 때, 한국 교회의 인식이라는 텍스트도 바로 보일 수 있다는 점을 가늠하자면 일반 사회의 인식이 어떠했는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일반 사회의 인식으로는 각종 보고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문교부나 다른 부서들의 정무보고에서 교계제도는 어떻게 비쳤는가, 그리고 그 보고가 교회와는 어떠한 관련을 맺고 있었는가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각 종교의 동향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있는 연감에서는 교계제도 설정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했는가, 그것이 한국 교회의 입장과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를 같이 밝혀주신다면 훨씬 자료가 풍부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러한 문헌 자료 보충 외에 역사의 중요한 자료는 기억입니다. 기억을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증언 청취를 해야겠지요. 지금 교계제도를 경험했던 많은 신부님이 계십니다. 혹시 가능하시다면, 교회 안에서 교계제도에 대한 인식을 바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나이 드신 성직자분들에게 의견을 묻는 인터뷰를 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생각을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현재 우리 교회는 기억의 가치를 너무 중요시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날 현대사에서는 오럴 히스토리(oral history)가 매우 중요한 영역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교회사에서는 아직 오럴 히스토리가 가지는 의미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성직자분들이나 그 당시 지도적인 신도들이나, 이 교계제도 50년 전의 사건을 기억하고, 당시에 느꼈던 감흥을 간직하고 계신 분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 점에 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주었으면 합니다. 이상의 자료에 대해서는 단순한 코멘트입니다. 양 선생님은 전문적인 역사학자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에 큰 이의가 없으리라 생각하고, 굳이 이 자료에 대한 지적에는 대답을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먼저 준교구라는 개념을 쓰고 있습니다. 준교구는 대목구와 구별되는 정식 교계제도 아래에서의 제도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대목구를 준교구로 보기보다는 서양 교회사의 전개 과정에서 padronado의 규제를 피하기 위한 변형된 교구 형태로 파악함이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다음으로 발표문에 주교와 대목구장 등등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대목구에서 정식 교구로 넘어가는 과정을 서술하는 글이므로 대목구의 책임자를 관행대로 주교라고 칭하기보다는 대목구장이라고 함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1831년 조선 대목구가 설정되었고, 1911년에 이것이 서울과 대구 대목구로 분할이 되었다고 발표문에 나와 있습니다. 조선 대목구에서 대구 대목구를 분리시키고, 조선 대목구의 명칭을 서울 대목구로 바꾼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 점은 여기에 계시는 오태순 신부님이 주관하셨던 1981년 조선교구 150주년 기념을 하는 과정에서 분명히 밝혀졌던 부분이었습니다. 대구교구의 경우 조선교구에서 서울교구로 바뀌고 거기에서 갈려져 가는 것이니까 서울교구와 창설 기념일(9월 9일)이 다릅니다. 이것은 조선에서 서울과 대구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사실이 될 것입니다.

 

다음으로 전교 지방과 비전교 지방 사이에서 드러나는 차이로 경제적, 인적 지원 관계에 대해 보완해주셨습니다. 그런데 경제적, 인적 지원 이외에 교계제도가 설정된 전후 시기에 또 다른 점은 없는가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다음으로는 면속구란 용어에 대해서입니다. 이는 당시 및 오늘날까지도 사용되는 공식 용어입니다. 그러나 이 용어는 그 용어에 함축되어 있는 구체적 관념을 제시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 용어를 쉽게 하기 위해서는 이 용어를 새롭게 바꿀 필요도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덕원수도원교구’라면 비신자들이나 비전문가들은 상대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점을 감안하여 이 용어에 대한 재고가 요청됩니다.

 

그리고 교계제도를 설정할 당시에 한반도와 오늘날의 한반도, 그리고 교계제도 설정 당시에 가지고 있었던 사실에 대한 인식과 오늘날 가지고 있는 사실에 대한 인식 사이에 차이가 난다고 생각됩니다. 오늘날 북한은 엄연한 하나의 독립된 국가로 유엔의 회원국입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할 때 한반도 전 지역에 교계제도를 설정한 것이 당시 남한 사회에서는 대단한 자부심이요,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정치적 견해를 강화시켜주고 뒷받침해주는 역할을 했다고 하더라도 과연 그러한 역할을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우리가 간직해야 할 것인지는 의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에 대한 발표자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다음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라는 주장의 근거가 오역에서 나왔고, “대한민국의 행정력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라고 번역해야 맞는다는 주장이 강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에 근거하여 북한의 유엔 가입도 진행되었다고 할 때, 당시 교회의 인식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은 없는가 하는 점을 살펴볼 시점이 아니냐는 생각이 듭니다.

 

끝으로 한국 교회가 경제적 자립에도 불구하고 인류복음화성에 계속 소속되어 있음을 보면, 교계제도 설정 당시 한국 교회를 포교성성에 소속시킨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을 좀 더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이 됩니다.

 

 

노길명 : 네. 감사합니다. 두 가지 측면에서 말씀해주셨습니다. 하나는 자료의 범주를 좀 더 넓혀서 문헌 자료와 함께 증언 자료까지 포함시키면 좀 더 좋은 논문이 되겠다 하는 것과 그리고 그 논문에 나와 있는 몇몇 내용들에 대해서 조금 보완 또는 수정해줄 것을 요청했는데, 이미 발표문에서 많이 바뀐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광 선생님께서 ‘덕원수도원교구’라고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한국 천주교회 주소록을 보면 ‘덕원 자치 수도원구’로 나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하튼 지적해주신 내용에 대해서 양인성 선생님께서 답변을 해주시겠습니다.

 

 

양인성 : 먼저 토론문을 맡아주신 조광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선생님께서는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들을 지적해 주셨습니다. 제 나름대로 변호해보자면 저는 오늘 발표자들 가운데 유일한 역사학 전공자입니다. 교회법이나 교회 용어에 대한 지식이 부족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 발표문에는 미흡한 점이 많습니다. 선생님께서 토론문에서 지적해주신 준교구나 면속구 개념 등은 제가 앞으로 원고를 수정하는 과정에서 많이 참고해서 반영토록 하겠습니다. 부족하지만, 선생님의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라는 주장의 근거가 오역에서 나왔고, ‘대한민국의 행정력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라고 번역해야 맞는다는 주장이 강하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에 근거하여 북한의 유엔 가입도 진행되었다고 할 때 당시 교회의 인식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은 없는가” 하는 점을 지적해주셨습니다.

 

제가 본문에서 썼듯이 1948년 12월 파리에서 열린 유엔총회 결의안이 알려진 이후에 이 결의안은 대한민국이 전 한반도에 걸쳐 통치권을 받는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이승만 정부나 박정희 정부에서는 이러한 해석에 근거해서 대한민국만이 유일한 합법 정부이고, 북한은 한반도 북부를 불법적으로 점거한 괴뢰 정부임을 각별히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조광 선생님께서 지적해주셨듯이 최근 이러한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즉 유엔 결의안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오역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엔 결의안은 대한민국이 한반도 전체의 정부라고 승인한 것이 아니라 선거가 실시된 지역에서 유권자의 자유의사에 의해 수립된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승인했고, 그 정부는 한국인이 대다수가 사는 남한에서 효과적인 통치와 관할권을 가졌음을 명시하였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북한 지역에 대한 통치권과 관할권이 없다는 말입니다. 대한민국 주권이 북에까지 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하지만 본문에서 보았듯이 1948년 12월 유엔총회 결의안이 발표된 이후에 한국 사회에서는 이것을 대한민국만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으로 해석해 왔습니다. 한국 교회도 그러한 인식을 비판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다음 질문입니다. 선생님께서는 “한국 교회가 경제적 자립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인류복음화성에 속해 있다. 그러면 교계제도 설정 당시에 한국 교회를 포교성성에 소속시킨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질문을 해주셨습니다.

 

교계제도 설정 당시에 한국 교회는 동아시아에서도 주목할 만한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남한의 전체 신자수는 50만이었습니다. 전체 인구의 약 2%에 불과했습니다. 여타 동아시아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도 많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컨대, 이슬람교 국가인 인도네시아의 경우, 1959년에서 1960년 사이 신자 수를 보면 100만 명이 넘었습니다. 또한 당시 한국인 성직자 수도 크게 늘긴 했지만, 교계제도 설정 당시에 한국인 성직자 수는 선교사보다 약간 많은 정도였습니다. 교황청은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교계제도가 설정되었지만 한국 교회가 여전히 교황청과 선교회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교황청에서 교계제도가 설정되었음에도 한국 교회를 포교성성의 관할하에 둔 하나의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덧붙여 한국 교회가 현재도 왜 인류복음화성에 속해 있는가의 문제는 앞으로 좀 더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시기를 문헌 자료, 즉 잡지와 신문에 집중하지 말고 회고담이라든지 원로 성직자와의 인터뷰 등을 참고해야 한다고 지적해주셨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공감을 합니다. 그런데 선교회 문서, 한국인 성직자의 기록 등도 참고하기 위해 꼼꼼히 찾아보았지만, 교계제도와 관련해서 그리 주목할 내용을 찾지 못했습니다. 저는 발표문을 준비하면서 교계제도 설정 당시 한국인 성직자들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의 인식에도 주목했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는 파리 외방전교회, 골롬반회, 메리놀회 문서를 조사했습니다. 관련 문서를 몇 건 찾아냈습니다만, 많지 않았거니와 그 내용도 ‘이제 대목구에서 교구로 설정되었다’, ‘앞으로 우리들의 부담이 많이 늘어났다’, ‘언제 어디서 교계 설정식이 있었다’ 등 단편적인 보고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기회가 된다면 당시에 사목 활동을 하셨던 원로 성직자들을 찾아뵙고 인터뷰를 해서 구술 자료를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선생님의 토론에 대해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부족하지만 이것으로 제 답변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노길명 : 제3 주제에 대한 논평을 일단 이것으로 끝내고, 이번에는 마지막 주제인 “교계제도 설정이 한국 교회에 미친 영향”에 대한 질의와 토론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지정토론을 해주실 분은 한국가톨릭문화원 부원장으로 계시는 박문수 박사이십니다.

 

 

박문수 : 네. 안녕하세요. 우선 어려운 주제를 맡아 최선을 다해 준비해주신 오 신부님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전체적으로 신부님의 논지에 동의하기에 비평보다는 분량이나 접근 방법 때문에 미처 다루지 못한 내용에 대한 저의 의견을 제시하는 것으로 몫을 다하고자 합니다.

 

오 신부님의 논문은 오경환 신부님의 〈해방 이후 한국 천주교회의 성찰과 전망〉(한국종교사회연구소 편, 《1945년 이후 한국종교의 성찰과 전망》, 민족문화사, 1989), 저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한국 천주교회〉(한국교회사연구소 편, 《민족사와 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와 같은 접근법을 취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에서 복음화를 주제로 한국 사회를 성찰하면서 유사한 현상들을 비슷한 방식으로 다룬 바 있습니다(《한국그리스도사상》 제18집 · 제19집 참조).

 

그럼에도 오 신부님이 현재와 같은 주제와 접근법(양적 추이 분석)을 취하신 것은 ‘교계제도 설정’의 영향을 특정(特定)하기가 쉽지 않아서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교회 전체가 참여한 운동이라든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같이 회의 결정 사항이 직간접적으로 교회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라면 변화 추이를 쉽게 추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계제도 설정은 직접적으로 교회와 신자들의 생활에 영향을 줄 만한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오히려 교계제도 설정 직후 개최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영향이 절대적이어서 대부분의 변화는 이 공의회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이후 한국 교회사에 큰 사건으로 기록될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조차도 개최 배경, 추진 주체, 문헌에 배어 있는 정신 등을 볼 때 역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영향이 큽니다. 따라서 교계제도 설정에만 초점을 맞춰 영향사를 고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만일 고찰하였다면 오늘의 제3주제와 같은 사료를 참고하고, 영향사를 추적하는 양적, 질적 연구들을 수행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짧은 연구 시간을 고려할 때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교계제도 설정 이후에도 이전 시기의 연장에서 교세는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성장이 개신교와 불교에도 이 시기에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개신교의 성장은 천주교를 능가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양적 성장을 교계제도 설정의 영향으로 해석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연성은 있지만 그 직접적인 결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또한 이 시기에는 개신교와의 선교와 영향력 확대 경쟁도 치열하였습니다. 개신교와 유착된 자유당 정부와의 갈등, 국가 권력에 접근하기 위한 경쟁 등이 그것입니다. 따라서 교세 증가가 교계제도 설정 이후에 일어난 변화 양상 가운데 하나로 보는 것은 타당하나, 직접적인 결과로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이 때문에 교계제도 설정의 영향사를 고찰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객관적 환경 요인들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영향을 분석하려면 교계제도 설정 이후 이 조치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주교들(특히 방인 주교들)의 자의식이 어떻게 변하였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리라 봅니다. 교계제도 설정은 분명 주교들에게 자립(自立)에 대한 의지를 자극하였을 것입니다. 교계제도 설정의 직접적인 결과로 주교들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초대를 받았고, 공의회 이후 주교들의 적극적인 솔선으로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의 탄생, 한국 사회에 대한 책임 의식이 증가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공의회와 직접 연결되었거나 별개로 영향을 받은 것일 수 있지만, 교계제도 설정을 전후로 주교들 혹은 다른 교회 구성원들이 이전과는 다른 자의식을 가졌으리라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교회 지도자들의 자의식 여부, 그리고 이 자의식을 실현하고자 노력한 내용에 대한 분석이 이뤄질 때 오 신부님 논고에서 본래 전달하고자 했던 바가 더 잘 드러날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가설이지만 이 연장에서 주제에 더 가깝게 생각되는 것은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입니다. 그리고 이 회의 개최 시기는 재정적으로 거의 자립하게 되는 시기입니다. 실질적인 재정 자립은 제44차 세계 성체 대회(1989)에 즈음하여 이뤄지지만, 나머지 교회의 자립 의지는 이 회의를 통해 구체적으로 표현됩니다. 또한 이 회의는 공의회의 직접적인 영향하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교계제도 설정, 제2차 바티칸 공의회,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로 이어지는 큰 흐름 사이에 이를 연계하는 교회 지도자들의 자의식 변화와 이 변화의 영향을 추적할 수 있다면 본고에서 열거하는 변화 양상들과 더불어 영향사적인 측면이 더 잘 드러날 것이라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볼 때 교계제도 설정의 직접적인 영향이라 볼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현상들입니다. 이러한 측면들이 함께 고찰되었다면 접근이 더 쉬웠을 것이라고 봅니다.

 

우선 교황청과 외교적 관계의 변화와 세계 교회 안에서 한국 교회의 위상 변화 측면입니다. 이 가운데 첫 번째 사건은 한국 주교들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초대된 것입니다(1962). 1963년에는 교황 사절의 등급이 상향 조정되었고, 1967년에는 한국 교회 최초로 추기경이 탄생하였습니다. 교황청의 여러 위원회와 유기적 연계도 두드러졌습니다. 이로 인해 주교회의 인성회, 한국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 주교회의 일치위원회, 매스컴위원회, 남녀선교수도회 장상연합회, 교황청 전교회, 어린이 전교회, 베드로 사도회 한국 지부 등의 설립이 이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세계 교회와의 관계가 훨씬 촉진되었음은 물론입니다. FABC(아시아 주교협의회) 창설도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자립의 측면은 외국 선교회(사)의 영향력 축소와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전체 사제 수에서 외국인 선교사들의 비중이 줄어드는 것과 같은 양적 변화 못지않게, 이들이 교회 안에서 담당하던 역할 변화와 같은 질적 변화 양상도 중요합니다. 교계제도 직후에는 영향이 크지 않았지만, 이후 방인 사제들이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선교회의 역할이 조정되기 시작합니다. 교계제도가 설정된다는 것은 이와 같이 한국 교회가 인적, 물적, 선교적, 신학적으로 선교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측면에서 일어난 변화를 추적해보는 것이 그나마 주제에 가까이 접근하는 방법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세 번째로, 이미 오 신부님도 다룬 바 있지만 한국 교회가 진정한 한국의 교회로 서기 위해 노력했던 결과들이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해외 원조 시작). 사제 수는 늘어났지만 이들의 자의식이 실제로 얼마나 커졌는지, 보편 교회와 일치하면서도 토착화 노력을 얼마나 해왔는지, 실질적인 재정 자립은 언제 이뤄졌는지, 그리고 이를 위해 주교들은 어떤 노력을 경주했는지 등도 영향사를 추적하는 데 유용한 자료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제 양성의 측면에서 교과 내용, 양성 책임자들의 양성, 신학 등이 어떻게 구성 · 진행되었는지, 그리고 이것이 사제들의 자의식 형성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입니다. 저는 2002년 9월에서 2005년 8월까지 3년간 ‘한국 근 · 현대 한국가톨릭연구단’에 속해 20세기 백 년 동안 가톨릭교회와 한국 사회가 만나 문화적으로 어떤 접변을 일으켰는지를 연구한 바 있습니다. 이때 연구 분야는 삶의 전 영역을 망라하였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사회와 접촉하는 면적이 그만큼 넓고 다양하다는 점을 반영한 결과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저는 종교(혹은 교회)의 영향이 미치는 범위가 넓고, 영향력도 막대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후 저는 종교를 연구할 때 항시 이때 배운 교훈들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이 맥락에서 저는 교계제도 설정의 영향사도 양적 성장 측면만 바라보지 않고 교회 생활 전 영역에 걸쳐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여기에는 교회사 연구자들의 뒷받침이 필수적입니다. 사회학자들은 이러한 자료를 넓은 사회적 맥락에 비추어 해석하는 것으로 기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 심포지엄의 주제는 여러 분야들이 학제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주요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앞의 세 주제를 미리 참조한 바탕 위에 제4 주제를 다루었다면 더 훌륭한 성찰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감사합니다.

 

 

노길명 : 네. 감사합니다. 발표자인 오 신부님께서 미처 다루시지 못한 측면, 그리고 오 신부님의 발표 제목을 보다 풍성하게 해줄 수 있는 측면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지적 내용에 대해서 오 신부님의 답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오세일 : 네. 무엇보다도 먼저 제 논문을 읽어주시고 세세한 부분에 대해서 코멘트를 해주신 박문수 박사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 개인적인 상황 때문에, 그리고 역사적으로 정리되어 온 관련 자료를 구하는 데 어려움이 많아서 논문 작업을 제대로 못 해오다가 지난 8월에 통계적인 자료들을 중심으로 양적 연구를 해 나가며 그에 대한 질적인 과제들을 성찰적으로 다룰 수밖에 없었습니다. 박 선생님께서는 저의 짧은 연구 시간을 고려해서 여러 가지 질적, 양적 연구를 병행하는 것들에 대한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해주셨습니다. 제가 외국에서 오랫동안 공부하고 한국에 들어온 이후로 한국 교회의 실정과 상황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인 자료나 정보들을 아직 폭넓게 수집하지 못해 왔었습니다. 그러한 제 연구의 한계에 대해, 선생님께서는 한국 천주교회를 위해 오랫동안 일해오시면서 교회에 대해 깊은 애정을 나눠주시는 마음으로 코멘트를 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가지 지적해주신 것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저 역시 동감합니다.

 

먼저, 공식적으로 발표된 혹은 찾아야 할 자료의 부족으로 영향사를 다루는 역사학적인 관점에 대해서 제가 깊이 천착해 나갈 수 없었지만, 기본적으로 교세 성장이라고 하는 양적인 변화상을 지적해주신 것에 대해서 제 기본적인 논점이 읽힌 느낌이 듭니다. 교계 구성원들 간의 변화상에 대한 양적 성장을 지적해주셨는데요. 그것은 교계제도 설정으로 인한 직접적인 영향으로 보기에는 어려울 수 있고 그보다는 공의회의 영향력으로 볼 수 있다는 논점을 통해 설명했습니다. 아울러 교세 성장에 있어서 사회환경적인 요인의 영향, 타 종교들에 대한 상대적인 우위성, 그리고 사회정치 구조 등 교회 외부적인 환경에서 오는 간접적인 변화상에 대해서도 박 선생님과 공감을 이루고 있습니다.

 

다만 교회 자립의 의지에 관해서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자의식 여부를 검토해보는 것은 아주 재미있고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이 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박 선생님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교계제도 설정, 제2차 바티칸 공의회,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록, 사목의안으로 이루어지는 장대한 역사적인 발전 전개 과정 안에서 교회 지도자들의 자의식들이 어떻게 성장하여 왔고 발전되어 왔는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또 다른 포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서 공감합니다. 그런데 지역 교회로서의 근본 동력 역시 교계제도 설정 그 자체보다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부터 추동된 지역 교회에 대한 관심에 기인한다고 보입니다.

 

그리고 외국인 선교사의 영향력이 축소되었다고 하는 점에 대해 저는 외국인 사제들의 비율을 통해서 단편적으로 보고를 해드린 데 비해 선교회 혹은 외국 수도회의 영향력이 어떻게 축소되어 왔는가에 접근해 보는 것을 제안해 주신 점도 아주 귀중한 조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점은 교구 내 외국인 선교사의 역할에 대한 현상적인 연구뿐 아니라 외국 선교회 및 수도회의 인적 구성을 포괄하는 조직적인 논의도 함께 필요할 수 있습니다.

 

일례로 예수회만 하더라도 1980년대 중반에 미국 선교사들께서 장상을 맡아 오시다가 내국인으로 장상이 바뀌고, 서강대학교 총장도 내국인 사제로 바뀌는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방인 수도회는 이러한 조직 구성과 교회 내 영향력이란 차원에서 예외라고 할 수 있겠지만, 외국 선교회의 역할 안에서 이러한 장상의 주도적 역할이 외국인에서 자국인으로 전환되는 것, 그리고 이것이 지역 교회에 끼친 변화상을 추적해보는 것은 별도의 주제이겠지만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사제 양성의 측면에 대해서 사제들의 자의식 형성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논의할 점이 많아 보입니다. 제가 피부로 느끼는 것은, 외국에서 공부하면서 지방 교구에서 유학 온 교구 신부님들 중에서 사제 양성 프로그램에 대해 전적으로 매달려서 공부하시는 분들을 많이 뵈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서울대교구 신학교 안에서 사목신학과 관련되어 실제적인 실행과 성찰에 대한 실습(practicum) 프로그램들이 커리큘럼 안에 담겨 있지 못하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사제로서의 자의식은 무엇이며 평신도와 사목적 관계 설정은 어떻게 해 나가야 하는가 등에 대해 교계제도의 원리를 더 깊이 성찰해 보면서, 구조적이며 교육학적인 현안들도 구체적으로 성찰하며 반영해 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낍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노길명 : 지금까지 발표자의 발표 내용에 대한 지정토론자들의 질의와 논평, 그리고 그에 대한 발표자들의 답변 내용을 들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오랜 시간 동안 기다리신 청중들의 질의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질의를 준비하시는 동안, 자유토론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 제가 먼저 한 가지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한국 교회에 대한 교계제도 설정 배경에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20세기 세계 교회사의 흐름과 교황청의 선교 정책, 근 일백 년 동안 정치권력으로부터 극심한 탄압을 받아 수많은 순교자들을 배출하면서도 굳건히 신앙을 지켜온 한국 교회의 영성과 전통, 그리고 광복 이후 계속되어 온 한국 천주교회 신자들의 바람과 청원 등이 교계제도 설정이라는 큰 결과를 낳게 한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발표자들께서는 백남익 신부님의 증언을 인용하여 1959년에 있었던 교황청 포교성성 장관 아가지아니안 추기경의 한국 방문이 교계제도 설정의 중요한 계기가 된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제1 주제의 발표자이신 조현범 박사께서는 “1959년 3월에 한국을 방문한 포교성성 장관 그레고리오 아가지아니안 추기경이 한국 교회의 성장과 성령 강림 대축일 당시 한국 신자들의 신앙 열기에 감동하여 교계제도 설정을 준비하기로 하였다고 한다”라고 발표하셨고, 제3 주제의 발표자이신 양인성 선생님께서는 “아가지아니안 추기경이 한국 교회를 시찰하고 교계제도의 설정 가능성을 확인하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아가지아니안 추기경의 한국 방문이 교계제도 설정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는 동의하지만, 증언 내용처럼 추기경께서 한국 교회의 성장이나 한국 신자들의 신앙 열기에 감동하여 교계제도를 추진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당시 학생으로서 학교의 동원에 따라 연도(沿道)에 나가 태극기와 교황기를 흔들면서 아가지아니안 추기경을 환영한 경험이 있습니다.

 

1959년에 아가지아니안 추기경이 한국을 방문한 까닭은 교계제도 설정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배경은 이러합니다. 당시, 서울교구는 교구에서 운영하던 《경향신문》을 통해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 체제와 부패를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이승만 정권은 가톨릭교회를 극도로 탄압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정부에서는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교수로 내정된 박양운 신부를 천주교 신부라 하여 임명하지 않았고, 소록도에서 나환자 치료 활동을 하던 의사를 천주교 신자라 하여 파면하였으며, 본인의 과오가 없음에도 신자 공무원들을 먼 곳으로 좌천시키거나 파면하였습니다. 그리고 《경향신문》에 대해서는 정간 처분을 내렸다가 결국에는 폐간 처분을 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승만 정권은 법무장관 김법린을 교황청에 파견하여 교회가 정치에 관여하지 말 것이며 노기남 주교는 ‘정치 주교’이니 서울 교구장에서 해임해달라고 요청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아가지아니안 추기경께서는 이런 이유 때문에 그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한국에 왔던 것이고, 한국에 와서도 정부 고위관리들과 만나는 데 거의 모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노 주교님의 회고록과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간행한 《한국천주교회의 대부 노기남》을 보면, 노 주교님께서 추기경이 계신 곳을 찾아갔으나, 추기경께서는 정부 고위층과 면담하는 데 시간을 거의 소모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오랜 시간 기다린 후 추기경님을 대면했더니, 추기경께서는 정부 관리들을 배웅하신 후 노 주교님께 왜 교회가 정치에 참여하느냐고 나무라시면서, 정치에 관여하지 말 것과 《경향신문》 운영에서 손을 뗄 것을 요구하셨다고 합니다. 이 기록들에서는 아가지아니안 추기경님께서는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지 말 것이며 교회는 《경향신문》에서 손을 떼라고 계속 요구하셨고, 노 주교님께서는 《경향신문》이 정부를 비판하는 것은 정치 참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기본적인 권리를 정당하게 대변하는 것이며, 신문마저 침묵한다면 공산주의의 독소가 파고들어 자유도 종교도 파멸되어 암흑시대로 바뀔 것이라고 말씀드렸다고 합니다. 추기경께서는 헤어질 때도 인간은 원조 아담 이래 야당이었다고 말씀하시면서 이승만 정권에 대한 비판을 못마땅해하셨다고 합니다.

 

저는 아가지아니안 추기경의 한국 방문이 교계 설정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다른 데 있다고 봅니다. 노기남 주교님께서도 기록으로 남기신 것처럼, 당시 교황청에서는 한국 상황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고, 교회가 정치권력과 갈등 관계에 있는 것을 못마땅해 했습니다. 그런데 4.19 혁명이 일어나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나니, 교회의 반독재 투쟁이 옳은 것이었음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한국 교회가 독재 체제에 맞서 싸울 만큼 성장했음을 교황청이 알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다시 말씀드린다면, 아가지아니안 추기경이 한국에 도착하여 한국 교회의 성장을 실감했거나 한국 교회 신자들의 신앙 열기에 감복하여 교계제도 설정이 앞당겨진 것이 아니라, 4.19 혁명을 통해 한국 교회가 불의와 독재 체제에 대항할 만큼 성장하였다고 평가하게 된 것이 교계제도 설정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이러한 한국 교회에 대한 교황청의 새로운 인식과 함께, 당시 세계 교회의 흐름 그리고 그간 한국 교회에서 요청해온 청원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함으로써 교계제도가 설정되기에 이른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에 관해서는 앞으로 보다 깊은 연구가 따라야 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정식 교계제도의 설정은 교회법상으로 한국 교회의 교구들이 대목구를 벗어나 자치권을 누릴 수 있는 개별 교회의 형태를 지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계제도 설정 이후, 한국 교회는 놀랄만한 성장을 보여 왔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교계제도 설정을 통해 한국 교회가 오랫동안 도움을 받아온 선교지 교회를 탈피하고 독립된 교구로서 승격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국 교회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것과 함께 독립된 교구로서의 책임과 역할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오늘 토론 과정에서도 언급된 바와 같이, 독립된 교구로서의 자의식, 복음화를 향한 열정과 노력, ‘받는 교회’로부터 ‘주는 교회’로의 변화, 보편 교회와 일치하면서도 민족의 전통문화와 대화하고 일치하려는 토착화의 노력, 평양교구와 함흥교구 및 덕원 자치 수도원구를 포함한 북한 교회 문제와 민족의 화해와 일치 등은 한국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중요한 과제들이라고 생각됩니다. 한국 교회가 대목구 체제를 벗어나 독립된 교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투철한 자의식과 함께 이러한 과제 해결에 더욱 정진해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동안 거의 연구되지 않은 분야를 맡아 수고해주신 발표자들과 토론에 참여하여 귀중한 말씀을 해주신 토론자들, 그리고 자리를 함께하여 끝까지 경청하여 주신 청중 여러분들께 감사드리면서 오늘의 심포지엄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교회사 연구 제40집, 2012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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