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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유리화공예에 대하여2: 스테인드글라스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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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14 ㅣ No.95

유리화공예에 대하여 2 - 스테인드글라스의 역사


II. 스테인드글라스의 역사
 
 
 
1. 스테인드글라스의 기원
 
스테인드글라스는 고대 이집트 고분에서 처음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날과 같은 스테인드글라스가 아니라 색유리로 만든 유리제품이다. 그렇긴 하지만 그러한 색유리가 지속적으로 진보를 가져와 오늘날의 스테인드글라스가 된 것임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색유리의 기술은 훗날 유럽으로 파급되면서 그리스도교와 만나 종교미술의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색유리가 그리스도교 미술형태인 스테인드글라스로 변모하게 된 것은 종ㄱ의 정신적인 빛의 신비를 색유리라는 물질적인 빛으로 환원시켜 빛의 신비로움과 황홀한 색채로 교회공간을 중압감과 신비스러움에 가득하게 함으로써 신자들에게 종교의 신성함을 더욱 자아내게 하였다.
 
우리가 서양미술사를 훑어보면 고대 이집트 문화가 에게 해를 거쳐 그리스 로마를 통하여 유럽 전 지역에 영향을 미친 것을 알 수 있는데 스테인드글라스도 그와 같은 과정을 거쳤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특히 건축의 발달과 변화에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로마 전제군주의 오랜 종교탄압이 있은 후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이르러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주교가 됨으로서 대규모적인 교회건축이 각지에서 건설되게 됐을 대 스테인드글라스는 점차적으로 그 교회건축에 침투하게 되었다.
 
특히 색유리가 당시의 소박한 벽면 장식법이었던 테세라(Tessera)와 결합하게 된 것이 하나의 전기가 되었다. 테세라란 기존에는 석회석 반죽을 하여 착색시켜 사용하거나 대리석 조각으로 모자이크를 하여 벽면을 장식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색유리로 만들어진 테세라를 시작하므로 이제까지의 테세라 보다 다양하면서도 강렬한 색채를 제공할 수 있었다. 또한 유리 테세라의 반짝이는 표현이 작은 반사경처럼 작용하므로써 전체적인 효과는 단순히 유리의 효과라기보다는 광체가 있는 빗물질적인 영상의 효과를 나타내었다. 이 모든 특색이 유리 모자이크로 하여금 초기 그리스도교 바질리카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건축미학의 이상적인 보조 수단으로 이용되게 하였던 것이다.
 
비잔틴 로마네스크를 거쳐 오면서 벽면에 부착된 유리 테세라는 차차 창문에 이용되어 직접 빛을 투과하므로 색의 미적효과를 더욱 신비롭게 유발하게 되면서 오늘날의 스테인드글라스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스테인드글라스는 항상 건축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이루어져왔기 때문에 건축의 변화에 따라 스테인드글라스의 형태도 함께 변화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기법적인 변천과 함께 스테인드글라스는 완전히 그리스도교 미술에 접목되었다. 현재 가장 오래된 스테인드글라스는 옛 프랑스 알사스 지방에 있는 스트라스부르그의 대성당 박물관에 소장되어있는 예수의 얼굴이다. 이것은 단순하게 양식화 되어 있는데 당시 스테인드글라스는 교회건축에서 적극적으로 필요성이 요구되지 못한 것 같다. 당시는 유리의 제조방법이 규사에 목탄을 섞어 만드는 극히 초보적인 단계였기 때문에 면이 고르지 못한 유리에 그려져 있고 여기에 그려진 예수의 얼굴은 초보적 단계인 ‘트레이스(Trace)’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11세기경 독일 아우구스부르그(Augus-burg) 대성당의 일창형식 속에 성인상은 완전한 스테인드글라스의 최초라고 할 수 있다. 즉 로마네스크 건축시기에 이르러서야 완전한 스테인드글라스가 나타났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본래의 스테인드글라스가 단순한 모자이크가 아닌 그라스페인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스테인드글라스는 건축의 일부에 회화공간을 지니고 성서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교훈과 인물들을 주제로 하여 문맹한 당시의 신자들에게 ‘보이는 성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고, 거대한 교회 내부에 신앙의 신비를 한층 더 고조시키면서 보다 깊은 신앙심을 지니게 하는 등의 역할을 수행해왔다.
 
 
 
2. 초기(~1280년경)
 
스테인드글라스의 역사에 있어 초기는 주로 로마네스크 시대이다. 이 시대는 스테인드글라스가 아직 교회건축 공간에 절대적으로 그 필요성이 요구되지 않던 시대로 보이는데, 예수 두상의 스테인드글라스 출현에서부터 1280년 이전의 모든 스테인드글라스를 총괄하는 시기이다.
 
이처럼 스테인드글라스가 오랜 시기를 더듬어 내려감을 알 수 있으나 최초의 실례로는 약 1150년대로 제작에 추정되는 알사스 위센버그에 있는 성 드니(St. De-nys)의 작품이다. 애비교회(Abbey church of Wissenbourg : Alsace)에 예수의 얼굴을 주제로 제작된 이 작품은 현재 노틀담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매우 단순하게 디자인되어 있다.
 
초기에 그려진 스테인드글라스는 거의가 채색유리나 무채색 유리(white glass)로 구성되어 있다. 채색유리 창문은 대개 사실화에 치우쳐 있고 무채색 창문은 일정한 도안식 형태이다. 두 가지 모두 넓게 채색된 가장자리에 둘러싸 있다.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채색된 인물들은 머리는 크고 몸은 여위었는데 다소 비례에 어긋나 어색한 인체묘사일 뿐만 아니라, 긴 옷은 상당히 많은 옷주름에 잡혀 있다. 인물 형태를 그린 묘사는 약간 유치함 다소 자연스럽지 못하다. 이러한 창문에 있어서 인물들은 배경에서 두드러지는 경향이 있다. 이는 배경보다 인물의 크기가 비례적으로 크기 때문이다. 이처럼 초기 시대의 스테인드글라스는 모자이크 장식에 치우친 로마네스크의 건축 장식방법에 눌리어 그리 많지 않지만, 주로 어두컴컴한 실내를 오색찬란한 빛으로 아름답고 신비스럽게 할 수 있었고, 그림의 주제가 ‘보이는 성서’의 역할을 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3. 중기(1280~1380년경)
 
(1) 장식형시대(1280년경~1380년경)
 
로마네스크의 건축은 점점 완숙 단계에 접어들면서 또 하나의 건축양식을 낳게 되었는데 이것이 곧 고딕건축이다. 시대적으로 교회는 더욱 대규모적으로 전개되어 종교의 신성화를 강조하게 되면서 스테인드글라스는 고딕건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소위 장식형(Decorated Style)이라고 하는 스테인드글라스가 한동안 지속되었는데 이 시기는 1280년경부터 약 100년간 이어졌다.
 
그 명칭이 가리키듯이 주요 요소는 장식적인 추구였다. 건물의 내부를 꾸미기 위하여 특수하게 자연적인 대상물이 관련되어 있다. 이 시기의 작가는 나뭇잎과 나뭇잎들이 엉켜있는 모양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이전에 행하여진 평이하고 저차원적인 유리회화(glass painting)방법과는 대조적으로 흐르면서 매우 장식적인 방법으로 그것들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가장자리는 문양적인 테두리로 무채색 유리에 대하여 장식적인 도안이 반복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이 시대 후반부터는 질산은(Silver stain)이 사용되기 시작하여 스테인드글라스의 효과에 융통성이 있는 짙은 레몬색을 제공하고 있다. 이것은 이전의 장식형은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장대함에다가 명쾌함과 화려함을 가중시켰는데 이러한 창문은 채색된 유리에 산재되어 있는 무채색유리의 조화로운 개입으로 오히려 차가운 색을 띠려는 경향이 있다. 이로서 질산은의 대두는 나타나자마자 기술적으로 급격히 퍼지면서 오늘날과 같이 유리의 뒷면에 적용, 거울로 응용케 되었다. 질산은 용제로는 식초보다는 물이 더 좋은 용액이었으며 아주 두껍게 사용되어 1/16인치에 상당하는 농도로 착색하고 있다.
 
이와 같은 장식형시기는 하나의 기적처럼 놀라운 것이었다. 초기 고딕건축양식은 궁중양식을 빌어 발전하여 신앙을 상징하고 신앙의 표현이 가장 광범위하게 전개된 시기라 볼 수 있으며 이러한 기초로 스테인드글라스는 완숙되어 역사적으로 아름다운 것을 창출케 되었다. 그중 색채의 배열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었으며 작은 부분에서 커다란 부분에 이르기까지 상호작용을 완전히 파악한 상태에서 제작되었다. 그림의 소묘는 놀라운 묘사를 하고 있으며 잘린 유리의 배열과 선은 매우 잘 조화를 이루어 강한 색채와 더불어 빛의 신비를 보여주게 되었다.
 
 
(2) 수직형 시대 (14세기~15세기 초)
 
스테인드글라스의 입장에서 고딕건축의 또 다른 특성은 로마네스크의 건축에 비하여 창틀을 매우 길고 넓게 하여 외부로부터 많은 빛을 받아들이게 한 점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건축양식에 부응하여 수직적인 스테인드글라스의 형태를 낳게 하였다.
 
수직형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장식적인 기법은 매우 독특한 방법으로 인물화에서는 민감한 음양의 묘사를 하였고 색깔 선택 감각뿐만 아니라 묘사하는데 있어 아주 세밀한 추구와 주의력을 보여주고 있다. 도한 장식들을 매우 정교하였으며 수직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시 말해서 수직형 스테인드글라스는 장식형에 비해 보다 정교하였고 아름답기도 더 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창문의 상당수는 멀리서는 잘 알아볼 수 없는 형태를 지니게 되었다. 너무 세심한 묘법은 수직형 시대의 특성이지만 이 시대에 인물의 음양표현에서는 살색으로 채색된 유리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며 약간 핑크빛이거나 흰빛을 띠었는데 이는 15세기 스테인드글라스 기술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기법이 되었다. 점차적으로 인물화에서 살갗 부분이 붉은색조로 채색되어 색채가 더욱 진보하게 된 시기였으며, 명암법이 두드러지게 표현되면서 배경보다는 인물묘사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시기였다.
 
명암법은 16세기에 주로 이용되었지만 이 시기에는 대담하고 강렬한 감각을 제공하였고 특히 유리를 통한 빛의 전달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명암법의 효과를 증가시키기 위해서 유리 양쪽 면을 이용하여 음양을 두렷이 하는데 노력하여 색채를 더욱 화려하게 나타냈다.
 
 
 
4. 전성기 (고딕 중기~르네상스)
 
이탈리아의 로마네스크를 거쳐 프랑스의 고딕시대로부터 스테인드글라스는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그 후 프랑스, 영국, 독일, 스페인의 종교의 번창과 발을 맞춰 이후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황금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특히 친퀘 첸토(Ci-nque Cento)기간에 더욱 스테인드글라스의 진가를 보여줌으로서 친퀘 첸토 양식이라는 새로운 형태를 창출하게 되었다.
 
이러한 추구로 해서 유리를 투명한 채로 남겨두어 빛과 그림자의 급속한 변화, 그리고 색채의 환상적인 전시를 만끽하게 되었고 그 후 스테인드글라스 작가들은 음양을 준 색채의 배열에 있어서 색소를 덧칠할 필요가 없는 유리를 개발하게 되었다. 이 당시에 뛰어난 감각을 지닌 거장들에 의하여 유리의 다양한 색소의 개발과 유리의 기술적 보완이 이루어졌다. 안트크글라스(antique glass)에서 점차 케세드랄글라스(cathedral glass)를 만들어 줄무늬나 물결모양이나 오돌오돌한 유리를 만들어 유리에 색채의 섬광이 더욱 대담하고 민감하며 다양한 색채의 파생을 보여주게 되었다.
 
당시의 작가들의 노력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전통적인 기틀로 토착화되어 연구 개발되고 있다. 따라서 색유리의 선택이 가능케 되었으며 재료의 개발로 그 표면에서 변화되는 더욱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의 황금시대를 가지게 되었다. 이때에 색채의 배열은 다른 시대에서 볼 수 없는 기술적인 외적형태의 완벽한 내적으로 충만한 주제가 서로 연결된 창과 기둥사이의 교회 내부공간에서 신,구약성서의 주제로 인간 최고의 예술작품을 만들고 있다.
 
또한 스테인드글라스의 심벌이라 일컫는 장미창에서 보여주는 찬란한 색채의 배열은 완벽에 가까운 원색의 퍼레이드와 같이 스테인드글라스의 선과 색유리의 색채가 만들어낸 아름다움을 집약시키는 독특한 형태로 그 진수를 보이게 되었고, 원색 유리의 등장으로 일률성 있는 색의 변화를 만들면서 황금시대를 이루게 되었다.
 
 
 
5. 쇠퇴기 (르네상스 말 이후)
 
르네상스 이후(16C 말 ~ 17C 초)에 이르러 무엇이 스테인드글라스를 쇠퇴시켰는지 그 원인을 명확히 결정지을 수 없다.
 
따라서 사람마다 약간의 서로 다른 견해차이가 있겠지만, 그 첫째 이유는 16세기 중반에 발견된 에나멜(enamel)이 스테인드글라스에서 남용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에나멜 색들은 일종의 색깔이 있는 색소였기 때문에 대체로 민유리(white glass)에만 주로 사용되었다. 에나멜 색들은 보통 엷고 강렬하지 못하였기에 얼마 되지 않아 색이 바라거나 퇴색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 시대의 일부 작가들은 에나멜로 훌륭한 작품을 제작하기도 하였지만, 대체로 어려운 유리 끼우기 과정을 피하기 위하여 에나멜로 칠해버리거나 투명조각을 감추려고 스테인드글라스와 에나멜그라스(enamel glass) 조각들을 혼합하여 제작하므로 스테인드글라스를 매우 탁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만일 그 표면을 가로질러 부분적으로 에나멜로 채색된 투명한 유리조각이있다면 그곳을 싸고 있는 다른 색유리보다 더 흐리게 보일 것이다. 반면에 에나멜은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의 색조를 한층 고조시키는 데에도 종종 이용되었다. 대체로 진품의 스테인드글라스 색소 에다가 에나멜 색소(enamel paints)를 혼합하여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분간하기 어려운 작품을 제작하였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빛에 변색되어 그 진가는 떨어지게 되었다.
 
둘째로는 고딕 건축양식이 르네상스 이후에도 간간이 교회건축에 나타났으나 스테인드글라스는 시대사조에 따라 예술적인 차원보다는 기술적인 묘사에 치우치다가 마침내는 색상의 기본 배열이 없어진 때문이다. 더구나 건축양식은 스테인드글라스가 필요 없는 형태로 변모하면서 유화(oil painting)라는 묘사기법과 벽화가 발달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건물 내부에는 성서의 강령이나 역사적인 사실들을 스테인드글라스가 아닌 벽화로 대체되게 했었다.
 
셋째로 유화로 그리는 벽화의 발달로 인하여 스테인드글라스는 작업상 많은 시간을 요구한다는 불편함을 느끼게 되었다. 원개지붕 천정에 사실감 넘치는 성서의 묘사와 화려한 장식이 벽화기법으로 치장되므로 스테인드글라스는 더욱 쇠퇴하게 되었고 참다운 스테인드글라스는 점점 사라져 가게 되었다. 도한 전쟁의 불씨가 곳곳에서 서서히 일기 시작하여 많은 기존 교회건물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상당수가 파괴되었다. 건축은 창문을 요구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연속되는 전쟁과 경제의 궁핍, 종교의 개혁으로 스테인드글라스는 갈수록 쇠퇴, 그 명분만 유지하게 되었다.
 
 
 
6. 현대의 스테인드글라스
 
(1) 스테인드글라스의 부흥
 
쇠퇴기 이후 300여 년 동안 모든 사회 여건 속에서 수난을 격어 침체하였던 스테인드글라스는 20세기 초에 이르러 회생되기 시작했다. 예전의 숨겨진 진가가 새롭게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역시 현대건축에 힘입은 바 크다.
 
독일 바우하우스의 신조형운동이 전통과 인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조형의 본질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이후 현대건축은 새로운 공간과 형체를 자유롭게 구축하게 되었다. 이에 부응하여 스테인드글라스는 새로운 의미로 현대미술 속에 접목되어 교회건축 뿐만 아니라 공공건물에서도 이용되는 현상을 가져오게 되었으며 동시에 현대 화가들도 스테인드글라스를 받아들여 적극 이용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화가들이 그들의 작품을 보다 영구적으로 보관하려는 욕망과 색유리의 색채의 신비에 매료되어 스테인드글라스에 적극 참여함으로서 서서히 전통에서 벗어나 무한한 조형성을 지닌 예술형태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특히 화가 샤갈(M. Chagall)은 그의 회화작품을 그대로 스테인드글라스로 표현해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또한 빌거(M. Bilger)는 오스트리아가 낳은 최고의 유리그림 작가로 등장하였고, 루오(G. Ro-uault), 브라크(G. Braque), 레제(F. Leger) 같은 화가들도 스테인드글라스의 방식을 통해 자기의 작품을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많은 대가들의 참여로 현대 스테인드글라스는 더욱 부흥케 되었고 독일에서 ‘글래스마하라이’ 즉 ‘유리그림작가’라는 말이 생기는 동기가 되었다. 도한 유리의 기술은 건축의 발달과 현대 물질문명의 발달에 병행하여 많은 스테인드글라스의 재료와 공구들이 진보하게 되었는데 이와 같은 새로운 재료와 기술은 전통적인 방법에서는 해결할 수 없던 문제를 해결하므로써 보다 자유롭고도 추상적은 스테인드글라스를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면 평판유리에서 탈피하여 보다 깊고 두꺼운 유리를 제작, 사용하게 되었으며 기교적인 방법(faceted gless)으로 보다 많은 빛의 굴절현상을 일으켜 더욱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를 창출하여 현대 건축과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
 
이와 같은 유리의 개발로 스테인드글라스는 다른 시각예술 등 순수미술과 함께 물질문명 속에서 잃어버린 빛을 갈망하는 현대인의 마음을 사로잡아 새로운 빛의 신비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2) 티파니(Tiffany)의 개혁
 
티파니(Louis C. Tiffany)는 그의 동업자인 하지(John Harge)와 1918년 뉴욕에서 스테인드글라스 사업을 시작하면서 최초로 유백색유리(opalesents)를 개발하였다. 이 유리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모든 스테인드글라스가 자연채광 뿐만 아니라 인공조명가지 이용할 수 있는 스테인드글라스로 변모하게 했다는 의미가 중요하다. 다시 말하여 전통적인 스테인드글라스를 실외적(室外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더불어 유백색 유리가 지니는 오묘한 빛으로 더욱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가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그는 여러 가지 색채를 하나의 유리 속에 넣어서 유백화시킴으로써 그가 제작한 스테인드글라스 창은 종래의 그것보다 더욱 순수한 표현이라고 주장하였다. 그가 처음으로 유백색 유리 개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7, 18세기의 에나멜 화법에 따른 스테인드글라스에서 발견되는 뿌연 중세기 창문에서였다. 스테인드글라스를 ‘대중을 위한 미의 창조’라고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대중보다는 부유층의 취향을 따른 것이라고 도외시 당하였다. 오늘날 스테인드글라스 부흥에 영웅적 역할을 한 그도 애초에서부터 거기에 흥미를 갖고 출발하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순수예술을 공부하는 족을 택해 유화를 공부하였다. 그러다 북아프리카와 스페인 등을 여행한 뒤 중세의 스테인드글라스에 탐닉하게 되었고 연구하게 되었다. 당시의 빨강 파랑 등의 색상들이 지나치게 어둡다고 느껴지자 이에 착안 유백색유리의 개발에 힘을 쏟았다. 최초의 실내장식에 손을 대면서 그는 ‘장식예술은 순수예술 보다 대중에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일용품을 아름답게 하는데 재능을 쏟는 예술가는 진실한 의미에서 만인의 교육자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1882년 그는 백악관을 장식하는데 초대되었으나 불행히도 그가 만든 백악관의 커다란 유백색 유리 스크린이 20년 후에 루즈벨트 대통령의 편애로 없어지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명성은 점점 높아지게 되었지만 그에 만족치 않고 오스카 와일드의 영향을 받아 뉴욕 루시앙극장에 스테인드글라스를 제작하기에 이르러 뉴욕저널에서 마침내 초미학적이라는 극찬을 받으면서 그의 명성은 정상에 달하였다. 그 후 1889년 파리의 미술상들에 의하여 그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유럽가지도 전래되며 인정받게 되었다. 또한 1892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에 수천의 유백색 유리조각으로 제작한 교회에서부터 1900년 후 art glass와 favrile glass까지도 새로운 개혁을 이루게 되었으며, 1971년 멕시코의 국립극장을 만들면서 더욱 새로운 극면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 티파니의 새로운 개혁은 유백색 유리(opalesents glass)로 만든 일용품인 티파니 조명등(Tiffany lamp shade)이다. 이 공예작품으로 인해 프랑스의 비평가이자 화상인 사무엘 빙그로부터 ‘비단처럼 섬세하고 부드러운 가죽과 같다’는 극찬을 받았다.
 
그의 램프는 유백색 유리의 예술성을 최대한으로 살리고 있고, 또 거기에 아름다운 조각장식이 잘 조화되어 있는 예술품이다. 이것은 널리 보급되면서 한때 스테인드글라스가 티파니 램프인 것처럼 오인하는 경우까지 발생하였다. 그러나 그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점점 품귀현상을 빚어 대중과 멀어져 가다가 1933년 이후에는 거의 잊혀지게 되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 그의 작품은 재인정 받기 시작하여 60년대 이후에는 골동품처럼 고가에 이르렀고, 마침내는 그의 작품을 모방하는 유행이 나타났다. 티파니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오늘날 이처럼 널리 보급되어 건축창문에서 뿐 아니라 공예에 이르기까지 획기적인 개혁을 유발시키게 된 것이다.
 
(3) 스테인드글라스의 실험적 추구
 
20세기에 이르러 세계의 역사는 두 차례의 커다란 전쟁속에 휘말리어 많은 기존 작품들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 후 30여년이 지나면서 공업문명의 발달로 사람들은 빛에 더욱 갈증을 느끼게 되었다. 또한 현대건축은 밀폐된 공간에 충분한 빛을 요구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환경 때문에 유리는 더욱 개발되었고 스테인드글라스는 현대건축조형과 일치하는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현대 많은 작가들은 유리의 종류, 재료, 기법 등 새로운 문제를 해결하여 단순한 창문의 치장에 급급하던 전통적 방법에서 실험적 추구를 하기에 이르러 이제 스테인드글라스는 ‘보이는’스테인드글라스에서 ‘감상하는’스테인드글라스로 변모하게 되었다.
 
특히 미국에서는 20세기 초 티파니에 의한 스테인드글라스의 흥분이 가라앉으면서 1892년 착공한 뉴욕의 디바인 대성당과 워싱턴의 피에타 대성당은 전통적 방법에 의해 100여 년 동안 계속 축조되고 있지만 전통주의에 대응하는 로버트 켈만, 마크 아담스, 크리스틴 뉴튼 등의 작가는 대표적인 실험 작가로 알려져 있다.
 
(4) 동서양의 융합
 
스테인드글라스는 그리스도교를 바탕으로 한 서양의 종교미술로서 이어져 왔다. 이는 동양에서 불교미술의 탱화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그런데 스테인드글라스는 동양에 있어 그리스도교의 전래와 더불어 알려진 것이어서 우리들에게는 오랫동안 여러 가지로 인식이 결여된 상태로 이어져왔다.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명동성당의 증축으로 90여 년 전 처음으로 스테인드글라스가 나타났다. 그러나 아직까지 스테인드글라스 본연의 미적 가치는 파악되지 못한 상태라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일본의 경우는 스테인드글라스가 19세기 중엽에 도입되었지만 독자적인 유리공예의 개발을 이룩하게 되었다. 현대에는 특히 유리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직접 프랑스 작가에 의뢰하여 스테인드글라스 탑을 제작, 그것의 아름다운 본질을 보여주었다. 이는 대중들에게 그 미적 효과와 가치를 인식케 하여 서양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동양에 융합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일명 ‘무지개탑’이라 칭하는 이것은 현대 프랑스의 저명한 스테인드글라스 작가인 가브리엘 르와르(Gabriel Lo-ire)에 의해 제작되었다. 69피트의 이 탑은 하꼬네 미술관에 세워졌고 꽃, 눈, 별 곡예사의 유희, 초생달 아래의 연인, 4계절 등의 소재로 어린이의 환상과 꿈이 차례로 펼쳐지고 있다.
 
이처럼 스테인드글라스 예술의 본질을 보여줌으로서 그 가치를 인식하게 하였고 유리공예품의 새로운 개발과 스테인드글라스의 실생활 응용방법에서 많은 변화를 이루었다.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그 예술적 가치보다 지나치게 상업적인 측면에서 일반사람에 알려지고 보급되고 있는 듯 한 느낌이다. 그러나 스테인드글라스는 상업적인 수단이 아니고, 단순한 손재간도 아니며 오랜 전통을 지녀온 고귀한 예술임을 느껴야 한다. 또한 종교와 뿌리 깊게 접맥된 예술이기에 영구히 문화유산으로 존속되며 항상 대중에게 깊은 공감을 주는 예술로 승화되어야 할 것이다.
 
 
사진은 가실성당 스테인드글라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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