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9일 (일)
(홍) 성령 강림 대축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영성심리: 마음을 정화하다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05-02 ㅣ No.2024

[영성심리 칼럼] 마음을 정화하다

 

 

잘 아시는 것처럼, 복음서에 등장하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자주 꾸중을 듣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악하거나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들 모두 율법을 엄격히 해석하고 그대로 따라 살려고 애썼던 이들입니다. 이들의 삶의 중심에도 율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자꾸 그들을 꾸중하시고 비판하셨을까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도 하느님을 이야기하고 율법을, 거룩함을 이야기했지만, 율법의 근본정신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마태 22,40 참조)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아니, 몰랐다기보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참되게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부러 그랬던 것은 아닐 겁니다. ‘율법’, ‘거룩함’이라는 가치를 추구하고 있다고 스스로는 생각하고 믿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실제로는 ‘율법’이 아닌 윗자리에 앉거나 인사받는 것(루카 11,43 참조) 등의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속아 넘어가는 모습이죠.

 

얼마 전에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습니다. 선거 때가 되면 ‘보수’ ‘진보’ ‘우파’니 ‘좌파’니 하는 단어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정치 성향이나 이념에 따라 파가 나뉩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어느 쪽에 속해 있든 상관없이, 자신의 주장을 옹호하기 위해 ‘하느님’과 ‘복음’을 이야기한다는 겁니다. 같은 하느님이시고 같은 복음인데, 어떻게 서로 반대되는 의견을 뒷받침하는 똑같은 근거가 될 수 있을까요?

 

정치뿐만 아닙니다. 예를 들어, 본당에서 신자분들을 위한 사목 행사를 기획한다고 할 때, 주임 신부님과 부주임 신부님 두 분의 의견이 서로 다른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그런데 두 분 다 ‘신자들의 영적 선익’을 이야기하며,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사회 일도 마찬가지죠. 어떤 사람들은 교회 가르침에 따라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를 우선적으로 선택합니다. 하지만, 반대쪽에서는 이러한 선택이 분열을 일으킨다며, 분열보다 일치를 선택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같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서로 다른 것을 말합니다.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 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을 떠올려 보지만, 너무나 다양한 현실 상황들 안에서 답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또다시, 참된 영성으로 나아가기 위한 심리-마음의 문제입니다. 내가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가치만이 아니라, 그 가치를 바라는 내 마음 깊이에 무엇이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정말 그 가치를 추구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실 다른 것을 바라고 있는지, 묻고 찾을 일입니다. 그 과정에서 나의 어쩔 수 없는 사사로운 마음을 보게 된다면, 복음의 참된 가치로 다시 돌아가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 정화’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리 2,5)

 

[2024년 4월 28일(나해) 부활 제5주일 서울주보 7면, 민범식 안토니오 신부(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홍보국장)]



31 1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