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5일 (일)
(홍)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교의신학ㅣ교부학

[신학]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읽기: 그 자체로 악인 고통 안에서 선이 발견될 수 있는가?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5-20 ㅣ No.582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읽기] 그 자체로 악인 고통 안에서 선이 발견될 수 있는가?

 

 

코로나19가 우리나라 전체로 확산되기 전 일부 개신교 목회자는 설교를 통해 ‘질병은 신의 벌’이라고 공공연하게 주장했다. ‘신천지’는 중국 우한에서 자기 신도들이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서 ‘자신들은 신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라고 주장하다가 국민을 위험에 빠뜨렸다.

 

이런 주장 뒤에는 고통에 대한 왜곡된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고통은 신의 벌, 또는 신이 의인을 시험하거나 교육하려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의 역사는 매우 길지만, 근대에 들어서면서 ‘변신론’(辯神論)으로 발전했다.

 

근대 철학자 라이프니츠는 악 없이 선이 존재할 수 없고 악을 거쳐 선이 증가하며 전체의 조화를 위해 악 자체는 좋은 의미를 지닌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그는 가장 완전한 존재로서의 신은 가능한 최선의 세계를 선택했다는 극단적인 낙관론을 펼쳤다.

 

이와 대조적으로 현대에는, 고통이야말로 악이며 극복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나갔다. 그렇다면 인간의 고통은 일부 극단적인 주장처럼 선이거나 과학의 발전을 통해서 사라지도록 해야 할 악일까?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질문에 올바로 답변하려면 악과 고통을 다양한 차원으로 구분해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퀴나스가 고통과 슬픔의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그 자체로 악인 고통에 대한 정당한 저항

 

아퀴나스는 고통에 대한 논의를 정리하는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에서 이 질문을 다룬다(I-II,39). 그는 그 대상이 선하거나 악한지를 판단하고자 먼저 ‘그 자체로’와 ‘다른 조건 아래에서’라는 구분을 기준으로 삼는다. 아퀴나스는 ‘그 자체로’ 바라본다면 ‘모든 고통은 악’이라고 주장한다. 아무 조건 없이 고통을 바라본다면 욕구가 선 안에 머무르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퀴나스의 판단은 라이프니츠식의 변신론적 주장이 설 자리를 없애는 셈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주장이 현대의 경향처럼 고통을 무조건 없애버려야만 하는 악이라는 결론으로 이끌지는 않는다. 토마스는 ‘어떤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는’ 고통이나 슬픔도 선이 될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 악인 고통이 선이 될 수 있는 조건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토마스는 수치스러운 어떤 일이 이미 벌어졌다는 전체 아래에서 ‘부끄러움’은 선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어떤 슬프거나 고통스러운 일이 전제되고, 어떤 이가 현존하는 악에 대해서 슬퍼하거나 고통스러워한다는 사실은 선한 일이다. … 따라서 악이 현존한다는 것이 전제된다면 슬픔이나 고통이 따라오는 것은 선한 일에 속한다”(I-II,39,1).

 

 

고통이 선이 될 수 있는 제한적 조건

 

아퀴나스는 이런 결론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 ‘선하다’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탐구해 들어간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일반적으로는 욕구의 종점을 선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욕구가 도달하고자 하는 최종 목적으로서의 선인 ‘윤리적 선’, 사람들이 욕구하는 목적에 도달하는 길인 ‘유익한 선’, 동일한 최종 목적이 우리가 그것을 조용히 즐긴다는 점에서 가리키는 ‘편안한 선’을 구분해야 한다(I-II,39,2-3).

 

이런 구분에 따르면 선에는 특정한 위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윤리적 선만 본디부터 선이고, 다른 두 선은 유비적인 의미에서만 그렇다.

 

이러한 구분을 앞서 언급된 ‘고통은 그 자체로 악’이라는 주장과 연결시키면 고통이나 슬픔은 윤리적 선일 수 없이 보인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슬픔도 악에 대한 인식과 거부를 포함하는 한에서 윤리적 선일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예컨대 육체적 고통의 경우, 위험하고 고통을 일으키는 것을 본성이 피하기 때문에 이를 통해 본성이 지닌 선성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내적 슬픔의 경우, 악에 관한 인식과 거부는 이성의 정확한 판단과 습관적 선성의 의지 때문이다. 그런데 모든 윤리적 선은 이성과 의지의 올바름에 달렸기 때문에, 슬픔도 윤리적 선이라는 성격을 지닐 수 있다(I-II,39,2). 그 자체로 악으로 규정된 슬픔조차 조건에 따라 윤리적 선이 될 수 있다면, 다른 선에 도달하고자 하는 유익한 선, 곧 도구적 선이 될 가능성은 훨씬 높아 보인다(I-II,39,3).

 

서구 사상사 안에서 죄에 대한 처벌, 사회 안정성 유지 등으로 고통의 도구적인 유용성을 인정하려는 해석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아퀴나스는 어떤 이유로 고통이나 슬픔이 도구적 선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그에 따르면, 먼저 죄와 같이 피해야만 하는 악에 대한 슬픔이라면 유용하다. 한 사물은 그 자체로 악이 아니지만 악의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피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이 세상 사물이 지닌 일시적 좋음에 대한 슬픔은 유용할 수 있다. 또 피해야만 하는 어떤 것에 대한 슬픔은 그 악을 피하려는 노력을 강화시킬 수 있기에 유용하다.

 

 

최고 악이 아닌 고통

 

아퀴나스는 고통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하면서 ‘육체적 고통이 가장 큰 악인가?’ 하고 묻는다(I-II,39,4).

 

모든 것을 육체적인 고통으로 환원시키며 이로부터 인간의 삶 전체를 해명하고자 하는 일부 현대 철학자들과 달리 아퀴나스는 어떤 슬픔이나 고통도 인간에게 가장 큰 악일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모든 슬픔과 고통은 진정으로 악인 것이거나, 실제로는 선인데 악인 것처럼 보이는 어떤 것으로 말미암아 생겨난다.

 

그에 따르면 이 두 가지 경우 모두 그것에 대한 슬픔은 가장 큰 악일 수 없다. 진정으로 악인 것에 대한 슬픔보다 실제 악인 것을 악이라고 판단하지 않거나 그것을 거부하지 않는 것이 더 나쁘기 때문이다. 선인데 악인 듯 보이는 것에 대한 슬픔보다 진정한 선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아무런 슬픔조차 느끼지 못하는 지경이 가장 큰 악이다(I-II,39,4).

 

 

고통이 담은 초월성의 발견

 

토마스 아퀴나스의 구분을 통해 드러나듯, 세상의 악이나 이를 통해 생겨나는 인간의 고통은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현상이 아니라 하나의 신비라고 보는 편이 옳을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는 작업을 포기할 수는 없다. 니체의 말처럼 ‘무의미한 고통이야말로 가장 참혹한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고통받는 이들에게 신의 섭리를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무조건 신을 옹호하는 것은, 자칫 그들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킬 위험이 있다. 따라서 그 고통받는 이가 한탄이나 질문을 통해 표현하려는 불확실성과 부당함을 함께 견뎌냄으로써, 그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는 대답을 찾아내도록 도와주는 것이 더 낫다.

 

아퀴나스는 “친구들의 공감이 고통을 완화시켜 준다.”고 강조한다(I-II,38,3). 물론 이 경우에도 고통의 심오한 의미가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내적으로 수용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또한 고통을 통해서 인간이 지닌 초월성이 드러나고, 신을 만나는 기회가 주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더라도, 이를 과장해서 미래의 행복을 근거로 고통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쳐서는 안 된다. 고통은 ‘그 자체로 악’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 고통이 유용하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인간의 유한성에 뿌리를 둔 더는 극복될 수 없는 고통과, 인간의 이기심과 악의로 말미암아 빚어지는 고통을 구분해야 한다.

 

우리는 이런 인간이 발생시킨 고통을 없애고자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서, 지상에서 서로의 생명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를 건설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고통받는 이들을 만났을 때, 이들을 단순히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고 그들을 구해 달라고 신에게 간청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우리 스스로 그들의 불필요한 고통을 제거하려는 ‘신의 손’이 되고자 노력해야 한다.

 

* 박승찬 엘리야 - 가톨릭대학교 철학 전공 교수. 김수환추기경연구소장을 맡으며 한국가톨릭철학회 회장으로 활동한다. 라틴어 중세 철학 원전에 담긴 보화를 번역과 연구를 통해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다양한 강연과 방송을 통해 그리스도교 문화의 소중함을 널리 알린다. 한국중세철학회 회장을 지냈다.

 

[경향잡지, 2020년 5월호, 박승찬 엘리야]



159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