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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영화 속 인간과 세상: 영화 조용한 열정 - 시가 삶이고 신앙인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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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5-06 ㅣ No.1097

[영화 속 인간과 세상] 영화 ‘조용한 열정’


시가 삶이고 신앙인 여자

 

 

드라마, 2017.11.23.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125분, 감독 테렌스 데이비스.

 

 

그녀는 세상이 자신을 기억하지 않고 지나가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시가 편지이고, 신앙인 여자. 그래서 삶이 그 속에 고스란히 스며있지만 그것이 시라고. 자신이 ‘시인’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시는 “이것은 한 번도 답장하지 않는/ 세상에게 보내는 나의 편지/ 자연의 부드러운 당당함으로/ 전해주는 소박한 소식”일 뿐이다.

 

평생을 고향 집에 머물며 세상과 결별한 채 은둔자로 살아간 에밀리 디킨슨은 그 세월 속에 켜켜이 쌓인 영혼의 울림과 감정, 자연과 신,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을 독백으로 남겼다. 그녀는 혼자이면서도 혼자이지 않았고, 엄격한 청교도 집안에서 자랐으면서도 자유로웠으며, 실연과 고통 속에서도 평화와 안식을 발견했으며, 죽음 앞에서 영원을 믿었다.

 

그녀는 세상이 자신을 기억하지 않고 지나가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난 아무도 아녜요. 당신은 누구인가요. 당신도 아무도 아닌가요. 그럼 우린 같은 처지인가요. 입 다물고 있어요, 사람들이 소문낼지 모르니까. – 아시다시피. 정말 끔찍해요, 유명인이 된다는 건 정말 요란해요, 개구리처럼 긴긴 6월에 존경심 가득한 늪을 향해 개골개골 제 이름 외쳐대는” 것이 싫어서.

 

그러나 소망과 달리 에밀리 디킨슨은 19세기의 ‘유명인’이 됐다. 그녀의 시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외로움과 고통, 어떤 사람들에게는 생에 대한 관조와 체념, 어떤 사람들에게는 저항과 희망, 어떤 사람들에게는 애잔한 슬픔과 실존적 깨달음이 됐다. 시란 이런 것이다. 때론 수많은 이야기나 긴 설명보다 더 생생하게 각자의 삶과 느낌이 된다.

 

짧지만 깊고,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하고, 아름다우면서도 소박하고, 따뜻하면서도 지적인 1,775개 독백 가운데 생전에 세상에 발표한 단 7개를 빼고 모두 그녀가 묘비명에 썼듯 하늘나라로 “불려 가고(called back)” 69년이 지나서야 혹시나 세상이 자신을 기억하려 한다면 “나도 후하게 판단해 주길” 바라는 그녀의 소망대로 사람들의 영혼을 일깨우는 시가 됐다.

 

우리 누구도 그녀의 마음과 생각과 느낌의 ‘실체’를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녀는 “고독은 잴 수 없는” 것이며, 그 크기는 “그 파멸의 무덤에 들어가서 재는 대로 추측할 뿐”이라고 했다. 그러니 우리도 미루어, 그녀의 시어들이 가진 상징을 통해 짐작할 뿐이다. 아니면 그것들을 나의 영혼과 가슴속으로 끌어들여 ‘나의 시’를 만들 뿐이다. 소설가 김훈은 “시를 읽을 때 내 마음은 시행을 이루는 언어와 그 언어 너머의 시적 실체 사이에서 표류한다.”고 했다. 그러다가 도착하는 것은 결국 나의 마음이다. 더구나 그 시가 한 번도 자신을 드러내거나 설명하지 않은 한 여자의 평생을 기록한 ‘내면의 성찰’이라면.

 

1830년 12월 미국 매사추세츠 애머스트에서 태어나 56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에밀리 디킨슨을 따라다닌 것은 이별과 고독, 질병의 고통과 시련이었다. 사랑에 눈 뜰 즈음 찾아온 시력 상실, 종교문제, 정치인인 아버지와의 가치관 차이, 늘 아픈 어머니를 돌봐야 하는 책임감, 아끼던 사람들과의 이별과 그들의 죽음, 말년에 찾아온 악성 신장염은 그녀를 세상보다는 자아 탐색의 은둔자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압축된 언어로 솔직하게 표현했다.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인데도 “그 사랑을 자기 그릇만큼 밖에 담지 못함”을 애달파했다. 혼자 걷다 “세상 출세랑 아랑곳없고, 급한 일 일어날까 두려움 없이 혼자 살며, 홀로 빛나는 태양처럼 다른데 의지함 없이, 꾸미지 않고 소박하게 살며 하늘의 뜻을 온전히 따르는” 길 위에 뒹구는 작은 돌에게 행복을 발견하기도 했다.

 

육체와 정신의 고통, 고독과 “죽음을 위해 멈출 수 없는” 시간 속에서 그녀가 원한 삶은 무엇이었을까. “만약 내가 한 사람의 가슴앓이를 멈추게 할 수 있다면, 누군가의 아픔을 덜어줄 수 있다면, 지친 새 한 마리 둥지로 돌아가도록 도와줄 수 있다면, 헛되이 사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 작은 도움이야말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소중하면서도 아름다운 사명일 아닐까. 그녀가 말하는 “영혼의 횃대 위를 날아다니며 결코 멈추는 법이 없는 날개 달린 희망”이 아닐까.

 

그런 마음이 용기와 자유, 열정과 순수를 준 것일까. 그녀가 매일 하나씩 쓴 시는 어떤 형식이나 관습, 대상에 구애받지 않았고, 거침이 없었다. 타고난 감성과 언어표현 감각은 간결하면서 지적인 이미지를 낳았고, 19세기와 20세기의 문학적 감수성을 연결하듯 추상적 사고와 구체적 사물을 섬세하게 결합시켰다.

 

그녀에게서는 “구별할 줄 아는 눈으로 보면, 깊은 광기는 가장 신성한 감각”이며 “깊은 감각은 순전한 광기”였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항상 그렇듯이 여기에서 우세한 것은 다수이다. 동의하면 제정신이지만 반대하면 즉각 위험한 존재가 되어 쇠사슬을 차게 된다.”는 것을. 그럼에도 그녀는 스스로 쇠사슬을 차고, 자신의 영혼은 있을 곳을 선택했다.

 

그녀를 가장 온전히 만나는 것, 누구로부터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는 그녀의 시를 읽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신시아 닉슨 주연의 영화 <조용한 열정>도 ‘시’이기를 원했다. 테렌스 데이비스 감독은 에밀리 디킨슨의 삶을 담으면서, 극적 흥미를 위한 ‘스토리’도 ‘대사’도 애써 만들지 않았다. 소녀시절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순간순간들을 그녀의 시로 압축했다. 마치 영상시집을 만들려는 것처럼.

 

연기와 대사가 아닌, 이미지와 내레이션(시)으로 빚어낸 애밀리 디킨슨의 삶과 감정이 어떤 묘사보다 명징하게 다가온다. 진실이란 때론 수많은 말보다 한 컷의 영상, 한 줄의 시에 얼마든지 담을 수 있다. 그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고, 영화는 대중예술이니까 그래서는 안 된다고 탓할 이유는 없다.

 

따사로운 햇살이 비치는 창가에서 밖을 내다보는 에밀리 디킨슨을 영화 <조용한 열정>는 시로 이렇게 말한다. “모든 황홀한 순간엔 고통이 대가로 따른다/ 황홀한 만큼 날카롭고 떨리도록” 살다간 영혼의 여인이었다고. 이보다 더 맑고 날카롭게 통찰이 있을까. “가을에 그대 오신다면 여름은 훌훌 털어버릴래요. 일 년 뒤 그대 오신다면 각 달을 공처럼 말아 서랍에 넣을래요.”보다 사랑의 감정을 솔직하고 직관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대사가 있을까.

 

<조용한 열정>에서 새벽녘까지 혼자 시를 쓰고 있던 에밀리 디킨슨에게 오빠의 아내가 찾아와 말한다. “너에겐 시가 있잖아.” 그렇다. 그녀에겐 삶이 되고, 역사가 되고, 신앙이 되고, 그리고 마침내 영화가 되어 우리의 영혼을 다시 한 번 울린 시가 있었다.

 

[평신도, 2017년 겨울호(VOL.58), 이대현 요나(국민대 겸임교수 ·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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