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 (금)
(백)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사목신학ㅣ사회사목

[문화사목] 영화 속 신앙 찾기: 문 열기 마음 열기 - 언노운 걸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7-21 ㅣ No.1020

[영화 속 신앙 찾기] 문 열기 마음 열기 - 언노운 걸

 

 

만일 낯선 누군가가 급하게, 애타게 당신의 문을 두드린다면? 그것도 하루 일이 끝난 시간이거나 한밤중이고, 그 문이 당신이 사는 집이거나 당신의 가게, 또는 당신이 일하는 곳이라면?

 

무조건 문을 열어 주기는 힘들다, 무엇보다 안전을 위해. 그런데 만일 당신이 인터폰 영상을 통해 적어도 그가 당신을 해치거나 무엇을 빼앗아 갈 사람이 아니라, 직업상 당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이라고 한눈에 짐작했다면, 그때는 문을 열어 줄 수 있지 않을까?

 

벨기에 리에주의 빈민가, 간호사도 없는 작은 진료소에서 임시로 근무하는 여의사 제니(아델 하에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진료 시간을 한 시간이나 넘긴 저녁 8시 5분에 흑인 소녀 하나가 다급히 인터폰을 누르며 문을 두드리는 것을 무시했다. 자신을 돕는 인턴이 문을 열어주려고 하자 ‘감히 인턴 주제에’라는 생각에 그것을 가로막았다.

 

진료 시간이 지난 뒤에 찾아온 발작을 일으킨 한 소년 브라이언의 응급 처치를 하느라 정신없기도 했지만, 순간적으로 자기 오만과 ‘갑질’에 빠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늦게 오면 의사는 쉬지도 말란 말이야. 환자에게 휘둘리지 마. 흔들리지 마. 급하면 벨을 한 번 더 누르겠지.”

 

평소에 제니는 이런 의사가 아니었다. 비록 석 달 동안 대리로 맡은 진료소 의사였지만 누구보다 가난하거나 외로운 사람을 성의껏 치료했고,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이 시도 때도 없이 불러도 불평 없이 집에까지 찾아가 보살폈다. 발바닥이 아픈 당뇨 환자를 대신해 복지국에 전화해 복지 카드를 충전해 주고, 공사장에서 다리를 다친 환자가 불법 체류자인 줄 알면서도 아무런 선입견이나 차별 없이 치료해 준다. 한 소년은 그녀의 따뜻한 치유의 손길을 잊지 못해 친구와 함께 ‘우리 동네 의사 선생님’이란 자작곡을 만들어 불러 주는 깜짝 이벤트까지 벌였다.

 

 

당신이라면 달랐을까

 

그날 밤 딱 한 번이었다. 하필이면 진료소에서의 근무를 하루 남긴 날이었고, 어느 때보다 그날은 늦게까지 환자가 많았으며, 그렇게 바라던 종합 병원인 케네디 센터에서 일하기로 결정된 날이었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경찰한테서 문을 두드린 그 소녀가 강가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는 얘기를 듣는다. 신은 그녀에게 단 한 번의 외면과 무심함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묻는다. “너는 그 일에 아무런 잘못이 없느냐?”

 

세상이 만들어 놓은 틀로 보면 그녀는 아무 잘못이 없다. 진료 시간이 끝났기 때문에 문을 열어 주지 않았고, 그 소녀는 응급 환자도 아니었으며, 그녀가 치료해 주지 않아 죽은 것도 아니다. 전에 그녀에게 진료를 받은 환자도 아니다. 누구도 그녀에게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경찰조차도 ‘내가 문을 열어 주었으면 살았을 텐데.’ 하며 죄책감을 느끼는 그녀에게 “선생이 그 소녀를 죽인 건 아니지 않으냐.”며 떨쳐 버리라고 말한다. 그냥 지나가면 그만인 일이다. 다음 날 그곳을 떠나 큰 병원으로 출근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제니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하느님과 그녀의 양심은 그녀의 잘못을 묻고 있었다. 그날 밤 문을 열어 주었다면 죽음을 막을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는 죄책감에 그녀는 케네디 센터로 가는 것까지 포기한 채 누군지, 무엇 때문인지,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는 그 흑인 소녀의 행적을 찾아 나선다.

 

지나치게 감상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는 젊은 여의사 제니의 용기 있는 선택과 행동을 통해 벨기에의 다르덴 형제 감독의 영화 ‘언노운 걸’(The Unknown Girl)이 우리에게 보여 주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 모두가 일상 속에서 무심히 잊고 지나가거나, 그렇게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거나,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에 대한 성찰이다.

 

 

양심의 문을 열 때 

 

‘언노운 걸’에는 살인 사건도, 범인도 없다. 그냥 신원을 알 수 없는 소녀의 죽음이 있고, 다만 병원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양심의 가책과 죄책감에 시달리는 한 여의사가 있을 뿐이다. 어찌 보면 아무 일도 아니다.

 

그 아무 일도 아닌 것에서 ‘언노운 걸’은 우리의 부끄럽고 부조리한 현실을 날카롭게 드러내며, 가난하고 소외된 늙은 자들의 설움과 아픔을 위로한다. 그 아픔을 조금이나마 따뜻하게 감싸 안으려는 사람들의 용기와 양심에 박수를 보내고, 그 양심이 세상과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한다.

 

제니 또한 무슨 큰 사명감이나 신념에 사로잡혀 소녀의 죽음에 매달리는 것은 아니다. 그냥 자신의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양심이 움직이는 대로 갈 뿐이다. 그녀가 알고 싶은 것은 두 가지, 그 흑인 소녀가 누구이며 왜 죽어야만 했는 지다. 가족을 찾아서 그녀의 죽음을 알려주고 싶었다. 이름도 없이 그냥 임시 공동묘지에 묻히면 아무도 그녀의 존재나 죽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가족이 없다면, 진짜 이름으로 정식으로 묘지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녀에게 왜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일까? 성매매 강요로 그 흑인 소녀가 실족사를 하게 만든 남자(브라이언의 아버지)와의 대화가 답을 해 준다. 진실을 안 제니가 “경찰에 가서 모든 진실을 밝히라.”고 하자 “왜 내가 그래야 해.”라며 그는 거부한다. 그런 그에게 그녀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죽은 소녀가 지금 우리에게 (그렇게 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그러자 남자는 “죽으면 끝난 것이 아니냐?”라고 하고, 제니는 “끝난 것이 아니니까, 우리가 이렇게 괴롭지.”라고 답한다.

 

제니가 죽은 흑인 소녀의 정체와 죽음의 진실을 알아내는 과정이 쉽지 않다. 그렇다고 특별한 재능이나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처음 소녀의 시신을 발견한 공사장의 크레인 기사부터 브라이언의 아버지와 소녀의 언니라고 자신을 밝힌 이버 카페의 직원, 어린 소녀에게 성매매를 시킨 그 언니의 애인까지 만나 소녀의 사진을 보여 주고, 혹시라도 감추고 있는 진실이 있다면 말해 달라고 부탁할 뿐이다. 자신의 환자인 소년 브라이언이 아버지를 보호하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다그치지 않고 스스로 고백하기를 기다린다.

 

 

진실이 당신을 자유롭게 하리라

 

처음에는 제니의 그런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부끄러운 진실을 감추던 사람들이 하나둘 마음의 문을, 양심의 문을 연 이유는 결국 그녀와 같다. 비록 직접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제니가 말한 것처럼 ‘그 소녀의 죽음에 나도 잘못이 있다.’는 것을 고백함으로써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죄책감으로 잠도 못 자고, 그 아이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며 경찰에 전화하는 브라이언의 아버지나 질투 때문에 동생을 모른 척한 것을 눈물로 후회하는 소녀의 언니나 모두 제니와 같은 마음이다.

 

‘언노운 걸’은 이렇게 아프리카에서 온 불법 체류 흑인 소녀의 죽음과 그 진실을 밝혀내려는 여의사의 선택을 통해 우리 모두가 타인의 불행에 ‘공범’임을 일깨운다. 모르고 지나간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 모르는 죄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라도 늘 사랑과 도움의 ‘문’, 진실의 ‘문’을 열고 살아야 한다. 한순간 지나치는 잘못이라도 제니처럼 양심의 소리까지 외면하지 말고 각자 용기 있는 선택을 할 때 세상은 조금씩 더 아름답고 풍요로우며 건강해질 것이다. 그런 모습이야말로 주님 사랑의 실천이고, 주님께서 바라시는 세상일 것이다.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거장’이란 수식어를 가진 다르덴 형제는 ‘아들’, ‘더 차일드’ 등 작은 이야기로 유럽 사회의 현실과 부조리, 그 때문에 소외되고 아파하는 사람들을 생생하면서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 칸영화제에서 두 번이나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언노운 걸’ 또한 의도된 연출의 영화가 아닌 다큐멘터리처럼 제니의 진실 추적은 물론 진료와 생활을 자연스럽게 담았다. 그래서 더욱 가난한 동네 의사로 남아 외롭고 아픈 사람들의 친구와 이웃으로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 감명 깊고 부럽다. 우리 사회에도 고령화와 빈곤과 소외로 신음하는 사람이 곳곳에 있고, 그들은 늘 내 가족이나 친구처럼 돌봐 줄 의사를 간절히 원하고 있으니까.

 

제니가 진료소 대기실로 나와 팔순이 넘어 보이는 할머니의 가방을 들고는 부축해서 진료실로 들어간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 이대현 요나 - 영화 평론가로 국민대학교 언론정보학부 겸임 교수이다. 한국일보 문화부장과 논설위원을 지냈다. 저서로 「소설 속 영화, 영화 속 소설」, 「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가 있다.

 

[경향잡지, 2017년 7월호, 이대현 요나]



1,409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