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9일 (일)
(홍) 성령 강림 대축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강론자료

1102-위령의날-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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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3-10-31 ㅣ No.519

위령의 날 [1102] - 첫째미사

 

        욥기 19,1.23-27ㄴ         로마 5,5-11          마태오 5,1-12ㄱ

    2003. 11. 2.

주제 : 세상의 행복과 하느님의 선택

 

한 주간 안녕하셨습니까?

(오늘 날씨는 아니지만) 느낌만으로도 춥다고 생각할 11월에 들어선 첫 번째 주일입니다.  

몸과 더불어 마음도 추워지기 쉬운 11월을 교회는 위령성월로 기억하고, 하느님 앞에서 외로워할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자고 합니다.

 

특히 오늘, 위령성월의 둘째 날은 ‘위령의 날’입니다.  ‘위령의 날’은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신 영혼들을 기억하는 날이라는 의미도 있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맞아야 할 죽음에 대하여 올바른 태도를 갖기를 권고하는 날이라는 의미도 있는 날입니다.  우스개 소리로 사람들이 기억하는 세상의 3대 거짓말의 한 가지로 생각하는 말에도 ‘빨리 죽고 싶다’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죽음을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삶에서 참된 의미를 찾고 있는지 알고 싶다면, 죽음에 대해서는 어떤 자세를 갖고 있는지 살펴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죽음에 대한 올바른 생각을 갖고 있어야 삶도 제대로 대할 수 있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각자의 삶에 정해진 죽음을 향해서 숨 가쁘게 달려가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내가 영원히 살고 싶다고 말해도, 내가 죽음과는 만나고 싶지 않다고 말해도 가능하지 않은 소리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향해서 달려가는 동안 우리 삶에는 수많은 일이 일어납니다.  그 기간동안 하느님을 만나는 사람도 있고, 하느님을 친구로 사귀고 가까이 지내거나 여러 가지 합리적인 이유를 대고 하느님과 아예 등지고 사는 길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지키며 살아왔다고 말할 사람도 있고 하느님은 몹시 두렵고도 멀리할 수 없는 분이라서 그저 하느님에게서 혼나지 않을 만큼 적당하게 눈치를 보며 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살든지 그 삶을 판단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미사를 통하여 특별히 기억하는 영혼들, 우리보다 세상을 먼저 떠난 영혼들, 이미 하느님과 함께 있거나 하느님의 자비를 바라는 모양으로 머무는 영혼들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것이 있는지 돌이키는 일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교회는 오늘 세상을 떠난 영혼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자고 말합니다.  그 의미를 모르는 분은 없으시겠죠?  식사전후 기도를 제대로 하는 사람들은 그 의미를 아실 것입니다.  우리는 식사하기 전에는 마련된 음식을 먹게 해주신 하느님의 축복에 감사하는 기도를 바치고, 식사를 마친 다음에는 우리와 같은 자리에는 앉아있지 않지만, 하느님 앞에 나아간 영혼들이 하느님의 축복에 참여하기를 바라는 기도를 봉헌합니다.  음식으로 내 육체가 만족했으니, 내가 기억하는 영혼에게도 하느님의 자비가 함께 하기를 주님께 청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에 나오는 ‘복된 사람들’의 모습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복음에 나오는 8가지 행복의 기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기준은 세상 사람들이 흔히 바라보는 기준과는 그 출발점이 다릅니다.  세상의 논리에서라면 그 모습들이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하더라도 피하고 싶은 모습들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세상의 기준은 접어놓고 하느님의 기준을 들어 그들이 행복하다고 이야기하십니다.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겠습니까?

 

‘마음이 깨끗하고, 현실에서 슬퍼하고, 정의에 목마르고,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받는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선언하십니다.  그것이 행복을 가져오는 일이라고 해도 그런 일이 우리 삶에 일어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의 모습을 정확하게 볼 필요는 있습니다.  세상에 사는 우리가 세상의 기준을 아무리 강하게 주장해도 그렇게 해서 만들어낼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우리는 무리하게 인간의 고집을 강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첫 독서에서 욥은 자신의 말을 누군가 구리판에 써 주기를 기대합니다.  그렇게 해줄 사람이 정말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한 소리는 아닐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 있게 자기 목소리를 높였던 욥이 하느님 앞에서 어떤 태도를 가졌어야 옳은 것인지 알기를 원한다면, 욥기 35장부터 읽으면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삶을 붙잡아주시리라는 희망, 하느님은 내 삶의 근거가 된다는 소리는 그저 한두 번 마음을 단단하게 먹는다고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일에도 그렇게 만만한 일은 없습니다.  하물며, 내 삶 전체에 대한 평가인데, 잠시 잠깐 마음을 잘 먹었다고 현실이 갑작스레 바뀌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은 위령의 날입니다.  내가 기도하고 기억해주지 않아도 외로운 영혼들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면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줄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다면 내가 필요한 순간에 그 누가 나를 위해서 기도해주겠습니까?

 

위령의 날에 외로운 영혼들을 위해서 함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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