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토)
(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안세화 주교와 김보록 신부의 발자취1: 김보록 신부님의 고향 쏠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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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4-09 ㅣ No.679

[교구의 뿌리를 찾아서] 안세화 주교와 김보록 신부의 발자취 ① 김보록 신부님의 고향 쏠노

 

 

안세화 드망즈 주교님과 김보록 신부님의 발자취를 찾아 답사를 나선 것은 2013년 가을이다. 그해 여름, 조환길(타대오) 대주교님의 명을 받고 가을 9월부터 준비 회의를 시작했다. 준비위원들은 모두 학생 신분으로서 시간을 쪼개서 써야 하는 상황이다. 젠틀맨 나영훈 신부와 총기 넘치는 신학생 전형천,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사람은 10월 초부터 회의를 거치며 역할을 분담했다. 

 

2013년 10월 26일, 4박 5일의 일정으로 답사 여행을 떠났다. 파리-디종-브장송-벨포르-스트라스부르를 거쳐 다시 파리로 귀환하는 코스다. 답사 이틀째, 우리 일행은 아침 일찍 초대 대구본당 신부님이었던 김보록 신부님의 고향 쏠노(Saulnot)로 향했다. 산길들길을 따라 얼마나 꼬불꼬불한지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아, 이런 깡촌에서 어떻게 어린 소년이 100년도 더 이전에 조선이란 나라에 선교를 하려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이 나를 붙들었다. 

 

프랑스의 시골 마을에 가면 무조건 마을 사무소부터 찾아 안내를 받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에 마을 사무소에 들렀다. 배가 제법 나온 농부 한 사람이 보였다. 사실은 딱 그분밖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낯선 자동차가 진입을 하자, 마을 사무실 문을 열던 건강한 체구의 아저씨가 우리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한국의 대구대교구에서 온 신부와 신학생 일행인데, 로베르(김보록) 신부의 후손 가족을 찾아 왔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가 “내 성이 로베르다.”라고 대답했다. 그 놀라움과 반가움이란…. 긴 말이 필요 없었다. 서로에게서 환한 미소와 감탄이 터져 나왔다. ‘아니 주님, 이 만남을 준비하고 계셨습니까?’하는 외침이 내 안에서 메아리쳤다. 그는 우리 일행에게 “나는 알랭 로베르이고, 우리 형은 드니 로베르다. 우리 형이 집안의 족보를 잘 관리하고 있다.”고 설명하며, 자신의 볼일을 젖혀두고 우리를 자신의 친형 드니에게 안내했다. 농업과 목축을 함께 하는 전형적인 농부의 모습이었다. 흙 묻은 장화와 농기구들이 우리나라의 시골을 떠올리게 했다. 

 

김보록 신부님의 생가로 향하는 길목에서 엄마와 함께 길을 걷는 한 소년을 만났다. 매우 수줍어했다. 엄마 뒤로 숨는 모습이 숫기 없던 나의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그 소년은 좌우로 찢어진 눈을 가진 아시아 사람을 처음 본 것이다. 알고 보니 드니의 손자뻘 되는 아이였다. ‘21세기인 지금도 동양 사람을 처음 본 아이가 있는 이런 마을에서, 100년 전에 한국 선교를 어떻게 상상할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과 함께, ‘여기서는 아무나 만나면 거의 로베르 집안인가?’ 싶었다. 

 

김보록 신부님의 생가를 찾아갔다. 지금은 화재로 일부가 사라지고 없다. 부친이 3형제들에게 집을 한 채씩 주었단다. 모두가 한 지붕 아래 연결이 되어 있었으나, 화재로 인해 중간 집은 없어지고 길이 되어버렸으며, 그 옆에 새롭게 집을 하나 새로 지었다. 지금은 두 채로 나뉘어 새롭게 단장되어 있다. 생가를 나와 150미터쯤 남짓한 마을의 중심에는 아담하고 매력이 넘치는 ‘세례자 요한 조각상’이 자리 잡고 있다. 마을의 수호자인 듯, 주민들의 마음의 중심인 듯 당당하고 멋지게 서 있다. 이 마을을 찾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꼭 사진을 찍는단다. 

 

김보록 신부님이 세례를 받은 ‘세례자 요한 참수 성당’으로 이동했다. 붉은 벽돌집으로, 시골본당 치고는 안정적이고 아름다웠다. 1845년에 설립되어 1850~52년에 확장공사를 한 이곳에서 1883년 김보록 신부님이 세례를 받으셨다. 당시 이곳은 산업혁명 이후 산업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소금광산, 방직공장, 기와제조 등으로 경제적 부를 한껏 누렸단다. 붉은 벽돌과 붉은 사암 제단도 먼 곳에서 배로 운반해서 만들 정도로 재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성당 확장 공사를 한 것도 인구 팽창과 관계가 있었다고 한다. 제단에서 신자석을 바라보면, 정면에 청동 세례대가 있고 좌측 뒤쪽 벽에는 성모상이 모셔져 있다. 후손들이 자랑하기를 김보록 신부님이 세례 받은 이 장소에서 자신들도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성모상은 왜 앞쪽 정면이나 뒤쪽 정면이 아니라 뒤쪽 벽에 모셨을까? 2차 세계대전 중 폭격을 맞아 구멍이 난 자리를 성모님이 차지하고 보호막을 쳐주고 계신다고 설명했다. 

 

김보록 신부님의 존영을 통해 후손들을 대하면, 알랭 로베르와 매우 닮았다. 60세가 넘어 보이는 형인 드니는 묻지도 않은 가족들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워낙 많은 이름들이 한꺼번에 쏟아져서 전부 기억할 수도 없었다. 김보록 신부님의 세례대장 사본을 보여주고, 누이인 안-마리도 만나게 해 주었다. 예고도 없는 방문임에도 순식간에 많은 가족들을 만났다. 우리는 미리 준비해간 홍삼차를 세 남매에게 대구대교구장 대주교님의 이름으로 선물했다. 준비해 간 선물이 모자라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인사말로 대신해야 했지만 그들에게는 그것으로도 충분하고 넘쳐 보였다. 

 

100년을 넘게 기다려 이뤄진 번개처럼 짧은 만남. 그럼에도 우리는 오랫동안 같이 산 가족과 헤어지는 느낌으로 서로를 포옹했고, 그들 중 특히 드니는 눈물이 글썽했다. 우리 아버지도 연세가 많아지고부터는 잘 우시더니…. 아니 그보다는 하늘이 맺어준 깊은 인연의 증거를 다시 찾는 후손들로서, 우리 서로가 어찌 쉽사리 지나칠 수 있었으랴. 반드시 다시 만나리라는 예감을 하면서 그렇게 우리는 마을을 떠나왔다.

 

[월간빛, 2015년 4월호, 심탁 클레멘스 신부(해외연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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