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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칼럼: 영화 히로시마 내 사랑 - 참사의 기억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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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10-01 ㅣ No.95

[영화칼럼] 영화 ‘히로시마 내 사랑’ - 2001년 감독 알랭 레네


참사의 기억법

 

 

‘잊혀진’은 ‘잊히다’라는 피동사에 피동의 뜻을 나타내는 ‘어지다’가 결합된 이중피동으로 어법에 맞지 않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에서 잊힌 무언가를 드러낼 때 보통 ‘잊혀진 무엇’으로 표현합니다. 그만큼 필연적으로 잊히고야 마는 것들을 잊고 싶지 않다는 절박한 마음을 우리는 두 번의 피동을 겹쳐서 드러내고 싶을 만큼 피할 수 없는 혹은 피하고 싶지 않은 운명처럼 여기나 봅니다.

 

알랭 레네 감독의 영화 <히로시마 내 사랑>은 원자폭탄이 투하된 뒤 12년의 시간이 흐른 히로시마를 배경으로 삼습니다. 여기서 ‘평화’라는 제목의 영화 촬영을 위해 히로시마를 찾은 배우 ‘프랑스 여자(엠마누엘 리바 분)’와 일본에서 건축가로 활동 중인 ‘일본 남자(오카다 에이지 분)’가 우연히 만나 관계를 맺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됩니다. 둘의 사이가 무르익을 무렵, 재건된 히로시마의 모습 이면에 감추어진 12년 전의 히로시마가 겪은 고통을 엿볼 수 있었다는 프랑스 여자를 향해 일본 남자는 ‘당신은 히로시마를 보지 못했다’고 단호히 말합니다. 더불어 대재앙이 지나간 곳에 다시금 꽃이 피고 일상이 꾸려지는 상황을 마주하며 프랑스 여자는 미래를 향한 새로운 희망을, 일본 남자는 과거를 향한 망각의 위협을 느낍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프랑스 여자는 과거 그녀의 고향인 느베르에서 겪었던 어떤 결정적인 사건을 향한 아픈 기억이 점차 희미해지는 체험을 합니다. 절대 잊히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기억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희미해지자 여자는 당황합니다. 그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사투를 벌이지만, 인간 존재를 옭아맨 망각의 힘을 그녀는 이겨내기 어려워합니다. 이런 그녀에게 잊지 않으려는 기억이 잊히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를 가장 어렵게 만드는 것은 자신이 기억하려는 것을 왜 기억해야 하는지, 그 기억을 잊지 않으려는 이유가 무엇인지가 잊히는데 있습니다.

 

곧 있으면 우리는 10.29 참사 1주기를 맞습니다. 한국 사회가 겪은 여느 참사들과 다를 바 없이 10.29 참사는 많은 이들이 참사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것을 꺼리는 이들에 의해 혹은 게으른 우리 자신의 박약한 의지에 의해 잊히길 강요당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망각이라는 족쇄에 사로잡힌 채 온전한 추모를 위한 기회를 ‘이번에도’ 놓치고 말았습니다.

 

영화 <히로시마 내 사랑> 속 두 주인공이 지키고픈 기억과 이를 방해하려는 망각 사이에서 사투를 벌이는 모습은 ‘잊혀진’이라는 이중피동의 잘못된 표현이 용인될 수 있을 만큼 절박해 보입니다. 영화는 기억과 망각의 줄다리기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이들, 잊지 않겠다던 의지가 조금씩 희미해지는 처지 앞에 좌절하는 이들과 그 절박함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10.29 참사의 1주기를 맞으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망각의 늪에 빠져드는 우리네 실존적 한계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영화 속 일본 남자의 대사에 따르면 우리 사회는 아직 2022년 10월 29일의 이태원을, 2014년 4월 16일의 진도 앞바다를, 2003년 2월 18일의 대구 지하철 중앙로 역을, 1995년 6월 29일의 삼풍백화점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2023년 10월 1일(가해) 연중 제26주일 서울주보 7면, 구본석 사도요한 신부(행당동성당 부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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