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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숨은 성미술 보물을 찾아서14: 김형구의 성서 읽는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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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4-17 ㅣ No.620

[숨은 성미술 보물을 찾아서] (14) 김형구의 ‘성서 읽는 여인’(1954)


성경 읽는 소박한 여인 모습에서 불교 조각 ‘반가사유상’ 떠올라

 

 

김형구, ‘성서 읽는 여인’.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서양화가 김형구(金亨球, 루카, 1922~2015) 화백은 1954년 성미술 전람회에 ‘성서 읽는 여인’을 출품했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김 화백의 출품작 이미지를 처음 접한 것은 고 방오석 화백을 통해서였다. 고 방오석 화백은 대학원 재학 시절 한국 가톨릭 미술에 대한 석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면서 많은 자료를 수집, 정리했고, 그의 논문 ‘한국 가톨릭 미술에 관한 연구’(1977)는 한국 가톨릭 미술의 역사를 정리한 최초의 학위 논문이기도 하다. 

 

김형구의 ‘성서 읽는 여인’은 2016년 개최된 ‘한국 가톨릭 성미술 재조명전’에서 사진 자료로 전시되었다. 당시 출품되었던 17점의 작품 가운데 전시장을 찾은 사제들에게 가장 인기가 높았던 작품이 바로 김 화백의 작품이었다. 많은 분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숙연해지면서도 정감이 있는 작품”이라는 감상평을 주었다. 

 

한복 차림으로 성경을 읽고 있는 평범한 여인의 모습을 담은 이 소박한 그림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의 단편과도 같지만, 작품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그저 범상치만은 않은 것 같다. 

 

김형구는 함경남도 함흥시에서 출생하여 동경제국미술학교를 졸업하고 함흥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가 1950년대 말에 월남했다. 전쟁 중에는 대구, 부산 등지에서 종군화가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1953년 제2회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부터 1981년 제30회까지 총 29회에 걸쳐 출품했으며, 가톨릭 신자로서 종교 주제의 작품을 꾸준히 이어가 2005년 제10회 가톨릭 미술상을 받았다.

 

서양화 개념의 도입 단계에서 르네상스와 인상파 등 서양 근대미술사와 미술기법이 일본을 통해서 유입되는 과정을 직접 체험했던 김형구의 작품에는 일본 동경제국미술학교 유학생들의 일본식 모더니즘의 경향이 드러나고 있다. 

 

그는 정치나 사회상보다는 ‘사람’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작업에 임했으며 대상을 왜곡하거나 과장하지 않고 현실을 충실하게 모방하고 재현한다는 의미에서 가장 보편적인 자연주의적 표현방식을 구사했다는 평을 받는다. 미술평론가 이경성은 “과격한 감정의 흐름을 억제한 온건한 시각으로 대상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려는 태도의 화가”라고 김 화백을 평한 바 있다. 

 

김 화백이 자주 그렸던 한적한 시골 마을이나 적막한 도시 풍경에 등장하는 인물은 역동적이 표현이 아닌 조용한 분위기를 보여주어 정지된 순간을 포착한 것 같은 고요한 침묵의 세계를 연상하게 한다. 그는 이렇게 추상미술이 확산되는 시기에도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낸 구상회화를 꾸준히 이어나갔다. 

 

‘성서 읽는 여인’은 이러한 그의 화풍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부엌이나 창고 같은 일상적인 배경에 소박한 한복과 맨발 차림으로 성경을 읽고 묵상에 잠긴 여인의 모습에서 깊은 신앙심과 성스러움이 느껴진다. 같은 제목의 작품이 1957년 세계 가톨릭 미술인전에 출품되었고 현재 작품의 소재는 불분명하다. 

 

김형구는 직업 모델을 쓰지 않고 가족과 주변 인물들을 작품의 소재로 삼고 사진이 아닌 스케치를 통해서 이미지를 포착한 후에 작업실에서 재구성하는 고전적인 방식으로 작품을 제작했다. 1954년 성미술전 출품작 ‘성서 읽는 여인’ 역시 2016년 전시장을 방문한 유족의 증언을 통해 작가의 아내를 모델로 한 작품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격자형 벽면에 빛을 드리우고 있는 작은 창 하나와 그 아래 놓인 둥근 채, 그리고 작품 중앙에 삼각형 구도로 배치된 여인의 좌상은 사실적으로 묘사된 일상의 표현에 기하학적인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에서는 흔들리지 않는 어떤 단단함이 느껴진다. 

 

아내를 모델로 한 작품 속 주인공은 꾸밈없는 소박한 한복 차림에 양팔을 걷어붙인 모습이다. 머리에는 미사보로 보이는 흰 수건을 드리우고 무릎에 성경을 펼쳐놓고 묵상에 잠겨 있다. 작품 오른편 하단에 그려진 흰색의 사각형은 미사보 주머니가 아닐까?

 

바쁜 일상 가운데 시간을 내었는지 맨발 차림으로 나지막한 앉을 것에 걸터앉아 혼자만의 성스러운 의식을 치르듯 성경을 읽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친근하면서도 초월적인 인상을 자아내고 있다. 자애로우면서 억척스러운 한국의 어머니상과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동시에 떠올리게 되는 이 작품은 이처럼 사실적 표현 속에 상징성이 강조된 중의적인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그런데 이 소박한 여인의 모습이 왠지 낯설지가 않다. 어딘가에 걸터앉아 오른손 손가락을 오른뺨에 지긋이 대고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 자연스레 구부러진 손가락과 치마 밑으로 살짝 드러난 맨발의 왼발 표현에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불교 조각인 반가사유상을 떠올리게 한다. 

 

성경을 읽고 있는 평범한 여인의 모습에서 명상에 잠긴 반가사유상의 자세가 자연스레 연상되는 이 작품은 그래서 더욱 우리에게 한국적인 인상과 함께 친근함을 전해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4월 7일, 정수경 가타리나(인천가톨릭대학교 대학원 그리스도교미술학과 교수)]

 

제보를 기다립니다

 

※ 가톨릭평화신문과 정수경 교수는 숨은 성미술 보물찾기에서 소개하는 작품들의 소재나 관련 정보를 알고 있는 분들의 적극적인 제보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함께 찾아 나서는 진정한 성미술 보물찾기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제보 문의 : 02-2270-2433 가톨릭평화신문 신문취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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