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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ㅣ기타

성화와 한의학: 마음을 다스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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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5-22 ㅣ No.505

[성화와 한의학] 마음을 다스리는 법

 

 

제우스가 프리기아로 암행에 나선다. 프리기아 하면 미다스 왕이 떠오른다. 미다스 왕은 술에 취해 몸도 가누지 못하며 끌려온 늙은 실레노스를 정성껏 돌보아 준다. 실레노스는 누구인가? 디오니소스의 스승이자 헤르메스의 아들이다. 물론 판의 아들이라는 등 그와 관련해 여러 설이 있지만 말이다. 디오니소스는 실레노스를 돌보아 준 것이 고맙다며 미다스의 소원을 들어준다. 그가 손을 대는 것마다 황금으로 변하게 해 준 것이다.

 

 

필레몬과 그의 아내

 

제우스가 실레노스의 아버지인 헤르메스를 데리고 바로 이곳 프리기아로 떠난다. 인간의 선악을 가늠하고자 정체를 숨기고 암행에 나선 것이다. 그 까닭에 인간이 이들을 알아볼 리 없다. 이들은 걸식도 못하고 문전 박대를 당한다. 이윽고 초라한 오두막에 다다른다.

 

늙은 농부인 필레몬이 아내 바우키스와 함께 이들을 반갑게 맞이한다. 엘스하이머의 그림을 보면 노부부가 이들에게 음식을 차려 주는데 참 소박하다. 루벤스의 그림을 보면 바우키스가 거위를 요리하려고 거위의 한쪽 날개를 잡고 뒤뚱거린다. 제우스는 이를 말리고 있다. 갸륵한 순간을 담은 그림이다.

 

노부부를 갸륵하게 여긴 제우스는 말한다. “신을 홀대한 마을 사람들을 벌주려 하는데 너희들은 살려 줄 터이니 이를 피해 얼른 높은 산에 올라가라.”

 

노부부가 산꼭대기까지 오르자 재앙이 시작된다. 대홍수가 일어난 것이다. 마을은 물에 잠겨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오직 노부부의 오두막만이 범람하는 물 위로 뜨더니 웅장한 신전으로 변한다. 이 신전을 지키며 살던 노부부는 세월이 흘러 어느 날 함께 죽음을 맞는다. 제우스는 노부부를 두 그루 나무로 만든다. 떡갈나무와 보리수다.

 

 

롯과 그의 아내

 

창세기에 보면 세 나그네가 아브라함을 찾아 음식을 대접받은 뒤 죄악의 성읍인 소돔으로 암행에 나선다. “저들 모두가 저지른 짓이 나에게 들려온 그 원성과 같은  것인지  아닌지를  알아보아야겠다.”(18,21)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돔에 사는 롯은 어떠했을까? 롯은 신분을 감춘 두 천사를 집으로 모시고 정성껏 대접한다. 한데 이들이 아직 잠자리에 들기 전에 성읍 사내들이 롯의 집을 에워싸고 음란하게 횡포를 부린다.

 

두 천사는 “주님께서 소돔을 파멸시키려고 우리를 보내셨소.”라며, 롯에게 가족을 데리고 성읍을 떠나 산으로 달아나라고 한다. 롯은 천사에게 산이 아닌 ‘초아르’라는 근처의 작은 성읍으로 피신하게 해 달라고 간청한다.

 

롯이 초아르에 다다르자 해가 땅 위로 솟아오르고, 주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과 불을 퍼부으셨다. 그리하여 그 성읍들과 온 들판, 그 성읍의 모든 주민과 땅 위에 자란 것들을 모두 멸망시키셨다. 다음날 아브라함이 아침 일찍 가서 보니 마치 가마에서 나는 연기처럼 그 땅에서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이 멸망의 한가운데에서 롯의 가족은 살아남는다. 롯은 완벽하지는 않으나 의롭지 못한 환경에서도 의롭게 살고자 한이다. 그 까닭에 하느님의 베푸심으로 살아남은 것이다. 하지만 롯의 아내는 천사의 말을 듣지 않고 뒤를 돌아다보아 소금기둥이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루카 17,32) 하고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심판은 까마득히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이와 똑같을 것이니, 롯의 아내처럼 뒤를 돌아보며 남겨 둔 것에 연연하지 말라는 경고이다.

 

다시 그리스 신화로 돌아와, 손대는 모든 것이 황금으로 변하는 능력을 가지게 된 미다스 왕은 결국 사랑하는 딸마저도 황금으로 변하는 비극을 불러온다. 롯의 아내와 미다스 왕 모두 재물에 연연하다 죽음과 파멸을 맞이한 것이다. 그러나 없는 재물도 성심껏 대접하여 죽어서도 두 그루의 나무가 된 필레몬 부부의 경우는 경건하고 선량한 인간이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 준다.

 

 

혜강과 오난

 

북두칠성이 하늘의 중심이라면 사람의 중심은 마음이다. 그래서 「동의보감」은 “옛적에 신성한 의사들은 사람의 마음을 다스려서 병이 나지 않게 하였다.”라고 강조한다. 마음속에 자리한 의심과 염려, 헛된 잡념, 불평, 자기 욕심을 모조리 없애 버리고, 자신의 생활 방식을 자연의 이치에 부합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세상의 모든 일은 다 공허한 것이고 종일 하는 일이 모두 헛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며 또한 내 몸이 있다는 것도 다 환상이며 화와 복이 다 없는 것이고 살고 죽는 것이 다 한갓 꿈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된다”(「동의보감」).

 

한마디로 마음에 잡념이 없는 허심(虛心)의 경지로, 탐욕이 없음이다. ‘없을 무’(無) 한 글자로 표현되는 경지다. 그래서 「동의보감」은 “본디 아무 것도 ‘없음’이라면 어디에 티끌인들 붙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사람이 살면서 ‘없음’이 어려운 것, 그래서 ‘허심’의 경지에 이르기가 어려운 까닭은 무엇일까? 중국 위나라 죽림칠현의 한 사람이자 철학가인 혜강은 다섯 가지 원인을 들고 있다. 첫째, 명예와 재물이다. 둘째, 기뻐하고 성냄이다. 셋째, 음란과 음욕이다. 넷째, 탐식이다. 다섯째, 정신이 허약하고 정기가 흩어지는 것이다.

 

이 다섯 가지를 ‘오난’이라 한다. 이것만 가슴속에서 없앨 수 있다면 “좋은 일을 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복이 오고 오래 살 것을 바라지 않아도 자연히 오래 살게 된다. 이것이 양생하는 큰 줄거리이다.” 한데 이처럼 어려운 일이 또 있을까?

 

* 신재용 프란치스코 - 한의사. 해성한의원 원장으로, 의료 봉사 단체 ‘동의난달’ 이사장도 맡고 있다. 문화방송 라디오 ‘라디오 동의보감’을 5년 동안 진행하였고, 「TV 동의보감」, 「알기 쉬운 한의학」, 「성경과 의학의 만남」 등 한의학을 알기 쉽게 풀이한 책을 여러 권 냈다.

 

[경향잡지, 2018년 5월호, 신재용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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