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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동양고전산책: 동양의 덕목으로 풀어 본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6) 선의(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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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8-12 ㅣ No.292

[최성준 신부와 함께하는 동양고전산책] “당신은 착하다”

- 동양의 덕목으로 풀어 본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 ⑥ 선의(착함)

 

 

뉴스에서는 날마다 흉악한 사건이 보도됩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도 안타깝고 무거워집니다. 그러다 간혹 착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소개되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그래도 이 세상은 살 만하다는 생각이 들지요.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시각장애인을 어느 시민들이 구해 줬다거나, 차에 깔린 사람을 구하기 위해 지나가던 사람 수십 명이 힘을 합쳐 차를 들어 올리고 구했다는 이야기를 접하게 되면 마치 내가 착한 일을 한 양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마음이 흐뭇해집니다. 맹자의 말처럼 모든 사람의 마음 안에는 어진 마음이 있어서 선의가 다른 이에게 전달되면 그 사람 안에 있는 어진 마음도 같이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무한 경쟁 사회 속에서 착하게만 살아선 안 된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지만 세상을 각박하지 않고 살 만한 세상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착한 사람들의 착한 행동인 것 같습니다. 나보다 어려운 사람을 보면 선의의 마음으로 도와주는 실천이, 다른 이들을 배려하고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바보 같은 행동이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는 밑거름이 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성령의 열매는 여섯 번째로, “선의(善意)”입니다.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착함”이라고 번역되었지요. 『가톨릭대사전』에서는 선의를 정의하면서 단순히 마음의 상태가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성서에서 뜻하는 착함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소극적인 의미 정도가 아니라 남이 곤경에 처했을 때 호의적으로 관여하고 기꺼이 도와주고자 하는 적극적인 마음을 가리킨다.” 그냥 단순히 착한 마음, 선의를 갖는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적극적으로 실천에 옮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머릿속으로 알고 있지만 그것을 직접 행동으로 옮기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자비의 실천에 대해서 언급하시면서 “실천 없는 자비는 죽은 것”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자비의 희년을 살면서 마음에만 선의를 품고 있다면 그것은 죽은 것입니다. 내 마음의 선의(착함)가 밖으로 드러나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직접 베풀어질 때 비로소 진정으로 맺어지는 성령의 열매가 될 것입니다. 성서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누가 내 이웃인지 묻고 따지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직접 곤경에 처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29-37)

 

동양의 유가 전통에서도 ‘실천’은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배움을 중시했지만 배운 것을 몸으로 익히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배운 지식이 많아 말만 번지르르하게 잘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으며 도리어 배우지 못한 것보다 나쁘다고 여겼습니다.

 

“(군자란) 먼저 그 말을 실행하고 그 후에 (말이) 행동을 따르는 것이다.”1)

“옛 사람들이 말을 쉽게 하지 않은 것은 자신의 행함이 미치지 못할 것을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이다.”2)

“군자는 말하는 것은 어눌하고 행하는 것은 민첩하고자 한다.”3)

 

이처럼 『논어(論語)』에는 말보다 실천이 앞서야 한다는 공자의 가르침이 곳곳에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도 예외 없이 어진 마음(仁)을 갖추고 있다고 이미 여러 번 언급했지요. 하지만 그 착한 마음을 속으로만 간직하며 살아간다면 그것은 마치 한 탈렌트를 받은 사람이 땅에 묻어 두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마태 25,14-30 참조) 나중에 주인이 돌아왔을 때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며 벌을 받을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실천은 신약성서 전반에 걸쳐 끊임없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 1,22)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은 쉽게 말을 내뱉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 하는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말만 앞세우고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정치인입니다. 선거 전에는 온갖 공약을 내세우고는 당선된 후에 약속을 지키지 않는 국회의원을 우리는 많이 보았습니다.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 되는 겁니다. 이런 정치인들은 국민들의 신뢰를 얻기 힘듭니다. 언행일치(言行一致)를 이루는 참다운 정치인이 되는 것은 정말 불가능할까요?

 

명나라 때 유학자인 왕양명(王陽明)은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는 이론을 이야기했습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는 것’과 그것을 직접 ‘실천하는 것’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기존의 주자학에서는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을 별개로 여겼습니다. 제대로 알아야 올바로 실천할 수 있다고 보고 “선지후행(先知後行)”설을 강조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왕양명은 반론을 폈습니다. 안다는 것과 그것을 행하는 것은 결코 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것을 실행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부모님께 효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워 알게 되었다고 하면서 효도를 실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효도에 대해서 진정으로 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앎의 진실하고 독실(篤實)한 곳이 곧 행함(行)이요, 행함의 밝게 깨닫고 정확하게 살피는 곳이 곧 앎이니, 앎과 행함의 공부는 본디 분리할 수 없다.”4)

 

우리는 착한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선의로 이웃을 대합니다. 하지만 이 선의(착함)가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맺어 주시는 선의(착함)의 열매가 잘 익어 훌륭한 열매가 될 수 있도록 오늘도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주님의 착한 양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 『논어(論語)』 「위정(爲政)」 13. “先行其言, 而後從之.”

2) 『논어(論語)』 「리인(里仁)」 22. “古者言之不出, 恥躬之不逮也.”

3) 『논어(論語)』 「리인(里仁)」 24. “君子欲訥於言, 而敏於行.”

4) 왕양명 『전습록(傳習錄)』 권2. “知之眞切篤實處,卽是行. 行之明覺精察處,卽是知. 知行工夫,本不可離.”

 

* 최성준 신부는 북경대학에서 중국철학을 전공하고 현재 대구대교구 문화홍보실장 겸 월간 <빛> 편집주간으로 있다.

 

[월간빛, 2016년 8월호, 최성준 이냐시오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실장 겸 월간 <빛>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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