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 (토)
(백)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가톨릭 교리

생활교리: 사말교리 (1) 죽음 -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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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8-21 ㅣ No.4282

[생활교리] 사말교리 (1) 죽음 :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시작과 마침, 만남과 헤어짐이 있듯이, 출생 이후 죽음은 반드시 찾아온다. 곧 “우리는 죽음을 잊고 살지만, 죽음은 결코 우리를 잊지 않는다”(서양속담). 그러면 믿는 이들에게 죽음은 무엇인가? 믿음이 있는 이와 없는 이 둘 다 모두 죽음 자체는 불안감과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단,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맞이하느냐’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죽음의 의미가 변화되었다고 이렇게 가르친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위령 감사송 1).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이 세상의 ‘끝’을 넘어서서 “새로운 삶으로 옮겨가는 과정”(『죽음 · 심판 · 지옥 · 천국』 14)이요,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성 데레사)이다. 그렇다면 믿는 이들은 죽음을 부정적이고 수동적인 자세로 그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맞이하는 마지막 관문으로만 여길 수 없으며, 하느님과의 만남이란 측면에서 보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죽음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성경은 삶의 마지막이 “생각지 않은 때에”(마태 24,44) 마치 밤에 도둑처럼 찾아올 수 있으니 ‘항상 깨어있으라’고 초대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옛 라틴어 격언인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는 오늘날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한 말이다. 사실 죽음에 대한 성인들의 권고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두라”(성 베네딕도), “마치 오늘이 마지막 날인 듯 사시오. 여러분 자신에게 주의하시오”(성 안토니오). 죽음을 기억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이 세상의 끝이 있음을 깨닫고, 잊고 있던(혹은 잃어버렸던) 영원하신 하느님의 존재를 의식하라는 일깨움이 아닐까 싶다. 왜, 우리 모두는 하느님께 생명(生命), 곧 ‘살라는 명’을 받았고, 그 명이 다하면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매년 11월 위령성월 등을 통해 ‘남’의 죽음만이 아니라 ‘나’의 죽음에 대해서도 깊이 성찰하고, 준비하기를 초대한다. 더욱이 천주교인의 죽음은 선종, 곧 착하게 살다가(善生) 복되게 마치는(福終) ‘착한 죽음’, ‘거룩한 죽음’이라고 하지 않는가! 다만 거룩한 죽음에 이르기 위한 복된 준비는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오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데 내일은 어떻게 준비가 되어 있겠는가?”(준주성범). 그러니 주님 앞에서 솔직히 묻고 답해보자. ‘나는 부활 신앙에 대한 확신에 찬 믿음이 있는가’, ‘나는 진정 하느님께 온전히 맡길 준비가 되어 있는가’, ‘나는 평화로이 눈을 감지 못하게 만드는 마음의 짐들을 정리하고 내려놓는 연습을 하고 있는가’…

 

모든 일에는 준비가 필요한 법인데, 하느님 앞에서 셈을 해야 하는 죽음은 얼마나 더 많은 준비가 필요하겠는가. 그렇다고 너무 심각해지지는 말자. 결국 우리의 마지막은 우리 손이 아닌 하느님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니까. 그러니 삶의 끝이 있음을 기억하며, 열심히 살아내고 있는 매 하루의 끝맺음 앞에 이렇게 기도해 보자. “전능하신 천주여,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성무일도 끝기도).

 

[2023년 8월 20일(가해) 연중 제20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8면, 윤태종 토마스 신부(전주가톨릭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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