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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사목] 간통죄 위헌 판결에 대하여: 흔들리는 6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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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5-16 ㅣ No.823

[특별기고] 간통죄 위헌 판결에 대하여 - 흔들리는 6계명?



21세기 현재를 일컬어 그 어느 때보다도 성에 대한 사회적 억압이 줄어든 시대라고 한다. 성은 영어의 ‘have sex’란 말이 나타내듯이, 갖거나 주거나 받을 수 있는 대상이 되었고, 이러한 성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큰 축복으로 여기며 살고 있다. 그 축복을 과거 그리스 로마시대의 사람들은 에로스라는 신의 선물로 생각했지만, 육체의 르네상스를 맞은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고삐 풀린 욕망과 에로스의 이끌림을 따라 무분별하게 살다 보니 강력한 힘으로 사람들을 휘둘러대는 에로스에 대한 반성이 진정으로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반성의 필요성을 비웃듯이 헌법재판소가 지난 2월 26일 간통죄에 대한 위헌 결정을 내렸다. 헌법재판소가 밝힌 폐지사유는 성적 자기결정권의 존중과 간통이 비도덕적 행위라 할지라도 본질적으로 개인의 사생활에 속하고 구체적 법익에 대한 명백한 침해가 없는 경우 국가권력이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게 현대 형법의 추세라고 밝혔다.

과연 이러한 사유로 간통죄를 위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물론 다양성을 인정하는 시대에 획일화된 생각을 고집하면 보수 꼴통으로 매도될 수도 있다. 간통죄 위헌 판결에 법조계와 여성단체 일부에서는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 강화되었다고 기뻐했지만, 일반 여성들은 당당하게 외도를 하면서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성적으로 교만하게 변해갈 남편에 대하여 걱정하고, 제도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여성의 민법상 안정권이 준비되어야 한다고 얘기하기도 하며, 간통죄 폐지로 제도적 결혼의 틀을 벗어난 무분별한 성행위가 난무하게 되고 부부라는 제도적 연결고리보다 개인의 성적자유를 더 중요하게 생각해 결혼을 부정적 시각으로 볼 수 있다는 염려도 현실화되고 있다.

이러한 염려의 현실 앞에 침묵하는 다수의 사람들도 간통죄가 위헌 결정을 받았다고 해서 간통이 정당화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 이유는 간통의 비윤리성이 간통죄의 위헌 여부와 상관없이 사회적으로 공감대를 이루고 있는 최소한의 윤리 기준이기 때문이다. 간통이 횡행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라도 쉽게 판단할 수 있는 상식에 속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간통죄 폐지의 문제를 교회의 혼인과 가정에 대한 가르침을 통해 살펴보자.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혼인

사회의 변화와 혼란의 시대에 가정의 위기를 보호하기 위해 발표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사도적 권고 『가정공동체』 28항은 가톨릭교회에서의 혼인은 하느님께서 맺어주는 것이며 “가정의 기본임무는 생명에 봉사하는 것, 창조주의 축복을 역사 안에 실현하는 것, 즉 출산을 통해서 하느님의 모습을 사람에게서 사람에게로 전달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성(性)은 혼인을 통해 “새로운 인간에게 생명을 전달하는 하느님의 협력자가 되는 것이 부부”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목헌장에서는 “혼인제도와 부부애는 본연의 성격상, 자녀의 출산과 교육을 지향하고 있으며 그로써 부부애는 절정에 달하고 흡사 월계관을 받아쓰는 셈이 된다.”라고 말하고 있다.(48,50항) 따라서 교회는 부부행위의 목적은 자녀출산이며 이 자녀 출산은 성의 자연질서에 의한 목적이라고 밝힌다. 한편 사목헌장은 “사랑은 감정을 동반하는 의지의 작용으로 인격에서 인격으로 향하는 것”이며, 이 사랑은 “몸과 마음의 여러 가지 표현에 특수한 품위를 부여하고 또한 이 표현들은 부부다운 우정의 특수한 요소와 표지로 삼아 값지게 만든다.”라고 가르침으로써 남녀의 성의 합일을 “혼인의 고유한 행위로써만 독특하게 표현되고 완성되는 행위”라고 말하고 있다.(49항) 즉 하느님께서는 혼인과 가정을 위해서 성을 마련하셨으며 성행위는 혼인에 의하여 결합된 부부 사이에만 정당하다는 것이다.


상호 증여로서의 성(性)

창세기의 1장과 2장은 인간의 성윤리의 기초가 되는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 즉 인간의 성은 하느님의 뜻으로 창조된 것이며 서로 다르게 창조하였을 뿐 남자나 여자나 다 같이 하느님을 닮은 존재로서 현실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과 부부일체를 이루는 결혼으로 합일과 공동생활을 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불러일으켜 인류를 존속시키는 신비가 들어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두 성이 있다는 것은 새 생명의 창조에만 의의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륜델(J. Gr ndel)은 “성이란 인간을 본질적으로 결정지어 주는 요인이다. 그것은 남자나 여자의 전체적 구조를 이루며 개인의 정신적 자세와 행동에도 영향을 미친다.”라고 했다.

이러한 근거를 바탕으로 교회는 성에 대한 전통적인 목적인 자녀 출산과 교육에 덧붙여 서로 간의 상호애와 존경을 표현하고 부부간의 일치를 심화시킨다. 즉 “부부가 친밀하게 깨끗이 결합되는 행위”가 “진정 인간답게 행해진다면 자신을 서로 주고받는 것을 뜻하며 그것을 도와줌으로써 즐겁고 고마운 마음으로 서로를 풍요하게 만든다.”라고 밝히고 이어서 “서로의 신의로 보장되고 특히 그리스도의 성사로 성스럽게 된 이 사랑은 역경과 순경에 몸과 마음이 갈릴 수 없도록 충실하며”라고 가르침으로써 부부간의 상호 신뢰와 인격의 존엄성의 의미에서의 성은 두 인격 간의 상호 증여에 의한 전인적인 일치를 이루게 됨을 말하고 있다.(사목헌장 49항) 특히 요한 바오로 2세는 창조의 신비에 있어서 남자와 여자가 상호 선물의 차원에서 결합되었으며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성은 인간의 가장 깊은 존재와 관련된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성에 있어서 상호 증여에 의한 전인적인 일치를 강조한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성의 목적과 의의에 있어서 전통적인 개념인 혼인제도 안에서의 부부애를 통한 자녀의 출산과 종족의 보존을 고수하지만, 이것만을 성의 유일한 목적으로 보지 않고 인격의 존엄성에 바탕을 둔 상호 신뢰와 증여에 의한 자기 포기로 완전한 친교와 일치를 이루어 하느님의 창조력을 모방하고 구원에의 완성을 지향하게 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더 나아가 가톨릭교회 교리서를 통해 교회는 성서적인 관점에서 인간의 성은 “남녀의 부부 사랑을 위해 있는 것이다.”(2360항)고 말하고 지금까지도 우리 인간은 창조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적인 능력이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품위에 맞게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과 갈등을 겪고 있음을 말한다.(2337항) 그러므로 성윤리는 사랑을 배우고 성에 대한 올바른 관계를 이루기 위한 지침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정결의 덕, 절제의 덕을 요구한다. 또한 이 덕은 상당한 기간이 필요한 것으로, “한 번에 결정적으로 이 덕을 이루었다고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된다.”고 교리서는 강조한다.(2342항) 동시에 이러한 덕을 이루기 위해서는 “성장의 법칙”을 겪어야 한다고 적고 있다.(2343항) 따라서 여기에는 개인의 노력뿐만 아니라 개인의 존엄과 사랑할 수 있는 권리를 존중하는 분위기가 형성될 수 있도록 문화적인 노력 또한 뒷받침되어야 함을 제시한다.

이처럼 그리스도교 관점에서 성과 생명 그 자체는 신적 개입에 대한 분명한 징표들인 것으로, 곧 생명의 주재자가 생물체의 조직과 감정에다가 이것이 자신의 생산물임을 드러내는 표지를 해놓은 사인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남자와 여자는 자신들의 모든 삶과 자신들의 전 존재를 선물로 내어놓고 오로지 하나의 마음과 영혼을 형성하는 것이다. 또한 성도 하느님의 선물로서 전적으로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으로 사랑으로 결합하는 남녀의 관계는 자유롭게 서로를 내어줌으로써 하느님의 사랑과 삼위일체를 반영한다. 실제로 그리스도 계시에 의하면 하느님은 지극히 순수한 영적 사랑, 하나의 존재, 하나의 지성, 하나의 의지 안에서 세 위격을 일치시키는 사랑이신 것이다.


인간의 성(性), 동물의 성(性)

따라서 인간의 성은 더 할 수 없이 절대적으로 독창적인 하느님의 섭리이며 맹목적인 우연성을 배제하고 인간 존재를 물리적·화학적 기계와 동일시하는 견해를 배격한다. 그리고 생물학적, 정서적, 영적인 다양한 차원에서 나타날 수 있는 성과 사랑은 물리적·화학적 작용과는 전혀 다른 성질을 지닌 실재임을 나타낸다. 따라서 성을 주어진 자연적 소여로 이해하거나 경험과학의 수단과 방법으로 이해한다면 성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를 획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인간은 동물의 성과 다른 특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본능에 예속돼 있지 않고 본능을 조정하며 그 존속과 품위를 지니게 되어 있으며 인간적 욕망에 노예가 되지 않고 그 능력을 승화시킬 때 본연의 의미를 지닐 수 있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성은 동물의 경우처럼 본능적으로 조절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가꿀 수 있는 그 어떤 것이므로 인간의 공동생활이 인간화되어 머물기 위해서는 성의 질서화가 요구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교에서의 성은 남자와 여자가 부부에게만 허용된 고유하고 배타적인 것이며, 부부가 서로에게 내어주는 성은 결코 순전히 생물학적인 것만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깊은 존재와 관련된 것으로, 남자와 여자가 죽을 때까지 서로에게 자신을 완전히 바치는 그 사랑의 일부일 경우에만 진정으로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성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강조되고 인식되어야 할 것은 성이 하느님의 선물로 주어져 있으며 선물로 주어진 이 성을 하느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간통(간음), 무엇이 문제인가?

이러한 근거를 바탕으로 간통에 대한 가톨릭교회 입장은 너무도 명확하다. 간통은 혼인으로 하느님 앞에 부부가 된 신분으로 부부의 신의와 성실을 저버리고 배우자가 아닌 사람과 관계를 갖는 행위로 과거에는 세 가지(배교, 살인, 간음) 가장 큰 죄악 중의 하나였고, 가정의 안정 및 화목과 사랑을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범죄이다. 더군다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간음은 배우자들의 신의와 충실 및 혼인의 성사적 축성을 거스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십계명 가운데 하나가 제6계명, 즉 “간음하지 말라.”인데, 간통은 곧 하느님의 법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부간 사랑과 신뢰는 하느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뿐 아니라 양심을 지닌 인간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기초 윤리이자 사회를 지탱하는 기둥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특히 헌재가 “가정과 혼인의 유지는 당사자의 자유로운 의지에 맡겨야지 형벌로 강제할 수 없다.”고 하였지만 이러한 간통으로부터 사회의 근간이며 헌법과 공동선의 가치인 혼인과 가정을 보호하는 것은 국가의 당연한 임무이며, 보조성의 원리에 의하면 국가의 의무인 것이다. 또한 “간통죄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는 주장도 혼인 자체로써 성적 자기결정권은 이미 행사되었고, 성적 자기 결정권의 진정한 의미는 성을 창조하시고 성에 질서를 부여하신 하느님의 계획을 따라 행사되는 데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해선 안 될 것은 간통죄 폐지는 간통을 인정해서가 아니라 간통죄를 처벌하도록 한 형법 제241조가 갖고 있는 법률적 흠결로 인한 위헌 판결이기 때문에 간통죄의 취지를 살릴 수 있도록 위헌 소지를 없앤 법률로 다시 제정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종래에 간통죄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바로 이혼이 전제되어야 했다. 이혼소송을 먼저 진행한 후에 간통으로 고소해야 하는 것이 그동안의 관례였다. 즉 더 이상은 상대방과 결혼생활을 지속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전제로 해야 간통으로 고소할 수 있었고, 이혼소송이 진행 중일 때만 가능했다. 따라서 간통죄 폐지는 죄형법정주의에서 보면 과잉금지원칙이 적용되어 개인의 일에 국가가 너무 끼어들면 좋지 않다는 형법의 보충성에 의해서 ‘윤리나 도덕적으로 지탄받아야 될 일이지 형법이 나서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이제 부부간의 간통죄는 법으로 통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윤리와 도덕적 문제로 종교적 신념과 가치 안에서 인간사회를 지켜가는 하느님의 법으로 판단해야 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변화는 사회 구성원들의 양심적 성숙과 신앙인들의 성숙한 신앙이 더 요구되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한다.


복음적 삶과 성숙한 신앙의 요구

콕스(H. Cox)와 베클레이(W. Barclay)는 성의 우상화를 고발하는 일이야말로 오늘의 그리스도교가 해야 할 시급한 사명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 이 세상에서 파생된 성윤리를 접하면서 ‘복음대로 살기란 지독히 어려운 일’이라고 말하면서 스스로를 합리화시키지 말아야 할 것이다. 특히 성윤리와 관련하여 어려운 점은 이것과 관련한 악이 만연하고 있고 더군다나 여론이 이에 냉담하거나 아니면 아예 동조하거나 부추기는 판단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간통죄 위헌 결정과 같은 일들을 성의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는 하나의 진보라고 여기거나, 새 시대가 도래하는 약속의 표지로 착각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어리석기 짝이 없는 생각인가를 삶의 실천을 통해 증거 해야 할 사명을 지닌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급변하는 성적 혼란의 시대에 철저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을 세상으로부터 강요받고 있다. 즉 영의 가난과 돈에 대한 숭배, 정결과 쾌락사이에서 철저하고도 근본적인 선택을 내릴 것을 요청받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더 적극적인 의미에서 9계명인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통해 부부 서로가 마음과 몸의 정결을 지키고, 서로에게 충실하며 서로의 참된 존엄성을 향유하면서 같은 애정과 같은 생각을 통해 서로를 성화시키기 위해 마음의 정화까지 다스리는 성숙한 신앙을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

[월간빛, 2015년 5월호,
김정우 요한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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