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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 일치기도주간에 알아보는 16세기 종교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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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1-22 ㅣ No.188

그리스도인 일치기도주간(18~25일)에 알아보는 16세기 종교분열

교회 분열,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 책임


16세기 종교분열의 도화선을 당긴 마르틴 루터 목각 초상.
 

이른바 16세기 종교개혁은 그리스도교 세계에 걷잡을 수 없는 분열과 혼란을 초래했다.
 
그 발단이 교회 쇄신에 대한 열망이었다 하더라도 그리스도교는 이로 인해 여러 갈래로 갈라졌고, 30년 전쟁(1618∼1648) 한복판에서 크나큰 고통을 겪어야 했다. 원인은 매우 복잡하다. 또 저마다 사관(史觀), 즉 역사를 보는 눈이 다를 수 있기에 잘잘못을 따져 양측이 모두 만족할만한 결론을 도출하기도 쉽지 않다.

그렇다 하더라도 종교개혁은 오늘날 너무나 많은 왜곡과 오해로 덧칠돼 있다. 특히 일반인들에게는 "부패하고 타락한 교회와 성직자들이 '면죄부'를 팔아 일어난 사건"이라는 중고교 세계사 교과서 수준의 이해가 전부이다. 그리스도인 일치기도주간(18∼25일)을 보내면서 종교분열에 대한 오해를 벗겨본다.


종교 '개혁'인가, '분열'인가

같은 현상이더라도 어떻게 이름 짓느냐에 따라 성격이 달라진다. 그래서 정확한 용어를 쓰는 게 중요하다.

개혁(改革)의 사전적 의미는 '제도나 기구 따위를 새롭게 뜯어고침'이다. 진정한 개혁은 기존 체제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모순과 폐단을 바로 잡는 것이다. 그러나 루터(루터교)를 비롯한 칼뱅(장로교)과 쯔빙글리 등은 자신이 몸담았던 교회(가톨릭)를 개혁한 게 아니라 밖에 나가 새로운 교회를 세웠다. 그것은 실패한 개혁이며, 가톨릭교회 입장에서 보면 분열 또는 반란이다. 하지만 다른 용어를 쓰는 게 어색할 정도로 종교개혁이라는 용어가 고착돼 있다.
 

면벌부? 면죄부?
 
면죄(免罪)는 교회가 돈을 받고 죄를 사해줬다는 인상을 주려고 대사(大赦, indulgence)를 악의적으로 오역한 것이다.

대사는 죄의 대가인 벌을 면제해 주는 것이지 죄 자체를 사면하는 효력은 없다. 죄를 사하는 유일한 방법은 고해성사뿐이다. 가톨릭 신자들은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용서받고, 사제가 주는 보속(기도, 선행 등)을 통해 죄의 대가를 치른다. 그러나 보속을 현세에서 완전히 실천하지 못해 남게 되는 잠벌(暫罰)은 사후에 연옥에서 채워야 하는데, 이 잠벌을 면해주는 것이 바로 대사다. 면죄부는 잘못된 용어다.


루터가 문제 삼은 대사부 남용은

대사 남용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당시 피렌체 메디치가문 출신인 교황 레오 10세는 메디치가의 학문과 예술에 대한 열정을 바티칸으로 끌어들였다.

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등 르네상스 거장들에게 성 베드로 대성당 신축을 비롯해 바티칸 성미술 작업을 맡겼다. 그러다보니 막대한 자금이 필요해 대사부를 남용하게 됐다. 전에는 대사 획득에 대한 보속으로 신심행위(기도와 성지순례)와 선행(자선)이 주로 주어졌으나 15세기 들어 선행을 현금 납부로 대신할 수 있게 한 게 화근이다.
 

종교분열은 왜 독일(신성로마제국)에서 시작됐나

중세 후기 프랑스와 영국 등은 중앙집권적 형태의 정치체제를 갖췄다. 그러나 독일은 국가적 통합을 이루지 못한 채 7선 제후에 의해 운영되는 지방분권 국가였다. 황제 선출권이 있는 7선 제후 가운데 3명이 '대주교급' 종교 제후였다.
 
이 가운데 마인츠의 알브레히트 대주교는 요하네스 테첼이라는 수사에게 대사부 판매에 관한 소임을 맡겼는데, 테첼 수사가 판매를 극대화하기 위해 무리수를 두었다. "돈이 헌금함에 '짤랑'하고 떨어지는 순간 연옥 영혼이 해방된다"는 등 효과를 과대 포장한 것이다. 1517년 이런 행태를 반박하면서 분열의 도화선을 당긴 사람이 마르틴 루터(비텐베르크대학 신학교수) 수사신부다. 또 교황청으로선 아무래도 국왕들보다 각 지방 제후들에게 건축기금 등을 요청하기가 수월했다. 그러다보니 독일인들 사이에서 반로마 정서가 팽배해졌다.
 

루터는 그 파장을 예상했나

예상하지 못했다. 한국교회사연구소장 김성태 신부에 따르면,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대사를 시행한 대주교와 교구장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 신자들이 대사를 오용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학술토론회를 요청했다(루터가 비텐베르크성당 정문에 반박문을 걸었다는 설은 근거가 없다). 그러나 반응이 없자 그 편지에 동봉했던 대사에 관한 견해서를 동료들에게 보냈는데, 이것이 출판업자 손에 들어가 이듬해 '95개조 명제'로 인쇄되면서 대사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루터는 초기만 해도 가톨릭으로부터 떨어져 나올 생각이 없었다. 그가 교황제도를 거부한다는 비난을 받자 교황에게 편지를 보내 대사 명제 출판에 대해 해명하고, 교황에 대한 충성심을 표명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럼 왜 그토록 빠르게 종교가 분열됐나

종교분열은 종교적 요소 외에 정치와 사회경제, 그리고 시대적 배경을 함께 봐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당시 교회 권위로부터 벗어나려는 정치적, 사회적 기류가 그 어느 때보다 강했다. 그렇기에 종교분열 원인을 종교적 영역에서만 찾는 것은 옳지 않다.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 프란즌 교수는 저서 「교회사」(1965년)에서 "루터가 종교적, 정신적, 정치적, 사회적 불만으로 가득 차 있던 화약통에 불똥을 던진 셈"이라고 평가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제2회기 개막식(1963)에서 "교회 분열은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의 책임"이라며 화합을 강조한 바 있다. 또 "가톨릭교회에서 해를 입었다고 느껴왔을 갈라진 형제들에게 용서를 청하는 한편 가톨릭교회가 입은 해에 대해서도 용서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평화신문, 2012년 1월 22일, 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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