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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충청수영 5위의 순교와 이장(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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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1-15 ㅣ No.1112

[보고서] 충청수영(忠淸水營) 5위(五位)의 순교(殉敎)와 이장(移葬)1)

 

 

Ⅰ. 머리말

 

1866년 3월 30일 충청수영에서 순교한 5위 성인은 다블뤼 안(Daveluy, 安) 주교를 비롯하여 위앵 민(Huin, 閔) 신부, 오매트르 오(Aumaître, 吳) 신부, 황석두(黃錫斗) 루카, 장주기(張周基) 요셉 회장 등이다. 이 5위 성인의 교회 활동과 순교에 관해서는 비교적 잘 알려진 편이나, 순교한 후 그 장례와 이장 과정에 대해서는 별로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이 5위 순교자 중 그 시신을 가족들이 찾아간 황석두 루카를 제외하고 4위는 두 차례 이장을 하고 박해기간 중 일본 나가사키(長 崎)까지 유해가 봉송되었다가 되돌아오는 등 많은 우여곡절을 겪게 되었다. 이 논문에서는 먼저 5위의 순교와 황석두 루카의 장사에 관해 살펴보고, 다음에 4위의 이장과 그 유해를 1882년 나가사키(長崎)로 봉송하였다가 1894년 반송한 과정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Ⅱ. 5위의 순교 장면

 

충청수영 5위의 처형은 1866년 3월 30일 예수수난대재 날에 집행되었다. 5위가 순교한 후 시체를 거두어 장사한 이치문 힐라리오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5위가 충청 수영에 도착함에 「대접하는 법은 사부 양반(士夫兩班)과 같이 하와 아전과 노령(奴令)이 주교 앞에서는 말 한 마디를 흩뿌리지 아니하고 주교, 신부 세 위는 장청(將廳) 아랫방에 앉히고, 조선 교우들은 윗방에 앉히고 다담(茶啖)을 올린즉, 두 교우는 먹지 아니하고, 안(安, Daveluy) 주교, 오(吳, Aumaître) 신부는 떡국을 잡사오시고, 민(閔, Huin) 신부는 얼마 아니 잡수시고, 주교가 교우의 먹지 아니하는 것을 보시고, “어찌 아니 먹느냐? 달라.” 하시와 오(吳) 신부와 한가지로 더 잡수시었다.」2)

 

사형장은 보령 갈매못이라 하는 곳인데, 수사(水使)가 있는 수영(水營)에서 한 10리쯤 떨어진 강가이었다.3)

 

「법장으로 나가시는 것을 보니, 앞에는 창과 기를 든 군사가 나가고, 그 다음에 풍류를 갖추는 풍악장이 늘어서 가고, 그 뒤에 안 주교, 오 신부, 민 신부, 황석두, 장주기 회장이 짚둥우리 타고 나가고, 마침에 수사가 따라가옵더이다. 나가실 때에 또 보니, 안 주교 형상은 흔연하고, 오 신부는 변색 없고, 민 신부는 우는 소리 내고4), 두 교우는 변색 없삽더이다. 안 주교 말씀이 “어서 나가지 아니하고 이리 더디 가느냐?”호령하시옵더이다 … (중략) … 죄인이 처음 만나서 법장까지 따라갔습니다. 법장에 이르러 수사는 높은 데 장막 치고 앉고, 군사들은 좌우로 가운데 비워두고 섰고,5) 죽일 이들은 군사들 서 있는 끝에 강가에 내려놓고, 결박하였던 것 다 끌러놓고, 상투에 명패 하나씩 달았사온데, 죄인이 그 시체를 거두어 장사할 때 그 명패를 본즉 죄목이 없이 죄인의 성명만 있사온데, 안, 오, 민, 장은 똑똑히 써 있는 줄 알고, 안 주교라 썼는지, 안토니오라 썼는지는 생각 안 나며. 신부네와 장 회장도 어떻게 썼는지 모르오며, 황석두 루카 명패는 죄인이 그 시체를 안 거둔 고로 모르옵니다. 죽이기 전에 얼굴에 회 발랐는지, 죄인이 먼데서 본 고로 똑똑히 모르며, 옷 다 벗기고 죽였는지는 똑똑히 모르나, 시체 찾을 때 보니 옷 하나 없이 발가벗고 있삽더이다.」6)

 

그날이 수난대재(受難大齋) 날이기 때문에 다블뤼 주교가 “오늘 내가 오전에 죽을 터이다.”라고 하였는데, 한낮이 다 되도록 처형을 아니 하자, “어서 결박하고 죽여 달라.” 하고 외쳤다. 그러자 구경꾼들이 “지금 죽을 놈들이 어서 죽여 달라 한다.” 하며 수군대었다. 사형장에 이르러 수사가 좌기하고 다담을 차려드리니, 황석두 루카는 흔연한 모습으로 “천주의 내신 만물을 오늘 마지막 먹으라 하시고 주신다.” 하고 기뻐하며 드시고, 안 주교는 국만 한 그릇 드시 고, 두 신부와 장주기 회장은 조금 손만 대었다.7) 이렇게 죽음을 눈앞에 두고 즐거운 마음으로 웃으며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고 군중들은 별 일이라고 하였다.8)

 

공주에서 휘광이가 와 사형을 집행하는데, 맨 먼저 안 주교의 목을 반쯤 베고 웃돈(예정)을 더 달라 하며 베지 아니하였다. 안 주교의 몸이 뒤틀리며 목에서 보배로운 순교의 선혈이 낭자하게 흘러내렸다. 그러자 보령 원님이 400량을 더 주기로 정한 후 오매트르 신부는 두 번의 칼질에 목이 잘리고, 다른 증거자들은 모두 단칼에 참수되었다. 처형에 앞서 그들은 비열한 잔인을 극도로 발휘하여 안 주교의 옷을 완전히 벗겼다. 그리고 다른 증거자들에게는 바지를 남겨두었으나 밤에 몹쓸 놈들이 와서 벗겨 갔었다.

 

시체들은 4일간 그대로 버려진 채 있었다. 그러나 개나 까마귀가 감히 침범하지 못했다. 사흘째 되는 날 저녁 그 근처에 사는 외교인들이 법장근처에 모래를 파고 다블뤼 주교, 오매트르, 위앵 신부는 한 무덤에 묻고, 황석두 루카, 장주기 요셉 회장 두 시체도 다른 무덤에 함께 묻었다.

 

 

Ⅲ. 5위 순교자의 장사와 이장


1. 황석두 루카의 장사

 

처형 후 5위의 시체는 4일간 사장에 버려진 채로 있었다. 그후 얼마 안 되어 외교인들이 5위 순교자의 시체를 모래를 파고 묻었다. 그러나 황석두 루카의 시체는 몇 주일 후 그의 배교한 가족들이 와서 파다가 부여군 홍산면(鴻山面) 삽티(揷峙: 홍산면 상천리)에 안장하였다. 「4월 13일에 시신을 본집으로 모셔올 때 시체 조금도 상하지 아니하고, 얼굴 화색이 생시 같으며, 매 맞은 상처가 다 나아서 딱지가 있고, 귀에 살 박은 흔적이 있었다. 시신을 홍산 삽티에 안장하였 고…」9)

 

황석두 루카는 체포 당시 서천 산막골(山幕洞)10)에 살고 있었다. 그러므로 시신을 본집으로 모셔왔다는 것은 산막골 본집으로 모셔왔다는 것인지, 혹은 삽티로 이사한 뒤 그 집으로 모셔왔다는 것인지 분명치 않다. 그러나 홍산 삽티에 안장하였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 기록을 근거로 필자는 그 무덤을 찾기 위해 1985년 겨울방학 때 삽티를 찾아갔었다. 눈이 흩뿌리는 추운 날씨였다. 마을 이장을 만나 물어 보았으나 전혀 알 길이 없었고, 옛날 교우들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몇 채의 초가집은 모두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음식점이 새로 생겼으며, 복숭아를 심은 과수원으로 개발돼 있었다. 이곳 과수원 개발 공사를 할 때 항아리에 담은 작은 철제 십자고상과 묵주가 출토되어 당시 홍산 성당 김동욱 신부에게 가져다주었는데, 김동욱 신부가 절두산 순교기념박물관에 기증하였다고 한다. 지금 황석두 성인의 무덤이 혹시 삽티 어딘가에 있다고 하여도 아무런 표지가 없기 때문에 찾을 길이 없다. 이리하여 황석두 루카 성인의 유해는 유실된 것이다.

 

 

2. 1866년 4월 교우들에 의한 1차 장사

 

황석두 루카의 시체는 배교한 그 가족들이 찾아다가 삽티에 장사하였다. 그렇다면 가족들이 찾아가지 않은 4위의 시신은 어찌 되었을까?

 

처형장 모래밭에서 처음 시신을 찾아 이장한 것은 1866년 4월 8 · 9일이었다. 4위의 이장은 처음 이(李士心) 바오로11)와 김(순장) 요한12)에 의해 계획되다가 장주기의 아들 장노첨이 3월에 보령으로 내려와 이 바오로와 김 요한을 만나 이장 의사를 밝힘에 따라 급진전된 것으로 보인다. 김(순장) 요한이 1882년 3월 15일 당시 부감목 블랑(Blanc) 신부에게 올린 보고서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전략)… 분부하신 사단은 처음 죄인이 치명하신 (다블뤼) 주 교, 신부의 시체를 염장(殮葬)하올 마음이 간절하오나 혼자 계책이 없사와 두루 방구(方求)하오나 교우들이 다 위험하다 하옵기로 중지하여 왔더니, 마침 남포 땅에 사는 이(李士心) 바오로라 하옵는 교우가 와 죄인더러 “주교, 신부 장사할 마음이 있다.” 하더니, “어찌 하겠느냐?” 하옵기에, “과연 하겠노라.” 하오니, “우리 둘이 하자.” 하고, 돈 걱정을 하온즉 “돈은 걱정 말라.” 하고 이 바오로의 말이 “내 논 19 두락 문서 전권(典券)하고 돈 90량을 내었으니 쓰자.” 하옵기로 장사 날을 4월 초8일로 정하였사옵더니, 전에 알지 못하던 사람 장(張周基) 회장의 아들이라 하고 찾으나, 죄인은 외인(外人) 중에 장종비적(藏蹤秘迹: 자취를 감추고 숨어 있음)하여 있삽고, 교우 상종은 없고, 근처 교우 혹 약간 아옵는데, 근 200리에 사는 사람이 찾아 왔삽기로 연고를 물은즉, “제 부친이 꿈에 와서 아무데 사는 아무 사람이 내 시체를 거두려 하는데, 너는 무심히 있느냐? 재삼 발현하옵기에, 그대 성명을 알고 찾아왔노라.” 하옵기로, “그러면 우리가 4월 초8일 장사하겠으니 오라.” 하였삽더니, 그날 왔삽기로 한가지로 장사하였삽더니 …(후략)…」13)

 

이처럼 김(순장) 요한과 이(李士心) 바오로가 주동이 되어 장사를 하려는데, 때마침 장(張周基) 회장의 아들 장노첨이 찾아와 4월 8일 함께 장사를 한 것이다. 방시영 프란치스코는 장사하던 날의 일을 블랑(Blanc) 신부에게 또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전략)… 안(安) 주교와 신부의 시체 거둘 마음이 간절하오나 위험한 시절이라고 생각만 하고 있삽더니, 병인(1866) 3월에 장(張周基) 회장의 아들이 와 “가자” 하옵기로, 4월 초에 장 회장의 아들과 한가지로 들어가 시체 있는 장소에 가보고 나와서 장 회장 아들 말이 “나는 다른 곳에 찾아 볼 사람이 있어 가니, 곧 나아가 장치선(張致善)과 상의하여 사람 3 · 4명과 염포(殮布)를 구처하여 가지고 초8일에 장사하게 오라.” 하옵기에 나와서 장치선을 보고 연유 말을 하온즉, 염포와 사람 네 명을 구변하여 한가지로 “가자” 하옵기로, 초8일에 미쳐, 각처 사람이 가서 한가지로 한 패는 광중을 역사하옵고, 한 패는 시체를 모셔오고 분주히 하오나, 날이 평명이 되오니, 황황급급하와 장사도 못 하옵고, 날이 밝은즉 “다 주인에게로 갈 수 없으니, 이곳에서 산으로 나아가라” 하옵기(에), 손자중(孫子仲)과 장(주기)(張周基) 회장의 아들과 남포(藍浦) 사람만 장사하라 하옵고, 죄인은 데리고 간 사람들과 한가지로 왔사오며, 그때에 쓴 돈은 장(주기) 회장의 아들 말만 듣고 소용은 염려 말라 하옵기, 그런 사단은 알은 채 아니 하였사오며, 그 후 이장은 죄인은 모르오며, 그때 왔던 사람도 혹 모르는 사람이 있사오나 피차 인사도 못한 이가 있사온즉, 죄인이 똑똑히 아는 사람만 후록 하나이다.

신부주 기체후 안강하옵심 바라옵나이다.

임오(1882) 3월 15일 방 프란치스코 상백

 

장 회장 아들

임중심 외(교)인

손자중

죄인[증언자] 방시영

방순오

김성도

서도심 」14)

 

이때 장사하는 일에 주동적 역할을 하였던 이(李士心) 바오로의 아들 이치문 힐라리오는 또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전략)… 장(주기)(張周基) 회장의 아들 노첨이라 하는 이가 내려와서 하는 말이 시체를 찾으려 경영하고 다래골 와서 물은즉 “모르겠다 하기에 왔노라.” 하온즉. 죄인의 부친(李士心)이 말하기를 “그러하면 일을 시작하자.” 하와 몇 사람과 의논을 하온즉, 누구의 대답이 어떻게 된 줄도 모르고, 장노첨이가 데리고 온 사람도 대개 네, 다섯인 듯하나, 그 사람이 돈을 얼마 가지고 온 것도 모르옵고, 노첨이가 데리고 온 사람 중에도 똑똑히 아는 사람은 방시영과 임중심이와 서(도심) 필립보뿐이요, 죄인의 식구와 죄인의 질서 이(李) 바르나바 성여와 한가지로 가서 시체 묻은 곳을 4월 초8일에 가 본즉, 돌로 봉분을 쌓아 놓았기에, 주막이 가까운 고로 소리나게 못 하옵고, 손으로 차차 헐어들어 가온즉, 시체 하나가 드러나기에 본즉, 적신(赤身)으로 묻고 또 목은 각각 몸에 맞추어 놓고 칡으로 허리를 둘러매고, 칡 틈에 나무틀 패를 만들어 언문(諺文)으로 쓰기를 “오가(吳哥)라” 하였기로 오(吳) 신부이신 줄을 알고, 또 다음에 안(安) 주교 시체가 그 모양이옵고, 그 다음은 민(閔) 신부이옵고, 그 다음은 장(주기) 회장이라.

 

밤에 시체 모양을 본즉 빛은 희유스럼하옵고, 물은 내왕하는 모양이옵고15), 냄새는 과하지 아니하와 시상(屍床)을 가지고 가서 올려 놓고 마포(麻布)를 가지고 감아서 지개에 넷이 지고 나선즉 공론이 “아무데나 사태 난 데 묻고 가자.” 하기에, 죄인의 말이 못 될 줄로 말씀하고, 주교 시체가 그 중 무거운 고로 죄인이 지고 앞서며 “나만 따르라.” 하와 급히 대참에 일하는 곳으로 가서 묻을 때에 봉분은 하나이나 광중(壙中)은 넷이옵고, 이 일을 할 때 주인은 수청고지서 사는 죄인의 장인 최(崔) 안드레아이옵고, 이때 손자중(孫子仲)이가 왔으나, 일 다하고 쉬는 날 와서 다녀가옵고, 신창(新昌) 남방재서 살던 김백원이라 하는 사람은 죄인의 처고모의 사위가 되옵는데, 홀아비로 다니다가 죄인의 처가에 와 있는 고로 한가지로 일은 하였사오나 삯은 주었사오며 …(후략)…」16)

 

이상으로 4월 8일의 장사 상황을 살펴보았다. 사형장 모래밭에 4위의 시체가 묻혀 있었는데, 무덤 위를 돌로 쌓아놓았었다. 밤에 들어가 시체를 파낼 때 무덤과 주막과의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하며 발굴하여 지개에 지고 와서 봉분은 하나이나 광중은 넷으로 하여 묻었었다.

 

또 이치문 힐라리오는

 

「병인(1866) 초아흐레 날에17) 죄인과 죄인 형 둘 이(李三哲) 끼수와 이(치서) 이냐시오와 이(李) 바르바라와 김성집이와 장(張周基) 회장 아들과 또 다른 교우 몇이 가서 안(安) 주교, 오(吳), 민(閔) 신부, 장(張周基) 회장의 시체를 거두어 염하니까 날이 새옵더이다. 빨리 염하여 가지고 한 10리 되는 데로 뫼셔다가 네 구덩이를 나란히 파고 관(棺) 없이 묻었더니…(후략)…」

 

라고 증언하였다. 그런데 이때 장사한 곳의 지명이 기록돼 있지 않아 아쉽기 그지없다.

 

이처럼 4월 8․9일에 4위의 시체를 갈매못 사형장에서 한 10리 떨어진 곳에 장사하였다. 

 

 

3. 1866년 7월 교우들에 의한 2차 장사(서짓골 장사)

 

교우들이 갈매못 처형장에서 4위의 유해를 찾아다가 1886년 4월 8 · 9일 처형장에서 10리 쯤 떨어진 곳에 1차 장사를 하였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이(李士心) 바오로가 4위의 무덤에 가 보았다. 여우가 무덤을 침범하였었다. 이것을 보고 이(李士心) 바오로는 그해 6월에 김(순장) 요한을 찾아가 이장을 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리하여 두 사람이 합의하고 각각 경비를 마련한 뒤 시체를 싣고 오기 위해 배 삯을 50량으로 정하고 외인의 배를 빌려 타고 무덤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가 풍랑을 만나 6일을 바다에 떠 있다가 겨우 돌아와 남포 서재골18) 담배밭 가운데 장사하였다. 이때의 일을 김(순 장) 요한은 이렇게 증언하였다.

 

「6월에 이(李士心) 바오로가 죄인에게 와서 “여우가 신부의 시체를 침노하였으니 이장을 하자.” 하옵기로, 죄인은 교우에게 수합하와 40량을 가지고, 이(李士心) 바오로는 자비 50량하여 가지고, 7월 초4일19) 시체를 파, 배에 싣고 남포(藍浦)로 오려 하는데, 선가(船價)를 50량 정하였삽더니, 사공이 마다하옵기로, “우리는 천주 성교하는 사람이라, 선생의 시체를 거두러 왔더니, 너희들이 마다하니, 만일 일후 누설 있으면 너희도 무관치 아니 하리라.”

 

하온즉 마지못하여 싣고 돌아옵다가 풍랑을 만나 엿새를 괴로이 지내었삽기로20), 상급으로 20량을 주옵고, 돌아와 남포 땅에 장사하옵는데, 1좌에 안(安, Daveluy) 주교, 2좌에 민(閔, Huln) 신부, 3좌에 오(吳, Aumaître) 신부, 4좌에 장(張周基) 회장이오나 위로 보면 통히 한 분 산소이로소이다. 자세한 말씀 다 못 아뢰오니, 이후 뵈옵고 소상히 여쭈오리다.

이후 신부주 기체 안강하옵심 천만복망.

임오(1882) 3월 15일 김 요한 상서」21)

 

또 이치문 힐라리오는 이때의 일을 보다 자세하게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그 후 얼마 지낸 뒤에 산소에 가본즉 여우가 구멍을 뜷은 고로 죄인의 부친22)이 돌로 막고 와서 또 들리는 말이 “혹시 수상하여 그저 둘 수 없다.” 하여 홍산(鴻山) 도암골서 사는 김순장에게 그 말을 하온즉 김순장의 말이 “내가 돈을 얼마든지 당한다.” 하더니, 국실(공주시 반포면 국곡리[菊谷里]) 점에 가서 그 동네 신 회장과 한가지로 내려올 때에 돈 40량을 가지고 왔으나, 김순장이 그 돈 40량 중 얼마 당한 줄은 모르고, 죄인의 형 (이치서) 이냐시오가 죄인의 셋째 형 (李三哲) 끼수와 한가지로 오 좌수(吳座首)라 하는 집에 가서 돈 50량을 얻어 왔사오나, 이 돈은 나중 번 7월에 쓴지, 처음 4월에 쓴지는 모르고, 또 (李三哲) 끼수가 돈 40량 대고, 죄인의 부친이 27량을 대어 가지고 수청고지로 가서 외인의 배를 삯을 내되 두 물거리에 삯 40량으로 작정하였다가, 나중 여러 날이 되매 20량을 더 주었사오며, 사공 그 동네서 사는 서성학이 형제는 죄인의 처편 일가요, 최 요한의 계모의 손자라. 성교는 행치 아니하오나 성교 일은 다 아옵고, 죄인의 의부(義父) 동서되는 안일삼이라 하는 사람과 죄인의 장인 최(崔) 안드레아 합이 사공 넷이 오르고, 죄인의 3형제와 질서(姪壻) 이(李) 바르나바와 조카 영화가 배에 오르고, 무덤을 파본즉 시체가 거의 썩고, 개와 여우가 침노한 흔적은 민(閔) 신부 왼편 엄지발가락이 상하였으나, 그저 붙어 있고 아주 떨어지지는 아니 하였삽고, 냄새는 감당키 어려우나 칠성판은 그 칠성판으로 쓰옵고, 배는 새로 바꾸어 가지고 염(殮)하오니, 이때는 7월 13일 밤이라. 다 하여 가지고 나선즉 또 날이 밝은지라. 급히 배에 올리고 수로(水路) 5리쯤 여수애23) 큰 강 어귀 가서 있다가 바람이 일어나며 비와 뇌성이 대작하오니, 이때는 밤이라 다 겁을 내고 도로 가 “피하라” 하는 대로, 두 번 쫓겨 들어와서 또 나가다가 솔섬24)이라 하는 데로 쫓겨 밤에 풍랑을 겪어 거의 죽을 뻔하옵고, 아침에 밥을 시키고 사공이 나서 보더니, “오늘은 더 큰 바람이 일어날 터이니, 일찍 녹안이뿌리25)로 가라.” 하더니, 행선(行船)을 시작하매 바람이 크게 일어나 화살 같이 달아나니, 수로 20리를 가서 녹안이로 가매, 떠날 때 앉힌 밥이 겨우 끓었으니, 그 속하게 달아난 것은 가히 알 터이옵고, 물에 떠 있기를 8일을 하고 집에 12일만에 돌아온즉 김순장은 죄인의 집에서 죄인들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삽고, 신 회장도 한가지로 있사와 남포 서재골 담배밭 가운데 광중은 넷을 파고 봉분은 하나를 만들 때에 산 주룡(主龍)으로 동남간으로 향하여 서서 마련하오면 좌편은 민(閔) 신부요, 다음은 안(安) 주교요, 그 다음 우편은 오(吳) 신부요, 그 다음은 장(張周基) 회장이라. 장사하고 헤어질 때에 수합한 재물은 다 없어지고, 국실 사람들 올라갈 노비가 없사와 남포 평바위골 사는 최이경이라 하는 사람은 최 요한의 8촌인데, 돈 일곱 량을 내어 노비하여 보내었고…(후략)…」26)

 

김 요한의 증언과 이치문 힐라리오의 증언 사이에는 날자와 풍랑으로 물에 떠 있었던 기간 등에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시체를 파서 싣고 나오다가 풍랑을 만나 신고한 끝에 겨우 살아 돌아와 남포 서재골 담배 밭에 장사한 것만은 동일하게 증언하였다.

 

또 장사하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놀라운 삽화(揷話)도 있었다.

 

「(전략) 2, 3일만에 남포 곰재27)로 와 시체를 거리에 모시고 날이 새니, 할 수 없이 각기 가 숨었거늘, 자다 깨어보니 (李士心) 바오로가 없으므로 (김)선우가 찾다가 할 수 없어 시체 계신 곳으로 가 보니 거기 있거늘, 깨우니 일어나며 말하되 “안 주교의 시체를 베고 누웠더니 든든하여 한 잠을 잘 잤노라.” 일어나 모시고 남포 뒤재로 올라와 장사를 지내되 서편은 주교요, 가운데로는 오 신부요, 동편으로는 민 신부요, 산소지방(山所之方)은 남포 교우 살던 동네에서 뒷날로 올라가 서편으로 내려가고, 동네로 내려오는 향점 (向点)에 올라가 보면 턱이 분명히 있고, 염장(殮葬)은 평장(平葬)이요…(후략)…」28)

 

“안 주교의 시체를 베고 누웠더니 든든하여 한 잠을 잘 잤노라”고 한 이 바오로의 고백은 우리에게 많은 감동을 안겨준다. 사람이면 누구나 시체를 혐오한다. 비록 부모의 시체라 할지라도 두려워하고 무서워한다. 그런데도 이 바오로는 든든하여 잘 잤다고 고백하였다. 바오로의 이 고백은 안 주교에 대한 그의 신뢰감이 얼마나 컸던가를 단적으로 표현해 준다.

 

1864년 7월 남포 서재골(서짓골)에 4위의 유해를 장사한 후 이 바오로는 그 해 12월 8일 서울 포청에서 치명하였다.29)

 

 

4. 1882년 블랑 신부가 강경에서 4위 유해를 확인, 나가사키로 봉송

 

1866년 7월 교우들이 4위의 유해를 서짓골에 장사한 후 18년이 지나 1882년 당시 부감목 블랑(Blanc) 신부는 유해의 유실을 염려하여 이 바오로의 아들 이치문 힐라리오에게 그 유해를 강경으로 발굴하여 오라고 명령하였다. 그때의 일을 이치문 힐라리오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죄인이 강경(江景)이에 살 때, 백(白, Blanc) 주교가 신부 때에 죄인 보고 말씀하시기를 “그 시체를 장사한 사람 중에 너희 형제 밖에 그 무덤 자리를 아는 이가 없으니, 너 죽기 전에 파오라.” 하시기에 죄인과 죄인 형 이냐시오 치서와 죄인 조카 이 안드레아와 김성보 합 4인이 대개 신사(1881)년 봄 2월 즈음에 가서 네 시체를 파서 백 주교께 바쳤더니, 백 주교께서 “그 시체를 네 집에 두었다가 누구 오거든 주어라.” 하시기에 한 달포 동안 죄인 집에 두었더니, 어느 교우가 와서 법국(法國)30)으로 들여간다 하기에 내주었습니다.」31)

 

그 후 한 달 동안 4위의 유해를 이치문 힐라리오 집 벽장에 보관해 두었다가,32) 다시 진안 널티 문 베드로 회장댁으로 옮겼다.

 

「1882년 당시는 감목대리가 공석이었기 때문에, 조선 선교지의 장상이었던 부감목대리 백(白, Blanc) 신부의 명에 의해 발굴되어, 그 자신에 의해 강경(江景)에서 확인되었다. 그 해 3월 23일 각 유해를 보자기로 싸고, 그 보자기 위에는 각각 조선의 이름을 적어 놓았었다. 자루를 묶은 노끈은 부감목대리의 인장으로 봉인되고, 4개의 자루는 진안 널티33)에 있는 문 베드로 회장댁에 보관되었었다. 이 사실들은 1882년 5월 22일에 기록된 편지와 동년 6월 2일 서울에서 밝힌 그의 증언에 명백하다.」34)

 

이렇게 4개의 자루에 담아 진안 널티 문 베드로 회장댁에 보관된 4위의 유해는 1882년 11월 6일 무사히 나가사키(長崎)에 도착하였다.35) 그때 유골을 나가사키로 봉송한 사람은 블랑(Blanc) 신부의 복사했던 권 타대오였다.36)

 

블랑 신부의 요청으로 4위의 유골을 받아 보관한 나가사키 교구 프티장(Petitjean, 1829~1884) 주교는 1860년 나가사키로 파견돼 페레(Furet) 신부가 1863년에 착공한, 현재 일본의 국보인 오우라 천주당(大浦天主堂) 건축을 인계 받아, 1865년 2월 15일 완공하였다. 당시 나가사키 교구장 지라르(Girard) 신부는 이 성당을 ‘일본 26성인성당’으로 명명하고 축성하였다. 프티장 주교는 또 우라가미(浦上) 교우촌에 250년 동안, 7대째 숨어 살던 교우들이 찾아와, 우라가미 신자들을 발견한 신부로 일본천주교회사상 유명한 분이며, 나가사키 초대 교구장이다. 그와 오우라 천주당은 한국 천주교회와도 관계가 깊다. 1878년 만주로 추방된 리델(Ridel) 주교가 1880년 일본 요코하마(橫濱)에서 《한불자전》과 《한어문전》을 인쇄, 출판하고, 1882년 12월 31일에는 오우라 천주당에서 거행되는 일본인 세 신학생의 사제 서품식에 참석, 이곳에 잠시 머물었으며, 1883년 7월 8일에는 블랑(Blanc) 주교의 성성식이 프티장 주교의 집전으로 오우라 성당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37)

 

그러면 4개의 자루에 담아 나가사키로 봉송된 4위의 유골은 어디에 안치되었을까?

 

「1866년 3월 30일, 조선 갈매못에서 파리외방선교회의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오매트르 신부와 신도회장 장주기가 순교하고, 그 시체가 매장되었다. 1882년 3월, 이들 순교자의 무덤이 파괴돼 유골이 짓밟힐 위험성이 높아지자, 파리외방선교회 블랑 부관구장은 박해가 끝난 일본에게 순교자의 유골을 보관하여 달라고 지시하였다. 그 결과 순교자의 유골은 그 해 11월 6일 무사히 나가사키에 도착, 프티장 신부가 받아, 그 후 12년간 오우라 천주당(大浦天主堂)에 보관하였다. 유골은 1894년 5월 22일, 박해가 끝난 조선으로 반환되었다.」38)

 

「명치(明治) 15년(1882) 11월에는 조선교회가 박해를 만나, 더욱 귀중한 것으로 여기는, 그들이 순교자들의 성유물(聖遺物)을 맡긴 것은 평화를 찾은 일본의 나가사키 26성성당(長崎26聖聖堂)이었다. 이 성유물이 그들의 모국으로 돌아간 것은 오랜 후가 되어서였다.」39)

 

위의 두 인용문에서 보듯 4위의 유골이 안치된 곳이 일본26성순교자천주당(日本26聖殉敎者天主堂)인 오우라 천주당(大浦天主堂)이다. 그러면 오우라 성당 어디에 안치하였을까? 4위의 유골이 나가사키에 도착한 후 12년간 오우라 천주당에 보관되었었다고 글을 발표한 나가사키 교구본부(敎區本部) 나가노 히로키(長野宏樹)는 문헌의 기록은 없지만 지하가 아니겠느냐고 하였다. 수긍이 갔다. 그리하여 필자는 나가노 히로키(長野宏樹)의 소개로 2008년 5월 8일 오우라 천주당 주임 모로오카(諸岡) 신부를 찾아갔다. 거기서 나카하마(中浜) 수녀의 안내를 받아 지하에 들어가 프티장 주교의 묘를 확인하고, 4위의 유골도 프티장 주교의 묘 주변 어디에 안치되었다가 반송되었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5. 1894년 4위의 유해 조산으로 돌아옴

 

4위의 유해는 12년 동안 오우라 성당에 안치되었다가 조선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그 유해가 언제, 어떻게 돌아왔는가? 그에 대하여는 《병인박해순교자 1차재판기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1893년, 내가40) 이 시체들을 적합한 때에 조선으로 보내주기를 청하자, 위에서 말한 4개의 자루들은 나가사키 쿠산(Cousin, 1842~1911) 주교에 의해 위임된 일본 교황파견선교사 프란치스코 보네(Bonne, 1855~1912) 신부에 의하여 확인되었다. 안 주교의 유해를 자루에 담아서 꽉 동여맸던 노끈은 습기 때문에 썪고, 좀에 삭아있었고, 다른 세 개 자루의 노끈들은 여행 중에 터져 있어서, 자루를 각각 다시 대마(大麻) 끈으로 휘감았고, 그 대마 끈은 나가사키 주교의 인장으로 봉인되었다.

 

이것들은 1893년 11월 21일 나가사키에서 교황파견선교사 프란치스코 보네(Bonne) 신부의 증언에서 명백하고, 또 그 나가사키 주교에 의한 증언에서 명백하다. 왜냐하면 나가사키 주교의 편지에서 입증되는 바와 같이, 이듬해(1894) 4월 30일 잘 포장된 네 개의 자루를 각각 나무 상자에 담아, 나가사키 주교가 ‘포페(Forfait)’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배의 선장 R. D. 리크루(Recouloux)에게 그 유해들을 조선으로 운구하도록 맡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금년 1894년 6월 21일 푸아넬(Poisnel, 朴道行) 신부41)와 마라발(Maraval, 徐若瑟) 신부42)와 함께 위에서 말한 포페(Forfait) 배에 올랐다. 그 배는 제물포(濟物浦)에 도착하였다. 위에 언급된 유골이 들어있는 4개의 상자를 받아, 다음날 그것들을 프와넬 신부와 함께 용산(龍山)으로 운반하여 신학교에 안치하였다. 마라발 신부는 주교관으로 운반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르장드르(Le Gendre, 崔昌根) 신부의 배려로, 그것들을 (     ) 제4일에 이곳으로 옮겼다.

 

우리는 나가사키 교황파견선교사 프란치스코 보네 신부의 증언에서 지신한 대로, 상자들을 열어, 기록과 봉인된 봉투들을 확인했다. 1893년 11월 21일에 기록된 것이다. 나가사키 주교의 인장으로 봉인된 각 자루의 기록들은 완전했다.

 

그래서 감목대리는 이 자루에는 하느님의 종들의 유골이 각각 담겨 있다고 공포했다. 즉 다블뤼 주교, 오매트르 신부, 위앵 신부, 장낙소[장주기] 요셉 회장의 유골이다.

 

나가사키 주교의 인장으로 봉인된 유해들은 완전하였다. 우리는 각 자루를 흰 무명 노끈으로 묶었다. [판독난해] 베르뇌(Berneux) 주교와 그의 동료들을 위하여 각 자루의 뼈들이 개별적으로 담겨 있는 이들의 이름을 상자의 표면에 기록하고, [판독 난해] 각 노끈의 끝들은 나무판에 고정하였다. 마침내 11개의 상자들43)이 여러 묘혈에 안치되었다. 이 묘혈들은 서울 부 주교좌성당의 지하방에 준비되어 있었다 …(후략)…

1900년 9월 11일 대목구 주교관에서

공증인 홍병철(洪秉喆) 루카

대목구장 뮈텔(Mutel)」44)

 

위의 기록에서 보듯 1893년 뮈텔(Mutel) 주교가 4위의 유골을 조선으로 보내달라고 청하자, 나가사키 쿠산(Cousin) 주교의 명을 받은 보네(Bonne) 신부가 1893년 11월 21일 4위의 유골을 추심, 1894년 4월 30일 잘 포장된 4개의 자루를 각각 나무상자에 담아 나가사키 주교의 인장으로 날인, 포페(Forfait)라는 배의 선장 리크루(Recouloux)에게 반송을 위탁하였다. 그리하여 1894년 6월 21일 제물포항에 도착하였다. 이에 뮈텔 주교는 푸아넬 신부와 마라발 신부를 대동하고 배에 올라가 유골이 담긴 4개의 상자를 받아 용산 신학교에 안치하였다. 그 후 1900년 11월 4일 용산 신학교에서 명동성당 지하 묘혈로 옮겨 안치하였다가, 1967년 절두산 순교기념관으로 옮겨 안치하였다.

 

 

Ⅳ. 맺음말

 

다블뤼 안(Daveluy, 安) 주교, 위앵 민(Huin, 閔) 신부, 오매트르 오(Aumaître, 吳) 신부, 황석두(黃錫斗) 루카, 장주기(張周基) 요셉 회장 등 5위는 국혼 때문에 서울에서 처형하지 않고 충청 수영으로 압송, 군문효수하라는 명이 내려져, 멀리 충청도 수영이 있는 보령시 오천면(鰲川面) 영보리(永保里)로 압송돼 와, 수영에서 10리 쯤 떨어진 오천면(鰲川面) 소성리(蘇城里) 갈매못에서 1866년 3월 30일 예수수난대제날 순교하였다.

 

순교 전날 밤 수영에 도착하였는데, 주교와 신부 세 위는 장청 아랫방에 앉히고, 조선 교우들은 윗방에 앉히고 다담상을 올렸다. 조선 교우들이 떡국을 아니 먹자, 다블뤼 주교는 교우들에게 “왜 아니 먹느냐? 아니 먹으려면 달라.” 하고 가져다가 오매트르 신부와 나누어 먹었다. 짚둥우리 타고 처형장으로 나갈 때, 다블뤼 주교는 기쁜듯 얼굴빛이 흔연하고, 다른 분들은 평소와 별로 다를 바 없는데, 위앵 신부가 솔재 고개에 이르러 슬픈 모양으로 고개를 숙이고 ‘흥흥’ 소리를 내며 울었다. 형장에 이르러 상투에 명패를 하나씩 달았다. 그 날이 수난대제날이기 때문에 다블뤼 주교는 “오늘 내가 예수님처럼 오전에 죽을 터이다.”라고 하였는데, 한낮이 되도록 처형을 아니 하자, “어서 결박하고 죽여 달라.”고 소리쳤다. 형장에서 마지막으로 다담상을 올리자. 황석두 루카가 “천주의 내신 만물을 마지막 먹으라 하시고 주신다.” 하며 기뻐하고 먹었다. 공주에서 휘광이가 와서 형을 집행하는데, 안 주교의 목을 반쯤 베고 웃돈(예정)을 더 달라고 흥정, 400량을 더 주기로 하자, 남은 분들은 모두 단칼에 참수하였다.

 

시체들은 4일간 모래밭에 버려진 채로 있었다. 외교인들이 5위 순교자의 시체를 모래를 파고 그 자리에 묻고 돌로 쌓아놓았다. 그 후 황석두 루카의 시체는 그 배교한 가족들이 찾아다가 부여군 홍산면 삽티(揷峙)에 안장하였으나, 실전되고 말았다. 그 나머지 4위의 시체는 이사심(李士心) 바오로, 김순장 요한, 장주기 아들 장노 첨, 방시영 프란치스코 등이 힘을 합해 1866년 4월 8일 밤에 시신이 묻힌 갈매못으로 들어갔다. 주막에서 거리가 멀지 않기 때문에 돌 허무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조심하며 시신을 발굴, 10리쯤 지개로 지고 와서 네 구덩이를 나란히 파고 관 없이 장사하였다. 이것이 1866년 4월 8 ․ 9일 교우들에 의한 1차 장사였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이사심(李士心) 바오로가 4위의 무덤에 가보았다. 여우가 구멍을 뚫고 침범한 흔적이 있었다. 그리하여 홍산 도암골 사는 김순장과 상의 이장을 하기로 결정하고 이사심 바오로의 아들 이치서 이냐시오, 이삼철(李三哲) 끼수, 이치문 힐라리오, 힐라리오의 장인 최 안드레아 등이 1866년 7월 13일 외교인의 배를 빌려타고 들어가 무덤을 파 보았다. 시체는 거의 썩고 냄새가 진동하였다. 시체를 거두어 새로 염하는데 날이 밝아 왔다. 4위의 시체를 급히 배에 싣고 5리쯤 되는 여수해(狐浦, 오포리)에 왔을 때 풍랑이 일기 시작, 솔섬(松島), 녹안이뿌리를 거치는 동안 1주일쯤 풍랑으로 신고하며 시체를 내리지 못하고 배 안에 갇혀 있었다. 풍랑이 가라앉은 뒤 미산면 평라리 서짓골 담배밭 가운데 광중은 넷을 파고 봉분은 하나로 하여 장사하였다. 이것이 1866년 7월 13일에 시작된 교우들에 의한 2차 장사였다.

 

1866년 7월 교우들이 4위의 유해를 남포 서짓골에 장사한 지 18년이 지나, 1882년 당시 조선의 부감목 블랑(Blanc) 신부는 4위의 유해 유실을 염려하여 이치문 힐라리오에게 파 오라고 명하였다. 그 때 강경에서 살고 있던 이치문 힐라리오는 이 명을 받고 형 이치서 이냐시오와 조카 이 안드레아와 김성보 합 4명이 가서 유해를 발골, 블랑 신부에게 바쳤다. 블랑 신부는 강경에서 그 유해가 4위의 유해임을 확인하고, 4개의 자루에 담아 서명하고 이치문 힐라리오에게 잘 보관하였다가 다음에 누가 와서 달라고 하면 주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치문 힐라리오는 자기 집 벽장에 4위의 유해를 한 달 동안 보관하였다. 그 후 블랑 신부는 4위의 유해를 다시 진안 널티(板峙) 문 베드로 회장댁에 보관하였다가 권 타대오를 통해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봉송하였다. 당시 나가사키 주교 프티장(Petitjean) 주교는 4위의 유해를 일본26성순교자성당인 오우라 천주당(大浦天主堂) 지하(추정)에 봉안하였다가 뮈텔(Mutel) 주교의 반환요청으로 당시 나가사키 교구장 쿠산(Cousin) 주교의 명을 받은 보네(Bonne) 신부가 유해를 추심, 1894년 4월 30일 잘 포장된 4개의 자루를 각각 나무상자에 담아 나가사키 주교의 인장으로 날인하여 포페(Forfait)라는 배에 실어 반송, 1894년 6월 21일 제물포항에 도착하였다. 그 후 용산신학교에 안치하였다가, 1900년 11월 4일 다시 명동성당 지하 묘혈에 안치, 1967년 절두산 순교기념관 지하 묘혈에 안치하였다.

 

………………………………………………………………………

 

1) 본 원고는 집필자가 관련 현장을 직접 답사하고 관련 사료들을 검토하여 작성한 ‘현장 답사 보고서’이다.

 

2) 《병인치명사적》, 24권, p.114. No. 12-B. <안 주교 등 치명사적>. 또 이치문 힐라리오는 1차재판 회차 83에서는 “서울서 내려와 고마수영에서 하룻밤을 쉴 때 떡국을 차려다 드리니까, 신부, 교우는 안 잡수고, 안 주교는 한 그릇 다 잡수이었다.”고 증언하였다.

 

3) 이치문 힐라리오는 “강가”라 하였으나, 달레(Dallet)는 “바닷가의 모래사장”이라 하였다.

 

4) 이치문 힐라리오는 또 “솔재라 하는 고개에서 민 신부가 슬픈 모양으로 머리를 숙이고 ‘흥흥’ 소리를 내며 울었다.”고 증언하였다.

 

5) 달레(Dallet) 는 “다른 군사 200명은 죽 늘어서서 사방에서 몰려오는 구경군의 무리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고 하였다. 《敎會史》 (하), p.434.

 

6) 《병인박해순교자시복1차재판기록》 회차 83.(1900. 3. 22.)

7) 《병인치명사적》, 24권 p.148, 헤르메네질드 광호의 증언.

8) 같은 책, 1권, p.32. 721 안 주교, 724, 황석두 루카.

9) 《병인치명사적》 16권, p.63. <황석두 루카 재건>

10) 산막골 : 서천군 판교읍 금덕리

11) 그는 1866년 12월 8일 체포돼 서울에서 순교하였다. 그 이름은 李士心, 《左捕》, (영인 본) p.427. 《치명일기》 134.

 

12) 김 요한의 자, 혹은 이름이 ‘순장’인 듯하다. 이치문 힐라리오의 증언(병인치명사적, 24 권, p.114. 다블뤼 주교 등 치명사적)에 홍산 도암골 사는 김순장이 7월 장사에 돈 40량을 가지고 왔다고 하였다. 그런데 김 요한 자신이 블랑(Blanc) 신부에게 올린 보고서한에서 7월 장사에 자신이 돈 40량을 대었다고 하였다. 이로 보아 김 요한은 김순장임이 틀림없다. 김선우라고도 부른 듯하다. 《병인치명사적》 11권 p.52, <이 바오로> 참조.

 

13) 《병인치명사적》, 24권, p.66. No. 8-A. 황 마르타 증언.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정리번호 180.

14) 《병인치명사적》, 24권, p.68. 《병인순교자증언록》 정리번호 181.

15) ‘물이 내왕한다’는 것은 무덤 속에 물이 들어오면 안 되는데, 4위의 무덤에는 물이 들어왔다 나간 것을 말한 것이다.

16) 《병인치명사적》, 24권, p.114. No. 12-B. <안 주교 등 치명사적>

17) ‘4월’이 빠진 듯하다.

 

18) 서재골 : 1991년에 간행된 《보령군지》(1991년간)에는 미산면 평라리에 ‘서짓골’이 있다. 평라리에 ‘곰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서짓골’이 ‘서재골’과 같은 마을임에 틀림없다. 이 마을 이름은 여러 가지로 불리고 있다. 이치문 힐라리오는 1차재판 회차 83에서는 ‘서지동’이라고 하였고, 또 《병인치명사적》에서는 ‘서직골’이라고 하였다. 그 아들 이윤오 바오로는 2차재판 회차 12에서 이 마을을 ‘서주골’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1925년에 4위 묘지를 답사한 정규량 레오 신부는 《경향잡지》574호 <치명지와 치명자 묘지 발견>이라는 답사기에서 이 마을 이름을 ‘서직골’이라고 하였다.

 

19) 이치문 힐라리오는 ‘7월 초아흐레날’이라고 하였다. 《병인순교자시복1차재판기록》, 회차 83. (1900년 3월 22일 증언)

20) 이치문 힐라리오는 ‘물에 떠 있기를 8일’이라고 하였다. 다음 인용문 참조.

21) 《병인치명사적》, 24권 p.66. <백 신부주전 상살이>. 《병인순교자증언록》, 정리번호 180.

22) 이사심(李士心) 바오로를 말한다.

 

23) 여수애 : 여수해라고도 한다. 보령시 오천면 오포리. 지픈골 서북쪽에 있는 마을. 호포(狐浦), 여소포(如所浦)라고도 부른다. 지형이 여우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보령군지》 1991. p.1025.

 

24) 솔섬 : 보령시 주교면 송학리. 송도(松島). 《보령군지》 1991. p.1022.

 

25) 녹안이뿌리 :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 가승구지 녹안이, 녹안여라고도 한다. 보령지방 사투리에서 지명 밑에 붙은 ‘여’는 암초 혹은 바닷물 위로 솟은 바위를 뜻한다. 이 지방에서는 배가 암초에 부딪힌 것을 ‘배가 여에 닿았다’고 한다. 녹안여는 바닷물 위로 바위가 솟은 곳이라 한다. 그 외에도 ‘검은여’ 등의 지명이 있다. 오천면 소성리 고경식 증언.

 

26) 《병인치명사적》, 24권, p.114. <안 주교 등 치명사적>

27) 곰재 : 보령시 미산면 평라리에 있는 고개. 《보령군지》 1991. p.1058.

28) 《병인치명사적》 11권 p.52. <이 바오로>

29) 《치명일기》134. 이 바오로; 《左捕》, 丙寅, 12. 7. 李士心.

30) 법국 : 프랑스. 그 유해는 프랑스로 간 것이 아니라 일본으로 갔다.

31) 《병인박해순교자시복1차재판기록》 회차 83(1900. 3. 22.) 이치문 힐라리오 증언

32) 《병인박해순교자시복2차재판기록》 회차 12(1921. 11. 21) 이치문 힐라리오 아들 이윤오 바오로 증언.

33) 널티 : 진안군 부귀면 신정리.

34) 《병인박해순교자시복1차재판기록》 5권, p.1907. 라틴어기록.

35) 長野宏樹, 〈프티장 신부, 조선의 성인의 유골을 보관하다〉《旅する 長崎學》 5, p.10.

 

36) 《병인박해순교자시복1차재판기록》 9권, p.1750, 이원명 빈첸시오 증언 참조. 권(치문) 타대오는 블랑 신부의 지시에 따라 다블뤼 주교 등의 유해를 가지고 페낭 신학교로 유학갈 신학생 2명과 함께 1882년 11월 6일에 나가사키에 도착하였다. 코스트 신부의 1882년 11월 6일자 서한(A-MEP, Vol.580, pp.1065~1066) 참조.

 

37) 江口源一, 《기리시탄 부활의 아버지 프티장 주교》, 1991. 九州印刷, p.288.

38) 長野宏樹, 《旅する長崎學》, 長崎文獻社, 2006. p.11.

39) 江口源一, 위의 책, p.289. 

40) 내가 : 뮈텔(Mutel) 주교를 말한다.

41) 프와넬 신부 : 당시 명동성당 주임신부였다.

42) 마라발 신부 : 그는 1893년부터 제물포본당 주임신부로 재직하였다. 

 

43) 유골을 담은 11개의 상자는 베르뇌 장 주교, 다블뤼 안 주교, 도리(Dorie) 김 신부, 볼리 외(Beaulieu) 서 신부, 푸르티에(Pourthié) 신 신부, 프트니콜라(Petitnicolas) 박 신부, 오매트르(Aumaître) 오 신부, 위앵(Huin) 민 신부, 장주기 요셉 회장, 브르트니에르 (Bretenières) 백 신부, 우세영 알렉시오 등이다.

 

44) 《병인박해순교자시복1차재판기록》, 5권. pp.1905-1908

 

[학술지 교회사학 vol 6, 2009년 12월(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하성래(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위원)]

 

원본 : http://www.casky.or.kr/html/sub3_01.html?pageNm=article&code=115678&Page=19&year=&issue=&searchType=&searchValue=&journa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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