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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최양업 신부님 서품 169주년 기념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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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5-02 ㅣ No.1761

최양업 신부님 서품 169주년 기념 특집 (1) 유년 시절과 신학생 선발

 

 

땀의 순교자 최양업(崔良業) 토마스(1821-1861년) 신부님은 두 번째 한국인 사제로서, 세례명은 토마스. 양업(良業)은 아명(兒名)이고 관명(冠名)은 정구(鼎九), 본관은 경주, 충청도 다락골에서 출생하셨다.

 

최양업 신부님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 성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와 복녀 이성례(李聖禮) 마리아의 장남으로 태어나 부모로부터 신앙교육을 받으며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의 가족은 이미 증조부 때 이존창(李存昌)의 권고로 천주교에 입교했었다. 본시 서울에서 살았는데 조부 때 박

해를 피해 낙향, 당시 홍주(洪州) 땅인 다락골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최양업 신부님의 부친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께서 출생하였고, 최경환은 이성례와 결혼함으로써 김대건 신부 일가와 친척관계를 맺게 되었다(최양업과 김대건은 진외 6촌간).

 

다락골에서 점차 생활이 넉넉해지고 또 외교인 친척들과의 접촉으로 인해 신앙생활이 해이해지자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은 보다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영위하고자 형제들을 설득하고 그들과 같이 서울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3년 만에 천주교 집안인 것이 탄로되어 서울을 떠나야 했는데 이 때 성인은 과천(果川)의 수리산 뒤뜸이로 피신하였다. 1836년초 입국에 성공한 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님은 즉시 조선인 성직자 양성을 위해 신학생 선발에 착수했는데, 어린 최양업은 16살이 되는 해에 수리산에서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제 1회 조선 신학생의 선서문

 

1836년 12월 2일

조선 신학생이 수업할 신학교 교장 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노라.

나에게와 또한 나의 뒤를 이어 조선교회를 다스릴 목자들에게 순명과 복종을 맹세하느냐?

- 맹세합니다.

 

나에게와 또한 나의 뒤를 이어 조선교회를 다스릴 수석성직자들에게 장상의 허가 없이는

그들이 지정하지 아니한 다른 지방이나 다른 회로 가지 않을 것을 맹세하느냐?

- 맹세합니다.

 

외방전교회 신부 조선선교사, 조선교회의 수석으로 있는(이 아래에 있는 서명한) 나는 이 소년들 - 즉 최 프란치스코(최 야고보와 황 안나의 아들, 태생지 : 경기도 남인), 최 토마스(태생지 : 충청도 홍주 다래골), 김 안드레아(태생지 : 충청도 밋내 놀매) - 이들이 오주(吾主) 예수 고상 앞에서 복음 성경 위에 손을 얹고 1836년 12월 2일 서약하였음을 받았음.

 

조선 선교사 베드로, 필립벨도, 모방 [2018년 4월 15일 부활 제3주일 원주주보 들빛 5면]

 

 

최양업 신부님 서품 169주년 기념 특집 (2) 신학생 시절과 서품 그리고 조선입국

 

 

어린 김대건과 최방제 그리고 최양업 세 소년은 1836년 12월 3일 마카오로 가기 위해 의주(義州)를 향해 서울을 떠났다. 정하상(丁夏祥), 조신철(趙信喆) 등 유지 교우들이 그들을 동행했는데 이들은 세 소년을 변문(邊門)까지 인도하고 거기서 새 선교사를 맞아들이게 되어 있었다. 일행이 12월 28일 변문에 도착한 후, 세 소년은 중국인 안내원을 따라 중국 대륙을 횡단, 이듬해 6월 7일 목적지인 마카오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마카오 주재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경리부 책임자 르그레주아(Legregeois) 신부님은 경리부 안에 임시로 조선신학교를 세워 조선인 신학생 3명을 교육하기로 결정하였다. 최양업과 김대건은 아편전쟁을 전후해 현지에서 일어난 민란(民亂)으로 인하여 두 번이나 마닐라로 피난해야 했고, 또 최방제와 1년여 만에 사별(死別)하는 등 그들의 유학생활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으나 그래도 1842년까지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1842년 최양업은 소팔자가(小八家子) 교우촌에서 신학공부를 계속하였다.

 

1844년 신학생 최양업과 김대건은 소정의 신학과정을 끝내고 연말에(늦어도 12월 15일 이전) 페레올 주교님으로부터 부제품까지 받았으나 교회법이 요구하는(만 24세) 연령 미달로 사제품까지 받지는 못하였다.

 

최양업은 1845년 한 해를 기다림 가운데 허송한 뒤 1846년 초에 메스트르 신부님과 같이 두만강 쪽을 통해 처음으로 입국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그 뒤 최양업은 요동교구의 베르뇌 신부님의 사목활동을 도왔으며, 1846년을 그는 한국 최초의 사제이며, 동료인 김대건 신부님이 순교한 소식을 들었다. 이제 최양업은 육로(陸路)로의 입국을 단념하고 해로(海路)로의 입국을 시도하고자 1847년 초에 홍콩에 도착한 부제 최양업은 입국의 기회를 기다리는 동안 페레올 주교님이 보내온 한국 순교자 전기를 프랑스어에서 라틴어로 옮겼다. 이후 여러 번 조선 입국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1849년 상해에서 4월 15일 강남교구장 마레스카(Maresca) 주교님으로부터 사제품을 받고 동료 김대건에 이어 두 번째 한국인 사제가 되었다. 최 신부님은 다시 육로 입국을 시도하고자 5월 요동으로 떠났다. 연말을 기다리며 7개월 동안 베르뇌 부주교님을 도우며 사목경험을 쌓았다. 12월 변문으로 떠났고, 이번에는 입국에 성공했다. 실로 입국 길에 오른 지 7년 6개월, 입국의 시도를 거듭하기 다섯 번만의 성공이었다. [2018년 4월 22일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 원주주보 들빛 5면]

 

 

최양업 신부님 서품 169주년 기념 특집 (3) 사목활동과 선종

 

 

1849년 귀국하자 최양업 신부님은 휴식을 취할 겨를도 없이 충청도에 있는 페레올 주교님을 만난 다음 전라도부터 사목활동을 시작하였다. 1850년 최양업 신부님은 6개월 동안 5개도 5,000리를 순회하는 가운데 어려운 시대상황 속에서 비참한 삶을 사는 신자들과 생사고락을 같이하였다. 1851년 페레올 주교님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고 다블뤼 신부님도 계속 병에 시달려 쇠약해졌으므로 최양업 신부님은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등 더 많은 공소를 돌봐야했기에 10월부터 공소순회를 시작하여 피로와 궁핍을 감수하며 8개월 동안 5,937명이 살고 있는 교우촌을 돌아야 했다. 최 신부님은 여름철의 휴가를 이용하여 충북 배티의 한 교우촌 절골에서 동생들로부터 부모님의 순교에 관한 증언 자료와 여러 순교자들의 자료를 수집하기도 했다. 1853년 2월 초까지는 페레올 주교님과 다블뤼 신부님을 간호해야 했으며 그러는 중에도 전국 각처 12,000명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어야 했다. 1856년 3월 2일 조선 4대 교구장 베르뇌 주교님과 푸르티에, 프티니콜라 신부님의 입국으로 마음에 큰 위로가 되기도 했다. 또한 르그레주아 신부님의 요청으로 순교자의 자료를 수집하던 중 기해일기에 빠져있는 우리 교구 출신의 순교자로 원주에서 참수형을 받은 복자 최해성 요한에 관한 증언을 수집할 수 있었다.

 

1859년 최양업 신부님은 기해, 병오 박해 순교자 82위가 교황청으로부터 가경자(可敬者)로 선포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접하고, 그해 성무집행을 위해 7,000리를 걸어야 했으며 관할지역 5개도에 공소만도 100개 이상을 사목하였다.

 

1861년 그는 하루에 80리 내지 100리를 걸었고 밤에는 고해성사를 주고, 날이 새기 전에 다른 공소로 떠났다. 그러면서 그는 한 달 동안 나흘 밤 밖에 수면을 취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성사집전을 끝낸 그는 주교님에게 보고 차 상경하던 중 1861년 6월 식중독과 과로에 의한 장티부스 발병으로 경상도 문경(聞慶)에서 쓰러져 보름 만에 선종하셨다. 최 신부님의 임종은 배론의 신학교 교장 푸르티에 신부님이 지켜보며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배론에서 170~180리 떨어진 곳으로 나는 간신히 최 신부님이 숨을 거두기 8~9시간 전에 도착할 수 있었으며 그는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되풀이 하고 있었다.”

 

장례식은 베르뇌 주교님의 집전으로 조선 선교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배론 신학교에서 장엄하게 거행되었고, 신학교 산기슭에 매장되었다. 교구장 베르뇌 주교님은 “최 신부님의 굳건한 신심과 영혼의 구원을 위한 불같은 열심, 그리고 무한히 귀중한 일로는 훌륭한 판단력으로 우리에게 그렇게도 귀중한 존재였다. 그는 12년간 거룩한 사제의 모든 본분을 지극히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사람들을 감화하고 성공적으로 구원에 힘쓰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애도하였으며, 다블뤼 주교님은 “최 신부님의 뛰어난 덕행, 그의 지칠줄 모르는 열성, 그의 재능과 뛰어난 재질, 무슨 일이든 해내는 능력 등으로 미루어 현재로서는 그것을 메울 수 있는 길이 없다”고 그의 유덕을 추모해 마지않았다. [2018년 4월 29일 부활 제5주일(이민의 날) 원주주보 들빛 3면]

 

 

최양업 신부님 서품 169주년 기념 특집 (4) 가경자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 시복시성 경과보고

 

 

땀의 순교자이신 최양업 신부님의 시복시성을 추진하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의 일입니다. 1996년, 배티성지에서 최신부님의 전기 자료집을 간행하면서 시작된 신부님의 시복 청원 운동은 1997년, 주교회의 추계 정기 총회에서 한국 천주교 초기 순교자들의 시복 시성 작업과 함께 통합하여 논의하는 것으로 결정되었습니다.

 

2001년, 주교회의는 최양업신부님의 시복시성 안건의 청구인으로서 그 절차를 진행하기 시작하였고, 그 첫 번째 시복법정이 2005년 12월 3일에 열렸습니다. 그 뒤로 4년간 총 13번의 시복 법정이 진행되었는데 마지막 법정이 2009년 5월 20일에 있었습니다. 같은 해 6월 3일, 마침내 주교회의는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시복시성 법정 문서’를 교황청 시성성에 제출하였습니다.

 

이 문서를 접수한 교황청은 문서들을 면밀하게 검토한 뒤에 최종 심사자료인 ‘심문조항(포시지오)’를 2014년 8월 23일 시성성에 제출했습니다.

 

이에 따라 교황청 시성성 역사위원회 심의가 같은 해 11월 8일에 열렸고, 시성성 신학위원회 심의가 2015년 12월 15일에, 성덕 단계인 추기경과 주교들의 회의는 2016년 3월 14일에 열렸습니다.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신부님의 시복 추진 건이 다른 순교자들보다 오래 걸리는 이유는 최 신부님이 신앙의 증거자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증거자 시복 조사에는 기적 심사가 따르기 때문에 한국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는 2007년 4월 15일에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기적 심사에 즈음하여”라는 담화문을 발표하여 신자들에게 최양업 신부님의 전구로 초자연적 은혜, 즉 기적을 받은 사례를 제보해 주기를 요청했습니다. 이 후 2015년 9월 8일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주관으로 기적 심사 법정이 열었습니다.

 

그리고 영광스럽게도 지난 4월 26일,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영웅적 성덕을 인정하는 교황청 시성성 교령을 승인하셨고, 그 다음날 바티칸 라디오를 통해 공식 보도되면서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님께서 마침내 ‘가경자’로 선포되셨습니다.

 

‘가경자’란 교황청 시성성 시복 심사에서 영웅적 성덕이 인정된 ‘하느님의 종’에게 붙이는 존칭입니다. 가경자로 선포된 증거자가 시복되기 위해서는 그의 전구(轉求)를 통해 기적이 일어났음을 입증하는 ‘기적 심사’를 통과해야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신부님께 전구하여 초자연적 은혜를 얻은 사례가 나타나 주교회의는 지난 6월 17일 교황청 시성성의 기적심사를 위한 법정에 그 문서를 제출하였습니다. 이 기적사례가 기적심사 법정에서 통과되어 복자품에 오를 수 있도록 시복시성을 위해 기도합시다. [2018년 5월 6일 부활 제6주일(생명 주일) 원주주보 들빛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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