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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일제하 장면(張勉, 요한, 1899~1966)의 교회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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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5-04 ㅣ No.889

일제하 장면(張勉, 요한, 1899~1966)의 교회 활동

 

 

국문 초록

 

이 논문은 한국 천주교회의 대표적인 평신도였던 장면의 교회 활동을 검토한 글이다. 그의 교회 활동이 활발하였던 일제 시기, 즉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정계에 입문할 때까지인 1925~1947년의 활동을 중점적으로 정리하였다.

 

장면은 메리놀회의 지원을 받아 미국 유학을 했고, 교리 및 교회사를 연구하였다. 이를 계기로 그는 1925년부터 1931년까지 메리놀회 선교사들을 도와 평양지목구 설정에 협력하였다. 그는 선교사들의 언어 교육과 전교회장 양성 교육도 담당하였다. 청년회장으로 교리 연구와 강연을 실시하였고, 교회 서적을 번역하기도 했다.

 

장면은 가톨릭 교육에 매진하였다. 그는 가톨릭 종교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였고, 한국 가톨릭 교육의 부진을 지적하면서 개선 방안도 제시하였다. 그는 1931년부터 1947년까지 가톨릭 교육기관에 재직하면서 자신의 교육관을 실천해 나갔다.

 

장면은 가톨릭 청년 단체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1925년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 시복식에 경성교구 천주교 청년회 연합회 대표로 참석하였다. 경성청년연합회 기관지 《별》의 발행 및 원고 작성을 담당하였고, 경성청년연합회가 주관한 1931년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 기념사업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본당 청년회에도 참여하는 한편, 한국 전체의 가톨릭 청년회 조직 구성에도 힘썼다. 1939년에는 경성청년연합회 회장이 되어 침체를 겪고 있었던 연합회의 재기를 위해 노력하였다.

 

장면은 문서(출판물)를 통한 선교도 전개하였다. 그는 《가톨릭 청년》 등 교회 잡지의 발행에 참여하였다. 또한 가톨릭에 대한 ‘오해’와 ‘불신’에 대해 반박하고, 가톨릭만이 ‘그리스도의 유일한 참된 종교’임을 밝히는 글을 작성하였다.

 

이상에서 보듯이, 장면은 평양지목구가 설정되는 데에 주요한 역할을 하였고, 가톨릭 교육기관, 가톨릭 청년 단체 등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이러한 활동으로 천주교회 내에서 대표적인 평신도로 부상하였고, 광복 후 천주교 대표로 정계에 입문하였다.

 

 

1. 머리말

 

장면은 한국 현대 정치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그는 1946년 미군정 자문기관인 민주의원(民主議院) 의원을 시작으로 정계에 입문한 후, 제헌국회 의원, 초대 주미대사, 제2대 국무총리, 제4대 부통령 등을 역임하였다. 1960년 8월에는 제2공화국 국무총리에 취임하였으나 불과 9개월 만에 5 · 16 군사 쿠데타로 실각하였다. 그 후에는 ‘구(舊) 정치인’으로 낙인찍혀 더 이상 정치 활동을 하지 못하였다.1)

 

장면의 생애에서 정치 이력과 함께 주목할 점은 가톨릭 신앙인으로서의 활동이다. 그는 1899년 9월 12일 유아세례를 받은 후, 줄곧 신앙인의 삶을 살았다. 그는 ‘그리스도교 교육가’이자, 교회사가(敎會史家)였다. 정계에 투신한 이후에도 그는 ‘그리스도교 원리’에 따라 행동하고자 했던 ‘가톨릭 정치가’였다. 이처럼 장면은 일생 동안 ‘구도자(求道者)의 길’을 걸었다.

 

장면의 생애에서 가톨릭 신앙과 교회 활동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럼에도 장면에 대한 연구는 주로 정치 활동에 집중되어 있고, 신앙과 교회 활동을 다룬 연구는 그리 많지 않다. 물론, 연구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탄생 100주년이었던 1999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장면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그의 신앙과 교회 활동에 대한 연구가 발표되었다.2)

 

기존 연구들은 장면의 신앙과 교회 활동을 전반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그러나 장면이 남긴 글들을 두루 활용하지 못하고, 몇몇 자료에 의존하였다는 한계가 있다. 장면 혹은 지인들의 회고록을 주로 이용하다 보니 오류도 발견된다. 회고록도 중요한 자료이지만 불완전한 기억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므로 1차 사료와의 비교 검토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에 이 글에서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자료들을 발굴하여 활용하고자 한다. 장면이 작성한 편지와 잡지에 기고한 글, 메리놀 외방전교회 잡지(The Field Afar) 등이 그것이다. 이 자료들을 이용한다면 기존 연구의 오류를 바로잡고, 장면의 교회 활동을 자세히 검토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이 글에서는 장면의 교회 활동이 가장 활발하였던 일제 시기를 한정해서 살펴보려 한다. 장면은 1925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1946년 정계 입문으로 이듬해 8월 동성상업학교 교장직을 그만둘 때까지 교회의 각 방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물론, 장면이 광복 이후에도 교회 활동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광복 이후의 교회 활동은 다음 기회가 있다면 검토해 볼 생각이다.

 

 

2. 평양지목구 설정 협력

 

장면은 1899년 8월 28일 서울 종로구 적선동(당시 삼군부 후동) 외가에서 장기빈(張基彬, 레오)과 황(黃) 루치아의 3남 4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는 생후 15일 만인 9월 12일 종현 성당에서 프아넬(V.L. Poisnel, 朴道行)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1909년 1월 3일에는 인천 성당에서 조선대목구장 뮈텔(G.-C.-M. Mutel, 閔德孝) 주교로부터 견진성사를 받았다.3)

 

장면은 수원농림학교 재학 시절,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살게 되는 중요한 사건을 경험하였다. 재학생들 가운데 유일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프로테스탄트 신자 학생과의 논쟁에서 무기력한 자신에게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가톨릭 교리를 연구하겠다고 결심하였고, 이를 위해 미국 유학을 준비하였다.4)

 

유학을 준비하던 장면은 메리놀 외방전교회(Maryknoll Missioners, 이하 ‘메리놀회’)에 대해 알게 되었다. 메리놀회는 1911년 아시아 지역의 선교를 목적으로 창설된 미국 최초의 외방 선교회였다. 메리놀회 총장 월쉬(J.A. Walsh) 신부가 선교지를 물색하기 위해 중국으로 가던 도중에 1917년 10월 24일부터 11월 2일까지 먼저 한국을 방문하였다.5) 장면은 월쉬 신부의 한국 방문을 알았을 것이고, 메리놀회에 관심을 가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월쉬 신부가 귀국길에 중국인 소년들을 대동하고, 그들의 유학 생활을 지원할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그는 중국인 소년들처럼 미국 유학을 할 수 있기를 원했다.6) 이때 그에게 큰 도움을 준 이는 뮈텔 주교였다. 뮈텔 주교는 메리놀회에 장면의 유학을 주선해 주었고, 장면의 보증인이 되어 총독부로부터 여권을 받을 수 있게 해 주었다.7)

 

장면은 1920년 10월 2일 미국을 향해 출발하여 11월 16일 메리놀회 본부가 있는 뉴욕주 오시닝(Ossining)에 도착하였다.8) 그는 월쉬 신부의 주선에 따라 영어 습득을 위해 1921년 1월 4일 메리놀회 예비 신학교인 베나드 스쿨(Venard School, Clark’s Summit, PA)에 입학하였다. 그는 교장인 번(J.P. Byrne, 方溢恩) 신부의 지도 아래 6개월간 영어와 기타 과목을 학습했다. 또한 신부들의 지도를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실천하였다. 그는 1921년 8월 28일 성 요한 세례자(St. John Baptist) 성당에서 한국인 최초로 성 프란치스코 제3회에 입회하였고, 이듬해 9월 24일 ‘프란치스코’라는 수도명으로 서원(誓願)하였다.9)

 

장면은 1921년 9월 19일 그리스도 교육 수도회(Christian Brothers of the Schools)에서 운영하는 맨해튼 대학(Manhattan College)에 입학하였다. 그는 영어 · 프랑스어 · 철학 · 역사 · 물리 등을 배웠다. 필수 과목으로 매일 한 시간씩 교리도 배웠고, 이와 별도로 교리 · 교회사 · 호교학(護敎學) 등도 연구하였다. 그는 회고에서 “여러 신부님께 개인 지도를 청하여 거의 무제한한 질문으로 신부님들을 괴롭혔다”고 할 정도로 교리 및 교회사 연구에 매진하였다. 전공으로는 교육학을 선택하였고, 1925년 6월 4일 학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유학을 마친 장면은 1925년 8월 29일에 귀국하였다.10)

 

장면은 몇 개월간 휴양을 한 후, 1925년 12월 평안도로 향하였다. 당시 평안도에는 메리놀회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1922년 11월 교황청에서 평안도에 대한 포교권을 메리놀회에 위임하자, 메리놀회는 선교사들을 한국에 파견하였다. 1923년 5월 한국 지부장 번 신부, 10월에는 클리어리(P. Cleary, 吉) 신부, 11월에는 모리스(J.E. Morris, 睦怡世) 신부가 차례로 입국하였다.11) 선교사들이 평안도에 정착하였지만, 언어나 문화를 익히는 데에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이에 번 신부는 영어에 능통하고, 교리 지식도 갖춘 장면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12)

 

장면은 평안남도 평원군 영유 본당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영유 본당은 모리스 신부가 맡고 있었다. 모리스 신부는 1921년 베나드 스쿨의 교사로 재직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13) 장면과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장면은 모리스 신부의 본당 사목을 도왔다. 그리고 1926년 여름 모리스 신부가 설립한 언어 학교(language school)에서 선교사들에게 한글, 한국의 풍습 등을 가르쳤다. 선교사들은 장면의 지도를 받아 빠르게 한글을 습득하였고, 입국 1년 만에 선교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14) 장면은 이러한 교육 경험을 바탕으로 1929년 11월 영한 교회 용어집 The Summary of Religious Terms를 작성하였다.15)

 

장면은 전교회장 학교의 교육도 담당하였던 것 같다.16) 전교회장은 비신자들을 입교시키고, 대세(代洗)를 주는 등 교회의 주요한 직무를 담당하였다.17) 1926년 당시 평안도의 메리놀회 선교사는 13명18)밖에 없었기 때문에 전교회장의 역할이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모리스 신부는 전교회장 양성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1926년경에 전교회장 학교를 설립하였다. 교육은 언어 학교 건물에서 실시되었고, 1926년 12월 당시, 교육생은 15명이었다.19) 한때 전교회장이 되겠다는 생각을 갖기도 했던 장면은 전교회장 교육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20)

 

1927년 3월 17일 평양지목구가 설정된 후, 장면은 평양으로 이사하였다. 그는 1927년 11월 평양 관후리 본당 클리어리 신부의 초청으로 본당 사무를 맡았다.21) 1928년에는 신자 단체인 평양 천주공교 청년회 회장을 맡았다. 그는 교리 연구 모임을 이끌었고, 호교 강사로 활동하면서 “근대 과학자와 악사상 선전가들의 천주교에 대한 공격을 엄정한 공교의 견지로써 반박”하는 요지의 강연을 했다.22)

 

한편, 장면은 교회 서적의 번역 작업에도 착수하였다. 그는 수원농림학교 시절, 프로테스탄트 학생과의 논쟁을 거치면서 교회 서적이 부족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이에 미국 유학 중에 교회 서적에 관심을 가졌고, 귀국 후에 번역 작업을 시작하였다.23) 그가 첫 번째로 번역한 책은 The Faith of Our Fathers였다. 이 책은 미국 볼티모어 대교구의 제임스 기븐스(James Gibbons) 추기경이 쓴 책으로, 성서와 그리스도교 초창기의 성현[敎父]들의 저서를 근거로 가톨릭이 그리스도의 정통 신앙임을 논증한 것이다. 장면은 미국 유학 시절, 월쉬 신부의 추천으로 이 책을 읽었었다. 그는 이 책을 번역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그 후, 학업을 마치고 귀국하여 초대 평양교구장인 방(方) 주교(인용 주 : 번 주교)의 초빙으로 평양교구의 일을 잠시 맡아 보게 되자, 원래 프로테스탄트의 본거라고도 할 만한 평양에서 너무나 미약한 가톨릭의 교세를 상승시키자면, 양교 간의 진부(眞否)를 확증할 만한 호교서가 절실히 필요함을 통감하고 교구장의 양해를 얻어, 곧 ‘교부들의 신앙’의 번역에 착수했다.24)

 

프로테스탄트는 천주교에 앞서 평안도에 진출하였고, 1920년대 초 교세가 천주교의 10배에 달하였다.25) 이처럼 천주교가 약세를 보였기 때문에 장면은 ‘프로테스탄트의 본거’인 평양[평안도]에서 천주교 교세를 확산시키기 위해 1926년부터 이 책을 번역하였다.26) 그는 1927년 12월부터 1930년 12월까지 경성교구 천주교 청년회(이하 ‘경성청년연합회’)의 기관지인 《별》에 <천주공교>(天主公敎)라는 제목으로 기고하였다.27) 그러나 번역서는 바로 출간되지 못하였고, 1944년에 이르러서야 일본인 구로가와[黑川米尾] 신부의 명의를 빌려 《교부들의 신앙》이란 서명으로 간행되었다.28)

 

장면은 1930년, 제2대 평양지목구장 모리스 몬시뇰이 쓴 책을 번역하였다.29) 이 책은 문답식으로 구성된 소책자로, 오직 천주교만이 참 종교임을 밝힌 것이었다. 이 책은 1932년 9월 22일에 《구도자의 길》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다.30)

 

장면은 1929년 10월부터 서포에 있는 평양지목구 관리사무소에서 근무하였다. 지목구의 사무가 체계적으로 확립되었다고 판단한 장면은 1931년 3월 18일 사무직을 사임하고 서울로 이사하였다.31)

 

 

3. 가톨릭 교육 활동

 

장면은 1931년부터 약 17년간 가톨릭 학교에서 교육자로 활동하였다. 물론, 그는 1918년부터 1920년까지 예수성심신학교 강사를 역임하였고,32) 1925년부터 메리놀회 선교사들의 언어 학교와 전교회장 학교의 교사로도 활동하기도 했지만, 이 학교들은 일반 교육기관이 아니었다. 일제하 민족에 이바지하는 길이 ‘민간 교육 사업’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던 장면은 서울에 올라온 후, 교육 활동에 매진하였다.33) 그는 훗날 “나의 지난날에 있어서 가장 오랜 햇수를 차지한 생활이 교편생활이다. 해방이 되는 해까지 거의 이십 년이란 세월을 변함없이 후세의 청년 양성에 노력을 기울였다. 다시 말하면 나의 생의 대부분이 교단에서 늙어졌다. 나의 청춘도 교단에서 흘러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상 싶다”34)고 회고할 정도로 교육 활동은 그의 이력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였다.

 

장면의 교육 활동을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그의 교육관부터 검토할 필요가 있다. 장면은, 교육의 본지는 지적 계발과 덕성 함양에 있다고 보았다. 지적 계발과 덕성 함양이 이상적으로 연결되어야 완전한 교육이 된다고 판단했다. 교육에서 지적 계발 못지않게 원만한 인격과 덕성의 함양이 중요한데, 이것은 가톨릭 종교 교육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했다. 이러한 교육관을 가진 장면은 학교에서 종교 교육을 없애자는 일각의 주장을 ‘망설’(妄說)이라고 비판하였고, 아동기부터 가톨릭 종교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35)

 

장면은 한국 가톨릭 교육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방안을 제시하였다. 한국 가톨릭 교육의 첫 번째 문제는 가톨릭 학교의 설비가 부실하다는 점이었다. 이 때문에 신자들은 종교 교육이 중요함에도 자녀들을 비(非)가톨릭 학교로 보낸다고 하면서 개탄하였다. 그는 가톨릭 학교의 설비가 부실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이것은 교회 당국자의 성의가 없어서가 아니라 재원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36) 또한 그는 중등교육기관의 상황이 더욱 열악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천주교회에서 운영하는 중등교육기관은 동성상업학교 1개교뿐이었고, 여성 중등교육기관은 1개교도 없었다. 유일한 학교인 상업학교마저도 ‘재원의 풍부하지 못함과 교중 인물의 부족으로 인하여 실로 여의치 못한 경영을 계속하는 중’이었다.37)

 

두 번째 문제는 ‘교중 인물’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가톨릭 종교 교육을 실시하고, 가톨릭을 전파할 인재가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장면은 종교 교육에 있어 교사의 역할을 중요하다고 여겼다.38) 그러나 교사 자격을 갖춘 신자가 극히 적었기 때문에 가톨릭 교육기관에서 부득이하게 비(非)신자 교원을 채용할 수밖에 없었고, 장면은 이를 ‘괴탄’(愧歎)한 일이라고 했다.39)

 

장면은 한국 가톨릭 교육의 부진을 지적하였지만, 이것은 일시 과도기적 현상이라고 보았다. 한국 가톨릭 교육계는 향상 중이므로 이를 완성하는 것은 신자들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40) 그러면서 그는 신자들이 실천해야 할 방안 여덟 가지를 제시하였다.

 

① 자녀와 손자를 가톨릭 교육기관에 보낼 것.

② 가정에서도 종교 교육을 시킬 것.

③ 본당 신부를 도와 학교 유지에 곤란이 없게 할 것.

④ 상업학교를 후원하여 가톨릭의 사회적 위신을 보존하고 일반 교육계에 공헌할 것.

⑤ 가톨릭 여자고등보통학교의 경영을 위해 창립 기성회를 조직하고 모집에 착수할 것.

⑥ 교원을 양성하기 위해 유망한 청년을 사범학교에 보낼 것.

⑦ 가톨릭의 사회적 선전 및 활동을 위해 전교회장 학교를 설립하고 고등교육을 실시하여 인재를 양성할 것.

⑧ 중등교육기관의 발전 및 완성에 따라 후일 공교대학(公敎大學)의 기초를 예비할 것.41)

 

이처럼 장면은 가톨릭 종교 교육을 강조하였고, 교육기관의 확충과 인재 양성을 역설하였다. 가톨릭 여성 중등교육기관을 설립하자고 했고, 중등교육기관을 갖춘 다음 가톨릭 대학의 설립을 준비하자고 했다. 모리스 신부가 했던 것과 같이 전교회장 학교를 설립하고 고등교육을 실시함으로써 가톨릭 선교에 앞장설 ‘교중 인물’을 양성할 것도 주장하였다.

 

장면은 이러한 자신의 교육관을 실현하기 위해 1931년부터 가톨릭 교육 활동에 매진하였다. 그는 1931년 4월 1일에 천주교회에서 운영하는 중등교육기관인 동성상업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42) 담당 과목은 영어였지만, 과학을 가르치기도 했다.43) 부임한 직후부터 5년여 동안 서무주임의 보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36년 9월 19일, 교장 박준호(朴俊鎬, 요한)가 사망하자, 그의 후임으로 11월 19일 교장에 취임하였다.44) 장면은 이때부터 1947년 8월까지 11년간 교장으로 재직하였다.45)

 

또한, 장면은 1936년 백동 본당 오기선(吳基先, 요셉) 신부, 동성상업학교 이사인 보댕(J. Bodin, 邊若瑟) 신부와 함께 유치원 설립을 추진하였다. 그는 설립 발기인으로 참여하면서 원사(院舍) 등 시설 마련에 힘썼다. 그 결과, 백동 본당 부설 유치원은 1937년 1월 26일 총독부 학무국으로부터 설립 인가를 받았고, 4월 12일에 개원했다. 장면은 오 신부, 보댕 신부와 함께 설립자로 등록되었고, 초대 원장에 취임하여 1945년 7월경까지 재직하였다.46)

 

장면은 1939년 4월부터 1942년 8월까지 종현 본당 부설 계성심상소학교 교장직을 임시로 맡았다.47)

 

이와 같이 장면은 가톨릭 교육기관에 재직하면서 인재 양성에 매진하였다. 그는 가톨릭 종교 교육을 중시하였는데, 동성상업학교 교사로 활동하였던 유동진(柳東璡)의 회고가 그러한 사실을 잘 말해준다.

 

그분(인용 주 : 장면)의 교육 방침은 철저한 천주교식이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종교적 신념으로 일해 왔다.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항상 강조하였다. 동성학교 시절에 매주 1시간씩 종교 시간이 있어 교리를 가르쳤는데, 그것은 그분이 학교에 오기 전부터 있었던 것이지만, 그분이 교장직을 맡으면서부터 학생들로 하여금 교리 시간에 상당한 관심을 갖게 하는 한편 입교에도 힘썼다. 그러나 그것은 강제성을 띤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다만 교과목 외에 1주일에 1시간씩 배정되어 있었던 것이다.48)

 

한편, 장면은 가톨릭 교육기관의 존속을 위해 노력하였다. 1940년대는 일제가 전시 체제를 내세워 사립학교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던 시기였다. ‘국가의 비상시국의 요청에 의하여 국내 학교를 정비하게 됨에 따라’ 동성상업학교의 존속 여부가 불분명해졌다. 이에 장면을 비롯한 학교 측에서 총독부 학무국과 교섭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1944년 2월 학무국으로부터 동성상업학교를 그대로 존속하라는 통첩을 받을 수 있었다.49)

 

그리고 장면은 대신학교50)가 교육 당국으로부터 인가를 받는 데에도 협력하였다. 1942년 2월 16일 예수성심신학교(대신학교)는 비인가 학교라는 이유로 총독부 학무국으로부터 폐교 조치를 받았다. 그러자 서울대목구에서는 신학생들을 원산대목구 덕원신학교로 보내는 한편, 정식 인가를 받은 신학교의 설립을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장면은 인가 신청 사무를 맡은 서정덕, 소신학교 교장 신인식(申仁植, 바오로) 신부와 함께 서류를 작성하고, 학무국 당국과 교섭한 결과, 1945년 2월 23일 총독부로부터 설립 인가를 받아냈다.51)

 

 

4. 가톨릭운동 참여

 

1) 가톨릭 청년 단체 활동

 

장면은 가톨릭 청년 단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일찍부터 청년회 활동에 관심을 갖고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장면은 유학을 준비하기 위해 1917~1920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 학관 영어과에 재학하였는데,52) 이때 프로테스탄트 청년회 활동을 직접 목격하였을 것이다. 그 당시 프로테스탄트에서는 청년회 연합회를 조직하였을 정도로 청년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었다.53) 장면은 천주교회에서도 청년회의 조직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는데, 다음의 사료는 그러한 사실을 잘 말해준다.

 

김 A 신부님이 제게, 주교님께서 이미 천주교 청년회를 조직하기 시작하셨고 오직 이 목적을 위해서 노련한 사제를 임명하셨다는 편지를 썼습니다. 오, 저는 이 좋은 계획이 하나의 사실로 승인되었고 성장하고 있음을 알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그런 조직들과 제도들이 얼마나 우리에게 간절히 필요로 하던 것이었던가요! 그러나 하느님의 도우심과 주교님의 도우심으로 미래의 언젠가 틀림없이 꽃 피울 것이라고 우리는 확실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54)

 

1921년 5월, 서울대목구 부주교 드브레(E.A.J. Devred, 兪世竣) 주교는 청년회의 조직을 추진하여 ‘노련한 사제’인 크렘프(H.J.-M. Krempff, 慶元善) 신부에게 맡겼다. 크렘프 신부는 각 본당 및 공소 청년회를 연결하는 연합회의 창립을 추진하였다.55)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장면은 천주교 청년회를 ‘절박하게 필요로 하던 것’이라고 하면서 기쁨을 표하였다.

 

1922년 6월 3일 크렘프 신부와 본당 및 공소 대표자들은 경성교구 천주교 청년회 연합회를 창립하였다.56) 창립 당시 장면은 미국 유학 중이었기 때문에 경성청년연합회에 참여하지 못하다가 3년 후인 1925년에 이르러서야 연합회 활동을 할 수 있었다. 1925년 5월 10일 그는 로마에서 열릴 예정인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 시복식에 파견할 경성청년연합회 대표로 선출되었다.57) 장면은 동생인 장발(張勃, 루도비코)과 함께 로마로 가서 7월 5일에 열린 시복식에 참석하였고, 7월 6일 교황을 만나 경성청년연합회의 서한을 전달하였다.58)

 

장면은 1927년부터 《별》에 실명 혹은 ‘J.C.생’이라는 필명으로 글을 게재하였다.59) 하지만 이것을 제외하곤 경성청년연합회에서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던 그가 경성청년연합회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1931년 3월 서울로 이사를 온 뒤였다.

 

장면이 서울에 왔을 때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가톨릭운동’(Catholic Action)이 태동하고 있었다. 이 운동은 교회 당국의 위임과 지도하에서 행하는 평신도의 조직적인 활동을 말한다. 교황 비오 10세(재위 : 1903~1914)는 평신도의 활동 영역을 인정하고 평신도의 적극적인 활동을 기대하였다. 비오 11세(재위 : 1922~1939)는 ‘평신도의 교계적 사제직 참여’라는 개념에서 평신도운동을 조직화하였다. 이후 가톨릭운동은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60)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1931년 9월에 가톨릭운동을 공식적으로 채택하였다. 1933년 3월 한국의 5교구장들은 가톨릭운동의 활성화를 협의하였고, ‘조선 가톨릭 진행회’의 위원장으로 평양지목구장 모리스 몬시뇰을 선출하였다. 모리스 몬시뇰은 1934년 8월 평양지목구에 ‘평양교구 가톨릭운동 연맹’을 결성하고, 가톨릭운동을 범교구적으로 추진하였다. ‘평양교구 가톨릭운동 연맹’에서는 계몽운동, 선전운동, 자선사업, 순회 교리 강습과 묵상회, 교회 출판물 보급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61) 이러한 활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은 청년회였다. 가톨릭운동의 기관지였던 잡지가 《가톨릭 청년》이었다는 점이 그러한 사실을 잘 말해준다.

 

장면은 가톨릭운동에서 ‘교육받은 청년’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였다.62) 이에 그는 경성청년연합회의 활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였다. 1931년 4월 12일 경성청년연합회에서 《별》 후원회를 조직하였을 때, 장면은 장발, 정지용(鄭芝溶, 프란치스코), 이순석(李順石, 바오로), 조종국(趙鍾國, 마르코) 등과 함께 임원이 되었다. 후원회가 《별》의 간행과 관련된 모든 업무를 담당한 조직이었으므로, 장면은 편찬 작업의 실무를 맡았을 것이다.63)

 

또한, 장면은 1931년 경성청년연합회의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 기념사업에 참여하였다. 경성청년연합회는 《조선 천주공교 약사》(朝鮮天主公敎略史)를 간행하였는데, 장면이 저술을 담당하였다.64) 이 책은 천주교의 조선 전래부터 1931년까지의 역사, 각 교구별 시설 및 사업 현황 등으로 구성된 것으로, 한글로 저술된 천주교사 개설서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65) 그리고 경성청년연합회에서 9월 26일 종현 성당에서 100주년 축하식을 개최하였을 때, 장면은 ‘선전 · 인쇄 · 왕복 문서류’를 담당한 통신원으로 활동하였다.66)

 

한편, 장면은 경성청년연합회의 산하 조직인 본당 청년회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1932년 6월부터 1년간 종현청년회 회장을 역임하였다.67) 1936년 명륜동으로 이사를 간 후68)에는 백동 본당 청년회인 혜화동 청년 친우회에서도 활동한 것으로 여겨진다.69) 그는 류홍렬(柳洪烈, 라우렌시오), 박병래(朴秉來, 요셉), 한창우(韓昌愚, 베네딕도) 등과 함께 1937년 1월 4일 대구에서 개최된 전국가톨릭청년회 창립총회에 참여하는 등 한국 전체의 가톨릭 청년회 조직 구성에도 힘썼다.70)

 

장면은 1939년 9월 24일에 열린 경성청년연합회 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었다.71) 당시 경성청년연합회는 오랜 기간 동안 총회를 열지 못하였을 만큼 침체를 겪고 있었다.72) 경성청년연합회는 1939년 11월 26일 교리 연구를 장려하기 위해 교리 시합 대회를 개최하는 등 재기를 위해 노력하였다.73) 그러나 당시 일제가 전시 체제를 구축하고, 한국 그리스도교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성청년연합회는 활동에 여러 가지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74) 결국 경성청년연합회는 1940년대에 접어들면서 활동을 중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광복 후, 장면은 가톨릭 청년회의 재건에 나섰다. 1946년 7월 7일 경성청년연합회가 다시 활동을 시작하였을 때, 장면은 회장에 선출되었다.75) 같은 해, 백동 본당에서 새 청년회가 출범하였을 때, 장면은 박병래, 김정희(金貞熙, 안드레아) 등과 함께 고문으로 활동하였다.76)

 

2) 문서 선교

 

장면은 교회 활동을 하면서 한국 천주교회의 현실을 직시하였다. 그는 한국 천주교회가 매우 침체되었다고 판단하였고, 그 원인으로 선교의 부족을 지적하였다. 그는 선교를 위해선 먼저 신자들이 교리 연구를 철저히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남에게 진리를 전하려면 나부터 잘 알아야 할 것은 말할 여지도 없다. 교리 연구는 각 지방에서 각기 본당 신부의 지도하에 연구반을 조직하여 철저하게 실행해야 한다. 물론 선전을 받을 대상에 따라 그 연구 재료와 방법에 차이가 있을 것이다. 즉 남자는 남자를 상대로, 여자는 여자를 상대로, 지식 계급은 지식 계급을 상대로 전교할 준비를 해야 한다.77)

 

장면은 각 본당에 연구반을 조직하여 교리 연구를 철저히 하되, 선교의 대상에 따라 연구의 재료와 방법에 차이를 두어야 한다고 했다. 그가 선교의 대상 중에서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지식인들이었다. ‘근대 사상에 물든 사람은 덮어놓고 종교를 미신으로 여기고 비과학적이라 조소하는 자가 많고 얼토당토하지 않은 오해와 편정으로 훼방하고 중상하는 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장면은 이들 지식인에 반박하기 위해선 교리 지식만으로 부족하며, 근대 철학과 문예사조, 교회사에 대한 지식도 갖추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러한 인식하에 장면은 교리 및 교회사를 연구하는 한편, 문서(출판물)를 통한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1931년 4월부터 경성청년연합회 기관지 《별》의 편집 실무와 원고 작성을 담당하였다. 그러다가 1933년 3월, 5교구 주교회의의 결정으로 《별》이 폐간되고, 6월 10일에 《가톨릭 청년》이 창간된 이후에는 《가톨릭 청년》의 발행에 관여하였다. 장면은 정지용, 장발, 이동구(李東九, 베네딕도) 등과 함께 《가톨릭 청년》의 편집 업무와 원고 작성을 맡았다.78) 《별》과 비교해서 지면이 크게 늘었기 때문에, 장면을 비롯한 편집진들은 철학, 신학, 성서, 호교, 역사, 과학, 문학 등 다양한 소재의 글들을 실을 수 있었다.

 

장면은 교회 잡지의 발행에만 그치지 않고, 다양한 글을 작성하여 잡지에 게재하였다. 1920년대 평양지목구에서 활동하였을 당시에는 교회 서적을 번역하는 데에 힘썼다면, 1930년대에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교회 잡지에 실었다.

 

장면은 가톨릭에 대한 ‘불신’과 ‘공격’에 맞서 가톨릭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였다. 1572년 8월 프랑스에서 발생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사건을 검토하고, 가톨릭교회가 위그노파의 학살과 관련이 없었음을 밝혔다.79) 성경이 이스라엘의 신화라는 주장을 반박하고, 성경이 신뢰할 수 있는 역사적 문헌임을 규명하였다.80) 16세기 교회가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을 위해 면죄부를 팔아 신자들을 착취하였다는 주장에 대해선 면죄부의 원어 Indulgence(恩赦)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왜곡된 인식을 낳았음을 지적하였다.81)

 

또한, 장면은 가톨릭이 ‘그리스도의 유일한 참된 종교’임을 강조하였다. 그는, 신성(神聖)은 그리스도의 진정한 교회가 가진 특수한 표식이며, 가톨릭교회의 특징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는 도덕률(道德律)이나 칠성사(七聖事) 등이 가톨릭교회의 신성성을 보여준다고 하였다. 가톨릭교회 내에서도 ‘패덕자’(敗德者)가 있지만, ‘진정한 개혁’으로 가톨릭교회의 신성성이 손상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는 ‘가톨릭교회의 진정한 개혁가’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가의 차이를 비교하였다. 루터(M. Luther), 칼뱅 (J. Calvin) 등을 ‘가개혁가’(假改革家)라고 하면서 그들의 개혁운동이 전쟁과 그리스도교 세계의 분열을 초래하였다고 비판하였다.82)

 

장면은 회회교(이슬람교), 영국 성공회, 장로교회 등 소위 ‘이단’(異端)을 다루었다.83) 종교의 유래와 역사, 가톨릭과의 관계와 차이점, 현재의 추세 등을 소개하였다. <이단 일속>에서는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18개의 이단을 간략하게 정리하였다. 그는, 이단이 부패한 인성(人性)에서 비롯되었고, 인류 사회에 큰 해악을 끼친다고 주장하였다. 이단의 존재는 가톨릭교회의 신성(神性)을 손상시키지 못하며, 오히려 통일된 교권(敎權)의 필요성을 가르쳐주는 적절한 교재라고 평가하였다.

 

장면은 19세기 영국에서 전개되었던 옥스퍼드 운동(Oxford Movement)을 소개하였다. 이 운동은 가톨릭 전통을 되찾아 영국 교회를 쇄신하려 한 운동으로, 뉴먼(J.H. Newman)을 비롯한 주도자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운동 이후에도 영국 국교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이들이 꾸준히 늘어났다. 장면은 옥스퍼드 운동이 가톨릭의 정통성과 유일성, 도덕적 우월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영국 국교회의 신도들이 ‘천주의 특은으로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로 돌아와 영혼의 평화를 얻기를 충심으로 기원’하였다.84)

 

한편, 장면은 순교의 가치와 의의에 대해서도 검토하였다. 그는 순교를 초자연적인 진리와 정의를 위한 자아의 희생이라고 정의하였다. 순교자들은 그리스도의 종교와 그 가르침의 근원이 천주로부터 온 것임을 확신하고, 그 확신을 생명으로써 증명한 성도들이라고 하였다. 박해가 심할수록 신앙의 전파가 더욱 번성하였다고 하면서 이것은 인력(人力)을 초월한 전능(全能)한 천주의 위업임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장면은 한국 교회사에서도 이러한 순교의 전통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후손으로서 ‘전폭적인 노력으로 주의 복음을 크게 선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85)

 

지금까지 보았듯이, 장면은 문서 선교에 힘썼다. 그가 교회 잡지에 기고한 글의 대부분은 호교론적인 글이었다. 이것은 1920 · 30년대 한국천주교회에 직면한 현실을 반영한 것이었다. 천주교회는 프로테스탄트나 사회주의 진영 등으로부터 거센 도전과 비판을 받고 있었다.86) 장면은 이와 같은 반(反) 가톨릭적 주장을 적극적으로 논박하고 가톨릭만이 ‘그리스도의 유일한 참된 종교’임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5. 맺음말

 

맺음말은 본문을 요약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장면은 메리놀회의 도움을 받아 미국 유학을 했고, 교리 및 교회사를 연구하였다. 이를 계기로 장면은 귀국 후 1925년 12월부터 1931년 3월까지 메리놀회 선교사들을 도와 평양지목구 설정을 위해 활동하였다. 그는 지목구의 사무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의 언어 교육과 전교회장 양성 교육도 담당하였다. 청년회장으로 교리 연구와 강연을 실시하는 한편, 교회서적을 번역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장면의 활동은 메리놀회의 한국 정착과 지목구의 토대를 쌓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장면은 가톨릭 종교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한국 가톨릭 교육의 부진과 원인을 진단하였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신자들이 실천할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는 1931년부터 1947년까지 가톨릭 교육기관에 재직하면서 자신의 교육관을 실천해 나갔다. 또한 그는 1940년대 전시 체제하에서 폐교 위기에 놓여 있었던 동성상업학교를 존속시켰고, 대신학교가 정식 인가를 받는 데에도 협력하였다.

 

장면은 가톨릭 청년 단체에서도 활동하였다. 그는 1925년 로마에서 열린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 시복식에 경성교구 천주교 청년회 연합회 대표로 참석한 것을 계기로 가톨릭 청년회 활동을 시작하였다. 경성청년연합회 기관지 《별》의 발행 및 원고 작성을 담당하였고, 경성청년연합회가 주관한 1931년에 열린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 기념사업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본당 청년회에도 참여하는 한편, 한국 전체의 가톨릭 청년회 조직 구성에도 힘썼다. 1939년에는 경성청년연합회 회장이 되어 침체를 겪고 있었던 연합회의 재기를 위해 노력하였다.

 

장면은 문서(출판물)를 통한 선교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는 《가톨릭 청년》 등 교회 잡지의 발행에 참여하였다. 또한 가톨릭에 대한 ‘오해’와 ‘불신’에 대해 반박하고, 가톨릭만이 ‘그리스도의 유일한 참된 종교’임을 밝히는 글을 작성하였다.

 

이상에서 보듯이, 장면은 평양지목구가 설정되는 데에 주요한 역할을 하였고, 가톨릭 교육기관, 가톨릭 청년 단체 등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그는 천주교회에서 ‘호교투사’(護敎鬪士), ‘교육계의 권위자’ 등으로 알려지게 되었다.87) 그리고 서울대목구장 노기남 주교, 초대 주한 교황사절 번 주교 등과의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 결과, 장면은 한국 천주교회의 대표적인 평신도로 부상하였고, 1946년 천주교 대표로 민주의원이 되어 정치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 글은 장면의 교회 활동을 일제 시기에 한정하여 살펴본 것이기 때문에 그의 교회 활동 전반을 이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또한 그의 신앙관이나 교회 활동의 시기별 변화상도 검토하지 못하였다. 광복 이후부터 1966년 사망할 때까지의 교회 활동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며, 앞으로 이러한 연구를 기대해 본다.

 

 

참고 문헌

 

1. 사료 및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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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연구 논저

강인철, <장면과 가톨릭액션 : 한 인물을 통해서 본 격동기의 교회>, 《한국천주교의 역사사회학》, 한신대학교 출판부, 2006.

김 녕, <장면과 가톨릭교회, 그리고 시민사회 : 이상과 현실>, 《가톨릭사회과학연구》 12, 한국가톨릭사회과학연구회,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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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광, <장면의 생애와 신앙에 관한 연구>, 《운석 장면 선생 탄신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자료집)》, 운석기념회, 1999.

- - -, <일제하 장면의 역사인식과 조선교회사 서술>, 《한국 근현대 천주교사 연구》, 경인문화사, 2010.

허동현, <장면의 정치활동과 사상에 관한 연구>, 《운석 장면 선생 탄신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자료집)》, 운석기념회, 1999.

- - -, <정계 진출 이전 장면(1899~1966)의 삶과 활동에 관한 연구>, 《경희사학》 23, 경희사학회, 2001.

- - -, <교회사의 시각에서 본 신앙인 장면(1899~1966) - 《작은 형제회 사기》(1966)의 장면 평가에 대한 현재적 성찰 ->, 《비교문화연구》 8, 경희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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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허동현, <장면>, 《한국가톨릭대사전》 10, 한국교회사연구소, 2004, 7320~7321쪽.

 

2) 허동현, 《건국 · 외교 · 민주의 선구자 장면》, 분도출판사, 1999 ; 조광, <장면의 생애와 신앙에 관한 연구>, 《운석 장면 선생 탄신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자료집)》, 운석기념회, 1999 ; 허동현, <장면의 정치활동과 사상에 관한 연구>, 《운석 장면 선생 탄신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자료집)》, 운석기념회, 1999 ; 김녕, <장면과 가톨릭교회, 그리고 시민사회 : 이상과 현실>, 《가톨릭사회과학연구》 12, 한국가톨릭사회과학연구회, 2000 ; 조광, <일제하장면의 역사인식과 조선교회사 서술>, 《경기사학》 5, 경기사학회, 2001(《한국 근현대 천주교사 연구》, 경인문화사, 2010에 재수록) ; 임기환, <장면의 정치사상과 가톨릭신앙>, 《경기사학》 5, 경기사학회, 2001 ; 허동현, <정계 진출 이전 장면(1899~1966)의 삶과 활동에 관한 연구>, 《경희사학》 23, 경희사학회, 2001.

2000년대 중반 이후의 연구는 다음과 같다.

허동현, <교회사의 시각에서 본 신앙인 장면(1899~1966) - 《작은 형제회 사기》(1966)의 장면 평가에 대한 현재적 성찰 ->, 《비교문화연구》 8, 경희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2004 ; 강인철, <장면과 가톨릭액션 : 한 인물을 통해서 본 격동기의 교회>, 《한국 천주교의 역사사회학》, 한신대학교 출판부, 2006 ; 박상배, 《한국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초석 장면》, 한국 재속 프란치스코회 출판부, 2012.

2014년 경희대학교 한국현대사연구원에서는 장면의 친필 연보를 영인한 자료집을 간행하였다(태수경 · 허동현 편, 《장면 시대를 기록하다》, 샘터.

 

3) 《장면 연보》(태수경 · 허동현 편, 위의 책, 42쪽).

4) 장면, <반세기 유서 깊은 호교서 “교부들의 신앙”>,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증보판), 가톨릭출판사, 1999, 273~275쪽.

 

5) “The Pioneer’s Log”, The Field Afar, 1918. 2, pp. 23~26 ;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드망즈 주교 일기》, 가톨릭신문사, 1987, 209~210쪽 ;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뮈텔 주교 일기》 6,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155~157쪽.

장면은, 월쉬 신부가 중국 등 아시아 지역을 순방하고, 귀로에 한국을 방문하였다고 회고하였다(<반세기 유서 깊은 호교서 “교부들의 신앙” 번역 출판 경위와 개정판 구상>, 275쪽). 그러나 월쉬 신부는 귀로가 아닌, 중국으로 가기 전에 한국을 방문하였다. 그는 중국 광동 지역을 선교지로 확보한 후, 중국인 소년 이냐시오와 프란치스코 사베리오를 데리고 귀국하였다(“The Pioneer’s Log”, The Field Afar, 1917. 10~1918. 11 ; “Our twins”, The Field Afar, 1918. 8, p. 120).

6) 장면, <반세기 유서 깊은 호교서 “교부들의 신앙” 번역 출판 경위와 개정판 구상>, 275쪽.

 

7)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50년사》,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1983, 477쪽 ; 《뮈텔 주교 일기》 6, 368 및 379쪽.

8) 《장면 연보》(태수경 · 허동현 편, 앞의 책, 54쪽).

 

9) 《장면 연보》(태수경 · 허동현 편, 위의 책, 43 및 54쪽). 제3회는 회원들이 세속에서 수도회의 정신에 동참하여 수도회의 지휘 아래 사도적 삶을 살고 그리스도교 완성[완덕]을 향하여 노력하는 단체를 말한다. 성 프란치스코 제3회는 1221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1181~1226)에 의해 공식적으로 창설되었다(<제3회>, 《한국가톨릭대사전》 10, 한국교회사연구소, 7640~7643쪽). 한국에서는 1937년 12월 25일 백동 본당 신자 40명이 성 프란치스코 제3회 회원으로 첫 착복식(着服式)을 하였다. 1938년 12월 25일 백동 본당에 한국 최초의 ‘성 프란치스코 제3회 형제회’가 조직되었는데, 장면은 부모, 동생, 부인 등과 함께 형제회에 참여하였다(《백동 70년사》, 천주교 혜화동교회, 1997, 82~84쪽).

 

10) 장면, <반세기 유서 깊은 호교서 “교부들의 신앙” 번역 출판 경위와 개정판 구상>, 273~276쪽 ; 허동현, 앞의 책, 1999, 47~49쪽.

11) 《한국천주교회사》 5, 한국교회사연구소, 2014, 210~212쪽.

12) 장면, <반세기 유서 깊은 호교서 “교부들의 신앙” 번역 출판 경위와 개정판 구상>, 276쪽.

13) 이정순 엮음, 《목 요안 신부》,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1994, 11쪽.

 

14) <장면 → 메리놀회 장상 1926. 11. 30 편지>(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 <모리스 신부 → 메리놀 본부 1926. 12. 14 편지>(이정순 엮음, 위의 책, 173~174쪽) ; 《천주교 평양교구사》, 분도출판사, 1981, 411쪽.

 

15) 《장면 연보》(태수경 · 허동현 편, 앞의 책, 60쪽).

 

16) The Field Afar 1927. 5, pp. 292~293에 장면이 모리스 신부와 전교회장 교육생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 있는데, 사진 설명에 “모리스 신부는 장면의 도움을 받고 있다”라고 되어 있다.

 

17) 르 장드르, 《회장직분》, 성서활판소, 1923, 228~231쪽.

18) <조선 성교회 현상 사업>, 《경향잡지》 601, 1926. 11. 15, 497쪽.

19) <모리스 신부 → 메리놀 본부 1926. 12. 14 편지>(이정순 엮음, 앞의 책, 177~178쪽).

20) 유수철, <장 박사 선종기>,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증보판), 393쪽.

21) 《장면 연보》(태수경 · 허동현 편, 앞의 책, 60쪽).

22) <지방 소식>, 《별》 16, 1928. 10. 10, 3쪽 ; <평양청년회 활약>, 《천주교회보》 20, 1928. 11. 1, 2쪽.

23) 장면, <반세기 유서 깊은 호교서 “교부들의 신앙” 번역 출판 경위와 개정판 구상>, 274~276쪽.

24) 장면, 위의 글, 276~277쪽.

25) 《한국천주교회사》 5, 2014, 211쪽.

26) 《장면 연보》(태수경 · 허동현 편, 위의 책, 62쪽).

 

27) 필자가 《교부들의 신앙》과 <천주공교>를 비교 검토한 결과, 내용이 거의 동일하다는 점을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실린 《별》 42, 1930. 12. 10, 1쪽에는 ‘22회’로 되어 있지만, 중간에 횟수가 중복된 것이 있기 때문에 정확한 횟수는 27회이다.

 

28) 장면은 완역본의 출간이 늦어진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번역은 완료되었으나 출판은 전혀 가망이 없었다. 일제 시대인 만큼 한국 사람의 출판은 모조리 사전 검열을 받아야 하며, 이런 미국인 원저의 종교 서적은 허가될 리 만무하던 시절이기 때문이다. …그 후, 나는 동성상업학교의 책임을 맡게 되어 원 주교님과 윤형중신부님께 이 책의 출판에 관해 의논한 결과 어느 외국인 신부의 명의를 빌려 출판하기로 했다”(장면, <반세기 유서 깊은 호교서 “교부들의 신앙” 번역 출판 경위와 개정판 구상>, 276~277쪽).

 

29) 지금까지는 장면이 《구도자의 길》을 저술하였다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장면은 자신의 연보에서 이 책을 저술했다고 하지 않았고, 다만 ‘번역 탈고’했다고만 했다(《장면 연보》[태수경 · 허동현 편, 위의 책, 62쪽]). 그가 연보에서 ‘저작’과 ‘번역’을 명확히 구분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책을 번역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 책의 저자는 모리스 몬시뇰로 보이는데, 장면이 이 책의 저자를 모리스 몬시뇰이라고 했고(J.C생, <선전하자! 활약하자!!>[3] 《별》 69, 1933. 3. 10, 2쪽), 《구도자의 길》 판권지에도 모리스 몬시뇰이 편집 겸 발행자로 되어 있다. 즉, 《구도자의 길》은 모리스 몬시뇰이 쓰고, 장면이 번역한 것으로 판단된다.

 

30) 장면은 자신의 연보에서 1930년 8월 21일에 출판하였다고 했지만, 책의 판권지에는 1932년 9월 22일에 발행된 것으로 되어 있다. 1930년 8월 21일에 번역본을 탈고하고, 1932년 9월 22일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31) 《장면 연보》(태수경 · 허동현 편, 앞의 책, 60 및 62쪽).

 

32) 《장면 연보》(태수경 · 허동현 편, 위의 책, 50쪽) ;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150년사 1855-2005》,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2007, 686쪽.

 

33) 장면, <인생 회고록>,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증보판), 36쪽.

34) 장면, <(특별기고) 내가 걸어온 길>, 《희망》 1957. 1, 43쪽(허동현, 앞의 책, 1999, 62쪽에서 재인용).

35) J.C생, <종교교육의 절대적 필요를 논함>, 《별》 4, 1927. 10. 10, 2쪽.

36) J.C생, <종교교육의 절대적 필요를 논함>, 《별》 5, 1927. 11. 10, 1~2쪽.

37) J.C생, <종교교육의 절대적 필요를 논함>(4), 《별》 7, 1928. 1. 10, 3쪽.

 

38) J.C생, <종교교육의 절대적 필요를 논함>, 《별》 5, 1927. 11. 10, 1~2쪽. 장면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증보판], 143~144쪽)에서도 교사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39) J.C생, <종교교육의 절대적 필요를 논함>(5), 《별》 8, 1928. 2. 10, 3쪽.

40) J.C생, <종교교육의 절대적 필요를 논함>, 《별》 5, 1927. 11. 10, 1~2쪽.

41) J.C생, <종교교육의 절대적 필요를 논함>(5), 《별》 8, 1928. 2. 10, 2쪽.

42) 《장면 연보》(태수경 · 허동현 편, 앞의 책, 62쪽).

43) 《동성 100년사》, 동성중 · 고등학교, 2011, 483쪽.

44) 《장면 연보》(태수경 · 허동현 편, 앞의 책, 68쪽).

45) 《노기남 주교 일지》(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1947년 8월 20일 · 12월 16일 ; 《동성 100년사》, 192~193쪽.

 

46) <혜화유치원 신설>, 《매일신보》 1937년 3월 21일자 ; 《혜화유치원 60년사》, 천주교 혜화동교회 혜화유치원, 1999, 17~19 및 30~31쪽.

 

47) 《장면 연보》(태수경 · 허동현 편, 앞의 책, 72 및 78쪽). 《계성국민학교 110년사》(계성국민학교, 1994)에는 장면이 1936년 11월에 부임하여 1942년 3월 말에 퇴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107 및 117쪽). 계성초등학교 측에 자료 확인을 요청하였으나 명확한 답변을 듣지 못하였다. 일단 이 글에서는 《장면 연보》를 따르기로 한다.

 

48) 유동진, <교육가로서의 운석>,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증보판), 378~379쪽.

 

49) <동성상업 존속>, 《경향잡지》 968, 1944. 3. 15, 22쪽. 일설에 따르면, 총독부 학무국에서는 동성상업학교를 적성국 외국인 신부들이 있다는 이유로 폐교시키겠다고 위협하거나, 공업학교로 변경하려는 책동이 있었다고 한다. 이때 장면이 총독부 교육 당무자인 반(潘) 씨를 매일 만나 교섭하였고, 그 결과 동성상업학교가 존속하게 되었다고 한다(《동성 100년사》, 166쪽).

 

50) 서울대목구에서는 1928년 대 · 소신학교를 분리하여 소신학생들에게 일반 중등학교 학생들과 동일한 교육 과정을 이수하도록 하는 방안을 마련하였다. 남대문상업학교를 갑조(甲組)와 을조(乙組)로 나누어, 갑조를 일반 상업학교로 운영하고, 을조는 소신학교로 운영하면서 을조 학생들에게는 대신학교로의 진학을 위한 신학 교육을 병행하기로 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1929년 대 · 소신학교가 완전히 분리되었다(《한국천주교회사》 5, 403~404쪽).

 

51) 《노기남 주교 일지》(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1944년 12월 29일, 1945년 1월 11일 ;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150년사 1855-2005》, 185~191쪽.

 

52) 《장면 연보》(태수경 · 허동현 편, 앞의 책, 50 및 52쪽).

53) 전택부, 《한국 기독교청년회 운동사》, 범우사, 1994, 173~216쪽.

54) <장면 → 드브레 주교 1921. 6. 17 편지>(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55) 《뮈텔 주교 일기》 7, 한국교회사연구소, 2008, 48쪽 ; 한국교회사연구소 역편, <1921년 보고서>, 《서울교구 연보》 II, 명동천주교회, 1987, 162~163쪽.

 

56) 양인성, <경성교구 천주교청년회연합회 연구>, 《교회사연구》 28, 한국교회사연구소, 2007. 6, 35~37쪽.

57) <장면 씨로 대표자 선거>, 《경향잡지》 566, 1925. 5. 31, 231~232쪽.

 

58) 한기근, <로마 여행 일기>, 《경향잡지》 573, 1925. 9. 15, 387~403쪽. 장발은 1921년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뉴욕 국립디자인학교,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장발>, 《한국가톨릭대사전》 10, 2004, 7321~7324쪽).

 

59) 안홍균은 《별》 영인본 해제에서 J.C.생을 장면으로 추정하였을 뿐, 별다른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10쪽). 필자가 확인해 본 결과, J.C.생은 장면이 분명하다. 《별》 59, 1932. 5. 10, 2쪽에는 J.C.생이 쓴 <로마 所見>이란 글이 있는데, J.C.생은 자신이 1925년 로마에서 열린 시복식에 참석했다고 했다. 당시 조선에서 시복식에 참석한 이는 뮈텔 주교, 대구대목구장 드망즈(F. Demange) 주교, 예수성심신학교 교장 기낭(P. Guinand) 신부, 한기근(바오로) 신부, 장면과 장발이었다. 이들 가운데 J.C.생과 연관된 이는 장면밖에 없다. ‘J.C.’는 ‘John Chang’의 앞글자로 판단된다. 메리놀회 선교사들의 문서에는 장면이 ‘John Chang’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J.C.생은 장면이 확실하다.

 

60) 《한국천주교회사》 5, 2014, 216~220쪽.

61) 《한국천주교회사》 5, 2014, 216~220쪽 ; 김수태, <1930년대 평양교구의 가톨릭운동>, 《교회사연구》 19, 2002. 12, 207~229쪽.

 

62) 우리의 급무는 어서어서 악시오 가톨니가, 즉 공교진행회의 사업으로 교육받은 청년들이 중심되어 공교 교리를 철저히 연구하여 우선 우리의 신앙을 굳게 하고 혼란한 현대사상계에 십자기를 높이 들고 영원한 진리의 고함성을 지르자(J.C생, <선전하자! 활약하자!!>[1], 《별》 67, 1933. 1. 10, 4쪽).

 

63) <본보 후원회 조직>, 《별》 47, 1931. 5. 10, 3쪽.

 

64) 《장면 연보》(태수경 · 허동현 편, 앞의 책, 62쪽). 장면이 저술하였지만, 판권지에는 경성청년연합회 총장 라리보(A.J. Larribeau, 元亨根) 주교가 편집 겸 발행인으로 되어 있다.

 

65) 조광, 앞의 책, 2010, 202~209쪽.

 

66) <조선교구 성립 제1백주년 기념 경축>, 《경향잡지》 713, 1931. 7. 15, 302쪽 ; <백주년 축하식 상황>, 《경향잡지》 718, 1931. 9. 30, 424쪽.

 

67) <종현청년회 정총>, 《별》 60, 1932. 6. 10, 4쪽 ; 《명동본당사》 I, 한국교회사연구소, 2007, 157~158쪽.

68) 《장면 연보》(태수경 · 허동현 편, 앞의 책, 68쪽).

69) 《백동 70년사》, 72~73쪽. 장면은 1939년 9월 24일 경성청년연합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는데, 혜화동 청년 친우회 소속이었을 것이다.

70) 《백동 70년사》, 92쪽.

71) <경성교구 청년회연합회 제四회 정기총회 개최>, 《경향잡지》 910, 1939. 9. 30, 432~433쪽.

72) 양인성, 앞의 글, 44~45쪽.

73) <경성에 남자교리시합>, 《경향잡지》 915, 1939. 12. 15, 551쪽.

74) 윤선자, 《일제의 종교정책과 천주교회》, 경인문화사, 2001, 284~299쪽.

75) <재생한 청년회 연합회>, 《경향잡지》 977, 1946. 8. 1, 14쪽.

76) 《백동 70년사》, 102~103쪽.

77) J.C생, <선전하자! 활약하자!!>(1), 《별》 67, 1933. 1. 10, 3쪽.

78) <가톨릭 청년>, 《한국가톨릭대사전》 1, 한국교회사연구소, 1995, 197~198쪽.

 

79) <성 발도로메오 瞻禮 前日의 대학살 사건>, 《별》 48, 1931. 6. 10, 2쪽 ; <성 발도로메오 瞻禮 前日의 대학살 사건>(속), 《별》 49, 1931. 7. 10, 2쪽.

 

80) <구약성경의 역사적 가치>, 《가톨릭 청년》 2, 1933. 7. 10, 14~20쪽.

81) <‘면죄부’의 진상>, 《가톨릭 청년》 10, 1934. 2. 25, 2~11쪽.

82) <교회의 신성성>, 《가톨릭 청년》 13, 1934. 5. 25, 14~18쪽 ; <교회의 신성성>(2), 《가톨릭 청년》 15, 1934. 7. 25, 6~10쪽.

 

83) <回回敎의 유래와 정체>, 《별》 63, 1932. 9. 10, 2~3쪽 ; <回回敎의 유래와 정체>(2), 《별》 64, 1932. 10. 10, 2~3쪽 ; <回回敎의 유래와 정체>(3), 《별》 65, 1932. 11. 10, 2~3쪽 ; <回回敎의 유래와 정체>(4), 《별》 66, 1932. 12. 10, 3~4쪽 ; <異端 一束>, 《가톨릭 청년》 14, 1934. 6. 25, 11~15쪽 ; <영국 성공회>, 《가톨릭 청년》 24, 1935. 4. 25, 15~20쪽 ; <장로교회>, 《가톨릭 청년》 27, 1935. 7. 25, 18~24쪽.

 

84) <옥스퍼드운동의 전망>, 《가톨릭 청년》 7, 1933. 12. 10, 6~11쪽.

85) <순교의 의의와 가치>, 《가톨릭 청년》 4, 1933. 9. 10, 2~5쪽.

86) 이진구, <일제하 천주교와 사회주의의 상호 인식>, 《교회사연구》 17, 2001. 12, 75~99쪽.

87) <편집 후기>, 《가톨릭 청년》 4, 1933. 9. 10, 80쪽 ; <성심전문학관 야간학교로 발족>, 《경향신문》 1948년 1월 25일자.

 

[교회사 연구 제47집, 2015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양인성(한국교회사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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