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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늘, 언제 어디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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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2-21 ㅣ No.897

[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늘, 언제 어디서나


“늘 기억하세요, 그분은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심을”

 

 

찬미 예수님.

 

‘나의 하느님’을 잘 만나고 계십니까?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느님만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고 ‘나’의 하루하루를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잘 보고 듣고 느끼고 계십니까?

 

이렇게 일상의 체험 안에서 끊임없이 하느님을 만나고 묵상하는 모습을 교회는 전통적으로 ‘하느님 현존 의식’이라는 용어로 표현해 왔습니다. 부활의 라우렌시오 수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죠. “영성생활에서 가장 거룩하고 가장 일상적이며 가장 필요한 수련은 하느님 현존의 수련이다.”(하느님 현존의 수련, 「영적 금언」 제2장 6항)

 

그런데 ‘하느님 현존’이나 ‘현존의 수련’과 같은 말을 들으시면 어떠세요? 어쩐지 나와는 조금 거리가 먼, 어려운 내용인 것 같은 느낌이 드시나요? 그럼 이렇게 표현하면 어떨까요? 우리 영성 생활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늘,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을 떠올리는 것’이라고요. 이것이 왜 영성 생활의 가장 기본이 될까요? 그건 바로 하느님께서 그렇게 늘,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부제 때 일입니다. 부제품을 받고 첫 방학을 지내면서 매일 주임신부님 집전 미사에 부제 복사를 섰죠. 그런데 부제 때부터 미사 중에 강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주임신부님께 강론을 어떻게 할지 여쭈었습니다. 그랬더니 신부님께서 강론은 미사하는 신부의 몫이니까 주일 강론만 두 주에 한 번씩 하고 평일미사 때는 안 해도 된다고 하시더군요. 그러면서도 언제 시킬지 모르니 준비는 늘 하고 있으라는 말씀도 덧붙이셨습니다. 그리고 한동안은 신부님께서 계속 평일 강론을 하셨기 때문에 저는 별다른 준비 없이, 그저 자기 전에 다음 날 복음만 한 번 읽고는 잠들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미사 시간이 다 되어 제의실에서 준비하면서 기다리고 있는데 신부님께서 갑자기 “오늘 강론은 부제가 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준비가 안 됐다고 말씀드렸더니, “항상 준비를 해야지. 정 안되겠으면 ‘잠시 묵상하시겠습니다’ 하고서 그냥 앉아도 돼.” 하시더군요. 그러면서 입당을 했는데 그때부터 머릿속에는 온통 복음과 강론 생각뿐이었습니다. 결국 때가 되어서 복음을 읽고 강론을 하긴 했는데, 무슨 말인지 저도 못 알아들을 강론이었고 미사에 오신 신자분들께 죄송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 강론 준비를 하기 시작했는데 참 신기한 것이, 원고를 준비해가면 신부님께서 강론을 하시고 어쩌다가 안 해간 날이면 영락없이 시키시더라는 것입니다. 그 덕에 진땀도 많이 흘렸죠. 그래서 그다음 방학 때는 한 가지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래, 강론을 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매일 원고를 준비하자. 그래서 언제라도 시키시면 잘 준비된 모습을 보이자!”

 

그러던 어느 날, 신부님께서 미사 전에 제의를 입으시면서 또 강론을 시키셨습니다. “오늘 강론은 부제가 해라.” 그래도 저는 준비를 해왔기에 “네!” 하고는 당당하게 가방에서 강론 원고를 꺼냈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 신부님께서 약간 놀라워하시더군요. 그리고 다시 며칠 동안은 신부님께서 강론을 하셨는데, 또 어느 날은 제의실에서 아무 말씀도 없으시다가 입당해서 본기도 끝나고 자리에 앉으니까 그때서야 “강론 준비했지?” 하시는 겁니다. 준비를 하긴 했죠. 그런데 강론 원고는 제의실에 있는 가방 안에 들어 있고… 그래서 또다시 진땀을 흘리면서 강론 아닌 강론을 해야 했습니다.

 

그다음부터 제가 어떻게 했을까요? 그다음부터는 강론 원고를 아예 바지 주머니에 넣고 미사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또다시 신부님께서 미사 중에 저더러 강론을 하라고 하셨을 때, 아주 여유 있게 바지 뒷주머니에서 원고를 딱 꺼내 들고는 강론을 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있었다고 해서 제가 당시의 주임신부님 때문에 고생을 했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신부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그러시는지 저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기쁘게 강론 준비를 할 수 있었고 또 아직까지도 재미있었던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매일 강론 준비를 하다 보니 제게는 하루 종일 복음 말씀을 생각하는 습관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강론을 준비하려고 성체 앞에 앉아 복음 묵상을 하기도 하지만, 그때뿐만 아니라 하루 온 종일을, 밥을 먹다가도 TV를 보다가도, 또 길을 걷거나 누구와 대화를 하다가도 문득문득 다음 날의 복음 말씀을 생각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상에서 매일 만나는 사람들, 그 겪는 일들 속에서 복음 말씀을 떠올리고 그 말씀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그리고 그 말씀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되는 모습이었습니다.

 

‘하느님 현존 의식’이라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의 모습입니다. 아주 어려운 기도 수련이기보다는, 그저 하루를 지내면서 하느님을 생각하는 것이죠. 그렇다고 24시간 내내 하느님 생각만 할 수는 없습니다. 온전히 우리의 하루를 지내면서도, 그 안에 ‘나’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하느님’께서 같이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 복음 말씀을 통해서든 아니면 어떤 작은 체험을 통해서든 하느님께서, 예수님께서 ‘늘,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깨닫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기도 생활의 시작인 것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성인은 기도에 대한 그의 강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느님께로 우리 마음을 향해야 하는 것은 기도 시간 중 묵상할 때만이 아닙니다. 다른 일에 대해 마음을 쓸 때, 즉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는 일이나 여러 가지 의무 활동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생각과 열망은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소금으로 조미되어 주님께 맛있는 음식이 되어야 합니다.”(Supp., Hom. 6 De precatione: PG 64,462-466).

 

첫 시작부터 말씀드렸습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를 만나고 계신 하느님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뿐이라고요. 그래도 괜찮다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는 그 하느님을 이제부터 알아차리기 시작하면 되니까요. 우리가 시작하는 ‘하느님 현존의 수련’입니다.

 

이 글을 다 읽으셨나요? 그리고 지금, 하느님을 떠올리고 계신가요?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사도 17,28)

 

* 민범식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서품을 받았으며 로마 그레고리오대학에서 영성신학 박사와 심리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가톨릭신문, 2017년 2월 19일, 민범식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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