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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한국의 주교좌 성당: 양식에 충실하면서도 근대적인 인천교구 주교좌 답동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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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10-06 ㅣ No.886

한국의 주교좌 성당 (9) 양식에 충실하면서도 근대적인 인천교구 주교좌 답동 성당

 

 

지금은 주변에 높은 건물들이 들어서서 시야를 가리고 있으나 건축 당시에는 인천항을 비롯한 시가지를 한눈에 바라보았던 인천교구1) 주교좌 답동성당(주보 : 성 바오로)2), 1889년 파리외방전교회 빌렘(J. Wilhelm, 洪錫九) 신부가 제물포에 도착해 지금의 성당 자리에 터를 잡으면서 역사가 시작되었다.3) 1960년대까지만 해도 매일 정오와 저녁 6시에 울리던 3개의 종은 이제 소리 내지 않지만,4) 조형미와 상징성이 두드러지는 양파 모양의 종탑에 매료되어, ‘개항’과 ‘조계지’를 연상시키는 인천의 이국적 이미지와 함께 답동 성당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초창기 한국 교회 건축 중에서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답동성당은 “양식에 충실하면서도 근대적인 성격을 가진 건물”5)이다.

 

1930년대 산업화가 시작된 시공 기술이 가미된 답동 성당의 구조 체계는 1897년 신축된 벽돌조 성당을 1937년 개축하면서 조적조와 철근콘크리트조가 혼합되었다.6) 의장(意匠)적으로는 건물 중앙에 큰 탑을 두고 경사진 지붕을 날개로 삼아 끝부분에 장식적인 작은 탑을 두고 있는데, 이 8각의 터릿(turret, 작은 탑 형태의 부속 건물)에 총화형(蔥華形) 돔(Bulbous Dome)을 얹은 3개의 종탑7)과 처마 및 창돌림띠 장식 등에 나타나는 “간략화된 디테일”은 답동 성당의 주요 특징이다.8) 종래의 성당 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던 회색 이형(異形) 벽돌에 의한 정교한 장식이 석재 몰딩으로 대체된 것이다.

 

최초의 답동 성당은 제3대 주임 마라발(J. Maraval, 徐若瑟) 신부가 재임기에 명동 대성당을 설계한 코스트(J. Coste, 高宣善) 신부의 설계도를 받아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다.9) 현재의 성당은 풍수원 · 용소막 · 장호원 성당 등을 건축한 시잘레(P. Chizallet, 池士元) 신부가 설계를 맡아 1933년 4월 개축 공사를 시작했고, 1937년 6월 30일 라리보(A. Larribeau, 元亨根) 주교에 의해 봉헌되었다. 답동 본당 역대 신부 중 가장 오래 재임하면서 일제 치하에서 본당의 성장을 견인하였던 제4대 주임 드뇌(E. Deneux, 全學俊) 신부가 공사 감독을 했다. 기존 성당의 외벽에 벽돌을 새로 쌓아 올리는 고난도의 공법을 적용한 개축 과정에서 답동 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에 충실한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후 몇 차례 보수가 있었으나, 준공 당시와 비교해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1973년에 대대적인 내부 보수가 이루어져, 마룻바닥을 콘크리트 슬래브로 바꾸고 지붕 및 창호 교체 공사를 하였다. 이전까지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 바닥에서 미사를 드렸는데 이때 입식으로 바뀌었다. 1979~1980년에는 스테인드글라스가 설치되었고, 1989년에는 인천교구 본당 설정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지붕 등 대대적으로 보수공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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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58년 서울 대목구에서 인천 감목대리구로 분리되어 메리놀 외방전교회에 위임되었다. 1961년 6월 6일 인천 대목구로 설정된 뒤 이듬해인 1962년 3월 10일 교계제도 설립에 따라 ‘인천교구’로 승격하였다.

 

2) 설립 당시 이름은 ‘제물포(濟物浦) 성당’이었고, ‘인천(仁川) 성당’으로 불리다가 1958년경부터 ‘답동(畓洞) 성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3) 1886년 선교사들의 개항장 거주가 허용되자, 블랑(J. Blanc, 白圭三) 주교는 1888년에 제물포에 본당을 설립하기로 하고, 당시 페낭 신학교에 있던 빌렘 신부에게 새 본당 지역을 맡아 주도록 요청하였다. 이를 받아들인 빌렘 신부가 1889년 7월 1일 제물포에 부임함으로써 제물포(현 답동) 본당이 설립되었다.

 

4) 윤인복, 「답동 성당, 빛과 구조의 미학」, 문화재청 소식지(www.cha.go.kr) 2013년 2월 18일.

 

5) 김정신, 「답동 성당(畓洞 聖堂)」, 한국교회사연구소 이전 기념 한국 성당 건축사 특별 전시회 팸플릿, 한국교회사연구소 1986. 12, 34쪽.

 

6) 김정신, 『한국 가톨릭 성당 건축사』, 한국 가톨릭 문화사 대계 제3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 73~75쪽.

 

7) 3개의 종탑은 전동 성당(1914년)과 비슷하지만, 중앙 중탑에 비해 양 모서리의 탑이 왜소하다(김정신, 「[특별기획] 답동 성당」, 『건축문화』 1985년 1월호, 97~102쪽).

 

8) 김정신, 「초기 양식건물의 보수 · 보존에 관한 연구 - 국가 지정 교회 건축 문화재의 현황조사를 중심으로」, 『건축역사연구』 10(2), 2001. 6, 55~71쪽.

 

9) 1895년 8월 11일 정초식을 거행하고 1897년 7월 4일 뮈텔(G. Mutel, 閔德孝) 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봉헌하였다(『한국가톨릭대사전』 3, 1544~1548쪽).

 

[교회와 역사, 2022년 9월호, 이오주은 미카엘라(한국교회사연구소 미디어콘텐츠사업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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