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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 정진석 회고록7: 사제의 길에 한 걸음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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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7-10 ㅣ No.383

[추기경 정진석] (7) 사제의 길에 한 걸음 더


착실한 꼬마 복사 눈에 사제는 ‘하느님의 사람’이었다

 

 

- 1942년 12월 20일 명동대성당에서 열린 노기남 주교 서품식에서 보미사들과 함께한 노 주교. 왼쪽 가장 앞에 선 어린이가 정진석이다. 서울대교구 홍보국 제공.

 

 

“열심히 하겠습니다!” 

 

명동성당 신부님 앞에서 진석은 성실하게 보미사(補Missa, 오늘날 복사)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사제로서의 삶에 한발 더 가까이 다가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어린 시절이지만 진석이 보미사가 된 것은 그의 일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 훗날 진석이 사제행을 결정한 데는 복사를 했던 체험이 분명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복사를 할 당시는 진석과 어머니가 수표교 근처의 외가에서 분가를 한 시기였다. 지금의 방산시장 근처 주교동에 두 식구의 보금자리가 있었다. 주교동 집에서 출발해 새벽 5시 미사에 늦지 않으려면 진석은 집에서 적어도 4시 30분에 떠나야 성당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래서 보통 새벽 4시 정도에는 일어났다. 보통학교(오늘날 초등학교) 3학년 꼬마가 아침 일찍, 그것도 스스로 일어나기는 어렵다. 그래서 아침이 되면 진석의 어머니는 단잠에 빠진 아들을 몇 번이나 재촉해야 겨우 잠에서 깨울 수 있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도시락 두 개 들고서

 

날씨가 따뜻할 때야 문제없지만, 특히 추운 겨울날에 아침 일찍 잠을 깨는 것은 큰 고역이었다. 추운 날 새벽 진석은 겨우 눈을 떠 수돗가에서 대충 이를 닦고 고양이 세수를 했다. 어머니는 도시락 두 개를 챙겨 고사리 같은 아들 손에 들려 보냈다. 복사하고 성당 구내에서 먹을 아침 도시락 하나, 바로 성당 옆에 있는 학교에 가서 점심시간에 먹을 도시락 하나. 진석은 도시락 두 개를 들고 명동성당으로 달려갔다. 

 

겨울철 새벽에는 해가 뜨지 않아 주위는 거의 암흑이었다. 조금 무섭기도 하고 빨리 달리는 발자국 소리가 마치 자신을 따라오는 것 같은 공명으로 들려 더 무서웠다. 당시 을지로에는 전차가 다녔는데, 이른 새벽 을지로와 종로를 잇는 텅 빈 전찻길을 일부러 당당하게 걸었다. 진석은 그래야 안심이 되었다. 도로 양쪽 처마 밑으로는 갑자기 뭐가 나올지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두려운 마음이 들 때면 진석은 주일학교 교리 시합 때 일등상으로 받은, 주교님의 가슴 고상만한 구리 십자가를 매고 걸었다. 주교님처럼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전찻길 한복판을 당당하게 걷자니 마치 자신이 주교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꼬마 주교님이다!!!”

 

양손에 도시락을 든 진석의 머리에 상상 속의 주교관이 생겨났다. 진석은 주교관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움츠렸던 어깨를 펴고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당당히 전찻길을 걷다 보면 무서운 마음도 한달음에 달아났다. 애초에는 무서워서 그랬지만 나중에는 멋도 들었다. 그렇게 걷다 뛰다 보니 저 멀리 명동성당의 종탑이 보였다. 종탑의 십자가를 보면 진석은 이내 안심이 되었다.

 

 

하루 두세 번씩 복사 서기도 

 

명동성당에는 당시 교구청 신부님들도 많이 계셨다. 다들 공동 집전을 못 하니 신부님들 개인 미사가 있었고, 이 미사마다 보미사가 필요했다. 진석이 새벽 미사를 하고 나면 꼭 보미사에 빠진 아이들이 있었다. 그럼 친구들의 빈자리를 대신 메워야 했다. 두 번, 세 번씩 복사를 서서 신부님과 계응을 했다. 신부님들이야 미사를 한 대씩 봉헌했지만, 보미사가 미사 한 대만 봉헌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커다란 명동성당에서 신부님과 미사를 바칠 때면 진석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기뻤다. 그래서 궂은 날이건 맑은 날이건 새벽 네 시 반만 되면 대문을 나섰다. 진석은 신부님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미사 때 집중도 잘하고 라틴어 미사 통상문을 계응으로 받을 때 기도문도 곧잘 외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부님들에게 어떤 복사가 인기가 있다면 반대로 복사들에게 인기가 있는 신부님이 있었다. 대개 빨리 미사를 지내는 ‘날쌘돌이형’ 신부님이 인기가 좋았다. 그런 신부님들은 미사 때 움직일 때마다 제의가 춤을 추듯 날쌔게 움직였다. 반면에 느림보 신부님은 다른 신부님보다 미사를 두 배나 느리게 드렸다. 명동성당 지하성당은 특히 추운 겨울철에 오래 있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느림보 신부님들의 보미사를 하면 내내 덜덜 떨어야 했다. 

 

어느날은 제의방에 우연히 미사를 느리게 지내는 신부님과 빨리 지내는 신부님이 함께 들어오신 적이 있었다. 진석과 다른 꼬맹이 보미사가 미사를 빨리 지내는 신부님에게 가려고 앞을 다투다가 그만 지하성당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미끄러졌다. 지금 보기에도 매우 좁고 뱅글뱅글 도는 계단인데 수녀님께서 반질반질하게 초칠을 해 광을 내둔 터였다. 진석은 아래까지 데굴데굴 굴러떨어졌는데도 냉큼 일어나 미사를 빨리 지내는 신부님께로 향했다.

 

어린 진석은 어쨌든 복사라면 늘 악착같았다. 진석에게 신부님들은 천사보다 아주 조금만 낮은 분들이었다. 어린 진석의 눈에 신부님들은 황홀한 말씀을 하고, 표정도 행동도 꼭 하늘에 닿아 계신 것 같았다. 그래서 보미사를 하면 세상에서 주님에게 제일 큰 상을 받는 기분이었다.

 

 

한국인 첫 주교 서품식의 복사로 선발돼 

 

그러던 1942년 12월, 한국인 첫 주교가 나왔다. 명동성당에서 매일같이 뵈었던 노기남 신부님이 주교님으로 임명된 것이다. 당시 진석의 나이 11살이었다. 명동성당에서 노기남 주교님의 서품 미사가 열렸다. 그동안 성실히 보미사를 했던 진석은 서품 미사 보미사로 뽑혀 난생처음 주교 서품식을 볼 수 있었다. 복사로 뽑힌 꼬마 넷 모두 신부님들이 인정한 성실한 학생들이었다. 한국인 첫 주교가 나온 날, 명동성당은 처음으로 만석이 되었다.

 

노 주교님은 진석의 첫 번째 교리문답 선생님이기도 하셨다. 진석은 계성보통학교에서 일반 수업 후에 천주교 교리문답을 배웠다. 노 주교님이 교사였고, 다음으로 조인환 신부님, 박귀훈 신부님이 학교의 교리 수업을 담당했다. 세 분이 진석의 교리 선생님인 셈이다. 교리 수업은 무조건 한글로 진행됐다. 문답책이 한글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학교 안에서는 일본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굉장히 엄한 벌을 받았다. 유일한 한글 수업이기도 했던 교리 시간 덕분에 진석은 한국어를 잘 배울 수 있었다.

 

밤이면 엄마의 무릎 밑에서 천주교 성인전이나 위인전을 읽기에 골몰하던 진석이 어느 날인가는 고단하였던지 일찍 잠이 들었다. 진석은 꿈속에서 노 주교님처럼 멋지게 미사를 지냈다. “도미누스 보비스쿰!(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평화신문, 2016년 7월 10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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